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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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유대감을 느끼며 살아가면서도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는 장소에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길 원한다. 테스 또한 부모님과 언니, 남동생 잭을 피해 집의 뒤테라스에 편하게 앉아 나무로 된 우물을 바라보는 시간을 즐겼다. 그것은 테스에게 최고의 시간이자 행복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어두운 밤,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테스는 낯선 여인이 우물에 아기를 빠트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 여자가 아기를 내버리고 간 뒤, 한동안 꽤 오래도록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 귓가에는 그 첨벙하는 물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13.p)

 

 

  그 물소리는 아기가 수면에 부딪혔다기보단 우물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같았다. 자신 안에 끔찍한 뭔가가 떨어진 사실을 알고 놀라고 당황해 소리를 내지르듯 내게 도움이라도 요청하듯(15.p)

 

 

  그날 밤부터 테스는 악몽에 시달린다. 테스와 그 가족에게 있어 우물과 탄광은 어떤 것일까? 탄광은 아버지 앨버트의 세계이자 그의 가족들의 삶을 유지하고 지탱하게 해 주는 근원이다. 탄광이 있고 그곳에서 계속 일을 해나가는 아버지 앨버트가 있는 한 테스의 가족은 부유하지 않지만 평화롭고 소박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있다면 어둠 속을 불빛으로 비춰보는 일이었다. 나는 어둠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둠에 찌들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팔꿈치 주름과 손금 사이사이 그리고 손톱 밑마다 지워지지도 않는 새카만 자국이 들러붙어 있었다. 늘 목구멍 저 밑에서부터 어둠의 맛이 느껴졌고, 한밤중이면 기침을 해대며 그 어둠을 뱉어내곤 했다. 19.p

 

 

  또 다른 면에서 그들이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 중심에 우물이 있다. 우물은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 인간으로서 존재를 지키며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한 축이다. 그래서 어린 아기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은 가족 전체의 삶과 가치관, 그들의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상하지 못한 끔찍한 일은 갖가지 모양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지만 그로인해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성숙한 한 사람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테스가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죽은 아기의 이름을 찾아 주고 싶어 하는 것이나 버지가 의심이 가는 부인들의 리스트를 작성한 뒤, 그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면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부끄러움과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까지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빈부 차이와 상관없이 사람들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우물사건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앨버트 역시 우물에 아기를 버리는 것이 끔찍한 일이긴 하나 그 이유가 전부 잔인하고 악의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흑인이자 성실한 동료인 조나를 통해 깨닫게 된다.

 

  ……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봐온 느낌이야. 그게 껍데기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껍데기를 까거나 깨서 그 안에 든 걸 보려는 시도도 안 했던 거지. 171.p

 

 

  우리도 살다보면 자신과 무관하거나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삶 속에 불쑥 끼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로 인해 아픔의 시간을 겪거나 괴로워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조금은 예전과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란 존재가 세상에 당당히 소리치고,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일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왔지만, 국가적 재난과 사회관계망의 불신, 사람들과의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 등 불가항력적인 일을 겪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돌아보고 나약한 자신을 인정하며 타인과 협력하며 해결방법을 찾아 애를 쓰게 된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겪었다고 삶이 끝나거나 일단락되어진 후 다시 이어서 시작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테스와 그의 가족이 우물 속에서 아기 시신을 발견하고 나서도 힘겨운 일상을 계속해서 살아내는 것처럼. 소설은 무언가 삶을 흔들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는 있지만, 우리의 삶은 그 속에 빠져서 마냥 허우적대며 있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우물과 탄광이 단편이었다면 우물사건이 소설전반에 중심이 되고, 그 순간이 주는 이미지와 묘사가 독자를 끌어당기는 묘미가 되었을 것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장편이었기에 우물 사건은 화두가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성장과 변화해 가는 모습들이 핵심이 되었다. 그것이 물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정해놓은 규율 안에서만 행해졌던 선의에 대한 앨버트의 자각과 테스가 우물에 아기를 버린 여자를 찾아내고 그녀에게 용서한다고 말해주는 장면은 독자로서 잊혀 지지 않는 장면이다. 그 가운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고 치열하며, 생생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또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앨버트와 리타, 그들의 보호 아래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끈끈한 우애를 보여주며 성장해 나가는 버지, 테스, 잭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등장인물의 각 시점으로 진행되는 구성도 소설의 지루함을 없애주는 데 한 몫 한다. 추리소설일줄 알았던 나의 추측이 빗나간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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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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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후에 남은 것들

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산문집

 

 

  사람이 호감을 갖고 다가왔을 때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잡아 주는 것이다. 서로 손을 잡음으로써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조금씩 마음을 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존재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손을 내미는 것은 최초의 용기이고, 떨림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도 우정도 그렇게 시작된다.

 

 

기꺼이 원했던 건

손을 내미는 것.”

 

이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우리 삶은 결코 돌이킬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원했던 건,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고. 12.p

 

 

 

  그래서인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초등학교 수업시간, 선생님과 친구들 몰래 짝꿍이 내민 손을 잡고 가슴 뛰게 행복해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철없던 어린 소녀였지만, 그 감정의 시작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사랑도 현재 진행 중일 때보다 그 열기가 식고 끝났을 때 그 실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사랑하던 대상이 변했거나 사라졌을 때, 그 뒤에 남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 느끼고 체험했던 기억과 그것들의 변주이다. 그래서 그 이후 남겨진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사랑이 삶을 확장시키거나 갉아먹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을 갈망하고 또 다른 사랑 속에 뛰어들게 만든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 사랑은 큰 에너지이자 환상이다. 아름답지만 슬픈 환상.

 

 

언젠가부터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과 맞닿은 무수한 기억의 편련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미지들은 하나의 확고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돌연히 나타나는 섬광과도 같다. 그 빛은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강타하여 잠식한 뒤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그런 빛들이 없었다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 빛들의 자취는 내가 캄캄한 삶 속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지도와도 같았다. 14.p

 

  만약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이 없다고 믿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삶은 더 효용적이고 간결해졌겠지만, 그만큼 건조하고 재미없는 삶이 되었을 것이다. 깊은 밤, 눈을 감고 감미로웠던 순간을 되씹어 보는 시간과 나 아닌 타인의 슬픔에 가슴저려가며 눈물 흘려주던 보석 같은 사랑을 잃고 어떻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름다워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눌 줄 알기에 사람들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그 잔상들을 붙잡으며 단단히 견디고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

 

 

  장혜령의 문장은 산문이면서 시이다. 사랑의 잔상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풀어놓았고, 소유했다. 그러나 그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또 다른 자신만의 사랑과 문장을 갖게된다. 그리고 나아가 읽는 이의 마음을 감싸준다. 사랑의 잔상들이 사랑을 잃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들의 버팀목 같다고 속삭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면서도 힘이 있다.

 

 

영어 단어 'deliver'에는 전달하다라는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뜻 외에 구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손에서 손으로 무엇을 전한다는 것,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그 무엇을 옮겨놓는 일에 구원의 의미가 담긴다는 것은 무척 상징적이다. 205.p

 

 

  사랑은 작가에게 수많은 잔상을 남겨 주었다. 그 잔상들은 우리에게 사랑의 문장이 되어 다가왔다.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아주며, 손에 담긴 무언가를 소중히 받고, 다른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건넨다는 것은 참 떨리면서도 무언가 벅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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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패티 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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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경험이 어떻게 소설이 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제목처럼 몰입하며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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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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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여행은 영원히 진행 중

 

 

1.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나는 패키지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잠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나의 패키지여행은 중국 상하이, 항주, 소주를 도는 45일 여행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에 호텔 조식을 먹고, 8시에 다시 모여 출발하는 이른바 678 아침 스케줄이 내게는 강행군이었다. 그 뒤로는 패키지여행을 가지 않았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직접 여행준비를 하고 현지에서는 오전 시간을 느긋하게 즐긴다. 지금도 나의 국내외 여행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여유를 즐기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두고 싶다.’

마흔 살이 됐을 때, 왠지 그런 다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아온,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 이를테면 풍경이나 축제 같은 것.

봐두고 싶네. 하지만 갈 일은 없을 테지.’

그렇게 동경했던 곳으로 앞으로 10년에 걸쳐 다 다녀보는 건 어떨까?

등을 민 것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패키지 투어의 존재였습니다.

- 여행을 시작하며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두고 싶다는 소망은 저자만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탐할 권리와 본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특히 처음에 나오는 북유럽 오로라 여행은 마음을 먹는다 해서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새벽 두 시가 지났고, 기온은 영하 18도인 세계.’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의 마음도 두근거렸다. 코끝이 아릴 정도의 차디찬 밤공기 속에서 발을 동동 거리며 오로라가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은 저자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 누구일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일 것이다. 패키지여행이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오로라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여행객 대부분 60대 이상 부부도 있지만, 여성 그룹이 많아서 재잘재잘 무척 즐거워 보인다. 북극권 여행이다. 춥고 멀고, 상당히 힘들 텐데 지친 기색도 없어서 젊을 때밖에 갈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나를 반성했다. 젊지 않아도 어느 때라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같다. 30.p

 

  애쓰고 수고한 자신을 위해, 육체를 이끌고 새로운 세계까지 걸어 나온 여행자는 장소를 옮길 때마다 다시 태어난다. 젊지 않아도 괜찮다. 나이 들어가는 것에 쫄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워진 나나로 돌아오는 우리는 행복하다. 혼자 참가해서 청승맞아 보일 수 있어도, 시간에 쫓겨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을 35일로 밖에는 다녀올 수 없어도 떠나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벽돌색 지붕의 귀여운 구시가지. 많은 관광객이 그 경치에 빨려들었다. 더 천천히 보고 싶었는데, 투어는 항상 시간에 쫓긴다. 특히 이번에는 독일 35일이라는 총알 투어다.

그런 여행으로는 아무것도 본 게 안 돼.”

하는 의견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는 남을 터. 아무것도 본 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정할 것인가? 59.p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여행을 할 수 있지만,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체력이 받쳐 주던 20~40대를 지나, 힘에 부치는 나이가 되었거나 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 혹은 동행자 없이 멀고 험한 여행지를 선택해야 할 때는 자유여행이 아닌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안의 중심에 패키지여행이 있다. 또 이 여행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패키지여행만 있다면 몇 살이 되었든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용기를 내어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지루한 일상의 자리로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저자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두 눈과 마음속에 차곡차곡 간직하고 싶은 나도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한때 나의 SNS 아이디는 걸어야 할 이유를 찾다였다. 걷기는 좋은 친구이자 삶의 돌파구였다. 땅을 디디며 두 발로 체중을 느낄 때 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걷기에 대한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당장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싶어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한량처럼 빈둥거렸을 때, 나를 일으켜준 것은 걷기였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족들이 모두 나간 후였다. 오전의 햇살이 집안의 먼지까지 비춰줄 때 나는 느릿느릿 세수를 하고 밥을 먹었다. 그다음 잠시 멍하니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벚꽃 피는 봄에 가고 싶었던 남산이 창밖으로 보였다. 나는 신발을 주섬주섬 주워 신고 가까운 남산을 향해 걸었다. 차비도 들지 않고 무엇보다 하염없이 시간 보내기에 좋았다. 국립극장 앞에서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산책하기 좋은 코스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어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영화배우 하정우가 아니라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었을 때, 화려한 배우의 삶 뒤로 끊임없이 걷고 고민하고 조금씩 나아가는 인간 하정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걷기 예찬을 읽으며 아무 것도 아닌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재의 나는, 긴 인생을 두고 보았을 때 1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세상 모든 고통과 우울을 껴안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29.p

 

-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34.p

 

  그런 우울한 기분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20대 초중반의 아름다운 청춘이 잉여 인간처럼 자신의 존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참 쉽다. 기분의 힘이 세다는 것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때 나는 열심히 걸었다. 걸으면서 산에 핀 꽃들도 많이 보았다. 아기였을 때, 우리는 걷기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았던가. 기억나지 않겠지만 온 힘을 다해 한발을 내딛었을 것이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앞을 향해 걸으면서 환희의 함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걸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9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8키로가 조금 안 되는 배낭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는 걸 그때 느꼈다. 발의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팔에 깁스를 했을 때, “너는 다리를 다친 것이 아니고 팔을 다친 것이니 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 라고 말해준 의사 덕분에 열심히 걸어서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착했다. 배낭과 한 몸이 되어 끝까지 걷겠다는 나의 결심은 운반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삶의 변수는 나의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고 다른 방법과 타협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는 조금 불편하지만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걸어보니 알 수 있었다. 오롯이 두 발로 걸어간다는 것, 그것이 자유라는 것을.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지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291.p

 

  여행이란, 두 다리를 움직여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걸을 수 있기에, 아니 혹여 걸을 수 없다 하더라도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훌훌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이니까. 걸으면서 시작되고 다시 걸어서 돌아올 수 있는 우리의 여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3. 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내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을 때, 아빠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201812, 폐렴으로 입원하신 아빠는 담낭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아빠는 항암치료를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담당 의사도 80세가 넘은 어르신께 항암치료 보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추천했다. 자신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하셨다면서. 그때쯤 마스다 미리의 <영원한 외출>이 나왔다. 마음을 잡지 못해 힘겨워하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누구나 부모의 죽음을 맞이한다. 명백한 사실이지만 애써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가까운 미래. 누군가 모두 겪는 일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슬픔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구나. 저자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 속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은 본인에게나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앞으로 하루하루 체력이 떨어질 거란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25.p

 

  우리 가족은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깊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족티를 맞춰 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주말이 되면 교외로 나가 외식을 했다. 한편으로 나는 1년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취소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빠는 내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으셨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여비까지 보태주었다. 자신의 병과 나의 여행은 무관한 것이며, 삶의 계획은 각자 다른 것이라고. 다행히 아빠는 내가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다.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나를 독려해 주신 것과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신 것. 그리고 나 혼자 걸어갈 수 있도록 80여 년 동안 내 인생의 여행길에 동행자가 되어 주었던 모든 것이 말이다.

 

사람은 먹으면 힘이 나는 것 같다.

그 핑계로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온 죽음을 앞에 두고 일을 하고, 가을옷과 구두를 사고, 카페에서 케이크를 먹으면서 책을 읽었다.

퇴원 후 아버지의 취미는 오로지 식(). 다음 식사 때는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저녁 식사 후, 내일 아침은 어묵을 먹고 싶어.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는 어묵 재료로 어떤 게 좋을까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두부, 엄마는 곤약, 나는 무, 평화로운 한때였다. 아버지는 내일 아침 세븐일레븐에 어묵을 사러 가겠다고 선언하고, 침실로 사라졌다. 39.p

 

  어느 날, TV를 보시던 아빠는 푸른바다를 보고 저기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화면 속에는 남해바다가 사파이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아빠와의 여행을 준비했다. 아빠와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느 한 때의 봄맞이 여행처럼 하동의 매화를 구경하고, 섬진강 재첩국을 맛있게 먹으며 남해로 내려가 23일을 보냈다.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매화나무 아래서 엄마와 나란히 서서 웃고 계시는 아빠사진을 보면, 인간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 처음 사랑했을 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웃음을 잃지 않을 것, 자연의 변화를 함께 느끼며 떠나간 이를 그리워할 수 있도록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줄 것.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연습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온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작해도 아무도 볼 수 없는 작품.

그 작품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를 아는 데 의미가 있다.

 

가지 못해도 좋다. 보이지 않아도 좋다. 아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97.p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그것이 흰나비를 대신하는 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힌트는 바깥에, 사람 수만큼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98.p

 

  비록 핸드폰 영상 통화와 메시지로 보낸 동영상뿐이었지만, 아빠는 내가 바로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있을 때 함께 계셨고, 포르투의 동루이스 다리에서 맞았던 바람 소리도 함께 들었다. 지금은 곁에서 함께 할 수 없지만, 나는 아빠가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을 여행 중이라고 믿는다. 병들고 나약한 노인이 아니라 걱정 없이 상쾌하고 가뿐한 여행자가 되어서 말이다. 먼 훗날 나도 그 여행에 동참하게 되겠지.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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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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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드는 시집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수 있지만, 소설은 여간해서 반복하여 읽기가 힘들다. 대신 기억에 남는 장면과 문장, 이야기가 주는 매력과 위로로 작품을 기억한다. 그런데 김은국의 <<순교자>>는 장편소설이지만 예외였다. 이 소설은 대학시절 갓 입학한 신입생인 나와 친구들에게 교수님이 내준 과제였다. 지금은 절판된 을유 출판사에 나온 회색 바탕의 <순교자>, 소설을 읽고 그 내용과 감상을 오픈 북 테스트로 중간고사를 보았었다. 당시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는 시험 보기 직전까지 조바심 내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 답안지에는 신과 성도들을 배신한 12명의 목사들은 순교자의 영광을 얻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킨 두 명의 목사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는 기독교 소설이다가 주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서 무언가에 끌린 듯 다시 시간을 갖고 깊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보다 재미있고 짜릿했던 대학 생활에 그 호기심은 금세 잊혀 졌었다.

 

  그러다 20년도 훌쩍 넘어버린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새롭게 디자인 되어 나온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순교자>>를 만났다. 한국 작가가 쓴 글이 세계문학 속에 들어있다는 것과 김은국이란 작가의 이름이 아주 옛날 기억을 소환했고, 2019년 가을, 책상에 앉아 시험을 공부를 하듯 탐독한 <<순교자>>는 내가 기억하는 소설과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그 시절 나는 무엇을 읽었던 걸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유의 능력은 조금씩 변하고 성숙해졌다. 그동안 꾸준한 독서가 이해와 감동의 폭을 넓혀 주기도 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낮아진 마음과 독서에 대한 애정이 읽게 되는 작품들과 그것을 쓴 작가에게 존경심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기독교 소설이란 좁은 카테고리 속에 가둘 수 없었다. 기독교와 전쟁을 의지하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은 신을 가진 인간과 이성을 의지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또한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으로 선택하고 해석하든 전쟁이란 고통의 역사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당하나 쉽게 전멸하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인류문명사를 강의했던 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대위가 되어 평양으로 파견된다. 그가 평양에 도착하여 처음 본 광경은 전쟁으로 파괴되고 부서진 장로교 평양 중앙교회였다. ‘와 대학에서 함께 근무한 박 중위의 아버지가 시무했던 교회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열기는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달구었고, 평양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런 땅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식민지시대와 견주어도 나을 것 없는 심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런 평양에서 는 장 대령의 명령으로 공산군에게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들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한 뒤 마무리 짓는 일을 맡게 된다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들과 살아서 돌아온 2, 바로 신 목사한 목사이다. 그 중 순교당한 박 목사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젊은 한 목사는 무엇 때문인지 정신적 충격을 입고 폐허가 된 교회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알 수 없는 기도를 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런 한 목사를 마주 했을 때, 이 대위는 북진 초기에 후퇴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목격하고, 그 현장에서 경험했던 어떤 분노를 떠올리며 힘겨워한다. 시체와 배설물 속에서 끌어낸 한 사람, 꺼져가는 목숨을 부여잡고 힘겹게 의식을 잃어가는 그에게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이상하고도 강렬한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나는 카메라 뒤의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초리들로부터 한 인간이 지닌 고난의 말없는 위엄을 내 온몸으로 지켜주기라도 할 듯 이, 남자의 몸 위로 상체를 구부리고 연옥과도 같은 그의 납빛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36.p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비참하게 죽어가는 같은 종족을 향해 세상 어느 생물이 카메라를 누르며 보도를 하고 기록을 남기려고 혈안이 될 수 있는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 대위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울부짖으며 카메라를 부수었다. 이 대위가 느낀 부끄러움은 애도 받지 못한 인간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존엄함이 무시당하는데서 오는 수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또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존엄함을 지니고 있는지,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하기보다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애써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아마 그 누구도 이런 의구심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신의 침묵을 가져왔는지 아니면 내려진 신의 대답을 못 듣게 한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볼 뿐이다. 그때와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낀 이 대위는 비틀거리다 쓰러진 한 목사를 부축하여 돌아가는 신 목사에게 질문한다.

 

목사님의 신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37.p

 

  신을 섬기는 목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대답할 수가 없다. 목사 또한 신이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고난은 고스란히 인간의 몫이고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란 고통 중에서 견디는 것뿐이니까. 어쩌면 고난 속에서 답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박해와 억압에 눌려있던 성도들은 광적인 모습으로 순교한 12명의 목사들을 추앙하고, 비겁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간다. 무언가 비밀을 감춘 채 동료 목사들을 잃고, 정신이 나간 젊은 후배를 돌보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신 목사 또한 고난에 대해 대답해 줄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호소하기보다 모든 것을 떠안고 죄인이라 고백한다. 그런 신 목사에게 진실을 알려달라고 이 대위는 끈질기게 매달린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장 대령 또한 굳이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전쟁이 나기 전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고 군목 또한 집요하게 진실을 캐고 다니는 이 대위에게 그 젊음과 열정이 부럽다고 말 할 뿐 그가 알고자 하는 진실에 대해서는 답해 주지 않는다.

 

…… 진실을 타협해버릴 순 없어. 진실은 숨겨둘 수 없는 거야. 어쩌면 이렇게 뼈아픈 진실이 교인들에게 찾아온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인지도 몰라.”

……

대령님, 진실은 그것이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 152~153.p

 

  진실을 감추고 죄인의 길로 들어가 기꺼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는 신 목사와 열 두 명의 순교자들을 빨갱이들에 대한 정신적 승리의 상징으로 둔갑시키려고 하는 장 대령이나 이 대위에게는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다. 과연 진실은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진실의 무게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반면에 진실은 묻어 두어도 여전히 진실이기에 까발리고 떠들어 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거짓에 짓눌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외면하며 살 수 있을지 묻고 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대위는 군인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인류문명사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역사 속 사건들을 연구하며 인간의 고통에 대해 추상적으로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론을 세워 나갔을 것이다. 열 네 명의 목사들 또한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자신들의 신앙을 살아가며 그들이 밝히거나 숨겨야 할 진실은 또 다른 곳에서 맞닥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약이란 것은 가정할 수 없다고 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고 그것을 맞이하는 인간은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잔인하지만 인간이 인간일수 있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애써 감추려고 했던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순식간에 튀어 나올 수도 있다. 상황이 수없이 바뀌면서 각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왜곡될 수 있지만, 해석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지 벌어진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평양을 점령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상황은 또 바뀌게 된다. 국군은 서울을 버리고 피란을 갔던 것처럼 또 평양을 떠난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고향을 버리고 살고자 남으로 내려온다.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기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또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가 죽어갈 수 도 있을 것이고,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본능만 남은 사람들에게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며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한 번 전쟁 속에 내버려진 인간은 싸우고 견디며 살 수 밖에 없다. 결국 고통은 인간의 몫이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이 살고 있는 곳곳이 전쟁터일지 모른다.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아닐지라도 살고 버티기 위해 매일을 바동거리며 살아야 하는 삶에 진정한 평화가 자리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마음속에서도 수많은 갈등과 잔인함이 도사리고 싸우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삶의 한순간, 반짝거리며 빛나게 해 주는 환희의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없으나 한번쯤 주어진 인생 속에 느끼고 나서야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그것을 절망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 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죽음 속에서도 다시 태어나는 생명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면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그것은 오로지 한계가 있고 유한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천사도 악마도 그것은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그 짜릿한 순간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기 위해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 슬프고 무의미하다.

 

신 목사가 다시 소곤거리듯 말했다.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283.p

 

신 목사의 당부 속에서 이성적이던 이 대위도 흔들리게 된다.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신은 알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을 떨칠 수 없으나 고통 중에서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는 또 다른 질문을 만들고 애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하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하나는 역사의 안에서, 또 하나는 역사의 건너편 저 멀리에서 각기 구원과 정의를 약속하며 각각 자기 쪽에 충성해줄 것을 요구하는 그 두 개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인가? 310.p

 

신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질문할 것이고, 인간은 그 속에서 방황하며 답을 찾으려고 애쓰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인간도 고통 속에서 무언가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각자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애쓰며 살아갈 것이다. 생명은 살아가라는 명령이니까. 산다는 것은 역시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일 테니까. 살아가는 한 아무리 죽음과 썩은 배설물 같은 땅을 헤맬지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반짝거리는 고유한 순간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초에 창조되던 순간 신이 불어넣은 생령을 가진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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