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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도망의 고수들은 자기 몸만 잘 숨기는게 아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가짜 흔적들을 만들어 추적자를 교란시키고 따돌린다. 탐정 소설의 고수는
패를 보여주고 시작해도 추격하는 독자들을 기막히게 따돌려 반전에 성공한다. 몽환화라는 제목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미 독자들에게 큰 패 하나를
보여줬다. 몽롱하고 환상적인 것이라는 암시가 책 제목을 통해 주어졌지만, 눈앞의 작은 실마리를 잡고 안개속을 더듬듯 페이지를 넘기면,
조각조각 흩어진 퍼즐들을 하나로 맞추지 못한 채 의문만 쌓는다.
수많은 단서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집중한다. 나의 상상력은 진부했다. 몬산토와 같은 다국적 종자화사가 어떻게
동남아와 아프리카 저개발국의 자생 식물들에 대한 특허권을 비열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획득하고 독점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지를 얼마 전 알게된
터라, 애도시대 때부터 존재했다는 신비로운 기능을 숨긴 노란색 나팔꽃이 국제적 종자 전쟁에 얽힌 비화와 정치적 내막을 가졌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자의적인 확신은 추리의 경로를 엉뚱한 쪽의 한 방향으로 몰두하게 했다. 노련한 고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언제든 추리소설을 읽을 때,
작가와 독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리한 쪽으로 유지하려면 고수가 보여준 패를 잘 기억해야 한다. 둔함을 깨닫는 건 뼈아프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주는 묘미는 잔잔한 메시지와 완벽한 구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아 완벽한 결말로 독자를 이끈다. 피를 보이지도, 잔인한 살해 장면을
묘사하지도 않으면서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가족간의 소외와 단절, 개인의 정체성의 상실, 금지된 욕망을 취한 과거의 빚이라는 문제들을 소통과 이해,
개인의 성장, 과거의 청산이라는 결말로 이끌어가는 작가의 저력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을 쫓지 마라. 멸한다.
마약이 주는 쾌감이란 자신의 모든 것과 맞바꿀 만큼 황홀한
것이었을까. 도취감에 취했을 때 경험하는 환상의 세계는 치명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기묘한 정신 이상으로 감각이 왜곡되면서 느끼는
순간적인 환희는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에도, 익명의 선량한 사람들을 향해 마구 칼자루를 휘두르는 순간에도,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하루하루 무너져내려갈 때에도, 감각적 만족감을 주었을까.
마약의 역사는 고대 때부터 흔적이 남아있다. 아편은 기원전 3천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나, 고대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의료 및 종교적 목적으로 쓰여왔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아편 중독자임을 암시하는
글들을 남겼고, 페루 아마존의 현지 샤먼들은 아야후스카라는 환각성 약초 음료를 제조하는 비법을 전해받는다. 동물들까지 매혹하는 마약 중독은
행동과 쾌감 사이에 강한 연합을 만들어 냄으로써, 중독을 낳는다. 좋은 느낌에서
시작하여 내성으로 발전하고, 의존성이 높아지면 갈망이 나타나면서 약물이 제공하는 도취감이 점차 미약해지면 쾌감은 욕구로 바뀌고 좋다는 느낌은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변한다. 마약의 황홀감을 경험한 이상 누구라도 중독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애도시대때부터 그것의 환각 작용이 알려져
심한 사회적 문제를 겪은 막부는 몽환화라는 은어로 통하는 마약, 노란 나팔꽃의 재배를 금했다. 나팔꽃은 예뻤지만 꽃이 아닌 씨앗은 금단의
열매였다. 한 번 취하면 스스로 멸하게 되는 중독적 마약이었다. 치명적 위험을 알면서도 은밀히 이용하고자 했던 댓가는 대를 이어 갚아야 할 빚이
되고 말았다.
상처 혹은 성장
우리는 살면서 크게 작게 어떤 결핍, 어떤 소외를 경험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하지만, 자잘한 상처들이 삶 전체에 걸쳐 때때로 말을
걸어온다. 아프다고. 상채기들이 나이테처럼 쌓여가며 삶을 형성해 가는 과정 속에 사건이 우연과 필연으로 얽히고 그것을 통해 성장한다. 사촌의
자살과, 할아버지의 살해, 의문스런 형의 행동을 쫓는 과정은 리노와 소타가 각자 자신에게 시련과 부딪치는 과정에서 만난다. 그 만남 속에 그들은
깨닫고 성장한다. 추리 소설이면서 동시에 성장 소설로 읽히는 이유이다.
소타가 느낀 소외는 몽환화를 둘러싼 비밀을 풀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평생을 풀어야 할 수수께끼였을 수도 있을 진실과 마주침으로써 그 정체가 밝혀진다. 출생의 비밀과 함께 해온 노란 나팔꽃에 얽힌
사연은 가족들 사이에서 소타를 하나의 섬으로 만들었다. 맏이다운 책임감과 신뢰로 다져온 냉철한 엘리트 지식인의 모습에 안타깝게 세상을 먼저 떠난
전처 자식이라는 사실이 형 요스케의 이미지에 신비감을 더하면서 소타는 열등의식과 반감을 품고 긴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집을
떠났다. 나팔꽃을 매기로한 아버지와 형 사이의 연대감 사이에 소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소외를 해소시킬 수는 없었다.
죽은자는 정정할 수 없는 기억으로만 콩크리트처럼 단단히 굳어있을 뿐 말이 없다. 죽은 자는 해명할 수 없다. 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 기억과
만나는 것. 소타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감춘 채 돌아가는 것을 최대한 미루고 거부한다.
부모는 피해자와 간접적 가해자로 만났다. 몽환화로 인한
가해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빚이라는 유산을 피해자의 직접 핏줄인 소타에게만은 물려주지 않게 하기 위해, 요스케 혼자서 그 짐을 짊어지기로
했지만, 그것이 소타에게 또다른 상처가 되었으리란 것을 가족들은 생각지 못했다. 오직 집을 떠나는 핑계를 찾기 위해 먼 곳으로 대학을 갔지만,
첨단 미래 에너지로 각광받던 전공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길을 잃는다. 원전은 이제 파괴와 종말을 상징한다. 소외와 단절을 벗어나기 위해 회피한
곳, 청춘의 한 가운데서 또 다른 층으로 만난 막다른 골목이다.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질주하던 트랙에서 갑자기 길을 잃기는 리노도
마찬가지다. 골을 향해 최대 속력으로 마구 달려가던 리노에게 고지 바로 앞에 나타난 가파른 절벽은 소타의 것보다도 치명적인 것이다.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라는 자신의 이상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던 리노에게 심인성현기증이라는 원인 불명의 병은 삶의 목적 상실이라는 고민만을 가져온 게
아니었다. 그동안 함께 해 온 친구와 모든 인관관계와의 단절, 불투명한 미래를 의미했다. 시간의 대부분을 수영부 선수들과 함께, 수영 연습과
수영 강습 알바로 쓰던 그녀에게 수영을 빼고 나니 내동댕이 처진 광활한 시간, 할 일마저 없어졌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대 사회다. 매우 잘
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남은 인생을 걸고 삶의 다양한 여러 경로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해 아주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그곳에 모든 나머지 인생을 걸고 집중해야 하고, 그렇게 한 우물을 향해 깊이 파내려간 곳에 암석이 있거나, 파다가 실패하면 쓰린 패배감을 안고
고스란히 산 것만큼의 인생 뒤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두사람은 모두 열씸히 자기가 믿은 길을 선택 했지만,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살아오던
삶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사방으로 뻗은 넓은 교차로, 빠르게 질주하는 도로의 한 가운데 서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길 잃은 미아가
되었다.
우연과 필연
차를 신형으로 바꾸면, 그 동안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동일 모델이 갑자기 길바닥에 천지다. 이상한 일이다. 인기 모델도 아니고, 개인의 필요와 경제적 사정과 선호도에 따라 결정된 일인데,
사고 나면 온통 같은 색상, 같은 모델의 차들이 유독 많아진다. 작가에 의하면 싱크로니시티는 어떤 행동을 하면 우연히 그것과 관련된 사건이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이 정도의 우연은 빈번히 일어나는데, 문제는 그것을 깨닫느냐 아니냐라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책에서 우연을 설명하는 방법은 그런 것이다. 많은 우연이 의미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가지만, 그 우연은 사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과 운명은 서로 반대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 안에 있다.
소타와 이바 다카미의 우연은 소설 내에서 유독
남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둘이 어린 시절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사건을 쫓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나타났다 사라진 것도, 소타의 형과
은밀한 일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도, 고층 건물의 창으로 몸을 던진 사촌의 공백을 대신하여 밴드에 나타났던 것도 모두 두 집안 모두 몽환화에
얽힌 비밀에 깊이 관여했고 그로 인해 몽환화의 비밀이 사회에 일으킨 파괴와 파장을 바로 잡고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그 빚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장남과 장녀가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는 노란색 나팔꽃이 또다시 사회의 어딘가에서 비밀스레 퍼지고 있는지를 감시해야 했다. 그래서 소년과
소녀는 우연처럼 필연적으로 만났다. 소타가 첫사랑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것과 또다시 우연히 마주치고 추격하게 되었던 것도, 모두 노란 나팔꽃에
대한 선조들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양심이자, 노란 나팔꽃에 얽힌 리노 할아버지의 죽음을 쫓는 과정이었다. 선조들은 한쪽이 피해자인동안
가해자였고, 다시 만난 후대의 소타와 리노는 가해자의 칼과 피해자의 피를 이어받았다. 쫓고 쫓겨야 했고, 감추고 파헤쳐야 했다. 운명처럼
만났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꽃, 개별적인 것의
아름다움
한 송이 노란 꽃이
내내 머리속을 맴돌았다. 수줍어서일까. 활짝 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밝고 번잡한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이른 아침 홀로 피었다가 한낮이
되기 전에 스스로 스러진다. 하나의 생명을 품은 꽃 하나는 그렇듯 고결하다. 금단의 씨앗을 취해 황홀감을 얻고, 창작의 모티브를 찾고, 감각을
마비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을 위해 한밭 가득 재배된 나팔꽃 밭은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리속을 채웠던 그 꽃이 아니었다. 리노의 할아버지가 매일
물을 주고 말을 건네며 가꾸었던 꽃도 아니었다.
우리의 아이들과 잠시 겹쳐져 보였다. 채 피기도 전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우리의 어린 꽃싹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새벽, 꽃이 피기도 훨씬 전 금단의 열매를 취하려는 어떤 무리의 인간들에
의해 무참히, 무기력하고 허망하게 가버린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세월호의 아이들은 군집명사였다. 한명 한명의 아이들은 개별적으로 인격체를
갖추고 한 가정의 부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이었지만, 학교라는 제도권 아래 한꺼번에 경쟁의 칼끝에 겨누인채, 웃고 떠들고 나누러
나가는 여행길조차 개별 인간으로서가 아닌 군집명사가 되어 스러졌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시받고, 뭉처서 하나처럼 취급받은 집단명사였다.
배가 가라앉는 그 무서운 시간에 단체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따라야 했던, 개별적인 저항없이 똑.같.이 따라야 했던, 그래서
함께 동시에 바다 밑으로 가라 앉은 아이들은 집단적인 희생 뒤에서 무언가를 황홀하게 취하게 될 보이지 않는 어떤 인간들에 의해 군집명사가
되었다. 부모와 친척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 군집 명사를 향해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릴 망정, 누구도 한 명씩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우리들은 그들의 집단 떼죽음만을 알 뿐, 그 한명 한명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노란색의 나팔꽃. 단 하나의 생명만을 본다면 얼마나
고결한가. 많은 씨앗들이 모여서 군집명사가 되었을 때, 그 속에서 개별 꽃들이 꽃잎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한 알의 씨앗으로 꽃을 피우기 위해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기울여 보아야 그 꽃의 개별적 가치를 알게 된다. 환각제가 되어 군집명사로
사라졌던 꽃이었지만 단 한송이가 홀로 피어 났들 때, 씨앗을 취하려는 어리석은 인간의 음모가 개입되기 전, 그것이 이른 새벽 막 피어오르던
순간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리노의 할아버지는 죽기 전 얼마나 정성껏 그 꽃에 물을 주고 꽃이 피기를 바랐던가. 인간의 욕심이 지독한 업이
되어 다시 만나, 손자의 생명을 앗아가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빼앗았지만, 한 개의 꽃일 때, 개별 생명일 때의 노란색의 꽃, 그 순수성에 온
마음을 빼앗겼던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