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책, 문예, 펭귄 세 개 버전의 맥베스를 소장(혹은 대여)하고 있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 읽은 것이 펭귄 판본인데, 1623년 <이절판>이라고 불리던 셰익스피어 전집에 최초 등장한 판본을 사용한다. 어딘가 생략된 듯 너무 빠른 스피드가 전개 때문에 열책 버전으로 갈아탔는데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행의 디테일이 생략된 빠른 스피드 때문에 제임스 서버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라는 작품이 생겨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출판사 별로 번역 텍스트는 꽤 달랐지만, 내용상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큰 특징만 보면, 열책은 원어의 운문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운문적 형식을 그대로 채택했. 줄바꿈을 자주하기 때문에 열악한 이북 읽어주기 기능으로 듣기에 더 용이하다.  펭귄 버전의 특징으로 판본과 작품에 대한 설명이 텍스트보다 많을 정도로 풍부하다. 텍스트의 영문적, 학문적 분석을 요구하는 독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 유용한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우는 대충 읽다  너무 길고 지루해서 술렁술렁 넘겨버렸지만, 그중 유용한 내용이 있었는데, 이 텍스트의 유래에 대한 정보다. “셰익스피어는 라파엘 홀린즈헤드(Raphael Holinshed)의 『연대기』 제2권에서 맥베스와 덩컨 왕, 그리고 운명의 자매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냈다.”[1] 이 때문에 레이위키 영문판이랑 두루두루 뒤졌지만, 이 서문보다 더 자세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이 홀린즈헤드 연대기에 맥베스의 덩컨왕 살해와 집권 후 10년에 걸친 집권기의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고, 셰익스피어는 그 평면적인 역사 서술서에서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 광기를 포착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열책 버전에서는 판본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펭귄 버전보다 텍스트가 조금 더 이해가 편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알고보니 대사 자체보다는 지문이 보다 상세하게 추가되어, 상황에 대한 이해가 쉬웠다고 할 수 있다. 맥베스가 왕으로 추대되어 잔치를 여는 동안, 자객들을 시켜 뱅쿠오를 살해했는데, 방금 전에 자객을 통해 뱅쿠오가 죽어 묻혔다는 보고를 받은 후인데,  그가 만찬장의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뱅쿠오의 유령을 본 맥베스의 반응은 두 버전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펭귄판에서 유령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처리된 것과 달리, 열책에서는 하오체로, 영주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듯이 보인다. 뱅쿠오의 유령은 맥베스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터라,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 해도 영주들에게는 말이 안되고, 독자들에게는 둘다 말이 된다. 나중에 다른 책의 버전에서도 확인해봐야겠다.


(펭귄)

맥베스    누가 이런 짓을 하였느냐?
귀족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맥베스    유령아, 내가 했다고 너는 말하지 못하리라. 피투성이가 된 너의 머리카락을 내 쪽으로 흔들지 말거라.



(열책)

영주들  무슨 짓 말씀이십니까, 폐하?
맥베스  내가 했다고는 말 못 하오.    그 피투성이 머리칼을 내게 흔들지 마라.  



맥베스 부인이 그의 정신분열적 행동을 수습하려고 애를 쓰면서, 이이가 원래 좀 이상한 데가 있다는 듯 둘러대는동안, 맥베스는 뱅쿠오의 유령과 귀족들을 번갈아 가며 무의식적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뭔뜻인지 잘 모르겠는 부분이 나온다. 기껏 죽였는데 살아서 돌아다닌다면 무덤은 솔개의 창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과 솔개 위 창자가 우리의 무덤이 될 거라는 두 가지 다른 표현이 그것이다. 어쨌든, 시체가 돌아다니니 무섭다는 말인 거 같긴 한데, 불충분하긴 하지만 열책에는 설명이 붙어있다.



(열책)

맥베스  제발 저걸 보시오!    보라고! 보란 말이오! 봐! 저걸 어떻게 설명할 거요?    왜,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말도 해봐라. 납골당과 무덤들이 우리가 묻은 것들을   다시 내뱉는다면 앞으로 무덤들은 솔개의 창자로 만들어야 한다.(솔개가 시체를 다 먹어치우게 해야만 시체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라는 주석이 붙어있다.)



(펭귄)

맥베스 제발, 저기를 좀 보시오! 저것! 바로 저것! 저것 좀 보시오!─자, 어떻소? 뭐야, 무서울 것 없다. 네가 머리를 끄덕일 수 있거든, 말도 좀 해보거라. 만약 납골당이나 무덤이 우리가 한번 매장했던 것들을 다시 돌려보낸다면, 솔개의 위 창자가 장차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이다.


⟪맥베스⟫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맥베스가 왕을 시해하는 장면이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맥베스⟫는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심리 중심이다. 왕의 시해와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피비린내나는 암살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문학으로 따지면 장르문학보다는 오히려 순수문학에 가깝다고나 할까. 나는 이 두 장르의 분류를 전에 김연수의 책에서 읽은 대로, ‘어떻게’와 ‘왜’의 차이로 생각해 보았다. 즉, 사건을 모의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정확한 디테일들은 거의 모두 생략되어 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가 누군가를 죽였고, 그 일로 인해 파생되는 인간의 심리 변화에 보다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극이 집중하는 것은 죽인 사람, 죽음을 모의한 사람, 그리고  희생자와 목격자들의 마음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다. 


극중에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은데, 주석에 따르면 시해된 덩컨왕과 맥베스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형제 사이이고, 덩컨왕이 죽으면 덩컨왕의 아들 맬컴을 제치고 왕좌의 1순위가 맥베스였던 모양이다. 읽을 때는 주석을 생략하고 읽어서 세습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왕을 죽인다고 왕이 된다고 생각하는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주석을 보니, 예언을 인위적으로 실행하려는 맥베스와 그의 부인의 음모 정황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애초 계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언과 동시에 두 사람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실행된다. 맥베스 부인은, 남편이 숲에서 만난 그 기이한 예언에 대한 사건에 대해 쓴 편지를 읽으면서 동시에 시해 음모로 비약된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더니 편지에는 마녀들이 나를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분〉라고 인사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뿐인데, 그녀의 머리속은 왕의 시해 계획이 이미 착수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양심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남편의 이중적 가치관이다. 


“당신의 성정이 걱정입니다. 지름길을 택하기에는 너무 인정이 많으시지요. 당신은 위대해지고 싶어 하십니다. 야망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야망에 따르는 사악함이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시지만 고상한 방법으로 그리되길 원하십니다. 속임수는 쓰고 싶지 않아 하면서    속여서라도 얻고 싶어 하십니다. 위대하신 글램즈 영주여 ”[2]


이 때까지 맥베스는 무훈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덩컨왕이 가장 신뢰하고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인정많고, 착한 심성을 드러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야망을 꿰뚫어보는 것은 그의 부인 뿐이다. ‘속임수는 쓰고 싶지 않으나 속여서라도 얻고 싶어하는’ 맥베스의 '등떠밀려 살인'은 몇 번이나 주저되고 머뭇거려진다. 왕이 글램즈 영지에 묵기로 한 날이 바로 모든 사건이 일어난 그 날 당일임에도,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아차리고  빠른 결단과 과감한 실행력, 그리고 집요한 설득으로 맥베스를 설득시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맥베스의 아내다. 아내가 없었다면 맥베스 혼자서는 그런 일을 계획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한다. 


왕의 시해라는 거대한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의 심리는 서서히 전환을 맞는다. 유령을 보고 정신 착란적인 증세를 보일만큼 두려움과 후회와 불안에 떨던 맥베스는 그 불안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더욱 사악한 광기를 보이기 시작한다. 맥베스가 불안에 떨 때마다 부끄러운 줄 알라며 그래도 사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나무라던 맥베스 부인은 반대로 점점 자신의 손끝에서 풍겨나오는 진한 피냄새를 지우고 싶어한다. 강했던 마음은 잠재된 두려움에 의해 본성을 드러내고, 반대로 약했던 마음은 살인의 행위에 가속이 붙으며 점점 냉혈한으로 바뀌어간다. 이제 그들은 마음 편했던 옛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남편은 아내 없이도 음모를 꾸미고 왕좌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만한 요소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아내 역시 남편이 저지르는 수많은 광기의 살인을 느끼며, 더욱 더 진해지는 손끝에서 나는 피냄새에 매일 밤마다 촛불을 들고 다니며 손을 씻는다.


두 사람의 계획은 애초에 잘못되었다. 마녀들이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을 예언했을 뿐 아니라 동행했던 뱅코우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것도 함께 예언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왕의 시해를 계획할 때만 해도, 맥베스 부부의 관심은 맥베스가 왕이 되는 예언을 스스로의 음모로 실행시키는 것에만 있지, 마녀들이 함께 예언한 것 즉, 뱅코우의 자녀들이 왕위를 이어간다는 예언에는 생각이 도달하지 못했다. 자식이 없는 맥베스 부부에게 그들의 왕조 건설의 야망은 공허하다. “열매 없는 왕관”을 쓰고 “헛된 왕홀”을 손에 쥐고 있다(3막 1장)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가 받고 있던 존경과 찬사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헛된 왕권과 광기에 쌓여 계속되는 폭압, 그리고 지속적인 반란과 진압 뿐이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뱅코우의 자손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왕위를 찬탈한 중간 매개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광기를 체념적 무모함으로 이끈다. 


제임스 서버(Thurber)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를 읽다가 등장 인물의 디테일이 기억나지 않아 맥베스를 다시 읽었다. 전에도 어떤 책에서 맥베스 부인의 손닦는 부분의 심리가 굉장히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어서 읽었는데, 이번 서버의 책에서는 맥베스의 살인 그 자체를 추리 소설 독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내용이어서 누가 범인이니 아니니 하며 따지는 내용이라 좀 더 주의 깊게 읽었다. 과연, 살해하는 장면 그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추론이 가능하리라. 원래 계획은 서버의 단편 맥베스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리뷰하면서 맥베스 줄거리를 한단락만 추가할 계획이었는데, 마음대로 안되었다. 서버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는 워낙 흥미로와 별도 리뷰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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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럴 칠링턴, 러터, 맥베스 탄생의 배경과 그 숨겨진 의미, 멕베스,  펭귄클래식코리아 서문 (1쇄 발행일 2010년)
[2]  맥베스, 1막 5장,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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