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 가는 것들에 대하여 - 인생의 끝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뜻밖의 행운
윌리엄 이안 밀러 지음, 신예용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청춘이었을때 최대 고민이었던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청춘이 지나고 나면 노후에 대한 대책없는 막막함을 포함하게 된다.  아직 미래의 일이고, 닥치지 않은 일이지만, 부모 세대와 조부모 세대들의 늙고 병약해지는 신체적 정신적 특징들을 목격하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투영된 그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들이 두렵다. 이 두려움은 퇴직연금과 노후 보험과 같은 경제적 준비로 단단하게 방어되지 않는다. 우아하고 품위있고 여유로운 노후에 대한 소망이 노력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년에는 기억력, 인지 기능, 이성적 판단 능력 등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정신적 활동과 관련된 전반적인 기능도 함께 퇴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노년과 함께 오는 모든 퇴화는 준비한다고 준비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독백이 흐르는 사해를 따라 떠내려가며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노년기의 전형적인 신호이다. p31

 

노년이란 이런 것이다. 미시간 로스쿨 월리암 이안 밀러 교수는 <Losing it>이라는 원제의 이 책 첫 페이지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문장은 계속해서 노년기에 흐려지는 뇌의 정신적 활동에 대하여 얘기한다

 

노년의 특성은 분별력이 흐려지는 현상이다. p31

 

그리고 범위를 넓혀 노년기의 전반적이고 실질적인 육체적 정신적 특징을 열거한다.

 

노년기는 쇠퇴, 비열함, 탐욕,비겁함, 까다로움, 성미급함, 침울함, 징징거림, 노안, 코흘리기, 난청, 성마른 기침, 대머리, 이빨 빠짐, 악취 성욕 상실, 처진살, 망각,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수다로 설명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2000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확히 들어맞는 해석이다.p73

 

한 치 틈도 없이 실날하다. 

 

이 책을 들고 서울대병원 파스쿠치에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기다리던 조금전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좁은 줄 사이로 한 호호 할머니가 마시던 커피를 카운터로 가져와 탁 놓더니 버럭 화를 내고 가지는거다. "써서 어떻게 마셔!!  이따위로 할거야?!!" 종업원과 손님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할머니는 돌렸던 발길을 다시 뒤돌아 버럭 소리를 더하고 사라지셨다. "마셔봐!!"  노년을 받아들일 수 없는 노년기 여성의 염색술 덕에 요즘은 귀해진 은빛의 백발에 통통히고 귀여운 완전 호호 할머니였다. 환불의 권리가 소비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미덕이 된 세상에 다다라 있다는 걸 알지 못한 호호 할머니는 3천5백원이나 하는 아까운 커피를 써서 마시지도 못한채 노인을 희롱했다는 생각에 발끈한 채 버려두고 가신 듯했다. 노인들의 이런 문화적 소외 현상은 그 커피의 신선한 향과 쌉싸름한 맛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종이잔 속의 카페인이 주는 위로를 향유하는 세대에게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다. 어르신의 이 작은 행동은 위에서 언급한 노년의 정신적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쇠퇴, 까다로움, 성미급함, 고립..

 

나의 할머니는 생전에 플라스틱 이라는 말을 플라티스 라고 발음하셨다. 우리들은 그 단어를 말할 때마다 깔깔거렸고 할머니는 망할 년들이라며 욕을 하셨다. 난 그 욕이 좋았다. 망할년들. 그리 성성한  할머니의 기운이 아직 노년의 끝쪽에 있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작은 일상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내가 크고, 내가 결혼을 하고, 또 며느리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점점 늙어가며, 살이 빠지시고 말귀가 점점 어두워지시고 떠나기 마지막 몇주전 급기에는 우리들을 알아보지 못하시던 그 암울한 기억을  끝으로 사라져가던 생명의 끝은 노년의 최후를 결국은 두려움과 잔인함으로 인식하게한다.

 

윌리암 이안 밀러는 방대한 고대 신화, 아이슬랜드 사가와 유대인의 성경,  문학 작품 속의 등장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노년의 특징을 매우 풍자적이고도 위트있게 사유한다.  그는 노년의 특징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로  공포, 지혜, 불평, '은퇴 복수 그리고 재산', 감정, 구원의 6개의  속성을 제시하고 이 속성에 따라 책의 각 부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노년의 특성을 접근하는 방식은 역사와 신화, 그리고 문학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윗, 요압, 베어 울프, 리어왕, 안스가르, 그리고 아이슬랜드 사가에 등장하는 수많은 노인들의 모습에서 본질적 노년의 모습을 찾았다.

 

1부 공포에서는 노년과 더불어 찾아오는 두뇌의 손상과 그에 따른 노년의 모습을 다룬다.2부에서는 지혜라는 것의 참모습을 해부하고 3부 불만 편에서는 노인의 가장  볼성 사나운 특징이라 여기는 불만이 실은 인간의 본성적이라는 점을, 심지어 종교적 형태로 행한 숱한 '신성한' 의식마저 일종의 신에 대한 불만으로 간주하는 통찰력을 통해 보여준다.

 

노인은 노년이나 노년의 특성 그 자체에 대해 불평한다. P136

 

모든 인간이 불평하며, 불평은 때로 삶의 통찰에 신릴한 유머가 가미된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울 수 있다. 불평이란 것은 대개는 지루한 일상적 화재이지만 노인의 불평에는 합법적 기능이 따르지 않으며, 불평을 멈추고 쓴웃음이나 지으며 긍정으로 빠져든다면 그 노인들은 더 이상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잃은 것이라는 것, 그리고, 떼를 쓰는 노인은 불평할때는 대체로 무시당하고 불평하지 않는 노인은 왼전히 무시당한다는 것이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노인들의 생존 전략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4부 '은퇴, 복수, 그리고 재산'  편에서는 사가를 비롯한 중세시대 속 인물들을 통해 좌절감에 젖은 노인들이나 연장자들의 마지막 선택, 비루하게 복수에 굴복하는 대신 침상에 들어가는 완벽한 시나리오로  복수 자체를 포기하는 힘, 사후 세계까지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끌어안고 가려 했던 사례들을 분석한다.

 

은퇴의식 안에는 나이가 들며 생기는 일반적인 무능함과 쇠퇴에 따르는 슬픔과 분노에 좌절과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정교하게 다룬 다양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208


그리고, 5부와 6부에서 이어지는 감정과 구원에 대한 주제도 그의 철학적 위트는 변하지 않는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밀러 교수가 이 책을 노년기의 자기 성찰, 자기 계발 혹은 노년을 준비하는 어떤 정신적 지침서로서  쓴 것은 아니다. 노년에 도달한 작가의 자조섞인 정신적 육체적 쇠퇴에 대한 기술은  간간히 뿌려진 양념이지만, 책 속에는 밀러 교수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지식과 예리한 통찰이 집대성되어 있다. 곳곳에 포진된 아일랜드 사거와 구약의 인물과 신들은 목사님의 설교보다 훨씬 살아있는 캐랙터로 독자앞에 유머러스하게 등장한다. 구약이나 사거, 그리고 책에서 언급하고 분석하는 고대 중세 문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더 즐길 수 있었을텐데 내 경우 이해 못하고 넘어간 걸 제외하고라도 앞뒤 설명 없이 갑자기 맞닥뜨리는 신화 속 이야기들의 위트있게 꼬여있는 문장들과 생소한 인물의 이름들이 가독성을 떨어뜨려  문단을 몇번씩 읽어야 제대로 유머를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뒤로 갈수록 흥미로워지는 이유는 앞에서 제시한 사가의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므로 나중에는 점점 밀러 교수가 분석하는 인물들과 친밀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책을 시작한지 한동안 흥미를 가지고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소리다. 제목과 표지 광고에서 암시하는 내용과 다른 전개 때문이었다. 이 책을 제목 그대로 늙어가면서 상실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상념으로 알고 읽는다면 한동안은 그야 말로 책 속에서 길을 잃을 지경이다. 띠지의 광고처럼 지혜롭게 나이들고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탐구하기 위한 자기계발서로 알고 읽는다면 아마도 내 생각에는 책을 끝내기 어려울것이다. 언제 본론으로 돌아갈지, 자조적인 어조로 스스로 강조했던 것차럼 박식한 노년의 지적 독백처럼 들릴수도 있다.

 

이 책은 오히려 노년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주제로 신화와 문학의 경계에 선 고대 중세의 성서와 사가에 대한 깊고 날카로운 꼬임으로 빚어진 유쾌한 비평서에 가깝다.  부제를 내 맘대로 지어본다면 '노년의 특성으로 보는 유쾌한 성서 비평.  쯤 해두었다면, 독자의 원성을 받을 일이 없었을 듯하다. 즉   이 책에서 노년을 맞기 위한 자아성찰이나 심리학적 탐구를 기대하지 말 것. 노년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과학적 팩트들을 찾으려 하지도 말 것. 그러나 집중해서 읽다 보면 자연적인 현상의 하나로서 노년을 이해하고 두려움을 떨칠 수 있으며, 유쾌한 마음으로, 그러니까 파스쿠치에서 커피가 쓰다며 버럭 소리지르는 미래의 나를 젊은이들이 의아해하며 키득거리는 종류의 해학적 모습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역사를 탐구하고 뒤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전체적 맥락에서 현재를 잘 이해하지 믓하고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과거 속에서 지혜를 얻고자 함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찾아본 노후의 모습은 우리에게 닥칠 노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는 조금 더 지혜로와질 지 모르고, 우리는 불만에 가득차 누군가에게 보상을 요구하고 끊임없이 불평하는 일상을 살게 될 것이고 은퇴와 더불어 침상에 누우며 비굴하지 않은 방법으로 모든 종류의 복수를 포기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구원이라는 추상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모든 만물이 그렇게 생로병사를 반복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연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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