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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평점 :
1920년대에 태어난 찰스 부코스키가 첫 소설 우체국을 낸 해는 1971년이다. 50세가 넘어 데뷔했다는 건데 그 이전까지는 하급 노동자로 전전하며 살았다. 그 중 우체국에서 12년간 우편 분류 일을 하면서 잦은 지각과 불성실한 근무로 해고 직전 한 출판사에서 전업작가가 되어 글을 쓰면 매달 1백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는 결정적 계기가 주어진다 이 후 우체국에서의 직정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페르소나이자 삶이 투영된 정편 <우체국>으로 데뷔 후 여생을 활발한 작품 활동에 바친다. 문학계의 이단아라고 하는 그의 작품 세계에는 헨리 치나스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야설적이고 마초적이라고 알려진 그의 작품들 중 이 책은 성장기가 배경이라 딱하게도, 야한 건 주로 생각 속에서만 머문다.
후에 ‘우체국’과 ‘여자들’에서 묘사하는 마초적 인간상으로 이어질 인생극장의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가 배경이지만 더 늦게 쓰여졌다.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의 가난한 성장기의 좌절과 체념, 낙담과 실패 같은 곤궁과 체념, 될대로 되라는 식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유년시절의 방황을 다룬다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삶의 방향이나 가치관이 새롭게 정립되는 기회가 오거나 성장하기 마련인데 그렇지 않다. 그는 성장하지 못한다. 성장 과정의 좌절은 해소되지 않고 절망은 깊어지며 곤궁에서 빠져나올 기회는 오지 않는다. 어찌 보면 빈곤했던 50년대와 60년대 혹은 70년대를 통과한 우리에게 이 책에서 흐르는 비관적이고도 체념적 정서는 성장기와 청소년기의 다수가 경험한 보편적 정서일 수도 있다. 비록 어르신들이 경험했던 극심한 가난과 배고플 염려는 별로 없는 시대지만 소수의 상위 몇 프로가 사회전체가 생산해 낸 부와 영예를 독식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미래는 불안하며 욕망과 절망은 함께 움직이며 보이지 않는 경계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에서 방황한다. 지금 이렇게 시간이 데려다준 곳에서 돌이켜 보면 내가 무엇이 될 지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시절은 푸르디 푸른 청춘이었다. 하고싶은 것과 할 수 없는 것 주어진 기회에 성의 없이 매달리면서도 주어지지 않은 가능성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방황했던 숱한 날들 그 잠못들던 순간들이 헨리 치나스키의 냉소와 통한다.작가의 분신인 치나스키는 폭력과 빈곤, 그리고 소외를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외투처럼 걸치고 다닌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폭력적 아버지를 순종적인 어머니가 제어할 수 없는 빈곤한 가정에게 자라면서 동네와 학교 친구들에게서는 왕따와 따돌림을 당하지만 치나스키를 따라다니며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장애가 있거나 치나스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자신보다 약자인 찌질이들이다. 강자에게서는 따돌림과 괴롭힘을 약자에게서는 원치않은 관심을 받으며 성장하는 동안 그를 둘러싼 환경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게다가 완강한 아버지는 그를 부자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넘들 다 있는 차도 없어 볼품없이 자전거를 타고 등교해야 하고 피부병으로 외모조차 엉망인 그는 하루하루가 희망없는 좌절의 연속일뿐이다.제목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생각나는데 청소년기의 좌절을 그린 성장담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데가 있자만 부코스키의 작품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자전적 경험을 더 냉소적으로 다룬다는 느낌이다. 소설이긴 하지만 우체국과 같은 전작들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으며 이런 지난한 방랑적 시간을 거쳐 느지막이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소설 속 치나스키 역시 작품을 쓰기도 하지만 친구의 작품과 비교해 스스로 형편없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작가가 되기 위한 어떤 기회도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작중 화자의 나중을 알고 있는 독자로서는 안타깝기도 하다. 작가가 되어 세계적 명성을 떨친 후에 돌아본 그토록 시시하고 보잘것 없었던 유년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