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서버 - 윈십 부부의 결별 외 35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9
제임스 서버 지음, 오세원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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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술집에서 만나 책 얘기를 한다. 여자는 추리물 매니아인데 자신이 어제 책방에서 추리소설인줄 알고 잘못 사서 읽은 게 맥베스라고 하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중고딩들이나 읽는 고리타분한 책을 왜 추리소설 문고판과 같은 사이즈로 만들었느냐는 거다. 재미있었냐고 남자가 묻는데, 여자가 딱 잘라 재미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엉뚱하고 기발하다.



“전 잠깐이라도 맥베스가 왕을 죽였다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요.”



아무리 단편이지만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몇 줄도 안읽고 당황해 하는 사람은 책 속의 남자 뿐이 아니다. 여자의 확신에 찬 대답에 독자 역시 황당스럽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여자는 한 마디 덧붙인다. 아내도 그 일에 연루되지 않았을 거라고. 물론 그 두 사람이 가장 의심스럽기는 하겠지만 그 둘은 덩컨 왕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여자의 말이다. 



탐정소설의 매니아인 이 여인은 탐정 소설의 규칙을 잘 알고 있다. 남자는 황당해서, 그럼 누 누 누가,..  이러고 있는 사이 여자는 아 정말 모르겠느냐고, 세계적 대작가인 셰익스피어가 누가 그랬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재미없는 그런 책을 썼겠느냐는 거다. 세계적으로 햄릿이란 인물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거의 없으니 맥베스 역시 파악하기 쉬운 인물일 리가 없을 거란다. 



맙소사. 탐정 소설만 읽는 여성은 맥베스를 덩컨 왕 살인 사건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연쇄 살인 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리뷰에도 썼지만, 대본에는 맥베스가 직접 덩컨 왕을 찌르는 장면이 명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셰익스피어는 살인 전의 심리와 살인 후의 심리를 대사와 암시를 통해 그의 살인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으므로 독자가 그것을 모를 수는 없다. 더욱이 대부분의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맥베스의 내용을 대략 알고 있기 때문에 과정과 대사의 디테일에만 관심이 있지 어떻게 죽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시 맥베스 희곡으로 뒤져보고, 어떻게 이 여인이 덩컨왕의 살인이 맥베스 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게 가능한지 살펴보자.


마녀들의 왕이 될거라는 예언을 전하는 남편의 편지를 읽으며 동시에,  살해를 결심하는 맥베스 부인은 ‘사악한 생각을 돕는 악령이여, 이리 와서 나의 여성성을 제거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무시무시한 잔인함으로 채워 다오.’라고 결심을 굳히고, 자신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 마실 술에 약을 탄다. 모두들 깊이 잠든 밤, 홀로 깨어 있는 맥베스는 부인이 준비해둔 단도를 발견한다. 셰익스피어는 피묻은 칼을 보고, 자신이 해야 할 살해와 양심 사이의 갈등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에만 촛점을 맞출 뿐이어서, 직접 찌르는 장면이 어디였는지 기억하기 힘들었는데,  찾아보면  없다. 칼로 찌르는 장면은 없다. 칼을 대하는 그의 독백에 자신이 저지르려는 잔인한 행위에 대한 불길한 예감과 한탄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독백이 끝나면 바로 장면이 바뀌고 2막 2장에서 부인에게 돌아온 맥베스가 해치웠다고 말한다. 영어로 해치웠다가 어떻게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술집에서 맥베스를 토론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이 해치웠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없다.  맥베스는 모든 일을 주관하는 아내에게 내가 직접 죽였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 자기가 본 환영들과 불안감. 아내가 보기에 남편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손에는 피가 묻어있고, 찌른 단도가 들려있었을 것이다. 아내는 손에 묻은 증거를 물로 씻으라고 시킨다. 게다가 단도들을 도로 가져가서 피를 잠든 신하들 손에 묻혀놓으라고 시키는데, 오 무서워 나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야 하니 , 저런 한심한 인간이 왕이 어찌되나 싶어서 쯧쯧거리며 단도를 가지고 나간다. 돌아와서 독백에는 이제 자신의 손도 붉어졌지만 남편만큼 두려움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는 않았다고 손을 씻자고 얘기한다.(그녀는 후에도 손을 반복해서 씻는다.)



이게 다다. 머리 속으로는 분명 맥베스가 찌르고 부인이 피를 바르고 하는 장면이 마치 본 것처럼 떠오르는데, 이것은 모두 대사 속에만 있을 뿐 실제로 장면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것이다. 음모론자들은 믿을 수 밖에 없는 수천 개의 증거보다는 확실하지 않은 의심 몇 가지로도 세상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 이 명백한 맥베스의 살해 계획과 이후에 계속되는 암시와 대사로도, 의심을 해소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없는 틈을 제임스 서버는 발견한 것이다. 다시 제임스 서버의 소설로 돌아오면, 여자가 의심하는 사람은 맥더프다. 처음엔 뱅코우를 의심했는데, 이야기 속에서 뱅코우는 맥베스와 함께 무훈을 세우고 마녀가 예언하는 걸 함께 목격한 자다. 훗날 그의 아들들이 왕권을 이어갈 거라는 예언도 함께 했기 때문에 역시 광기에 휩싸인 맥베스의 다음 희생물이 된다. 이 일을 두고 여자는 교묘한 대목이었다고, 추리법칙상,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범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언제나 두 번째 희생자가 된다는 점을 치켜세운다. 



아버지가 살해된 것을 알고 자신들의 안위마저 위태로움을 직감한 두 왕자 맬컴과 도널베인이 아버지의 살해자로 지목되어 도망가는데, 남자는 혹시 이들이 의심스럽지는 않냐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서도 이 추리 매니아는 이론이 있다. 살인은 극중 비중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거다. 나 역시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전에 히가시노 게이고 였던가 어떤 장편 소설을 읽는데, 비중 없는 인물이 혜성처럼 비밀을 잔뜩 들고 등장해서 범인이 되어 마무리되는 경우다. 이 여성이 말하는 잡배다. 물론 중간 중간에 한두번 언급이 있기야 했겠지만, 스토리 전체에 녹아있지 않고 비중이 없던 사람이 범인인 경우, 독자들은 이야기의 핵심에서 소외된다. 



놀란 남자는 다시 책을 읽겠다고 하고 그녀와 헤어진다. 다음 날 새로운 시각으로 그러니까 추리 소설의 시각으로 맥베스를 다시 읽는다. 맥베스를 다시 읽은 남자는 그녀를 찾아와 더욱 황당한 주장을 한다. 주의깊게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조금은 뚱딴지 같은 대목이었는데, 2막 2장에서 맥베스 부인이 남편의 살인을 돕기 위해 잠든 사람들 옆에 단검을 빼놓아두었다고 독백하는 장면에 있다. 맥베스의 부인은 잠든 모습이 아버님을 닮지 않았던들 자기가 틀림없이 그 일을 직접 했을 거라는 거였는데, 이 남성은 이 대사를 보고, 이 잠든 남자가 사실은 덩컨왕이 아니라 아버지(맥베스의 아버지 혹은 맥베스 부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버님을 닮은 게 아니라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즉, 잠든 덩컨 왕이 ‘아버지’를 닮은 이유는 그가 덩컨 왕이 아니라 아버지였기 때문이며, 덩컨 왕을 죽인 사람은 딸을 왕비로 만들고 싶은 아버지였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놀랄만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면서도 반박한다. 이야기에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범인이 될 수는 없다는 건데, 여기에 대해서도 남자는 설명이 있다. 2막 4장에 (로스가 늙은 남자와 등장)이라는 지문이 있는데, 이 노인이 누구인지는 책에서 한 번도 밝혀진 바가 없다. 바로 이 사람이 딸을 왕비로 만들고 싶어 하는 늙은 맥베스라는 것이다. 이걸로도 충분치 않다고 여성이 반박하자, 남자는 예언을 한 세 명의 마녀들 중 한 명이 변장한 사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내민다. 여자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둘은 다음 번엔 햄릿을 분석해볼 작정이라고 한다.


현대 문학에서 선정한 세계 문학 단편집들이  대부분 그런 것 같은데, 제임스 서버의 단편들 역시 개성이 뚜렷하다. 카투니스트로도 활동했던 그의 단편 중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되다는 2번이나 영화화 되었다. 카툰 그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물의 특징을 포착하고, 그것을 조금 과장되게 그림으로써 익살과 유머를 전달한다. 서버의 단편들에서는 물체의 시각적 특징 대신 캐릭터의 특징을 행동과 대화로 생생하게 포착한다. 복잡한 서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가진 개성 때문에 생기는 특별한 상황을 그의 단편들은 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추리소설 매니아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다른 소설들 역시 짧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캐릭터의 특징들 때문에 잘 읽히고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져서 헤어지기 아쉬운 인물들이 된다. 



35개의 단편 중 [쏙독새, Whip-poor-will], [아홉 개의 바늘], [윈십 부부의 결별], [에마 인치, 떠나다], [햄버거 몇개] 등이 인상적이다. 특히 쏙독새는 라임이랑 이런 게 잘 맞아떨어지고, 웃픈 내용의 결말이 충격적 비극으로 끝나기에 잊기 전에 다시 한 번 내용을 정리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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