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들은 대체로 길지 않았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격정적 감정에 휩싸여 있지도 않다. 절제되고 압축되고 친근함 속에 안전 거리가 확보된 듯한 그런 문체다. 대대로 대필해주는 집안의 교육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가끔 느끼는 거북스러운 일본식 표현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책이 있을까 싶다. 츠바키 문구점의 후속편이라고 하는데, 전편을 안읽고 읽었지만 맥락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니라서 상관없이 잘 읽혔다. 처음엔 그냥 시시콜콜 사소한 일상을 일기처럼 엮은 에세이류의 소설이라 시시했는데, 읽을 수록 그 싱겁고 밍밍함에서 잡아끄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주인공이 너무 착해서 착한데 또 뭐 이런 바보같은 인간이 있어 이런 류가 아니라 은근히 이해할 수 있는 빨려들어가는 선함이 그것이다.

편지 사연들도 사실 드라마틱한 전개를 원한다면 훨씬 자극적인 소재로 발전시켰을 수가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 버리고 떠났던 엄마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막장성 소재는 그렇게 포포의 마음만 어지럽힌 채 소식이 없다. 알콜중독자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받은 남자가 찾아와서 이혼을 원하는 와이프에게 답장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편지쓸 때, 편지쓰는 것을 구상할 때 포포는 의뢰자가 준 작은 정보에 의지해서 그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한다. 꼴보기싫은 남편을 가진 여성에게 감정이입을 했다가 다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남편으로 감정이입을 한다.

오래전 죽은 문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사랑하는 후지산 이마(이마 선이 후지산 처럼 생긴 여성)의 의뢰는 한편의 코미디 같지만 외뢰인도 대필자도 심각하다. 후지산은 퇴직 후 야스나리 씨가 살던 이 마을 가마쿠라에 이사와서 살며, 같은 경치를 보고 계절을 느끼며 살아간다.

“야스나리 씨를 상상하면요, 이렇게 가슴이 찡하니 아파와요. 그러나 그다음에 몸의 골수에서 달콤한 물방울이 배어나온다고 할까요. 야스나리 씨를 행복하게 할 사람은 나 말고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답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야스나리씨에게서 받는 편지다. 당연히 오래 전에 죽은 야스나리는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포포가 야스나리 대신 편지를 써준다고 해도, 자신이 의뢰에서 받은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슨 잔잔한 감동이..

기쿠코 님
며칠 전, 하얀 모자를 쓴 대불은 보셨습니까.
당신이 감기에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평생 단 한 사람이어도 당신 같은 독자를
만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쓰지요.

-야스나리
추신. 추위를 이기려면 소고기를 먹는 것이 최고입니다.


포포가 사랑해서 결혼하는 남자에게는 아이 큐피가 있다. 포포는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하려는 것인지 아이가 예뻐서 결혼하려는 것인지 독자로서 헷갈릴 정도로 아이를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선물로 생각한다. 결혼 인사를 하기 위해 남자(미츠로) 집에 갔다가 비극적으로 죽은 큐피의 엄마 미유키의 사진을 보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 둘이 살림을 합치기로 하고 물건을 정리하던 중,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미유키의 편지를 보고 화를 낸다. 미유키를 향한 포포의 애틋함이 알듯 말듯 하면서도 따뜻하다. 만일 한 남자를 진정 사랑해서, 그가 사랑했던 삶의 비극, 그림자까지 모두 포용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비극적 죽음이 몰고 온 빈 자리에 자신이 대신한다는 느낌을 미유키의 존재를 거듭확인함으로써 어떤 위안을 얻을 수 있을 지 의문이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츠바키 문구점의 포포는 자신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이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 속에 미유키를 항상 배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은 섬뜩한 느낌이지만 미유키가 가족 속에 함께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암튼 일본 사람들의 소설 속엔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선하게 서로에게 베풀면서 살고 있는데, 왜 역사는 타민족과 타국을 겨냥해 잔혹한 짓들을 했으며 아직도 저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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