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을 거꾸로 돌려 물리적인 나 자신과 만나야 한다는 조건을 뺀다면, 누구나 과거와 만날 수 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 둘은 닮은 듯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나는 어느날 수십년 전에 함께 기숙사에서 반년을 지냈던 대학 동창 한 명을 만났다. 그 애가 기억하는 나, 그 애가 묘사하는 어떤 순간 그애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긴 시간동안 친구의 기억 속에 저장되며 변형된 이미지와 묘사를 통해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낯설었다. 오랜 시간동안 변해온 지금의 나와 연결되고 결국은 어떤 본질이 그 안에도 지금의 내 안에도 있을 것이다. 


엠마누웰 카레르의 이 소설, 한달 내내 읽게되는 <왕국>의 초반 ⅓ 분량을 읽을 당시의 마음이 그랬다.  바오로와 루카가 등장한 이후 수도 없이 밑줄을 그었지만, 결국 내 얘기로 돌아와서 서두를 시작했다. 카레르처럼 나도 그러고 있다. 


이 책은 과거 나였던 그 젊은이와 그가 믿었던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충실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다면 시작은 어떨까. SF 작가 필립 K 딕의 뒷담화를 나누다가 한 말이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지적인 사람들이 기독교처럼 말도 안되는 것을, 그리스 신화나 도깨비들이 나오는 동화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때, 그러니까 기독교 탄생 초기에는 과학도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으니 그럴 수 있겠지만, 오늘날에 만일 어떤 신들이 백조로 변신한다던가 두꺼비에 키스하면 백마탄 왕자로 변신하는 스토리를 믿는다면 미친놈이라고 할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믿고 있어도, 미친놈으로 여겨지지 않고, 설사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대해주는 일들이 참으로 희한한 일들이라고 썼다. 


그는 이 책을 기획했고, 그러기 위해 그 희한한 기독교 세계의 믿음에 관해 취재하기 위해, 기독교 커뮤니티들과 함께 하는 크루즈 여행에 신청했다가 취소한다. 여기서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시전하시는데,  알고보니 작가 자신이 20여년 전에 열혈 기독교 신자였던 것. 그는 믿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대신 20년 전의 자기 자신을 찾는다. 자신이 수년간 매일 읽고 공부하고 암기하고 메모했던 수십권에 걸치는 자신의 노트와 대면한다. 믿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과 믿지 않는 현재의 자기 자신이 충돌한다. 그가 만나는 과거의 노트에는 훗날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그 날과 같이 종교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현재 그는 그때 바랐던 그 상태가 아니다. 그 점에 안도한다. 


나는 카레르가 글을 쓰는 방식이 첫번째는 솔직해서 좋다. 이 솔직함은 자기 자신을 후벼 파고 구멍을 뚫어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오랜 시간 단어를 조합해야 표현 가능한 지적인 솔직함이다.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 자아에 대한 자부심과 환멸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슬퍼 허무해 쓸쓸해 기분나뻐 이런 식의 빈약한 몇 개의 미리 만들어놓은 진부한 형용사 조합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발가 벗어 헤쳐보고 들이다 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리하여 그가 기획한 바오로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은 과거의 종교적 체험과 현재 그것을 반추하는 시간들을 인내심있게 읽어내야 하는 130쪽이 이후에야 시작하는데,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관련된 생각, 그리고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결국은 이것이 역사책이냐, 유사 역사책이냐, 혹은 개인적 체험을 담은 에세이냐, 혹은 바오로와 루카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냐 라고 그보다 더 많은 쟝르의 특징들을 말해도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은 카레르식의 저작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범주화하기를 좋아하고, 제목을 붙이기 좋아하고, 뭔가 정의하기를 좋아하니, 내식대로 이 책을 다시 정리해본다면 역사의 재구성 혹은 역사 소설을 위한 자료 조사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 역시 틀렸다. 핵심은 이 책 속에 종교의 기원을 찾는 역사적 탐구 이외에도 기록의 빈틈을 빼곡히 메운 무한 상상력이 레고 블럭처럼 촘촘히 기록의 틈새와,논리의 헛점을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오로의 자취와 루카의 자취를 따라간다. 고대 로마의 역사, 유대의 역사 속에서 네 개의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쓰여지고, 유대교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어떻게 유대인만 제외하고 전세계인의 종교가 되었는지에 대해 유추한다. 상상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상상인지 유추인지 이런 것은 내가 논할 문제가 못된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종교에 대해, 아니 기독교라는 종교를 대해 늘 의문을 품었던 여러가지 주워들은 사실의 기원에 대해 풍부한 단서를 제공한다. 성경과 성경이 쓰여진 당대 역사와 언어를 제대로 공부하고 거기에 충만한 종교적 체험까지 갖춘 저자가 분석한 텍스트를 통해 궁금했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주는 것은 물론, 종교의 탄생이라는 근본적인 과정까지 흥미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