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후.

p40

박중위가 주는 라면을 받아먹지 않았다면.. 연희 누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태풍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사소한 현상들이 태풍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풍을 유발한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결과가 무작위로 원인들을 소환하는 이 시스템은 심리학적 요인에 의해 지원받고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인간 심리의 무규칙성과 돌발성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과 인과적으로 관련지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낸다.

 

 

 

p115

헤브론 성이 그에게 도피성인 것은, 그가 세상에서 범한 과거의 죄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앞으로 범할 죄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기 때문에 더 그랬다.

 

 

 

p313

학대받음으로써 얻게 될 구원에 대한 도착된 소망이 그의 내부에서 커 가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중략) 그는 자기 고난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적어도 영광에 이를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더럽고, 아직 더럽고, 여전히 더러웠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더 치욕을 겪고 고통을 받아야 깨끗해질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치욕은 거통과 더러움을 씻어 주첬지만 충분히 깨끗해지지는 않았다. 치욕과 고통으로부터 그가 부단히 확인한 것은 그의 더러움이었다.

 

 

 

한정효

p169

선글라스를 벗은 한정효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을 때의 한정효와는 달랐다. (중략) 그의 눈앞에는 동원될 억지 논리와 무리한 기획과 희생자들과 시끄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질 세상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의 무력함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못쓰겠다"라고 선언되었으므로 그는 더 이상 쓰이지 않을 것이었다.

 

 

 

p291

저 굉장한 말씀들은 애초에 이 세상을 이길 힘이 없어요. 세상은 크고 무섭고 힘이 세요. 언제나 그랬어요.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그에 비하면 말씀은 무력하기 짝이 없어요. 그건 말씀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가진 힘이 다른 힘이기 때문이에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씀은 세상에게 능욕당하고 옷 벗기고 채찍질당하고 창에 찔리고 못이 박히고 죽을 수밖에 없어요. 다른 힘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찮은 것이 자주 위대한 것을 이겨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생각해 봐요. 그분은 땅의 법칙에 철저히 무력했어요. 예수님은 '나의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라고 했어요. 세상 권력에 대한 철저한 무능력. 그것이 그분의 진짜 능력이었어요. 그분이 무능한 것은 그분의 능력이 땅의 법칙 저 너머에 있기 때문이에요. 말씀들의 위대함도 땅의 법칙 너머에 있는 위대함이에요. 말씀들이 이 무자비하고 막무가내의 현실을 무너뜨리고 이기고 지배하리라고 기대하지 마요. 말씀이 굉장한 것은 현실을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기 때문이에요. 현실에서의 철저한 무능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말씀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p292

그는 세상을 떠나지 않은 채 세상과 상관없이 사는 일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과 상관없이 살려면 세상을 떠나야 한다.. 세상을 떠나지 않으려면 세상과 상관해야 한다.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과 상관없이 살려고 하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상처와 굴욕을 각오해야 한다. 각오한다고 해서 상처가 나지 않거나 굴욕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상처와 굴욕을 각오해도 상처는 나고 굴욕은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그 상처와 굴욕이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상처입고 굴욕을 당함으로써, 그 상처와 굴욕으로 승리했다.

 

 

알듯.. 말듯..

 

인간 내면의 세계를 그 깊고 미로 같은 보이지 않는 추상 속을 구석구석 탐험하고 해부학적인 언어로 기술한 대가의 작품이다. 책을 덮은지 몇 일 되었는데 아직 여운이 길다. 어쩌면 종교에 기대(?)를 이제는 포기하고 그냥 이해하는 입장에서 바라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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