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낳아야 될 것인가 덜 낳아야 될
것인가
딜레마다. 맬서스 인구론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우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증가에 기아를 걱정했던 세대들은 이제 자신들을 부양할
젊은 인구가 늘지 않아 걱정이다. 급격하게 줄어든 출생률은 자본주의를 지탤할 높은 성장률에 장애가 된다. 많이 태어나야 많이 소비하고 많은
소비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된다는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 자본주의와 그 체제를 복종하는 우리 사회를 지탱한다. 일이십년의 일도 예측 못한
인간들이 2100년 2300년을 예측 한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건을 걸면 예측 자체는 가능하다.
현재와 같은 인구증가율의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서 우리는 2100년 2300년을 예측해 볼 수 있다 그 조건은
하늘에서 똑 떨어진 우연 같은 거다. 우리는 불과 반 세기 전에는 한 가정에 평균 두 명 이하의 낮은 출생률이 경제성장을 위협할 만큼 높은
노인인구부양이라는 부담을 지게할 줄 몰랐다.
현재의 낮은 인구 증가율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60년대 표어 탓인가. 중장년 층에 해당하는 인구의 대부분이 두명의 형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부의 계획된 출산율 조절에 따른 결과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노년층은 대부분 여럿 형제들을 두고 있다. 출생률 감소는 여성의 고등
교육과 사회진출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지금 중장년층의 어머니 세대들은 대개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들은 전업주부이면서 '둘만 낳아
행복한 가정'의 환상 아래 정부에서 유도한 출산율 조절 정책을 고분고분 수용하였다. 그 세대의 2~3 낳기 경향이 전부 표어
탓만은 아니겠지만 이것은 형제가 하나뿐인 그 세대의 자식들이 막상 자신의 세대가 되었을 때는 둘 이상 낳는 일을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갈고 교육하는 양육의 책임이 활발한 사회 활동과 자아 실현이 충분히 보장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에게 더 큰부담으로 부과되었을때 여성의 선택은 자명하다. 똑똑하고 논리적인 여성과 똑같이 경쟁해야 하면서도 가정의 경제
부담은 전적으로 남자의 몫으로 바라보는 사회 속에 소외되어가는 남자들 역시 자녀 낳기에 적극적일 하등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출산율이 급격이 낮아져 경제활동 인구가 대책없는 비율에 접어들고 있는 국면에 이르자 정부는 이미 몇십년 전부터 "둘만 낳아 잘기르자"
표어를 걷어냈고 이제는 여러가지 출산장려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아이를 카우는 일은 푼돈의 세금 면제와 자잘한 혜택으로 상쇄될 수
있는 종류의 부담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쩌면 노인문제의 심각성이 어느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 정부는 너도나도 아이를 낳아야 하는
파격적 정책으로 우민을 꼬셔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출산율이 매우 저하되었거나 매우 높아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파괴적 결과는 아무도 예측 불가능하다. 세대와 세대가 거듭되어야 나타난다. 더 많이 낳거나 더 적게 낳은 세대가 다시 또
더 많이 낳거나 더 적게 낳고 또 그들 후손이 그것들을 반복함에 따라 세기를 천천히 지나가며 인류를 위협하는 대재앙이 될
수도, 후대까지 지속가능한 삶을 지켜줄 수도 있다. 서론이 길었다.
멜서스는 틀렸다.
인류가 탄생하여 세계인구가 10억이 되는 데는 6만 4천년이 걸렸다. 10억이 되던 해는 1820년이었다. 세계인구가 10억에서 20억이
되는 데는 최초의 10억명이 될때보다 6백 배가 빨라져 겨우 106년이 걸렸다 1926년 세계 인구는 20억이 되었다. 34년만인 1960년에
30억이 되었고, 그로부터 인구가 10억씩 증가하는 데는 계속해서 15년(1975년, 40억), 13년(1988,50억),
12년(2000,60억)이 걸렸다. 그리고 2011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세계 인구는 70억명이 되었다 11년 만에 10억이 늘었다. 가파른
인구증가율은 꺽이는 듯했지만, 지난 10년 미니 베이비붐으로 2003년에 유엔에서 내놓은 2100년 인구예측은 90억에서 100억으로 상향
조정됐다.
최초, 2003년에 UN이 발표한 <2300년 세계 인구>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간지점인 2100년까지의 세계 인구가
91억으로 증가했다가 이후 서서히 감소해 2300년 90억 수준에서 안정된다는 것이었다. 평균적인 각 가정에서 아이들을 조금 더 출산 했을때
예측 결과는 360억. 중간지점에서 4배에 해당됐다. 또한 출산율이 예상보다 조금 더 낮았을 때 예측 별관 결과는 2300년 23억명에
불과하다. 세계의 각 가정에서 조금 더 낳는것과 조금 덜 낳는 것의 차이가 2300년에는 이런 막대한 차이를 낳는다.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인류의 역사를 통털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구의 추이와 인구 변화의 배경을 꼼꼼하게 분석한다. 그는 최근 몇십년 동안의
빠른 인구 증가가 대륙 내에서 조절되지 않는 유럽의 초과 인구가 다른 대륙으로 퍼진 것을 주요 영향으로 본다. 유럽에 넘쳐나는 사람들이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지 않고 다른 대륙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 자손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이제 유럽은 이민자들의 받아들이지 않는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대륙의 대대적인 이동이 인류에 끼친 해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국가와 대륙의 힘의 불균형과 남용이 대대 손손 이어질
인구 증가와 환경 파괴로 이어진 결과에 대해 영국인으로서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신대륙의 부가 구대륙으로 옮겨지면서 신대륙에는 죽음이 찾아왔다. 1492년 1억명에 달했던 아메리카 대륙
중부 지역의 인구는 두 대륙의 만남 이후 질병, 살인, 사회 붕괴에 따라 천만 명 미만으로 줄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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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식민지 지배 국가들이 대체로 대규모 학살을 통해 그들의 영토를 얻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헨리 모턴 스탠리는
부관들에게 작은 마을에서 아프리카 사람을 만나면 새를 쏘아 죽이듯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탐험에서 스텐이 자신은 거의 30개에 달하는 대규모 도시와 60에서 80개에 달하는 마을을 공격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1878년에는 콩고에 그들의 기업체를 사귀파기 위해 5년 계약을 체결 했다 그 결과는 근대 최초의 잘 계획된
대량학살이었다.117
우리는 유럽의회 과거를 개화된 문명을 전파한 것으로 착각하고 찬양하지 말아야 한다.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주로 대리전을 치렀고 소련 국경 근처에서도 그랬다. 그들은 지금 여전히 시리아, 리비아 ,
이라크, 소말리아 그리고 또 다시 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적 전쟁만큼이나 시월한 경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런 전쟁의 이면에는 특정
집단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그 집단이 뒤떨어지거나 심지어 인간 이하로 여겨지는 집단을 종속시킬 권리를 인정하려는 생각이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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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멜서스는 틀렸다. 그는 우생학적 입장에서 논문을 교묘히 조작 발표했다. 법칙으로 보이는 것은 추세의 평균에 불과했다. 세계적인
인구 추이는 생존률, 교육정도, 이민 등의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했다. 이민은 세계 인구를 변화시킨 큰 요인 중 하나였다. 이민은 가장 힘 있는
자의 일시적인 기분에 좌우되었다. 필요하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데려다 사고 팔고 죽였고, 과잉인구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쫓아보내거나 자국의 문을
닫았다.
그는 또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지구촌의 경계아래 다 함께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범국가적인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을 지적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원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에 대한 나라 안팍의 소유권에 집착하는 대신 사용하면 사라지는 에너지를 얼마나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절약할 수 있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실에 당신이 나라의 지도를 걸어 놓으면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지도를 자기 정체성 의한 부분으로 생각한다.중략.
국가주의와 국민 국가에 대한 공동소유 의식을 전파 하는 것은 국민 대다수를 이롭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의 지위를 강화
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중략. 지금까지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의 시민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점을 이미 지났다. 영국의 예
저자 대니 롤링은 자국인 영국의 예를 들어, 2008년 경제위기가 도래하기 전에 이미 전 제품에서 소비 하향 곡선을 그렸음을 보인다. 그
이후에도 선진국의 소비 감소 폭이 더욱 넓어졌다. 일시적인 지속적인 감소의 한 부분일 수도 있으나 이런 감소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가장
두드러진 감소는 석유 소비에서 나타났다. 생산이 감소하면 소비는 정점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북해산 석유의 경우 영국에서는 1999년
노르웨이에서는 2001년 정점에 도달했다 육지의 경우 많은 국가에서 그 이전에 정점을 도달했다. 원유가가 100달러가 넘은 이래, 공급이
감소하는데도 원유 가격이 떨어지는 이유는 소비도 함께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감소의 원인 중 하나는 불황이기도 하지만 불황 이전에 소비
감소는 이미 시작했다고 본다.
영국의 원재료 소비는 2001년을 기점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환경을 손상시킬 만한 소비는
불황이 닥치기 전에 이미 감소하기 시작했다. 전력 수요는 일년동안 10% 이상 감소했다. 소비가 졸면 폐기물 처리, 매립지와 소각장 운영을
비롯해 해로운 경제 활동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물 소비는 2003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이후 인구는 늘었어도
가정의 물 소비량은 꾸준히 줄어즐고 있다. 수영장은 없어졌고 빗물 받이를 설치하고, 많은 가정이 환경친화적으로 변모했다. 모든 혁신은 물소비량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 했다. 영국인들은 음식도 덜 먹기 시작했다. 칼로리 섭취량은 1974년 하루 2500Kcal로
정점의 이르렀다가 전반적으로 감소해 2012년에는 2300Kcal를 기록했다(그러나 그들은 더 뚱뚱해졌다). 목재와 질소비료 같은 미네랄 시멘트
역시 경제 불황 훨씬 이전에 이미 소비 정범을 지나쳐 감소 추세에 있다.
저자는 소비 감소는 일부 지도자의 예지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선진국에서 환경 파괴적인 성장이 중단되며 세계경제가 재편성 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다.
그렇다면 한국은? 영국학자가 쓴 책에 한국은 없다. 우리는, 청년 실업과 소득 불균등 심화와 같은 어두운 현실 앞에 또다시 높은 개인당 두
세배의 노인을 먹여살려야 하는 부양인구의 짐을 지고, 하루 하루 살얼음 같은 길을 조심스레 걷고 있는 우리의 어린 세대들과 그들의 후대를 위해
우리가 남겨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