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귄의 초기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은 굉장히 오래된 책이지만 시공사에서 재출간되면서, 표지가 사람 마음을 홀랑 앗아간다. 2004버전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영문판 표지도 오래돼서 별로 읽고 싶지 않게 만드는데, 이 책 실물로 보면 더욱 예쁘다. 단편집으로 6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10여년 동안 출간된 단편을 작가 스스로 선택한 선집이다. 각 단편마다 해당 작품에 대한 작가의 말이 첨부되어 있어 무엇보다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특히 젊었을 때 쓴 초창기 단편집이라 작은 이야기 속에 담긴 거대한 메시지와 대담한 이야기 구성이 매력적이다.
사실 르귄의 작품이 그렇게 술술 잘 읽히는 편이 아니다. 이 소설들에 비하면 몇달 전 나온 에세이 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심심하리만큼 평이한 문장에 속한다. 첫 작품 <샘레이의 목걸이>를 읽었을 때 가슴에 뭔가 쿵 하는 게 느껴졌는데, 나중에 이 이야기를 토대로 헤인 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이 탄생할 거였다는 걸 이 소설을 쓸 때 작가가 알았을까 궁금하다. 그래서, 이 단편이 남긴 아쉽고 마음아픈 여운이 다소 풀리기를 기대하며 헤인 시리즈 첫 편인 <로캐넌의 세계>를 읽었는데, 결론은 더욱 아쉬웠다. 얘기를 만들자면, 샘레이가 목걸이를 찾아 돌아온 그 충격적인 순간부터 얼마든지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을 텐데, <로캐넌의 세계>에서 샘레이는 이미 그 목걸이를 자신의 시누이인지, 딸인지에게 맡긴 채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마음을 온통 흐트러놓고, 자꾸 그 작은 단편 속의 이야기 속으로 향하고 집착하게 만드는 <겨울의 왕>을 읽고는 책을 잠시 덮고 여운을 즐기기로 했다. 르 귄의 작품을 읽으면 판타지 SF라는 쟝르에 가두기엔 너무 아쉬운 다채로운 색깔의 문학적 세계를 발견한다. 단편들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다채롭고 역동적인 서사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산문을 통해 전달되고, 섬세한 배경 묘사는 독자를 책과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썼지만, 매번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고, 그 중 첫번째로 원고료를 지급받은 소설이라는 설명도 있고, 소설의 결말에 등장한 인물이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의 주요 인물이 되기도 했다는 각 단편의 앞에 들어있는 여러 설명은 더없이 소중하다. 특히 <겨울의 왕>에 대한 르 귄의 설명이 특별하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지칭할 때 남자와 여자를 he와 she로 구분해야 하는 영어권 문학의 애로 사항을 실감하게 된다. 르귄님 왈, <겨울의 왕>의 초기 집필 당시 양성인의 대명사를 남성으로 취급하여 he로 썼는데, 개정판을 내면서 she로 바꾸었다고. 그러고 보면 르귄의 영향력은 굉장하다.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 시리즈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나오는데, 모든 인물들이 she 로 지칭된다. 시리즈의 후반에서 더욱 중요한 사실이 드러나겠지만, 르귄이 집필 당시 남녀구분이라는 단단하게 굳어진 세상의 틀을 깨고 구분을 모호하게 한 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내 나이의 사람이 봤을 때 겨우 아이로 느껴지는 데뷰 초창기 나이의 르귄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그렇고, 당시 SF 문단의 생태계도 그렇고, 당연히 남성위주의 세계관에 익숙해져있었을 것이다. 또한 서구인의 언어에서 남과 여를 극도로 구분하는 문화 자체가 그와 그녀를 동시에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인칭대명사를 찾을 수 없는 언어 문화적 빈곤함(?)이 양성인을 지칭할 때 He를 사용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더욱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이 양성인 주인공이 왕이라는 사실인데, 왕이라는 최고 권력자의
명칭 역시 나뉘어져 있고, 최고 권력자는 남성적 명칭이 더 어울렸을 테니 왕에는 그녀보다는 그가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양성인의 체계가 뭔가 복잡해서 왕은 아이를 낳고, 왕의 행동 역시 어떤 섬세함을 연상시킨다. 어쨌든 명칭의 문제는 페미니즘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 같다. 만일 내가 이 소설의 초기 버전을 읽으면서 He와 매치되는 번역인 그 혹은 그남자로 아르가벤을 접했다면 이 소설에 대해 아주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다.
말했다시피 소설에 등장하는 행성에 사는 게센인들은 양성인이고, 이들은 <어둠의 왼손>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이 작품은 눈쌓인 왕국의 동화같은 풍경과,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광속 여행에서 발생하는 시간차, 통치와 반역, 출생의 비밀 같은 서로 잘 매치되지 않을 것 같은 키워드들로 설명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에게 납치되어 세뇌된 젊은 왕 아르가벤은 자신이 왕국을 멸망케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음을 알고, 아직 아이인 자기 자식 암렌에게 선양하고 대신에게 섭정을 맡긴 후, 자신은 올룰이라고 불리는 24광년 떨어진 행성으로 간다. 가는동안 우주선 안에서는 겨우 몇 시간의 시간만 흐를 뿐이지만, 각각의 행성에서는 24년이 흐른다. 아르가벤은 올룰에 12년간 거주하면서 자신의 아이가 왕국을 슬기롭게 잘 통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가 다시 겨울 행성으로 돌아갔을 때 자식은 늙고 폭군이 되어 왕국은 멸망의 위기에 서 있지만 자신은 여전히 패기넘치고 젊은, 왕국을 구할 유일한 인물이다. 사람들은 아르가벤을 알아보고 다시 반역을 꾀하여 아르가벤을 옹립하고자 한다. 늙은 왕이자 자신의 딸(아들)의 목을 베는 젊은 왕. 얼마나 아름답고 비극적인가.
이렇게 쓰니 스토리 구조가 그리 복잡하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풍성한 은유와 아름다운 시적 판타지 사이를 넘실거린다. 소설의 구조는 몇몇 개의 스냅 사진을 설명하는 식으로 띄엄띄엄 시간을 점프하고, 그 빈 시간의 공백들은 더욱 많은 상상과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젊은 엄마(아빠)와 늙은 딸(아들)이라는 반전된 구조. 아르가벤->암렌->아르가벤->암렌으로 순환되는 통치자의 이름이 암시하는 영원한 부모-자식 간의 반역과 선양 구조는 더욱 깊은 사색과 추리 속으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