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생명체를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거나 비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서사는 SF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익숙한 소재다. 그것이 클론이라 해도 전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 서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것이 독자를 경악케 한다. 기증이라는 행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독자에게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매우 낯선 방식이다. 이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앞에서 분노하거나 저항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심하게 좌절이라도 해야 할 문제를 제쳐두고 사소한 우정 속에 켜켜히 박힌 갈등과 사소한 기억과 의도를 따지며 관계적 감정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몰두하기에 충격과 걱정과 염려는 독자 스스로의 몫이다. 클론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인간의 장기 제공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무심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용서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정해진 삶 밖으로 나가는 걸 차단하는 것은 어떤 물리적 수단도 아닌 의식이었다. 은폐와 암시가 시간을 타고 천천히 성인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의식의 강, 만들어진 운명을 천명으로 알고 안주하는 인간의 태만, 무기력. 어찌보면 인간은 태곳적부터 사피엔스의 마음이 생겨났을 때부터 이렇게 시스템의 권력이라는 맹목적 허구에 길들여지는 것이 전체 종의 생존을 유리하게 했을테지만, 다시 보자. 이게 인간이다. 가축을 잔인하게 취급하고, 동물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끼리 노예를 부렸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노동자를 기계취급한 주체가 바로 인간이다.
루시 선생님이 분노했던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장도 마담도, 아이들의 성장을 담당한 개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엄격한 교장은 아이들의 복지와 보호를 위해 교장으로서 할 일을 했고, 제롬비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스하게 보살폈고, 마담은 마담대로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작은 손으로 그리고, 만든 '최고'의 작품들을 수집했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아이들을 최상의 상태로 돌보고 성장시키지만, 아이들의 존재 목적에 기생하는 제도권의 수혜자들이며, 아이들과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루시가 분노하는 것은 반인륜적 클론 농장과 기증 제도가 아니라, 헛된 꿈을 꾸도록 내버려두는 아이들의 성장 환경이다. 캐시가 '네버 랫미 고' 노래를 들으며 베개를 끌어안고 아기를 떠나보내는 엄마를 상상할 때, 아이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마담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은 성교 교육 시간에 자신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실에 공허감을 느낀다. 캐시가 베개를 끌어안고 아이를 달래듯 '네버 렛미 고' 속에 투영하는 건 떠나가는 아기이며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아기이다. 태어날 수 없는 아기 대신 베개를 안고, 존재할 수 없는 아기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노래를 투영하는 모습은 슬픔 넘어의 것이며, 이룰 수 없는 막연한 동경일 뿐이다. 하지만 마담의 시선에 비친 캐시는 성장하자 마자 곧 생을 떠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이며 자신이 가진 한 차원 더 깊은 세계에서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마담은 불붙은 막대 끝을 기어가는 개미를 보듯 캐시를 보며 한없는 연민에 눈물 흘리지만, 캐시는 인간의 자신(들)을 향한 그러한 슬픈 감정을 잘 모른다. 훗날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라도 그들은 기증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의 실체를 잘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DNA 원본을 향한 호기심과 동경같은 것의 차원을 결코 넘지 못한다.
클론들의 삶은 정해져있다. 그들의 비극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이 장기제공용이라는 비인륜적 의무를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간병인으로서 거울처럼 똑같은 무수히 많은 죽음, 죽음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기증을 체험하는 방식으로 집행이 유예된다는 사실에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즉 성장이 끝나면 바로 기증을 마친 클론들의 간병인이 되어 자신이 겪게 될 똑같은 고통과 세네번까지의 반복적인 죽음을 수년간 수없이 많이 겪은 후에야 비로서 기증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간병인으로서의 생활을 비참하게 이어가며 겨우 5년의 삶을 유예한 루스는 기증의 시간이 다가오자 '기쁘게' 받아들인다. 11년을 간병한 주인공 캐시 역시 다르지 않다. 기증의 끝은 당연히 죽음이고 기증이 유예되는 유일한 길은 간병인의 연장이지만 간병 자체가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제 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위로하는 일이다.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간병 기간을 축소시켜 어서 임무를 끝내고 '할 일'을 완수하는 일보다, 삶이 곧 죽음이지만 그래도 헤일셤의 친구들이 대부분 생을 마친 후에도 아직 '살아'있으니 죽음을 통한 삶의 유예는 위안인가.
처음으로 근원자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토록 직접적으로 빈번하게 언급하고 앞뒤 맥락이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음에도 나는 아이들과 똑같은 상태가 되어, '듣고 있으나 듣지 않았'다. 듣고 있지 않았으나 말해졌고, 말해진 모든 것들은 어느새 아이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빈틈을 차곡차곡 채웠다. 루시 선생님은 그들이 '듣기'를 원했다. 어쩌면 생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를 바랐을 지도. 자신들의 운명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온전한 문장으로 듣는 그 충격적 순간조차 그들의 관심은 사실보다 루시 선생님의 감정에 더 집중한다.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았으나, 듣지 않음은 듣지 않은 시간 속에서 무심히 쌓여온 정보들이 마침내 한데 모아져 정확하게 삶과 운명을 정의해도 격정적 상태를 겪지 않고 순응하게 한다. 헛된 희망들은 여전히 꺼진 재 속에 남아 있는 불씨처럼 잔재해있지만, 자신의 근원자(원본)에 대한 막연한 환상, 사랑의 증명이라는 동화같은 전설이 유예해줄 것이란 순박한 믿음과 추론 뿐이다.
이미 결정된 미래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대신 기증을 위해 흠없이 깨끗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매일 강조되는 학교에서 은연중에 기증이라는 단어가 의식의 어두운 장막 속에서 거주하며 조금씩 수용을 향해 움직였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작품을 걷어가던 외부인 마담의 주저하듯 두려워하던 시선이 어쩌면 외부인들과의 벽을 더욱 단단히 높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장을 마치고 외부로 나가 외부인의 세계에 살면서도 그들은 외부인들로부터 고립되어 있긴 마찬가지였으므로 무엇이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의 실체를 체험해보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 누군가는 기증을 위해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우주적 질서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캐시가 헤일셤 시절의 우정과 코티지 시절의 갈등과 이별 그리고 간병과 기증의 시간동안 다시 만나 엇갈린 사랑과 교활한 우정을 반추하고 용서받는 시간들로 채워나가고, 기증이라는 몇번의 수술과 고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죽음이 퇴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 지도 모른다. 내일 죽어도 오늘은 순간에 충실해야 할 세부적 감정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헤일셤은 특별한 곳이다. 이 특별한 헤일셤이라는 장소가 또다른 이슈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클론들이 오로지 목적만을 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사육된 것과 달리 헤일셤의 아이들은 당대 인권운동 바람을 맞은 곳이었다. 마치 오늘날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 복지가 이슈화되는 것처럼, 장기제공자들에게도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권리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던 시절, 많은 단체의 후원과 사회적 지원으로 인해 헤일셤이 설립되어, 그곳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교사들의 보살핌과 교육과 창작활동을 보장받은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성장을 마친 후에도 헤일셤 출신이라는 명패는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본인들에게도 자랑스레 추억할 수 있는 의미있는 장소가 된다. 캐시가 기증자들을 헤일셤의 지인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헤일셤 출신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며, 진실된 사랑이 증명되면 집행이 3년간 유예된다는 소문도 헤일셤 출신만 해당된다. 인간과 클론 사이의 계급관계 특권의식이 다시 클론들 사이에서 출신지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비련의 주인공들의 운명을 미리 알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그들이 헛된 꿈을 꾸는 걸 막지 않고, 들었으되 듣지 못하게 은폐하는 것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토록 '많이 들었으되 듣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아이에게 루시처럼, 화를 내며 너희는 청소부도 트럭 운전사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고 여길 나가자마자 곧 간병인이 되고, 기증을 하여 짧은 생을 마치리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그토록 잔인하게 전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는 에밀리 교장선생님처럼 해맑게 키우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훗날 봇물 터지듯 쏟아냈던 에밀리 교장의 말의 홍수가 헤일셤의 설립과 폐쇄, 아이들에게 작품활동이 격려되고 마담이 가져가는 작품과 갤러리에 대한 진실을 밝혀주는 듯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에밀리가 하는 말의 이면에는 단 한가지 주목할만한 진실이 있다. 헤일셤이 아니었다면 동물처럼 사육되었을 너희를 위해 우린 최선을 다했다고, 별 관심도 없어보이는 캐시와 토미에게 쏟아붓는 그 모든 고백의 핵심은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도 예술도 창작열도 그 무엇도 집행 연기의 사유가 될 수 없다. 기증 이외의 삶은 3년이 아니라 단 3개월도 주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며, 그 누구의 어떤 권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성역이다. 이미 세번의 기증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에서 엉터리 소문들과 더 엉터리 추론으로 만들어낸 겨우 3년이 되었을 희망. 평생을 사랑했지만, 교활한 우정이 찢어놓은 그 사랑 앞에서 남겨진 조각 시간들, 예리하게 가슴을 베이는 것처럼 아프다. 그들의 죄는 들었으되 듣지 못한 것이다.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는 대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