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지 않는 의사, 믿지 않는 환자
제롬 그루프먼 & 패멀라 하츠밴드 지음, 박상곤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나는 의사를 잘 믿지 않는다. 의사의 지식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학이라는 분야의 불확실성과 투약, 주사, 수술과 같은 의료 행위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의사의 신중하지 않은 선택을 의심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은 잘 주워먹는 편이다. 진통제나 지사제, 수면유도제 같이 직접 삶의 질에 즉각적으로 개선을 주는 의약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복용해야 하는 관리용 의약품을 먹는 기준은 결국 나의 의료행위에 대한 가치관과 편향을 반영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의료 행위에 대한 의사와 환자와 보호자의 가치관을 사례를 통해 적고 있다.


같은 질병이라도 전문가 사이에서 치료 방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고혈압 치료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미국과 유럽의 전문가 위원회에서 각각 치료 기준이 다르다. 치료의 효과보다 부작용을 더 걱정하는 것을 손실피경향이라고 하고, 인위적인 치료보다 자연치유법이 훨씬 더 현명하고 안전하다고 강하게 있는 신념은 자연주의적 편향이고, 우리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개개인의 경험을 가용성 편향이라 한다. 이런 저마다의 가치 기준에 의해 의사건 환자건 치료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치료에는 측정하기 어려운 순효과라는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순효과란 치료로 얻는 효과에서 부작용을 뺀 것이다. 어째꺼나 주변 사람의 말을 듣고 치료를 선택하는 것은 가용성 편향이며 일화는 단지 n분의1인  여러가지 경험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 일화에 강한 인상을 받아 생각을 왜곡하게 되므로 이성 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가용성 편향은 이미 일찌감치 극복했고 치료효과가 거의 없는 자연주의 편향은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내게 잘 안맞을 뿐더러 거기에 개입된 상업주의와 미신적 요소들은 불신을 부축인다. 손실회피경향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유는 두통이 지속되는 상태라든가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야하는 상태가 알약 한알이면 말끔히 없어진다는 경험적 지식이 다른 선택의 여지를 말끔히 없애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다른 유전자 조합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 고유한 존재다. 치료 방법은 통계와 확률이지 진리가 아니다. 내게는 좋은 효과를 내는 펜잘이 비슷한 유전적 조합을 가진, 같은 환경에서 자란 동생에게는 안듣는 것처럼 치료란 개인의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사전의료지시서에 대해 바람직한 문서이고 삶이 무의미해지는 광범위한 상황에서 인간이  법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전의료지시서 living will은 본인이 직접 지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하게 되었을 때 존엄사할 수 있게 뜻을 밝힌 문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전의료전향서로 도입된지 몇년 안된 걸로 안다. 기도삽관, 혈액투석,영양제 공급 등으로 이미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지의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이다. 내 할머니는 내가 어릴때부터 이와 비슷한 뜻을 분명히 밝혀 오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만 해도 당사자가 의식불명인 경우 보호자는 의료행위에 대한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없었고, 생명 존중의 원칙에만 충실해야 하는 의사들은 환자의 뜻과 무관하게 존엄하지 않을 지라도 생명을 연장시키지 않으면 살인에 해당될 수 있었기 때문에 원칙에 맞는 그러나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의료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도 할머니는 오랜 당뇨병을 지니고도 장수하셨고 비교적 짧은 병상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셨다. 때문에 나는 이 사전의료전향서가 시행된다고 했을 때 관심을 가졌으나 실제로 이것이 생의 마지막을 직면한 환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미국 의료 드라마에서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고, 어쨌거나 생사의 갈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바람직한 권리로서 치매나 파킨슨과 같은 정신적으로 무의미한 삶에도 죽음을 합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책에서는 이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한 사람들의 상반된 마지막 사례가 그려져 있다. 건강할 때 작성한 문서는 실제로 죽음과 가까우리 만큼 병이 깊어질 미래의 상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장애인 채로 침대에서만 누워지낸다면 삶이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예측은 실제로 침상에서 겨우 숨만 쉬며 지내게 되는 일에 적응했을 때 아주 작은 일에조차 행복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준다. 그래서 막상 자신이 상상했던 무의미한 병상에서 오히려 사전의료지시서의 내용과 모순되는 행동을 보인다. 인간의 생명은  스스로 존엄사 따위보다 훨씬 존엄한 것이다. 어쩌면. 그냥 숨 쉬는 것만으로도.

 

정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