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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평점 :
유현준 교수의 공간에 대한 철학, 건축과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동안 내가 여행을 하거나 거리를 걷거나 낯선 공간을 체험하면서 느낀 막연한 생각들을 제대로 설명해주었다. 그만큼 공감되는 게 많았다. 예를 들어 중소 규모의 도시에 가면 나는 늘 허름하고 좁은 골목길에 매료되곤 하는데 점점 그러한 공간들이 없어져간다. 남아 있다 하더라도 새로 지은 원룸촌이 지나다니기도 어려울만큼 빽빽하게 주차된 차들과 함께 원형을 잃은 낯선 공간으로 변한 모습에 안타까워하곤 한다.
왜 골목길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었는데 나는 그것이 일종의 향수일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런 이유도 크다.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아이들이 골목길의 정겨움을 알 턱이 있을까. 저자의 설명은 다르다. 공간에 속도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이론은 저자가 직접 연구한 이론이라 여겨지는데 어렵지않은 단순한 계산 방법이지만 도시 공간의 걷고싶은 길에 대한 많은 단서를 준다.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공간을 체험하는 거다. 우선 이걸 먼저 생각해보자. 뭘하든 수동적인 행동보다 능동적인 활동이 훨씬 재미있다.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 역시 수동적인 행위가 될 수도 보다 능동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공간의 구성에 따라 결정된다. 만일 어떤 공간이 보행자에게 다른 길로 갈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똑같이 생긴 변함없는 담벼락으로만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면 스스로 걷고 있다 해도 걷는 행위 자체에 선택귄도 없고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도 변화가 없어서 내가 걷는다기 보다는 길이 나를 태우고 가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반면 골목이 많고 단위당 출입구 수가 많으면 계속해서 보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이벤트의 수가 풍부해지면서 보행 자체는 걸으면서 흘끔거리거나 들러서 뭔가를 산다거나 혹은 코너에서 턴을 한다거나 하는 수많은 이벤트를 만들수 있고 그러한 작은 공간의 조밀한 연결이 비행자의 다채로운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형건물들이 밀집한 곳에 사람들이 걷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의도의 마포대교 오른쪽 편 산업은행이 있는 주변엔 대규모 건물이 엄청난 수의 사무원들을 아침마다 깔대기로 흡입하듯 거리의 출근자들을 빨아들였다가 저녁이면 뱉어낸다. 점심 시간에는 사무원들로 활기찬 이 곳이 퇴근 시간이 지나면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싶을만큼 인적이 드물다. 그러나 다리 하나만 더 건너가면 자연스레 형성된 구도심 상가 지역에, 지저분한 간판을 달고, 작은 술집과 밥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은 달라진다. 사람들로 붐벼나는 것이다.
유현준 교수는 공간의 효율성을 위해 어쩔수 없이 선택한 큰 덩치의 고층 대형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걷고 싶은 거리 더 나아가 살고 싶은 도시 보러 오고 싶은 거리를 만들려면 필요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잘 디자인된 국내외 건물들의 예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여행이나 책을 통해 익숙한 건축가, 익숙한 건물들이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컨셉에 잘 조화롭게 어울려,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피터 춤토르, 안도 다다오, 프랭크 로이드 등등 건축물을 계획할 때에는 단지 외형적인 디자인 뿐만 아니라 그 건축 공간 내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도 고려되어야 하는데 때로 외형적으로만 예쁘게 만들려고 하는 크리에이티브 아트 디렉터 얘기도 나온다.
저자는 또한 19세기 이전 건축이 왜 오늘날의 건축에 비해 아름답다고 느끼는가에 대해 이런 견해를 가진다. 산업화 이전의 건축은 당연하게도 건축 재료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하다보니 주변경관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비슷한 재료로 만들어진 주변에 통일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스나 발칸반도의 해변 경사진 마을의 새하얀 집들이 대단한 건축물이 아님에도 유명 관광지가 된건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집들이 통일성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서울의 언덕위에 지어진 달동네 주택들은 비록 예쁘자는 않지만 작은 집들과 골목들로 충분히 사람과 사람간의 거리를 좁혀준다.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그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엄마들이 함께 하던 사회적 기능을 하던 골목이라는 공간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공원이 대신하게 되는데 이런 개념은 르 코르뷔지에의 머리속에서 나온 개념을 흉내낸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이 도심속 공원을 제공한다고 광고의 판타지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게 잃는 것이 바로 집을 찾을 때 걷던 길과 골목으로 이제는 엘리베이터와 숫자와 복도가 이를 대신한다. 저자의 이런 생각에 너무 공감이 되어 울컥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오래전 새벽마다 커다란 스피커로 새마을 운동 노래를 틀어놓고 마을 사람들을 깨우며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그렇게 정겨운 우리것들을 다 때려없애자던 박정희 정권이 끝난 후에도 옛 것 특히 건물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이를 갈고 없애는데 혈안이 되어왔다. 일이십년만 지나면 때려 부수고 더 효율적인 공간의 활용을 위해 새로 짓고 부수고 또 새로지어 주택가로 온전히 남아있는 골목길이 멸종 위귀의 희귀종이 되고 난 후에 남겨진 골목은 이제 수십년간 그곳에서 그곳을 만들고 살아온 예술인들과 원주민, 상인들을 더이상 임대료도 지불할 수 없게 임대료를 올려 쫓아내는 젠트리피케이션 잔치를 벌이는 중이다.
할렘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보는 입장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곳에서 수십년간 터잡고 살던 가난한 흑인들을 뉴욕 외곽으로 내쫓는 자본주의적 개발논리에 의해 소외되는 원주민 문제이고 또 하나는 더이상 손써볼 수도 없이 우범화되어 범죄의 온상이 되는 곳을 살리고자 하는 시당국의 노력이다. 빈잡이 속출하고 건물 곳곳은 손상되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 지역을 살려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그런 선택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거란 생각을 해보니 할렘의 경우, 너무나도 고질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젠트리피케이션 그 자체만을 문제삼을 게 아니라 양면성을 모두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때, 이미 너무 우범지역이 된 곳이라 집 하나 새로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개발업자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블럭 하나를 통채로 손본 것이다. 브라운스톤의 아주 오래된 건물은 헐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도록 복구 되었으며 주변에는 스타벅스와 반스앤노블 조합의 체인점을 유치했는데 그 두개가 뭔 성장성 같은게 있는지 그 가게가 같이 있으면 동네가 급이 달라 진단다. 그렇게 개발된 곳은 흑인 변호사나 전문작들에게 임대해 주어 조금씩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고. 결국 있는 사람이 이사오게 하여 그 블록 자체에서 못사는 흑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고, 그 젠트리피케이션은 조심스럽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데, 이제는 낮에도 관광객들이 기 지역을 활보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흑과 백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개발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