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지음 / 예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오래된 한국 영화 중 안성기와 장미희가 나왔던 깊고 푸른 밤은 오래 전 영화이지만 깊은 인상 때문인지 오래 전에 봤음에도 주요 장면과 소재가 잊히지 앉는다. 아직 아메리칸 드림이 위세를 떨치고 있을 당시, 재앙과도 같은 가난을 떨치고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꾸고 태평양을 건너가지만 적법한 투자금도 자격도기술도 학위도 없이 까다로운 이민법으을 우회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결혼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의 일이었지만 실제로 먼 친척분 중의 한 분이 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를 계기로 모든 가족들을 불러들인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은 멀고도 비현실적인 곳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전해오는 소식 역시 비현실적이었다. 지금 생각헤 보면 깊고 푸른밤의 내용처럼 처음 결혼할 때부터 그 결혼이 영주권을 얻기 위한 계약결혼이었던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썽만 부리고 껄렁껄렁했던 집안의 한 아재가 어느 날 아메리칸 드림에 들떠 미국에 있던 여자와 갑자기 결혼을 해서 떠나고 가족들 모두 불러들인 후 여자 나이가 많아 아이가 계속 유산된다는 둥 그런 얘기가 들렀던 걸 보면 결혼 생활을 한동안 지속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정착후 둘의 관계는 결국 이혼으로 끝났던 것같다.

이 소설도 미국에 정착한 현 세대의 이민자들과 그곳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이야기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고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완전히 변한 것들이 있다. 이제 젊은 한국인 2세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서 중심 도시의 중심가를 움직이는 주요 인물이 되어 있다. 미국을 찾은 한국인들은 더이상 가난에 쩔어 천하고 노동집약적인 일자리를 찾아 다니는 대신 뉴욕의 중심가에서 예술을 강의하고 예술가들을 발탁하고 사진을 찍고 강의를 듣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시안계끼리, 한국인들끼리 엮이는 인간관계는 그 무한한 세계를 넓은 작디 작은 세계로 축소시킨다. 세계 예술인들의 중심 뉴욕 맨하탄에서 예술을 매개로 서로 관계맺고 살아가는 한국 이민자들과 유학생들의 이야기다.

내가 반해 가슴앓이 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에게도 반해 가슴앓이할 가능성은 얼마나될까. 로미오와 줄리엣을 말할때 우리는 집안 대대로 원수 지간인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라는 우연에 주로 집중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 반한 우연 또한 흔치 않다. 사랑은 자주 둘중 하나가 먼저 반해 신호를 보내거나 짝사랑에서 시작해서 고백과 관심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쪽으로 진행된다. 사랑은 더 사랑하는 쪽과 덜 사랑하는 쪽 사이의 균형을 찾고 받아들일 때까지만 유효하다.

비자도 없고 작품도 장래성이 없는 한 예술가를 사랑하는데, 모든 걸 가진 자신에게 단 한마디의 확신도 주지 않는다. 결국 그의 뉴욕에서의 장래를 위해 티파니에서 스스로 반지를 사서 끼고 축복바지 않은 결혼 둘만의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는데, 예민한 그녀의 촉이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감지해낸다는 거다. 성주가 공공장소에서 책을 읽다가 눈물흘리는 모습에 반해 그를 지켜보고 스토킹이라 할만한 행동까지 했던 정인의 눈에 포착된 모습은 그가 예술 강의에서 강사 수영을 바라보는 눈빛이다.

유능한 큐레이터 마리는 사진 작가 성주를 사랑해서 자신의 집에 들이고 함께 살지만 비자 만료가 다가오는데도 시민권을 지닌 자신에게 청혼하지 않는 성주에게 복잡한 마음이다. 그들의 인연은 성주의 일방적 관심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랑이 시작되자 마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사랑으로 인한 충만감이 아니라 의심과 불안 뿐이다. 소설은 마리의 시점일 때조차 성주의 어떤 점이 그녀를 그렇게 불안하게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자의 심리와 행동은 독자를 화자에게 공감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부증가 같은 상태의 화자를 쯧쯧거리며 가엽게 바라보게 만든다. 그녀가 독자에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건, '자 봐봐 성주가 이러이러하니까 내가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가 아니라 ' 내가 쟤를 너무 사랑해서 나 힘들어 죽을 거 같아'인 것이다. 화자는 철저히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나 마리는 괴롭다. 심리적 고통이 너무 커서 날카로운 면도날로 팔목을 그어대며 육체적 고통으로 그것을 덮으려 하고, 남편의 폴더 속 사진들을 뒤진다.

큐레이터의 마음에 들고 싶어했던 성주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따라와서 인연을 만들지만 막상 그녀가 그를 돌이킬 수 없이 사랑하는 시점은 그와의 성적인 관계가 통속적 욕망을 지나는 지점이다. 그가 나를 정말로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은 그녀가 가진 모든 조건이 그의 장래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치명적으로 사랑하면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 구하는 갈구가 결코 채워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상대에게서 내가 원하는 걸 채울 수 없다면 내가 포기해야 한다. 예정된 실연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다가오기 전에 끝내는 것이 그런 정신상태에서는 유일한 희망이다.


마리와의 이혼은 다시 성주의 비자 상태가 불안해짐을 의미한다. 너무 사랑해서 의심하고 증오하고 고통에 겨워 결국은 끝내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인정한 두 사람의 이혼 소송기간 중 이민국에 애초 결혼이 사랑 때문에서였지 비자 때문이 아니었음을 증언해야 하는 여자와 이를 부탁해야 하는 남자, 이렇게 상황은 꼬일대로 꼬였지만 애초 그 균열의 원인을 제공해야 했을 남자의 외도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여성이 쓴 작품에서 한 여성의 외모적 특징에 대한 섬세한 묘사 대신 그저 단순히 '아름답다'는 빈약한 형용사로 모두 설명되는 점은 여성을 대성화하는 남성적 시선을 아무 성찰 없이 사용하는 것으로 느껴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리의 직업적 위치, 시민권자로서의 위치, 우월한 외모 등 모든 면에서 성주에게 갑의 위치에 선 마리의 모습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읽기로 했다. 빼어난 외모, 직업적으로도, 비자 상태로도 갑의 갑 상태에 있어야 할 여성이 금방 부서질 것같이 취약한 남성에게 사랑 때문에 종속되는 대조적인 상황을 그려내기 위해 빼어난 외모를 강조해야 했다.

정인은 성주를 사랑했을 마리와 결혼한 상태에서 수영의 뒷모습을 슬프게 바라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현재 옆에 이소는 파트너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뉴욕의 한엔 예술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정인, 마리, 수영이 모두 성주라는 인물과 사랑을 매개로 엮인 채 엇갈린 사랑 속에서 성주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자의 감정 속에서 복잡하기만 하다. 자신이 아닌 수영을 사랑한 남자 때문에 생긴 마리의 그 긴 고통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수영과 성주는 특별한 관계도 아닌 것 같은데, 둘이 어떤 관계었던 아니던 문제는 그가 공교롭게도 비자를 가진 여자를 따라다녔고, 그녀에게 사랑에 관한한 어떤 확신도주제 않은 채, 비자를 구걸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결혼을 이루었으며, 결혼한 동안 그녀는 그토록 그의 다른 여자를 상상하며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결코 나쁜 남자로 나오지 않는다. 비자 때문에 마리를 사랑했던 것 같지도 않다 다만 그가 마리에게서 결혼의 혜택인 비자 연장을 받는 동안 수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흘렸다는 거다.

정인은 그런 그에게 또 반해 그의 집을 서브렌트해서 한달간 들어가 살지만, 그녀가 발견한 건 힘겨워하는 마리의 흔적이다. 그래서 애인의 애인이다. 정인의 애인(성주)의 애인은 마리. 마리의 애인(성주)의 애인은 수영인데, 그 와중에 마리의 동료가 결혼 2달 전에 마리에게 사랑한다고 한다고 가볍게 고백했던 것까지 치면 동료의 애인의 애인은 마리다. 애인의 애인들. 모든 말해지지 않은 누군가의 짝사랑들, 짝사랑하는 누군가들, 그리고 피다 말은 사랑과 싹이 트기도 전에 쓸쓸하게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외사랑들이 돌고 돌고 돌아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 연결되는 세상이 상상되었다. 사랑,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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