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가 불가능한 말기암 환자에게는 항암제보다는 고통을 잊도록 도와주는 진통제가 더 절실하다. 절망이 끝을 보이지 않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는 어쩌면 이런 책이이야 말로 절실했던 건지도 모른다. 필요는 수요를 만든다. 시간이 흘러도 비루한 현실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홀로 내 던져진 청춘에겐, 그리하여 산업 역군이 되어 있어야 할 총명한 인재들이 공무원 과거 시험 준비로 영혼이 바싹 마른
고달픈 청춘이 되어 버린 시대에겐 위로와 치유와 같이 달콤한 언어 외에는 달리 그들을 구제할 대안이 없을지도 모른다.
견뎌라.
네 운명을 사랑해라.
이 어처구니 없는 운명론을 스스로 말하기는 챙피했던 모양이다. 니체를 빌려온다. 누구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철학자 니체를
끌어들이고, 아모르파티라는 뭔가 감각적이고도 세련돼 보이는 외국어인지 전문용어인지를 첨부하면 운명론이라도 면죄부가 주어질 지도 모른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수상한 그녀>에서 노년 전문 교수가 학생들에게 노년의 특징 강의 도중 한 학생은 늙으면 뭐하러 사냐며
자기는 늙기 전에 죽을 거라고 했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우리도 어릴 땐 어른이 안될 줄 알았다. 어른이 되면 어떻게 살지. 어른이 감내해야 하는
모든 책임과 의무와 노동을 떠안고 어떻게 살지. 두려웠지만 어찌어찌 살아졌다. 누구나 어른이 다가오고 피할 수 없이 어른의 책무를 다하며
살아간다. 평범한 가정에 시련이 닥쳐 나락으로 떨어져 죽는 것 말고는 달리 살 방법이 없은 것 같아도 대개는 자살하지 않고 살아간다. 암에
걸리기고 하고. 차 사고도 나고. 하루 아침 실업자가 되기도 하고. 배우자가 배신을 때리기도 한다. 그렇게 인생엔 온갖 시련이 있지만 저마다
교회를 가거나, 그냥 앉아서 참거나, 참지 못해 미치거나, 어쨌든 그렇게 살아간다. 너무 불행해져서 못 살것 같아도 그렇게 살다 보면 또 그
나름대로 적응하고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책도 어떤 사람들에겐 그런 상황을 지나는 순간엔 짧은 위로가 될
수 있다.
니체가 말했다는 아모르파티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철학적 용어인데 김난도 교수가 전하는 메시지는 대략 그 운명론에 가깝다.
개인의 운명은 사회가 책임질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괜히 저항하느라 힘빼지 말고, 아무리 비루한 현실이라도 그 현실, 그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 아 알흠다워라.
육체적
통증이 격심할 때에도 한 순간만 살아넘기고 나면 견딜 수 있다 깊은 좌절이 그 바닥을 보여 주지 않을 때에도 마음을 호두껍데기로 단단히 감싸고
꼭 하루씩만 살아가면 견딜 수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신기하게도 지나간 얘기로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74
사표를 원하는 직장인에게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면 떠나고 떠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자신은
공중목욕탕에도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다면서 (자신과 같이 성공한 사람들을 본받아) 고독한 시간에는 자신을
성장시키라고 말하며, 결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준비나 자신감이 확실해 지는 시점이란 영원히 없으므로 마음
먹었으면 실행하라고 충고한다. 사랑에 대한 충고는 어찌 보면 그럴싸해 보일 수도 있겠다.
사랑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없다. 소통이 단절되는 때가 사랑이 끝나는 때다. 항상 곁에 있고, 아무리 친밀하더라도 더
이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랑은 다하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소통할 수 있으면 사랑은 유지된다. 그리고 그 소통의 끝에
섹스가 있다.184
이 말이 그럴싸 해 보인다면 소통 대신 아무 긍정적 단어나 갖다 붙여
보시라. 이해, 감동, 배려, 용서, 베품, 나눔, 공감, 등등등. '이해가 단절되는 때가 사랑이
끝나는 때다.', '감동이 단절되는 때가 사랑이 끝나는 때다.', '배려가 단절되는 때가 사랑이 끝나는 때다.' 수백가지 단어를 넣어도
성립하는 게 사랑이다. 사랑이 그렇게 만만한 거다. 사랑이 만만한 게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방법이 만만한 것이겠지. 그럴싸해 보이지 않나.
여기서 영감을 얻어 갑자기 떠오르는 사랑에 대한 나의 의견. 사랑에 대한 나의 빈 칸에는 소식이라는 말을 넣어본다.
소식이 끊겼을 때가 사랑이 끝났을 때이다. 소식을 전할 수 없는 백 가지 이유는 모두 핑계다.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면 천가지
이유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랑은 소통이니 이해니 배려니 하는 그런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이 지어내는 단어가 아니에요 교수님. 사랑은요 만나지
못하면 그걸로 끝인거에요. 멀리 있어 그리운 마음은 환상이랑 부르는 거지요. 뭔가를 단순화시킬 땐 그것만이 아니면 안되는 고유성과 설득력이
필요하지 않나요. 말을 할 수 없더라도, 말로 소통할 수 없어도 왕자 옆에 있기 위해 인어는 사람이 된 거지, 소통할 수 없다고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거든요. 따라서 소통할 수 없으면 섹스도 무용지물이란 말은 틀렸어요. 소통할 수 있다고 해서 인어가 인어인 채였다면 왕자는 단 한
순간도 인어공주가 바라는 눈빛을 보내주지 않았을 거거든요. 다가갈 수 없으면 바라볼 수조하 없기 때문에 옆에 없으면 사랑이 끝난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변영주 감독과의 트위터 설전에서 변씨 편을 들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다만 별 거 아닌 한마디에 아무르파티인지
뭔지 외국말을 주워다가 철학자를 동원하고 별거 아닌 생각들이 마치 영혼잃은 청춘과 애어른들의 삶의 지침서인양 불티나게 팔리고 홍보되는 현실에
대한 작은 저항에 발끈해서는 만국민이 바라보는 공개 설전 트위터로 끌고가는 모습 역시 이런 종류의 착하고 예쁜 책을 짓는
멘토로서의 이미지와는 한참 다르다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실망은 앞으로도 쭈욱 안고 가셔야 할 듯.
"일단
기본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책 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다. 지들이 애들을 저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서 심지어 처방전이라고 써서 그것을 돈을 받아먹나? 애들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 면 무가지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걸 팔
아먹나? 아픈 애들이라며? 아니면 보건소 가격으로 해 주던가."
이런 글이 프레시안에 가감없이 턱 하고 실렸을 때, 변영주가 느꼈을 기자에 대한 배신감을 생각하면 내 속이 다 쓰리다. 이런 말은 너랑 나
사이에서만 오프더 레코드로 한 말이잖니. 프레시안의 인터뷰 기자가 사적인 견해 오프더레코드를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화근이었어도 이걸 읽고 발끈
해서 공개 설전으로 치고 나서는 김난도 역시 어른이 되는 종류의 책을 써낼 만큼 성숙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서울대 최고 인기 교수이고,
온국민의 멘토를 자처하고 나선 사람이라면 변영주가 한 말은 자신 개인을 향한 말이 아닌,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자본기득세력들을
향한, 즉,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잣대로 대안도 없이 이리저리 리드하고 자기 착취를 유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치유니 힐링으로 그들을
또다시 기만하고 있는 자기계발류 산업 자체를 향해 있다는 것 쯤은 알아차려야 했다.
아픈가. 아파하시라. 지적질 당해서 아픈 것이지, 몇백만 독자로부터 사랑받는 멘토의 권위에 난 작은 흠집 때문에 아픈
것이지, 절대적 고통, 절대적 절망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다. 당신의 아픔은 당신이 위로하는 사람들의 아픔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