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열린책들에서 블루 리커버리 컬렉션을 시리즈로 냈는데, 이 시리즈의 표지들이 마음을 끌었다. 열린책들에서 특별히 블루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여덟 개의 책을 냈는데,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열해보니, 모두 프랑스 현대 작가의 소설이고, 어디로 통통 튕겨갈 지 모르는 유쾌하면서도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있는 중편 분량의 작품들이다. 리커버리 블루 컬렉션의 중 [밑줄 긋는 남자] 외에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와 [달리기]를 읽었는데, 각각의 작품 분위기는 다르지만 대략 열린책들에서 어떤 작품들을 함께 모았는지는 알 듯하다. 프랑스대통령의 모자는 그 전에 읽었고 블루 컬렉션에 있는 책들이 취향저격이어서 나머지도 읽을 예정이다. 오늘은 [밑즐 긋는 남자]부터 소개한다.
스물 다섯의 싱글. 애인없음. 직업없음. 주인공 콩스탕스의 톡톡튀는 재기발랄함과 솔직함, 그리고 엉뚱함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이야기가 어디로 어떻게 튈지 궁금궁금.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 보니 아쉽게도 이야기가 끝나 있고 해피엔딩이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한 상대는 로맹 가리인데 서른 몇 개의 작품만을 남겨놓고 죽었다. 이미 읽은 대여섯 개의 소설을 제외하면 1년에 한 권씩 읽는다고 해도 평생 끌어안고 살아갈 만큼의 갯수가 되지 않는다. 다른 책들을 섭렵해 보기로 하고 도서관에 가서 이런 저런 책을 빌려 오지만 빈번한 시점 교차와 수많은 등장인물에 집중하지 못한 채 안구 운동만 하다가 마지막 책인 [오렌지 빛]을 펼치는데 조금 읽다가 다시 흥미를 잃고 책장을 휘리릭 넘기다가 밑줄 친 부분을 발견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혹은 중고 서적을 샀을 때, 이전 사람이 밑줄친 것을 보면, 나 역시 왜 이 사람은 이 부분에 밑줄을 쳤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이전 독자의 밑줄의 위치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혹은 반대로 맞아 맞아 하며 공감하기도 한다. 그렇게 때로 밑줄은 같은 책을 읽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약하고 느슨하게 연결한다. 우리의 사랑스런, 심심했던 콩스탕스는 이 밑줄을 계시로 해석하기로 한고 반납을 결정한다. 도서관 직원 지젤은 반납 책을 검사하다가 낙서를 했다며 핀잔을 준다. 억울한 콩스탕스는 펄쩍 뛰다가 자신이 발견한 밑줄 말고 마지막 장에 글자가 써져 있는 걸 알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27쪽)
마침 노름꾼은 대여중이고 도스코예프스 특별 전집에도 그 작품이 있을 거라는 지젤의 권고를 사양하고 꾸역꾸역 대여중인 일반판 노름꾼을 찾아 대여를 하고 밑줄을 찾는다. 여러 부분에서 발견된 밑줄은 자신을 사랑하는 새로운 사랑의 등장이라 믿고 설레발을 친다. 집에 와서 밥만 홀딱 먹고 설겆이 한 번 안하고 돌아가던 남친을 차버린 후 아버지와 아저씨와 생일을 보낸 후 외로움에 지쳐 홀로된 처지를 비관하던 중 밑줄은 새로운 사랑을 암시하는 것이 틀림없다. 밑줄은 계속 그녀를 흠모하여 멀리서 지켜본다는 듯한 암시를 준다. 참을성 없는 콩스탕스는 책의 끝에서 가리키는 다른 책을 계속 찾아가며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남자를 쫓는다.
메시지가 끊기기도 하고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지젤을 통해 길고도 절절한 편지를 전달하고자 했지만 뜻대로 밑줄 긋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던 어느날. 짜잔 자신이 그 밑줄 긋는 남자라며 나타났는데 기대했던 것처럼 시적이고 괴팍한 천재적 중년이 아니라 다소 소심하고 젠틀하고 배려심있는 평범한 학생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크게 실망을 하고는 돌아선다. 여기까지가 초중반의 내용이고 이후에 잔잔한 반전과 반전이 계속되면서 결국 콩스탕스의 사랑이 진행되는 이야기다.
천진난만한 스물 다섯 살 싱글 여성의 변덕스런 사랑의 심리를 어쩌면 이토록 사랑스럽고도 솔직하게 그려놓었는지 만족스런 결말임에도 너무 짧아 작가를 살짝 원망할 뻔했다. 한국어판에 붙이는 서문부터 평이한 듯하면서도 참 맘에 들었는데 다른 책은 번역된 것이 없음에도 20년째 절판되지 않고 계속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어줘서 기특하다고나 할까 하는 기분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 작가지만 개성넘치는 캐릭터 드리븐의 유쾌한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결코 실망하지 않늘 작품이다. 가독성도 좋아서 정말 술술 읽히고 여러 문학 작품을 매개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많은 소설들의 일부를 엿볼 수도 있다 특히 로맹가리는 콩스탕스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니 모아둔 책에서 한권 꺼내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