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배경은 공항 대기실 인물은 딱 두 명이다. 장면도 거의 바뀌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대화로 이어가고 있는 소설은 2인극을 위한 희곡을 연상시키는데, 적의 화장법이라는 제목이 낯설다. 





우리가 화장을 하는 이유는 잡티와 주름을 얼굴을 잘 포장해서 예쁘게 만들기 위해서다. 남에게 잘보이기 위해서도 하지만, 자기 만족을 위해서도 한다. 누구더라, 레이먼드 카바였나, 작가 중 누군가는 작업실로 쓰는 방에 가기 위해 옷을 단정하게 입고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간다고 하던데, 화장이던 옷이던 단정하게 입는 이유 중 하나는 내면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추악한 것들을 덮고 추구하는 현재에 몰두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양복을 차려 입고 컴퓨터에 앉으면 게임을 하거나 악플 같은 걸 달러 찌질한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는 대신 작업 리스트를 열어 할일을 체크하고 해야 할 일에, 추구하는 일에 매달릴 거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 잘 차려입은 현대인들의 무의식 속에는 때로 소스가 뚝뚝 떨어지는 핫도그를 길거리에서 게걸스레 먹으며, 예쁜 여자들을 따라다니며 성폭행을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내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데, 자신은 잊고 있을지도 모를 만큼 오래 전 추악하고 폭력적인 욕망을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에게 배출한 사람들은 갑자기 까발려진 자신의 정체가 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강간과 추행을 행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당신은 바로 눈앞, 입이 닿을 만한 거리에 깨끗해 뵈는 시원한 물을 놓고도 그걸 마실 권리가 없어 목이 타들어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방금 사막을 건너온 당신을, 구미에 맞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물 스스로가 거부한다 이겁니다. 마치 물이라는 물질 자체가 당신을 거부할 권리를 가진 것처럼 말이죠! “





짧은 치마를 입고 요란한 화장을 했다고 해서 누구나 그걸 성적 암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주,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피해를 공개적으로 호소할 때마다 ‘행실’ 프레임이 가장 먼저 2차 폭격을 가한다. 너님을 위해 예쁜 건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동의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 어떤 성적 행위도 폭력이 개입된다. 언제 하위 권력이 상위 권력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던가. 





공항 대기실처럼 따분한 곳도 없다. 탑승 시간이 계속해서 연기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미국 사람들은 그런 일에 익숙해졌는지 언젠가 미국에서 국내선을 탈 때 3~4시간 이상 아무 설명도 탑승 수속이 안되고 기다리는 일이 있었는데, 애가 타고 짜증이 나서 데스크를 몇번이나 왔다갔다 했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며 책들을 읽고 있던데, 우리의 주인공 제롬 앙귀스트는 책읽기에 방해를 받는다. 





텍셀 텍스토르라는 자가 나타나 무례하게 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아무에게나 자기 얘기 늘어놓기 하기 좋아하는 그냥 짜증나는 인간인 줄 알며 무시하려 했는데, 이야기의 흐름이 점점 오싹해진다. 반전의 반전이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다가 맞이하는 결말은 쿵 하는 충격적이다. 




아멜리 노통브가 천재라 불리는 데에는 이런 이야기 구조의 긴장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소설에서는 묘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작가는 한 인물의 입을 빌려 스스로 묘사에 대한 작가로서의 입장을 확실히 하고 있다. 특히 진부한 묘사의 하나로 자주 나오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콕 찝어 겨냥한다. 





“도대체 그 어떤 색깔도 허용되지 않는 소설 속인데도, 마치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는 것처럼, 여주인공을 세세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 짜증나는 일이 있을까요 실제로 여자가 금발에다 밤색 눈동자를 가졌기로서니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여자 입장에서 보면, 십년 전 강간했던 강간범이 눈앞에 나타나, 자신을 죽일 기회를 주러 왔다고 칼을 손에 쥐어준다면 어떻게 할까. 혹, 아내를 살해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을 죽일 기회를 주겠노라고 자신을 죽이라고 한다면? 강간을 당한 여성도, 아내를 잃은 남성도 범인을 직접 죽일 수는 없다. 법은 피해자에게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법제도만이 가해자를 벌할 수 있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에





(여기부터 강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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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앙귀스트가 처한 선택은 보다 어렵다.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분열된 자아가 화장을 지운 자기 자신임을 믿을 수 없기에 아니 선택의 여지는 점점 없어지고,  스스로가 죽던가, 살인자가 되던가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내재되어 있는 추한 자아가 물리적으로 실체화되어 있다면, 추한 자아와 함께 화장한 자신도 함께 죽을 테지만, 그가 믿는 것처럼 그런 추한 자아는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통쾌하게 아내에게 복수하고 살인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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