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도 아니야 노동자도 아니야 - 특수고용노동자 이야기
이병훈 외 지음, 박진희 사진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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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항상 누군가의 희생위에 다른 누군가의 아늑한 삶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개발도상국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던 시절, 수많은 공장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고속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되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 이 저속 성장의 늪에서 구조적으로 보호받아야할 장치에서 소외된 채 사회 구석구석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밑불이 되는 을 중의 을이 있다.  이들은 저성장과 사회안전망의 해체라는 덫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우리 사회를 그나마 멈추지 않고 덜그럭거리며 굴러가게 하는 데 일조하는, 사장님도 아닌, 노동자도 아닌 특수고용노동자라는 계층이다. 이 책은 노동문제 전문 연구원들과 노동전문사진기자가 그들의 삶을 밀착 취재하여 직접 그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네 명의 공저자가 각자 분석한 논문을 함께 실었다. 그들 개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차분하다.

 

2012년 12월 현재 우리나라의 전체 노동자 중 특수고용노동자의 비율은 14%다. 성비는 여성 66%. 기혼여성 57%로 기혼 여성이 압도적이다.  책 제목처럼 특수고용노동자는 자영업자와는 달리 자기 점포나 작업장을 가진 사장님도 아니고, 회사 시스템 내에서 노동의 일부를 담당하며 월 단위의 보장된 급여와 노동법의 보호 내에 있는 노동자도 아니다. 이들은 기업과 노무공급계약을 맡고 일하는 개인 사업자다. 그들은 회사에 출근을 하여 출근 도장을 찍고 성과에 따라 줄을 서거나 동일 시장 내에서 파이 조각의 크기를 가지고 경쟁한다. 실제 노동 과정은 종속노동 관계의 굴레에 묶여 있지만 시스템 내의 구성원으로서 가질 수 있는 보호막은 없다. 

 

이들의 활약은 우리의 삶 구석 구석에서 눈부시다. 우선 이 책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빠르고 저렴한 택배 시스템은 오픈마켓과 온라인백화점, 방송홈쇼핑 등의 온라인 시장의 동력이다. 상품이 제아무리 값싸고 좋아도, 빠르고 저렴한 배송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오늘날과 같은 온라인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렴한 대리운전은 자가운전자들의 음주 운전을 방지하고, 술집과 유흥업소 매출을 돕는다.  학습지 교사들은 고비용의 과외가 허용되지 않는 아이들의 기초 학력 향상에 기여한다. 오바마가 그리도 부러워하는 한국인의 빠른 셈과 기초과학능력은 아마도 집집마다 하루 10분씩 이 분들의 방문으로 점검되는 보이지 않는 방문의 힘이 컸을 것이다. 요구르트 판매원은 매일 마트에 가지 않고도 가족의 정기적인 유제품 섭취를 돕는다. 합법적인 채권추심원은 도덕성이 결여된 우리 사회 금융질서를 유지시킨다. 간병인은 간호사와 보호자가 하지 못하는 24시간 환자 돌보미 일을 도맡아 한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은 골퍼들의 허세만 채워주는 게 아니라 골프장 순환을 빠르게 유지시킨다. 프랜차이즈 미용실 디자이너, 방송구성작가들은 특정 회사 직원처럼 회사의 시스템 내 구성원으로서 주요 역할을 하지만 단지 시스템의 통제만 받을 뿐 법적으로는 개인과 시스템 사이 계약 관계에 있는 전문인들이다.  위태로운 곡예운전 퀵서비스 기사들은 우리나라 물류의 모세혈관이고 주요 도시의 고속도로를 오가는 트레일러 기사들은 물류의 핵심 축을 이룬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만 관련 업체들은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 중 대다수는 엄연히 업주들의 체계적인 관리 내에, 업주의 고용 질서 내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이지만, 실제로 노동자 집단의 경계 바깥쪽에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개인사업자지에 가깝지만 중계업자의 통제 하에 가격과 수수료율에서 자유업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이들은 고소득이라는 닿기 어려운 희망을 쫓아 자신과 연결된 모든 인간 관계를 동원하여 업체의 상품을 팔지만, 단물만 빨아간 회사에서 쓴물이 나올 때 버틸만한 여건이 안된다. 출퇴근 도장을 찍으면서도 그 회사 직원이 아닌 위치. 개별 임금 협상을 금지시킨 채 고정된 연봉제 체계 내에서 거의 24시간을 구속되어 일하면서도 방송국 직원이 아닌 프리랜서인 신세. 그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극단적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며 좀 더 노력하면 손에 넣을 것 같은 희망을 품는다. 보험설계사 이정희씨의 16명의 동기들 중 현재 남은 이는 4명 뿐이다.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극소수다. 특수 고용직 노동시장은 능력과 운에 따라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단물 빨리고 경계 밖으로 내쫓기는 구조다. 낮은 진입장벽 덕에 빈자리는 금세 채워진다. 268

방송구성작가는 최소한의 자유도 없이 하루 종일 방송국에 매어 있고  작가들끼리 연차별로 끊어서 지급되는 고정 임금을 받고 있으면서도, 계약 조건을 조정할 수 없는 기형적이고 차별적 형태의 프리랜서로 고용되어 있다. 이들 구성 작가로서의 대망의 꿈을 안고 몇 해동안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다가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상한 프리랜서는 캐디도 마찬가지이다. '프리랜서' 라는 직업적 명칭이 갖는 자유는 커녕 일반 노동자들이 갖는 만큼의 자유도 없는 게 현실이다. 자유로이 근무시간을 정하는 것은 물론 쉬는 날도 없다. 진정 프리랜서라면 내장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캐디피를 흥정할 수 있는 자유도 있어야 하겠지만, 순번에 따라 내장객을 배정받고, 캐디피도 정해진 만큼만 받을 수 있다.
 
조금 더 자유롭게 일하는 퀵서비스나 대리기사, 트레일러 기사들의 경우 사업주의 권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설계된 약탈적 구조의 시스템 속에서 일한다. 콜센터, 중개업체, 프로그램사, 단말기 업체, 통신사, 보험료 등 이들의 순수한 노동력에 기생하는 숱한 비용을 제하고 나면, 바로 탐욕스런 중계회사의 수수료율의 농간, 존재하지 않는 오더에 응하는 실수를 이용해 패널티 수수료를 착취하는 뻥오더, 갑과을의 종속 관계 속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구조적이고 악의적인 문제들에 직면해있다. 중계회사의 업체에 대한 통제 권력에 복속되어 있지만 다수의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은 동료들과 서로 고립되어 있다. 동료들이 같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 서로 차지하려는 경쟁자이기 때문에 연대를 형성하기 어렵고, 함께하는 직업적 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런 구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저 열심히 날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한편,  심각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면서 정직하게 수입을 얻고 있다는 자부심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법은 이들을 외면하고, 사회는 이들을 이용하고, 먹고 살 방법을 찾아 표류하는 개인은 낮은 장벽의 특수고용노동종사자가되어 조직 내에서 소외된 채, 파이 조각의 크기를 가지고 동료들과 경쟁하느라 아주 작은 권리를 찾기 위한 연대조차도 어렵다. 이것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이다. 언제쯤, 사회는 대략 공평해질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아이들이 이 구조에 타협하고 안착하는 지점은 어디쯤 될까.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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