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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첫 몇 페이지에는 이미 일어난 주요 사건의 끝에서 볼 때 오랜 기간 고통받은 인물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궁금하게 하는 현재가 있다. 읽기도 전에 알아버린 쌍둥이의 사연은 거대한 공상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의 한 장이 펼쳐지던 23년 전에 시작된다. 대의를 품은 그 큰 역사의 이면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큰 신보다 하찮은 아주 작은 신들이 있다. 엄마가 나를 조금 덜 사랑하게 되는 작은 사건들, 개구장이 쌍둥이들의 작은 말썽들, 그리고 큰 사건 속에 강요된 어떤 타협.
우연은 없었다. 우발적인 것도 없었다. 노상강도도 개인적인 보복도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422
에스타와 라헬은 쌍둥이다. 수 분을 차이로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들은 쌍둥이 임이 의문스러울 만큼 외형과 성격이 다르지만, 둘 사이에는 둘이 함께 하나로 느끼는 하나 된 정체성이 있다. 그렇게 둘이서 하나 같은 서로 다른 남매는 23년 만의 재회한다. 재회는 일방적이다. 에스타는 말을 잃었다. 그는 라헬을 보지 않고, 존재마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 시작점에서 저자는 하얀 소녀(백인)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패 하나를 보여준다. 인도 사회에서 백인이라는 특권적 존재와 그것의 죽음은 당연히 그 죽음과 관련이 있든 없든 많은 인도인들의 책임과 비극적 형벌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소녀의 죽음과 함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진 에스타(남)는 천천히 말을 잃어갔고, 젊지도 늙지도 않은 서른 한 살에 다시 마을로 돌려보내졌다. 낡은 저택과 함께 스러진 옛 가문의 영화를 접수해서 살고 있는 그들의 고모는 돌려보내진 에스타를 책임지라며, 이혼 후 홀로 이 일 저일을 전전하는 쌍동이 여동생 라헬에게 연락한다.
에스타는 어디에 있어도, 배경에 녹아들어 투명한 존재와도 같아서, 그와 한 방에 있다는 사실을 한참동안 눈치채지 못한다. 그가 있음을 알았더라도 구고 전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더욱 어렵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작은 공간만을 차지했다. 어째서 말을 잃은 걸까. 엄마가 기차를 태워 6살 된 꼬마 아이를 홀로 보내는 장면이 플래시백 된다. 죽은 소녀는 외사촌, 아이들의 아빠 역할을 해왔던 외삼촌 차코의 딸이다. 그 소녀의 죽음이 소녀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하지만 대체 여섯살 짜리 아이가 어떻게 아홉살 자리의 죽음과 관련 있게 될지 읽을 수록 더욱 궁금한 상태로 몰고 간다. 그래서 책을 놓기가 어렵다.
일단 찾아온 정적은 에스타 안에 머무르며 서서히 퍼져나갔다. 정적은 머리에서 뻗어나 늪 같은 두 팔로 그를 감싸안았다. 정적은 원시의, 태양의 심장박동 리듬으로 그를 얼러주었다. 정적은 흡반 달린 촉수들을 슬그머니 뻗더니 그의 두개골 안쪽을 따라 살금살금 움직여 그의 기억의 언덕과 계곡들을 빨아들이며 오래된 문장들을 몰아냈고 이를 혀끝에서 털어냈다. 정적은 사고를 묘사하던 어휘들을 그의 생각에서 벗겨냈고, 생각은 그렇게 벗겨진 채 벌거숭이로 남았다(26)
이야기의 시작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쌍둥이 엄마 암무의 연애와 결혼과 알콜 중독과 폭력. 거기까지만이었다면 쌍둥이들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지 모른다. 아버지 바바는 알콜 중독으로 플랜테이션 매니저에 해고될 상황에서 은밀한 제안을 받는다. 딜의 대상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쌍둥이들의 엄마 암무다. 암무는 자신이 자란 케랄라 주의 아예멤넨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전혀 딜레마일 수 없다. 아무리 힌두 사회라도, 아무리 ‘친영을 한’ 고결한 집안이라도, 남편이 자기를 팔아, 직장을 유지해서 아이들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매일 때리는데 어떤 다른 대안적 선택이 있을 수 있나. 학대에 지쳐, 여성차별적 전통을 자랑스레 지켜온 지역 유지의 친정으로 암무는 아이들을 끌고 데려온다. 이미 친정의 대저택에는 캠브리지에서 공부하다 영국인 아내와 결혼/이혼 후 돌아온 차카도 아예멤넨의 대저택에 돌아와 있다.
어떤 상실이 쌍둥이 중 한 사람의 말을 잃게 하는 동안 쌍둥이의 다른 한 쪽, 라헬은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냉담하다. 라헬을 사랑해서 결혼하고 미국으로 데려간 전남편은 그녀가 바라보는 벽 너머의 세계를, 그 공허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일 저일을 전전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 라헬이다. 라헬과 에스다는 같은 날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가졌고, 그럼에도 결국 이 둘을 하나로 잇는 깊은 상실감이 있다.
그는 어딘가에서는 라헬이 떠나 온 나라 같은 곳에서는 여러 가지 절망이 서로 앞을 다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절망은 결코 충분히 절망적인 수 없음을. 한 국가의 거대하고 난폭한, 휘몰아치며 밀어붙이는, 우스꽝스러운, 미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적인 혼란이라는 성지 옆에 불시에 개인적인 혼란이 찾아오면 뭔가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큰 신이 열풍처럼 아우성치며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자 작은 신(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사적이고 제한적인 ) 이 스스로 상처를 지져 막고는 무감각해진 채 자신의 무모함을 비웃으며 떨어져나갔다. 자신의 모순을 확인하는 일에 익숙해진 그는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정말이지 무심해졌다(35)... 한쪽 쌍둥이의 공허는 다른 쌍둥이의 침묵의 또 다른 버전이었음을(36)
이 모든 이야기의 직접적인 발단은 차카의 전처와 딸아이를 인도로 초대하면서 시작된다. 전 가족이 그들을 환영하기 위한 ‘연극’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차안에서, 기차 신호대기 중 대규모 혁명 시위단과 마주쳐 일촉즉발의 위기와 고모할머니를 향한 어떤 모멸의 순간을 맞게 되는데, 이 때 이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는 불가촉 천민인 벨리타의 모습을 아이들이 발견한다.
벨리타.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1940년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데, 이 카스트 계급에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 집단이 있다. 그들은 종교로부터도 버림받아 경전을 읽을 수도 없고, 자기 발자국을 밟지 못하도록 뒤로 걸어가면서 비로 발자국을 쓸고 가야 할 만큼 분리되어 있다.
1960년대 인도의 남부, 케랄라라는 주가 배경인데, 유독 이 케랄라에서 공산주의가 득세했다. 공산주의가 득세했음에도 불가촉천민을 향한 천대와 멸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을까. 일본의 부라쿠마나 우리나라의 백정 같이 변혁과 개방 속에서 사멸된 계급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1억이 넘는 인구가 차별과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손으로 뭘 잘만들고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좋은 벨리타는 할머니의 공장에서 인정을 받는데, 쌍둥이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벨리타와 잘 지내고 있다. 쌍둥이들에게 벨리타는 엄마(암무)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가정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분열된 개인이 모여사는 가정이지만,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살던 가족들은 외삼촌의 외국인 전처와 백인 소녀는 모두에게 각자 다른 이유로 불편한 존재지만, 그들에게 백인이 어떤 존재였던가. 겉으로는 끝도 없는 환대를 펼친다.
작은 균열과 이질감 속에서 사건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돌려보내지고 다시 돌려보내지고 또 돌려보내진 에스타가 어떤 거대한 역사에 의해 말을 잃게 되었는지, 플래시백이 천천히 23년 사연을 천천히 비추기 시작할 때, 그 23년간 계속된 상실의 중심에는 하얀 아이의 죽음보다 더 큰, 역사가 있다. 그 죽음이 역사가 되기를 부인하기 위해 아이들의 두려움이 동원되고, 아이들의 미래가, 아이들의 트라우마가, 그리고 아이들의 인생이 저당잡힌다. 하지만 그 하얀 아이는 아예멤넨의 대저택에서 함께한 짧은 십여일동안 외할머니와 고모할머니, 이혼한 외삼촌, 이혼한 엄마와 쌍둥이 아이들이 하녀와 함께 살아가는 저택에서 세상의 중심이 된다. 하얀 아이의 죽음이 건드린 역사의 귀퉁이가 지난한 역사를 조금 무너뜨렸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것이 보상이 보상이 될까. 상실에 대한, 말을 잃은 것에 대한, 그리고 무심함에 대한 보상이?
마르크스 혁명, 대지주와 기업. 이 말도 안되는 모순된 가치들을 함께 실현하고 있는 뚱보 외삼촌은 전처의 방문을 국가 대표 트로피마냥 자랑스러워하고, 남편의 폭력에 익숙해져 그걸 사랑으로 알고 있던 있던 맘맘무가 어느날 폭력의 아버지의 손을 뒤로 꺾은 그 아들에게로 애정의 대상이 넘어간 후, 영국인 전처의 방문에 질투를 발산하고, 아이들은 더욱 말썽이다. 이런 정신적 환대를 해나가기에 지친 암무는 어느날 아이들과 벨리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 본다.
그 깃발을 높이 들고 분노로 팔근육이 불끈 솟았던 사람이 그였기를 바라게 되었다. 주의 깊게 쓴 쾌활함이라는 가면 아래에 그녀가 너무나도 격분하는 독선적이고 질서정연한 세계에 대항하여 살아 숨쉬는 분노가 감춰져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녀는 그 남자가 벨리타였기를 바랐다( 244)
암무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부모의 기업을 말아먹고 계신 기업인 남동생의 모순된 태도와 세상의 부조리를 가장 직관적으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 시대의 여성이 깨어있어봤자 뭘하겠는가. 시니컬한 대화들은 통통튀며 인도 사회의 미세한 단면을 바라보게 만들지만, 역시 클라이맥스는 사랑과 욕망이 분출되는 순간이다. 소설 한 권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되었지만, 저술활동은 사회활동가이며 사상가로서 주로 활동하는 저자의 이면에 이런 숨죽여 읽게 만드는 고혹적인 장면이 있다. 더욱 더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벨리타
몸에는 동전만한 햇빛들이점점이 춤추는 가운데 고무 나무 그늘에 서서 딸을 팔에 안은 남자가 고개를 들어 암무와 눈길이 마주쳤다. 수 백 년의 시간이 덧없는 한 순간으로 완결되었다. 역사는 방심하고 있던 곳에서 허를 찔렀다 오래된 뱀이 허물 벗듯 벗겨졌다. 오랜 전쟁의 그 흔적, 그 상처, 그 흉터와 뒤로 걷던 나날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 빈자리에 어떤 독특한 기운이 감지할 수 있는 빛나는 무언가가 강에서 물을 보듯 하늘에서 태양을 보듯 분명하게 보였다.더운날 열기처럼, 팽팽해진 낚싯줄에서 느껴지는 물고기의 세찬 끌어당김처럼 분명했다. 너무나 명백히 있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245
암무
자라면서 암무는이 차갑고 계산적인 잔인함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부당함을 용서하지 않는 고결한 판단력을, 그리고 ‘누군가 큰 사람’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해온 ‘누군가 작은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고집스럽고 무모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다툼이나 대립을 피하기 위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런 것을 찾아 뵙고 어쩌면 즐기기까지 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252
필라이 동지 - 차코
궁핍한 환경이 자신에게 차코를 제압하는 어떤 힘을, 혁명의 시기에는 아무리 옥스포드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도 절대 맞설 수 없는 그런 힘을 부여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K.N.M 필라이 동지)는 궁핍을 총처럼 차고에 머리에 겨누었다 379
하지만 동지, 그들을 대신해 동지가 혁명을 시작할 수는 없어요. 자각시킬 수만 있을 뿐이죠. 그들은 그들만의 투쟁을 시작해야 해요. 그들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요. 385
이렇게 그는 요리용 합성식초의 상표 계약을 따내고서 교묘히 차코를 ‘전복시키려는 자들’의 투쟁 계급에서 ‘전복시킬 대상’이라는 믿을 수 없는 계급으로 추방 시켰다 385
죽음에 이르게 한 ‘합법적’ 폭력. 사랑의 댓가
쌍둥이는 너무 어려서 이들이 역사의 심복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다. 계산을 분명히 하고 역사의 법칙을 깬 사람들에게서 벌금을 걷기 위에 보내진 자들일 뿐이다. 원초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완전히 비인간적인 감정에서 행해진 일일 뿐이었다. 이제 시작 단계인, 아직 인정되지 않은 두려움-자연에 대한 문명의 두려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 힘없는 자에 대한 힘있는 자의 두려움에서 생겨난 경멸감. 421
우연은 없었다. 우발적인 것도 없었다. 노상강도도 개인적인 보복도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422
벨리타
그들의 작품이, ‘신’과 ‘역사’에게, ‘마르크스’에게, ‘남자’에게, ‘여자’에게, 그리고 머지않아 아이들에게 버림받는 작품이 접혀진 채 바닥에 놓여있었다 반쯤 의식이 있었지만 움직이면 없었다424
자신들이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었다는 각자 나름의 확실한 인식으로 세 사람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442
자신의 소멸이 유일한 출구인 터널에 들어서려 한다는 것을 그가 알았더라면 돌아섰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어쩌면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454
암무가 어둠 속에서 침실 문에 기대섰다 다시 저녁 식사 자리로 돌아가기 싫었기에.하얀 아이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유일한 광원인 듯 그 주위를 맴도는 나방처럼 대화가 맴도는 그곳으로. 그 대화를 한 마디라도 더 듣게 된다면 자신이 죽을 것만,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만일 1분이라도 테니스 트로피 나도 받은 것 같은 차코의 자랑스러운 미소를 차만 해야 한다면 혹은 만만치가 발산하는 그 성적인 질투의 암류를 느끼게 된다면 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