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천천히 맞딱드리게 될 노년. 삶의 어떤 측면에서라도 함께한
시간 계수가 커졌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훨씬 많은 컨텐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너 퀸들런. 그녀가 스스로
돌아본 그녀의 젊음은 육아와 일과 자아 사이에서 여성해방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해방의 자유만큼 책임과 의무가 어깨를 누르며 매일 전쟁같은 일상을
치러 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것은 성공을 통과한 시간이었기에 독자의 눈엔 그 힘겨웠던 시간마저도 눈부셨다.
육아와 일과 불확실한 미래와 경제적 미래와 자아와의 갈등 사이에서 하루하루 전쟁같은 삶을 살았던 것에서는 그녀와 다르지 않았음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하지만 눈부신 성공도 충족한 자아실현도 만족스럽고 충실한 양육과 가정생활을 영위했던 시간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을 통과하고
있음에, 저만치 기다리고 있는 노년을 바라보면 어떤 종류의 글로도 위안이 되지 못한다. 어느덧 누구나 향하는 그 곳, 노년과 죽음, 그
시간으로 뻗어 있는 시간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며 나는 그녀의 자신만만한 수다가 위안이기 보다는 부럽다.
애너퀸들런, 그녀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퓰리처 상을 수상한 언론인이자 작가이자 소설가이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부러워하는 것마저
사치로 느꺼질 이 야릇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잔잔한 가슴에 파문을 던지게 된 것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애너 퀸들런의 인간적인 너무나 수더분하고
평범한 동네 아주머니 같은 일상적 수다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성공에 대해 읽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그녀의 평범한 일상 더 평범한 생각들을
읽어내야 하는 데 약간의 당호깜을 느낀다. 그녀가 동네 미용실에서 만난 이웃집 여자처럼 평범해 보이는 첫번째 이유. 그것은 나, 내 가족, 내
딸들, 내 남편이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매일 매일 친구들과 모여서 하는 그런 얘기, 내가 그랬는데, 내가 이런 사람인데, 내 아들이, 내
남편이, 내 과거의 어느 시간에, ... 그런 이야기를 책을 통해 늘어놓는 애너 퀸들런의 수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과 그녀가 함께한 시간들 속에
그녀의 전쟁같은 삶을 이끌었던 너무나 평범한 그들이 사는 이야기.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환기시키며 수다스럽게 현재 60대인
자신의 노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지나간 시절을 주워담는다. 남편은 단연 첫번째 주제다.
애너 퀸들런의 인간관계가 60대가 되었을 때에는 그녀를 진정 아끼고 무조건 응원하는 사람들만 남는다. 그녀의 현재 나이가 되고 보니 든든한
지원군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 지원군들 중 남편이 그녀에겐 으뜸이다. 제일 첫번째 챕터가 남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나한테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간다. 부부동반 모임이나 아이들 친구의 이름은까 먹을지 몰라도 내 최신작을 악평했던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다. 나는 남자의 그런 면이 좋다. 아니 남자의 그런 면을 사랑한다. 50
그 다음은 친구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사랑해 주는 여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들보와도 같다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게 된다는 그녀의 말은 백퍼센트 동감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랜 시간 그러니까 켜켜히 나무테처럼 쌓여 상처와 흔적을 모두 함께 간직한 오랜
친구여야만 가능하다. 나를 나의 모든 단점들까지도 알고 이해해주는 그들이 나의 소소한 행복을 깨닫게 해주는 사실 말이다.
흔히,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은 고집이 세다. 이건 나의 선입견이겠지만 특히 노년 남성은 더욱 그러하다. 직장과 가정에서 책임과 의무를 잔뜩
짊어진 채, 또 한 편으로는 권위라는 칼자루를 들고 묵묵히 나아가야 했던 한 사람의 삶이 의식이 시간과 함께 석고 처럼 굳어가는 슬픈
현상이다. 사회적인 기대치와 역할에서 자유로운 여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만만해지는 반년 남자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와 청춘의 힘을 잃고
초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초라함에 대한 반작용일 지도 모르겠다. 애너 퀸들런 역시 나이듦에 대해 비슷한 성찰을 한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완고해진다 행동도 수채화가 아니다 점점 동판화와 가까워진다 완벽주의자라는 강박증 환자가 된다.
96
그녀는 어느날 신문에서 강도를 물리친 '노부부' 이야기를 읽고 예순 8의 나이를 노부부라고 칭 한 것에 대해 분개한다. 언론계에 몸 담고
있던 그녀 스스로 오랫동안 '연로'하다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썼을까 싶어 그녀 스스로가 쓴 기사를 찾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젊었을 때 그
단어는 그녀의 기사에 수시로 등장 하였던 것이다. 반면 그녀가 나이 먹어감에 따라 기사에 등장하는 횟수가 점점 줄이기 시작하더니 아예
사라졌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을 나이를 먹을수록 연로하다는 단어에 경멸의 의미가 담긴 것처럼 느껴지는 데다 그녀가 생각하는 연로의 기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큐 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50세 이상 성인들은 대부분 실제 나이보다 최소 10년 이상 젊게 생각한다고 한다. 60
에서 74 사이에서는 3분1 이 10년에서 20년까지 젊게 생각했다. 연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 하지 않는 연령대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애너 퀸들런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시대에 태어나 발전이 전쟁처럼 느껴지는 시대를 거쳤다. 여자는 능력과는 무관하게 결혼하거나 아이가 생기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세대였다. 그녀도 어렸을때는 육아와 가정 아니면 일 이 둘 중에서 하나만 고를 수 있는 시대, 남자에게서 신분을 부여받는
시대에 살았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아니면 아무데서나 무엇이든 해도 되는 시대, 직장을 박차고 나와 금세 다른 곳에 취직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찾아왔다. 여성 해방 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가능하게 했지만 여전히 날선 편견은 어디서나 기다리고 있고, 해방의 댓가로 여성은 예전 여성의
두 세명 몫을 감당해야 했다. 그녀 또래의 노년의 초입에 서 있는 세대는 지금, 여전히 살아 계신 부모와 시부모의 건강을 살피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등골을 파주면서 지난 세대에 비해 두 세배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제
와 돌이겨 생각해 보면 인생의 기로였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차에서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거나 등장인물들이 회전문을 사이에 두고 아슬
아슬하게 비켜가는 장면이 영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한다.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