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 운명의 지도를 뛰어넘은 영국여자들
김이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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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술술 잘 읽히는 책을 읽으니 머리 속 꼬여 있던 나사들이 요즘말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김이제 교수가 만난 영국의 대표 여성 10인은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형용사의 결합이 또다른 명사의 형용사가 되는 꼬이고 꼬인 복합 문장이 떠오르는 복잡한 여성들이다. 박인환 님의 시 속에서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한 잔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각인된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얼마나 격정적이었던가. 잘 알려진 제인 구달 , 애거서 크리스티, J.K. 롤링 모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생소한 트레이시 에민, 도린 에린스 등도 쉬운 문장으로 써내려갈 수 있는 삶을 살지 않았다. 김이재가 만난 그들은 대개 18세기, 빅토리아 시대 긴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때 태어나, 영국에서 처음으로 참정권을 요구했던 1913년 격정의 세대를 어머니로 둔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고등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모두 이혼을 했다. 그들은 모두 제도와 관습의 틀에 맞서 싸웠으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몇몇 인생의 고비들을 맞기도 했다.  이룩하고 성취하는 과정은 제각기 달랐으나 그들은 결국 인생의 후반기에는 큰 성공으로 엄청난 부를 획득했고, 그 부의 최종 귀착지는 대개 환경과 소외계층을 위해 쓰여졌다.

 

바디샵의 창시자, 애니타 로딕은 동물 실험에 반대하는 슬로건을 바디샵의 최고 가치로 삼아 브랜드를 키우고 영국의 동물 학대 반대 운동에 기여했으며 , 아프리카와 오지의 숲에서 나는 천연 재로들을 화장품의 재료로 이용함으로써, 숲을 살리고 척박한 환경에 놓인 원주민들의 삶을 개선시켰다. 영국의 생가가 있는 본머스에서보다 우리나라에 더 잘 알려진 침팬치들의 어머니 제인 구달은 학술 논문보다는 대중강연을 통해 침팬지의 삶을 이해시키고 보호의 필요성을 확산시켰다. 결혼 실패와 숱한 염문 끝에 스물 다섯살의 연하와 결혼하여 20년간 해로하고 있는  열정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스코트랜드와 영국적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세계적으로 성공한 디자이너이자,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이슈에 목소리를 높이는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00년 전 홀홀 단신 동쪽 끝 한국 땅까지 여행을 와 <한국과 그 이웃나라>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에 올려 놓은 베스트셀러 여행작가이다. 사랑스러운 르네 젤위거가 출연한 미스 포터 라는 영화로 그 삶이 우리에게도 알려진 베아트릭스 포터는 100여년 이상 유아 동화 캐릭터의 대명사가 되어 온 피터래빗의 작가이다. 부자집에서 태어났지만, 어린시절 이복 형제들로부터의 성폭력과, 우울증, 정신이상 등 불행으로 점철된 생을 살아온 버지니아 울프는 사건이 아닌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소설을 전개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실험한 <댈러웨이 부인>을 탄생시켰고,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 50대 문학작품 7위의 위치에 자신의 작품 <등대로>를 올렸던 세계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103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10억부 이상 판매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된 위대한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는 자신의 일상에서 관찰한 모든 대상과 지식을 매우 전문적이고 현실적이게 추리 소설 속에 녹여 내어, 폭력적인 묘사 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공포와 긴장을 만들어냈다. 언론에서 미혼모의 궁핍한 삶이 훨씬 더 많이 알려진, 해리 포터의 창조자 J.K.롤링은 사실 천상 글쟁이었다. 그녀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는 마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되다'에서 처럼 상상의 세계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게이트를 현대 미술 중심지로 부상시켰다는 트레이시 에민은 음주, 낙태, 섹스, 자위 행위 등 자신의 모든 경험을 솔직하게 그대로 다 보여주는 현대 미술가이다. 런던 올림픽의 마지막 성화 주자였던 도린 로렌스는 1997년 아들이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해 살해된 후 차별과 맞서 싸운 투지의 여성으로, 용의자들은 도린 로렌스와 그녀를 후원하는 단체들의 노력으로 19년 만에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영국의 인습적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책의 첫 장은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철의 여인 대처는 11년간 영국을 통치하면서, 빈부격차와 지역갈등을 심화시켰고, 소통의 기회를 축소시켰고, 효율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노동자 농민 실업자 싱글맘들을 탄압하고, 오만과 독선으로 일관하다가 초라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녀는 남자의 부를 이용하여 권좌에 오르고 워킹맘과 주부라는 코스프레를 통한 거짓 서민적 이미지를 만들어 대중을 선동한 권력지향형의 인물로, 영국에서는 이제 만나는 사람 마다 그녀에 대해 물으면 치를 떠는 존재가 되었다. 저자 김이재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강하고 유능한 이미지만 강조된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를 가장 앞에 소개하면서, 실제로 빅토리아 시대에 차별의 벽을 박차고 나와 세상을 바꾼 진짜 위인들 10인의 모습을 대조시켰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짧게 만났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인물의 느낌과 감정이 마치 자서전과 같은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그에 대한 자료의 출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많은 여행과 자료 수집을 통해 쓰여진 글이니만큼 그 신뢰성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참고 자료의 미표기가 아쉽다. 대부분의 한국 책들이 다 마찬가지다.  

 

영국에 거주할 당시 Lake District 라는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그 잘 보존된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적이 있는 나로서는 베아트릭스 포터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베이트릭스 포터는 자신의 캐릭터를 일찌감치 저작권 등록하고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 동화책 수입 이상의 수입을 벌어들였다. 그녀는 버는 족족, Lake District 의 땅을 사들였다. 그 지역이 상업화되고 개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곳 주민들은 포터의 이러한 부동산 사재기가 지역 개발을 막는다고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설악산이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되면 개발이 어려워질까봐 지역 주민들이 길길이 반대해서 영구 등재 불가 상태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결국 지구촌 어디서건 보통 사람들에겐 실질적 이득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앞선다는 거다. 그녀들이 위대한 건 땅을 투자와 투기로 바라보는 보통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을 때 그 거대한 호수 지방의 모든 땅은 National Trust라는 문화/자연 유산 보호 단체에 기부했다. 베아트릭스 포터가 보존한 그 땽을 밟았을 때 힘덜었던 기억 하나가 있다. 가파른 오르막의 왕복 1차선의 산길을 주행하다가 반대쪽에서 오는 차량을 만나면, 두 차가 교차해서 지나갈 충분한 공간을 만날 때까지 한 쪽에서 양보하여 계속 후진해야 한다. 호수지역 자체가 워낙 넓고 대개 오전엔 상행차량이 오후엔 하행 차량이라 이런 일이 드물긴 했지만 수동 기어를 가진 낡은 차에 아기까지 태우고 있을 때에는 그런 순간이 아찔하다. 태초의 원시적 황량함 속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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