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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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라는 말은 저속한 비속어는 아니지만 행위 자체가 민망한지라 우리는 말할 때, 그 단어를 직접 쓰지 않고 여러가지 에둘린 표현을 쓴다. 성기는 엄연한 신체의 구성품인데도 거룩한 유전자 전달의 목적 보다는 똥오줌과 같이 더러운 것을 배출하거나 비도덕적 혼외 정사의 상징처럼 만들어진 특정 용도의 비속어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냈고, 오늘날의 십대들은 그게 뭔말인지도 모르고 태연하게도 즐겨쓴다. 나도 '꼴리는 대로' 라는 표현이 마음 끌리는 대로라는 말인줄 알았다.

 

내 세대의 대부분 기간 중 수많은 성기와 성행위를 뜻했던 비속어들이 대중화되면서 저급함의 감도가 완화되는 동안, O지 라는 단어가 꿋꿋하게 금기화된 비속어로서의 위치와 지휘를 박탈당하지 않은채 숨겨 보호되는 데에는 뭔가 불가사의한 이유가 있을 거 같다. 금기를 뛰어넘는 문제작이라는 카피라이트는 행위보다는 단어의 사용에 더 주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주에서 금서로 지정한 것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금기시된 단어들이 책을 메웠기 때문이지, 그 내용이 인간의 비도덕적이고 변태적인 성적 타락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번역자 정역묵은 많은 고심을 했겠지만 단어의 선택에 있어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다. 왜?. 원서가 언어 때문에 금서가 되었다면 번역서도 금서가 될만큼 강한 언어를 써야하지 않은가. 거기에 몇십년동안 차마 조폭 형님들조차 모셔두고 쓰지 못한 보호받은 단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O지다. 이 책에 그 단어는 태깅감이다. 그렇다고 해서 태그 붙이는 난에 O지 라는 단어를 쓸 수도 없는 일이다.

 

포트노이증은 저자 필립 로스가 만들어 낸 가상의 병명이다.  소설 내의 정신과 전문의 슈필포겔이 맨 앞장에 맨 뒷장에 한 번 나오는데, 포트노이를 상담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포트노이 병으로 명명하고 이를 발표한 것으로 짐작하도록 설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의 전부를 구성하는 그의 독백은 슈필포겔과 상담하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읽힌다.  특히 이 증상들 가운데 다수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널리 나타나는 결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곁들인 설명은 포트노이의 어머니에 대한 이해 불가능한 애증을 설명한다.

 

이렇게 근사한 병명을 하나 얹으면  그의 난해하고 망측하고 어이없는 자기비하적 성적 행동과 고백을 이해하기가 편해진다. 가령 사춘기의 과도한 자위와 독립 이후의 문란(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현대적 관점으로 봤을 때는 그리 문란하지도 않은) 성관계는 유대인으로서 민족 정체성과의 치열한 싸움이며 동시에 애증 관계의 엄마에 대한 반항과 자기 방어로 나타난 기제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달 읽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런어웨이>에 실린 소설 <침묵>에서 주인공 줄리엣의 딸이 가출한 단서를 이 책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 이런 엄마라면 가출 말고는 살아낼 방도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엇다. <런어웨이>는 내면 심리 묘사를 직접 작가를 통해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화를 통해 독자에게 유추하도록 만드는 편이었는데, 엄마 줄리엣은 '딸과 떨어져 지낸적이 없다,',  '우리 딸은 엄마에게 불평할 기회를 한번도 준 적이 없다.', '딸애는 나에게 기쁨을 준다,', '하루라도 연락하질 않으면 못견딜 것이다,',  '산만한 자기와는 달리 땔애는 사색적이다' 라고 딸과의 관계에 대한 단서를 주었다. 딸은 어떤 캠프에 들어갔다가 바로 쪽지 한 장 안남기고 수십년동안 사라져버리는데, 줄리엣은 독자에게 그 오랜 세월동안 품어왔을 원망과 그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책을 덮고도 왜 떠났을까. 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렇게 엉뚱한 책에서 그 단서를 찾다니. 결국 딸에게 그 엄마는 자신과 결부된 모든 세상과 함께 버려버리고 영원히 잊고 싶은 그런 종류의 엄마였던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엄마들이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엄마들은 자신이 자식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포트노이의 냉소적인 불평 속에 드리운 엄마라는 존재의  압도감은 섬뜩하고 집요하다. 식탁에서 4살 짜리 아이에게 칼을 들고 남기지 말고 먹을 것을 강요하고, 하교 길에 프랜치프라이를 사먹는걸 알게 되었을때 쓰레기를 먹는다며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부짖는다. 날카로운 불평에 가득한 회상이긴 하지만 이렇게 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강압과 회유를 통해 끊임없이 전통적 가치관과 관습의 틀에 옭아매는 부모가 있다면 포트노이병이 가상이 아닌 실제가 될 수도 있겠구나 까지 생각이 미친다.

 

유대인 가정은 대체로 모계의 입김이 센듯하다.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에서도 유대인 하워드는 30살이 넘어서까지도 엄마와 같이 살면서 모든 가사는 물론 치과에 데리고 가는 일까지 중요한 일의 결정을 엄마에게 맡긴다. 그런 가정이 유대인의 일반적인 가정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포트노이의 가정에서는 전통적인 인습적 전형성에서조차 비켜져 있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개처럼' 일해 경제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권위는 바닥이고, 어머니의 입김으로 집안의 모든 게 움직인다. 중학 중퇴 정도의 학력인 아버지의 가정내에서의 무기력함은 어머니의 강압적 요구가 만들어내는 불만에 불만족을 보태면 보탰지 어떤 방법으로도 릴리프를 주지 못했다.

 

 

사실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 긴 분노의 시기동안 내가 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터져 나올 것만 같던 아버지의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매일 밤 저녁식사를 할 때 내가 무지하고 야만적인 송장 같은 아버지에게 퍼붓고 싶었던 나의 폭력 역이었죠.63

 


그가 시달리는 것은 부모와 가정의 인습적 틀의 뿌리가 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의 그 까다롭고도 촘촘하게 삶을 규제하는 율법들을 생활 속에서 엿볼 수 있고, 한 때 우리나라 부모들의 훌륭한 양육의 본보기로 삼았던 유대인의 양육방식의 실제를 접할 수 있다. 맞다. 사춘기마저 20대로 옮겨 놓는다는 헬리콥터 맘이 등장한 배경에는 알게 모르게 지향해왔던 유대인 모방적 교육철학이 보태어졌을 지도 모른다. 

 

코셔 방식의 엄격한 조리과정을 통과한 것만 먹는 까다로운  식규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만감, '이방인'과의 엄격한 분리, 각종 종교 기념일 예식과 복장... 유대인의 삶은 정말로 민족 주체성 하나로 타이트하게 조여져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좋다. 그들이 옳다고 치자.  그들의 신이 수억의 지구인들 중 그들 민족만을 선택해 구원해줄 주거나 말거나 거기에 별다른 이의가 없다고 치자. 그들은 왜. 그 긴 세월 2천년동안 나라 없이 핍박과 냉대를 받으며 함께 나라를 이루고 살 작은 땅떵어리 하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오면서 바다 건너 먼 땅에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그 민족적 어둠의 시대에조차 섞이는 걸 거부하고 조소를 참으며 그들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던걸까.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무엇일까. 그들의 지배계급이 신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은 피지배계급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 순종적으로 삶의 방식 자체를 규제하도록 만든 걸까.

 

 

존재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차라리 나더러 밖에 나가 도둑고양이나 나무를 위해 옷을 갈아 입으라고 하지 그래. 그건 그래도 존재하기라도 하잖아. 92

 

 

온 세상이 이미 알고 있는데 왜 어머니는 모르세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에요. 중략. 회당의 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러시아의 공산주의자 되겠어요110

 

 

홀로코스트의 시대 무력하기만 했던 자신들만의 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걸까. 그들은 왜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걸까. 포트노이에겐 그리도 참을 수 없던 온갖 종류의 엄격한 규율이 그들의 정체성을 지킨것일까. 우리를 보라. 한 땅덩어리에서 단일민족으로 500년동안 국가를 이루고  지켜온 유교적 관습이 한 방의 개화기 이후 단 백여년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않은가. 물론 형식적인 부분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우리는 태평양과 대륙이라는 거대한 지리적 경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똘똘 뭉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서구화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 민족은  2천년이 넘게 흩어져 살면서 어떻게 그 까다로운 율법과 억압적 양육 방식이 조금도 희석되지 않은 것일까.  

 

포트노이가 크면서 점점 삐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있다. 그의 눈에 비친 집안의 부조리와 모순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좋은 머리와 천성적인 의협심을 품은 진보주의자의 눈으로 성장과 함께 깨닫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포트노이는 타고난 의협심과 정의감과 영특함 유대인으로서의 모순적 자만심과 배타성 사이에서 반항과 배교라는 선택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인 어머니의 그림자를 털어버리지 못한채 길을 잃고 자위에 몰두하며 죄책감을 갈구했다.

 

 

청소부를 마치 노새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 존엄성에 대한 열망이 아예 없는 존재처럼 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구요. 112

 

유대인을 가르켜 흔히 하는 말 중에 부모가 살아있는 유대인은 15살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서른이, 마흔이 넘어가도 유대인의 아들은 소년인 채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인 듯하다. 그는 유대인의 양육방식과 자식에게 거는 기대에 극한의 환멸과 저항을 느낀다. 착한 아들, 나의 천사, 집안의 기둥. 아이들을 옭아매는 것은 단지 체벌과 강압 뿐만은 아니다.  아이를 위해 모든 걸 걸고, 아이의 장래에 목을 거는 부모의 과한 기대는 앨릭스에게 천벌처럼 무거운 부담이다.

 

 

나를 위해 그러지마세요. 제발 당신 삶이 지금 이 모양인 이유를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앨릭스를 내밀지 말아 주세요! 나는 모든 사람의 존재의 이유가 아니니까요! 나는 내 평생 그 짐을 지고 다니는 걸 거부 합니다! 172

 

 

우리 자신이 너무 안쓰러워 큰 거리며 신음을 토하고 있네요. 유대인 부모의 아들들. 슬퍼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들들이 말이에요. 이 죄책감의 거친 바다를 흔들흔들 헤쳐 나가느라 지긋지긋한 멀미에 시달리면서요.173

그 억압과 강제를 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쇠라도 녹일 듯한 사춘기 소년의 성적 욕구와 호기심을 성적 방종을 통해 방출한다. 그래봤자 소년이고, 그래봤자 자위다. 그가 참을 수 없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설사를 핑계로 자위를 하러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집안은 이방인들의 음식을 사먹어 그렇게 됐다며 홀라당 뒤직어지고, 그의 끈적한 배설물은 욕실의 이곳 저곳으로 튀고.. 곳곳에 웃음이 터지는 부분은 이런 종류의 강박을 죄책감으로 끌어내는 자기비하적 코미디다.

 

 

내가 얼마나 더 오래 이용 가능한 구멍에 이걸 계속 꽂아댈 것인가? 처음에는 이 구멍에, 그러다가 이 구멍이 지겨위지면 저기 있는 구멍에... 하는 식으로. 이게 언제 끝 날 것인가? 아니, 왜 이게 끝나야 해?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규범에 순응하려고 ? 151

 

그는 자위의 시절이 끝나자 부모가 금기하는 이방인, 즉 앵글로 색슨 백인들과 자유롭게 교제하며 성적 방종의 끝까지 지만 그와 동시에 죄의식,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도 싸운다.  포트노이는 이방인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는 자신을 혐오하는 듯 자신을 조소하고 비웃는다. 백인 여자 친구의 집에서 백인 이방인 문화를 동경하는 방식은  집요하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조롱과 야유이다. 

 

 

나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고맙습니다 하고 대꾸합니다. 심지어 생명 없는 물건에게도. 나는 의자로 걸어가 바로 의자에게 말합니다 실례합니다. 고맙습니다. 냅킨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들며 나도 모르게 냅킨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322

 

 

 

좋은아침 그가 말합니다. 중략. 그는 8시부터 12시 사이에 시간들이 좋기를 바랍니다. 즉  즐겁고 유쾌하고 유익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우리모두 서로서로 4시간동안 기쁜 마음으로 많은 것을 이루기를 바라는 겁니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보세요. 정말 멋있습니다. 좋은아침. 똑같은 것이 좋은 오후에도 적용됩니다. 또 좋은 저녁에도. 또 좋은 밤에도. 이럴수가. 324

 

그리고 그의 성적 욕망은 유대인으로서는 유대인이 아닌 자신에게 금지된 이방인 백인과의 행위로 향하고 그 행위는 성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선생님 내가 내 X지를 이 여자들 보다 여자들의 배경에 더 깊게 꽂는다는 겁니다. 마치 X을 통해 미국을 발견한 것처럼. 미국을 정복할 것처럼. 3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방인조차 사랑하지 못한다. 그가 그토록 저항해온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에게 스탬프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는 유대인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유대인으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서른이 되도록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방황하며 중2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가엾은 유대인은 결국 자신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2천년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유랑을 시작한다. 유랑 중 그가 도달한 곳은 유랑의 민족 유대인이 최종 기착한 팔레스타인의 땅 바로 그 곳 이스라엘이다. 그 곳에 어머니같이 강철같은 유대인 여인이 있다. 그 곳에서 그는 발기하지 못하고. 자기 땅에서 발기하지 못하는 그는 유대인을 품지도 못한다. 포트노이는 스스로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인식한다.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는 것은 어머니의 강압적인 양육방식인데 포트노이가 정작 화나는 대상은 아버지이다.  그에게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어머니 자체인데, 스스로는 그렇게 신을 부정하고 배교를 했음에도 결국 자신을 위해 종교를 바꾸지 않을 거라는 여자친구를 끝내 용서하지도 못하고 헤어진다.

 

마지만 장을 넘기자 슈필포갤은  말한다. 자 상담을 시작할까요. 그의 상담은 어디부터 시작될까. 이 부분은 좀 이해가 안간다. 이제까지의 독백은 슈피포겔에게 하는 말로 이해를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슈필포겔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인 듯하다. 진실은 여기까지이고, 그는 유럽에서 온 심리상담박사에게 거르고 순화해서 자신을 전달할 것이다. 그는 그런 비속어를 쓰지는 않도록 교육받은, 부모가 살아있는 유대인 남자는 15세인, 15세 유대인이므로.

 

 

*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읽는 경우에 따라 남성, 여성을 막론하고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소리내서 발음하기 어려운 음흉한 욕설과 비속어를 포함한다. 필립 로스라는 미국 최고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정보만 가지고는 어느 정도인지 예측이 어렵겠으나, 이 책이 필립로스가 서른살 중반쯤 쓴 책임을 감안한다면(1960년대) 성적으로 그리 과한 건 아니라고 생각된다.중간중간 아메리칸파이 류의 코믹한 부분이 많지만, 또 중간중간 갑자기 배경설명도 없이 장면이 바뀌고 인물도 바뀌고 누구를 향해 무엇을 얘기하는 지 모른채 불평하는 걸 읽어야 하는 지루함도 있다. 말년에 쓴 에브리맨과 언제 썼는지는 모르지만 영화로 제작된 휴먼스테인과 비교한다면... 젊을 때가 역시 패기 한 번 좋구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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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10-14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굉장히 흥미롭네요. 유대인은 모계혈통으로 인지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엄마가 유대인인 것 보다 확실한 건 없겠죠... 코셜도 도마가 세개라고 하더라고요. 육류 유제품류 채소류던가 서로 섞이면 안 되니까 조리도 설거지도 따로 한다고요. 현대에 와서까지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는 가정은 드물테지만 가끔 안식일 지킨다고 문명을 거부하는 모습들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그려지더라고요. 아미쉬처럼은 아니고 전깃불을 켜고 끈다거나 하는 그런 거요.(정확하게는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안 그래도 리뷰 찾는다고 책 검색했더니 표지에 c word가 눈이 들어와서 이 책 뭐지?? 했어요. 이런 내용일 줄이야.... 참 유대인들은 흥미로와요. 혹시 핀켈스타인이 쓴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책을 읽어보셨을까요? 유대교로 개종하는 건 언제나 환영이나 그 안에서도 계급을 나누고 이스라엘의 실태 등등을 알 수 있어요. 이 책도 봐야겠습니다 ㅎㅎ

2016-10-14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