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을 검색하면 국내문학에서만 134권이 나온다. 전집만도 을유출판사와 루쉰번역위원회 두 군데서 나와있다. 세계문학 세트에 포함된 대표작들은 <아큐정전>과 <광인일기>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중국 현대 문학의 창시자라고 한다. 루쉰 소설 전집을 출간한 을유문화사의 목차를 보면 3권에 걸쳐 총 33편을 출간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Q정전>은 열린책들로 읽었는데, <방황>은 문예출판사 버전으로 읽었다. 번역에 대해서는 개뿔 모르고, 옛스러운 문체가 작품과 잘 어울렸다. <축복>은 문예출판사 <방황>의 맨 처음에 수록된 단편으로 1924년 상하이에서 발간되던 <동방잡지>에서 최초로 발간되다고 적혀있다. 루쉰의 소설에선 만연된 폭력이 그림자처럼 사회 곳곳에 드리웠던 암울한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방황은 루쉰의 눈에 비친 사회 소외된 여성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을까. 여기 나오는 주인공은 다만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을 뿐, 게다가 자해를 하면서까지 죽은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려고 애를 썼던, 당대의 그 쓰레기같은 정절 관습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여성이지만, 결국의 사회와 관습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몇 번에 걸쳐 인생을 후려친 잔인한 운명 앞에 허물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그녀의 그 비극적 스토리가 아니다. 그녀의 비극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축복(祝福)은 '중국 강남 지방의 풍습으로, 매년 섣달그믐에 신령에게 제사를 올려 지난해와 내년 한 해의 풍년과 평안을 비는 의식 (주6 에서).'이다 이 지역의 축복은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로, 사람들은 상서롭지 못한 일을 입에 올리거나 해서는 안되며,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샹린 아줌마는 남자 못지 않게 힘이 세고 부지런하여 몇 사람의 몫을 했던 하녀로 화자는 축복을 지내기 위해 방문한 네째 아저씨 집에서 그녀에 대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에서 복신을 맞기 위해 온갖 정성과 예를 갖추고 한 해의 운수가 대통하기를 기원하며,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며 한껏 세밑 풍경에 동화되던 화자에게 우연히 마주친 샹린 아줌마와의 우연한 만남은 이제까지의 기분을 싹 잡치게 만드는 불편한 것이다. 한 때는 인부 몇 사람 몫의 일을 하고 아주머니에게도 큰 힘이 되었던 샹린아줌마는 지금 거지꼴이 되어 있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자 구걸을 할 걸로 알았던 그에게 거지꼴의 샹린 아줌마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사람이 죽고나면 도대체 영혼이 있나요?" 그는 당황한다. 화자와, 저자에게 귀신을 믿고 복을 빌고 하는 이런 풍습들은 척결해야 할 미개한 풍습이다. 당시 개화된 지식인들에겐 사회 구석구석 퍼져있는 척결의 대상은 귀신, 악습, 봉건 등의 추악한 것들이다. 화자는 축복이라는 대형 제사도 그러한 악습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 마을에서 그런 전통에 거스른 언행을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꺼려하고 내치는 쓰레기같은 존재가 된 샹린 아줌마의 이 물음에 화자는 당황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믿고 매달리는 귀신의 존재, 영의 존재에 대해 유일하게 의심을 품고 있는 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던중 다음날 넷째 아저씨가 화내는 소리에 듣는데, 나중에 아저씨가 화낸 이유가 샹린 아줌마가 죽었어서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사람들은 샹린 아줌마 개인의 삶과 죽음 그 자체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하다. 심지어 어떻게 죽었는지 물어도 그야 뭐 굶어죽었겠지 라고 하고, 언제 죽었냐 물어도 그야 뭐 어제 밤이 아니면 오늘이겠지 라며 그야말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죽은 것만큼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데 아저씨가 화가 난 이유는 '그 요망한 것이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 바로 이 때', 축복을 위해 준비하는 이 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 때, 죽음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는 이 어처구니 없는 역설보다는 수 년을 집에서 일하던 하녀의 죽음을 대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비정함이다.
그리고 나서 샹린 아줌마의 인생 사연이 펼쳐진다. 처음에 동네 사람 소개로 이집 하녀로 들어왔을 때에는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매사에 열심히 하고 잘해서 제사 준비도 직접 하고, 집안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는데, 어느날 시어머니가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와 그녀가 집에서 도망갔다며, 몇년치 월급을 챙겨 강제로 끌고 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샹린 아주머니의 남편이 죽고 난 후 시어머니는 그녀를 산골의 어느 총각한테 큰 돈을 주고 팔아먹기로 한 모양이다. 개화기 중국의 풍속으 잘 모르겠지만, 역사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여성에게 굉장히 불합리한 관습이 자리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밖에 잘 모르니, 그 때와 비슷하다고 친다면 남편이 죽으면 당연히 죽이되던 밥이되던 시집에서 먹고 살면 되었던 전근대적인 풍속과 달리 시집에서 죽은 아들의 아내가 정절을 지킬 가치마저 없는 그저 물건 같은 소유물이었을까. 아무튼 힘도 세고 몸집도 되는 샹린 아주머니는 세상 떠들썩하게 반항을 하며 산골짜기로 팔려 온갖 폭력 속에 강제 '시집'을 가고, 머리를 짓찧어 깨져 나가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상한 정절의 저항의 나날이 끝난 후, 아들을 낳고 행복한 몇 해를 지내지만, 남편은 장티푸스로 죽고, 아들은 늑대에 물려가 죽고 만다. 그렇게 혼자가 된 여자에게 죽은 남편의 큰아버지가 찾아와 집까지 빼앗아 갈 곳조차 없어진 처지가 되고 만다.
한편 샹린 아줌마가 척척 잘 해내던 일들을 새로 들인 하녀들이 제대로 못하고 밥만 축내자, 샹린 아주머니를 그리워하던 넷째 아주머니는 다시 수소문을 해서 그녀를 데려오지만, 눈빛도 전만 못하고,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다. 여기서 충격적인 것은, 샹린 아주머니가 자신의 사연을 그러니까 그 박복한 운명의 이야기를 스스로 소비하는 방식이다. 이 세상 천하에 아무도 없는 외토리인 그녀가 그토록 모진 시간을 보낸 것에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것에 위안을 삽고, 자신의 입지를 넓혀간다.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와 그 이야기 그러니까 강제로 시집간 이야기부터 아들이 죽기까지의 그 비극을 듣지만,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싫증이 났고, 더이상 그녀를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이 며칠에 걸쳐, 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곱씹혔다는 사실과, 진작부터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어 이제는 싫증과 멸시의 대상으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첫날밤을 저항하다 이마에 난 흉에 대해 말하고 다시 그것으로 사람들과 소통한다. 하지만 이내, 죽어 저승에 가면 두 남자 귀신이 자신 때문에 다툴텐데 그러면 누구에게로 갈 거냐, 두 조각으로 나뉘어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이웃의 말을 듣고 걱정에 빠진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더럽혀진 여자이므로 제사때 쓸 물건을 손에 댈 수도 없는 처지임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미풍양속을 어지럽힌 여자이므로 도움은 받되 절대로 제사에는 손을 담그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그래서 제사상에 올리는 모든 음식은 직접 해야지 안 그러면 정결하지 못해 조상께서 흠향(歆饗)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기에, 전근대적인 사회일수록, 그리고 작은 규모의 마을일수록 어려운 이웃을 돕고 이웃공동체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환상을 품기 쉬운데,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 작은 사회에서도 인간의 비정함은 도시적 삶과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보다 큰 도시에서라면 그저 작은 편견의 파편들로 흩어졌을 미신들과 함께 삶을 옥죄고 감옥을 만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 소설,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지켜보는 냉정한 시선만큼은 살인자의 시선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