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사랑일까
사라 폴리 감독, 미쉘 윌리엄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세 번의 우연으로 시작된 유부녀의 불륜. 3류 막장 드라마같은 시작이다. 사랑. 자상한 남편을 둔 행복한 결혼 5년차 주부의 나른한 권태를 뚫고, 설레임으로 찾아온 이 사람. 가슴 한 가득 그 사람으로 채우더라도, 사랑은 저만치 떨어져 비껴가길 바랐는데, 다가오지 말기를 바라는 만큼 남자의 뒤를 쫓는 모순적 행동을 보이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여자의 모습이 있다.

 

 

나는 나의 남편에게 상처줄 수 없다.  마고가 세 번의 우연 중 앞집에 사는 결정적 우연으로 엮인 남자 대니얼을 그리 강하게 끌어 당기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밀어버리는 이유를 우리는 천퍼센트 이해한다. 가슴 가득 품은 다른 남자 때문에, 바쁜 남편의 등뒤에서 백허그로 유혹하다 울어버리는 그녀의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우리는 이해한다. 당신을 유혹하는 데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줄 알아? 굼뜬 남편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우리 인류는 아무리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결실을 맺음과 동시에 천천히 식어버리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헌 사랑 대신 새 사랑이 나타난다고 즉각적으로 배신을 때릴 수 있도록은 진화하지는 못했다. 인류가 불행해진 건 그 때문이었다. 사랑하지 못해서 외롭고, 사랑해서 외롭고, 사랑이 식어서 외롭고, 식은 사랑 때문에 뜨거운 사랑을 밀어내야 해서 외롭다. 소설은 그래서 생겨났다. 영화도.

 

 

 

침묵이 어색해졌다면, 사랑이 식은건지도 모른다. 마고의 남편 루는 결혼 5주년 외식에서 아무말 없어도 음식이 맛있다. 결혼기념일조차 가슴에 품은 다른 남자의 그림자를 미친듯 밀어내고 싶은 마고는 어색하다며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고 하지만 루는 대답한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싫어. 마고는 매일 반복되는 비슷한 게임의 농담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마고의 결혼 5년차의 권태는 아슬아슬하게 흔들린다. 흔들릴 수록 매몰차게 밀어내고, 밀어내는 순간에도 확인하고 싶다. '당신이 날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고 싶어요.' 남자의 작은 물리적 스침에도 소스라치며 밀쳐내는 정숙한 그녀지만, 질문은 당돌했다. 남자. '내 입술이... 당신 입술에 머물러요..' 그렇게 감미롭게, 그렇게 애절하게, 길고 가슴아픈 긴 애무를 언어로만 전한다.  유혹을 떨치며, 그녀는 약속 하나를 제안한다. 30년 후에  키스할 약속.

 

 

 

30년 후라면 괜찮을 것 같다. 평생토록 한 사람에게만 헌신했다면. 30년 후 58세가 되어서라면. 그렇게 늙어서라면. 한 번쯤은 이토록 사랑하는 남자에게 키스를 해도 괜찮을 거 같다.  해변의 등대 앞에서 만나 58세가 되었을 때 만나 키스할 것을 약속하며 힘겹게 떨쳐내던 사랑.  굴복은 순간이다.  남녀가 팽팽한 접전 끝에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밀당에서 밀리는 순간이다. 그가 떠나는 순간, 그녀는 사랑 앞에 굴복한다.

 

 

 

I am afraid of being afraid(두려워지는 게 두려워.)

 

 

 

그렇다.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그것을 두려워하게 될 자신이 두렵다.  막상 일이 닥치고 나면 그 닥친 일을 극복하고 싸우느라 두려워할 틈이 없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틈 그것이 두려운 거다. 이제 남자는 두렵다. 여자와 여자의 남편 사이. 그들 틈 새에 있게 될 두려움이 두렵다.  그녀는 길을 잃을까 두려운 게 아니라, 길을 잃을까 두려워지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여자의 촉은 언제나 맞다. 그가 엽서 한 장을 끼워넣고 이사짐을 싣고 떠나는 걸 그 새벽에 귀신처럼 알아챈다. 떠나고 나서야 확실해지는 사랑.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않기로 한다. 남편을 속이지 않기로 한다.

 

 

 

이제 함께 된 두 사람. 레오나르도 코헨의 'Take this Walz'를 따라 둘은 길고 긴 섹스를 한다. 말로만 가능했던 일이 환상처럼 짜릿하고 아름다운 현실이 되었다. 이 영화가 만일 진짜로 별볼일 없는 뻔한 3류 막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Take this walz 씬이 그것을 용서해줄 터였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시를 읽듯 노래하는 레오나드 코헨의 음악에 따라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시 또 익숙해짐으로 바뀐다. 아. 인생이여. 둘은 함께 욕실에 있다. 남자는 이빨을 닦고 여자는 쉬를 한다. 둘의 사랑이 뜨거울 때에도 여자는 남자 앞에서 쉬를 했다. 수영장 물 안에다가 쉬를 해서 물이 파랗게 변하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모두 씻으러 갔었다. 그 때 공공장소에서 소변을 보는 행위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은밀한 행위를 바깥에서 하는 함으로써 욕망에 대한 암시를 의미한다면, 이제 서로에게 익숙해진 소변은 새로운 권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녀는 전 남편 루 앞에서도 소변을 보았다.

 

 

 

사랑의 틈새로 들어오는 권태 자락은 나른한 일상에게 자꾸 무언가를 보챈다. 그러나 불같이 뜨거운 열정이 다시 권태가 되는 순환을 통제하는 것은 사랑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다.  사랑이 잔인한 건 영원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일까.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죽을때까지 설레이는 사랑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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