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의 여행은 영원히 진행 중

 

 

1.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나는 패키지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잠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나의 패키지여행은 중국 상하이, 항주, 소주를 도는 45일 여행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에 호텔 조식을 먹고, 8시에 다시 모여 출발하는 이른바 678 아침 스케줄이 내게는 강행군이었다. 그 뒤로는 패키지여행을 가지 않았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직접 여행준비를 하고 현지에서는 오전 시간을 느긋하게 즐긴다. 지금도 나의 국내외 여행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여유를 즐기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두고 싶다.’

마흔 살이 됐을 때, 왠지 그런 다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아온,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 이를테면 풍경이나 축제 같은 것.

봐두고 싶네. 하지만 갈 일은 없을 테지.’

그렇게 동경했던 곳으로 앞으로 10년에 걸쳐 다 다녀보는 건 어떨까?

등을 민 것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패키지 투어의 존재였습니다.

- 여행을 시작하며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두고 싶다는 소망은 저자만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탐할 권리와 본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특히 처음에 나오는 북유럽 오로라 여행은 마음을 먹는다 해서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새벽 두 시가 지났고, 기온은 영하 18도인 세계.’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의 마음도 두근거렸다. 코끝이 아릴 정도의 차디찬 밤공기 속에서 발을 동동 거리며 오로라가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은 저자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 누구일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일 것이다. 패키지여행이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오로라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여행객 대부분 60대 이상 부부도 있지만, 여성 그룹이 많아서 재잘재잘 무척 즐거워 보인다. 북극권 여행이다. 춥고 멀고, 상당히 힘들 텐데 지친 기색도 없어서 젊을 때밖에 갈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나를 반성했다. 젊지 않아도 어느 때라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같다. 30.p

 

  애쓰고 수고한 자신을 위해, 육체를 이끌고 새로운 세계까지 걸어 나온 여행자는 장소를 옮길 때마다 다시 태어난다. 젊지 않아도 괜찮다. 나이 들어가는 것에 쫄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워진 나나로 돌아오는 우리는 행복하다. 혼자 참가해서 청승맞아 보일 수 있어도, 시간에 쫓겨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을 35일로 밖에는 다녀올 수 없어도 떠나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벽돌색 지붕의 귀여운 구시가지. 많은 관광객이 그 경치에 빨려들었다. 더 천천히 보고 싶었는데, 투어는 항상 시간에 쫓긴다. 특히 이번에는 독일 35일이라는 총알 투어다.

그런 여행으로는 아무것도 본 게 안 돼.”

하는 의견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는 남을 터. 아무것도 본 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정할 것인가? 59.p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여행을 할 수 있지만,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체력이 받쳐 주던 20~40대를 지나, 힘에 부치는 나이가 되었거나 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 혹은 동행자 없이 멀고 험한 여행지를 선택해야 할 때는 자유여행이 아닌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안의 중심에 패키지여행이 있다. 또 이 여행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패키지여행만 있다면 몇 살이 되었든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용기를 내어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지루한 일상의 자리로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저자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두 눈과 마음속에 차곡차곡 간직하고 싶은 나도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한때 나의 SNS 아이디는 걸어야 할 이유를 찾다였다. 걷기는 좋은 친구이자 삶의 돌파구였다. 땅을 디디며 두 발로 체중을 느낄 때 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걷기에 대한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당장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싶어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한량처럼 빈둥거렸을 때, 나를 일으켜준 것은 걷기였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족들이 모두 나간 후였다. 오전의 햇살이 집안의 먼지까지 비춰줄 때 나는 느릿느릿 세수를 하고 밥을 먹었다. 그다음 잠시 멍하니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벚꽃 피는 봄에 가고 싶었던 남산이 창밖으로 보였다. 나는 신발을 주섬주섬 주워 신고 가까운 남산을 향해 걸었다. 차비도 들지 않고 무엇보다 하염없이 시간 보내기에 좋았다. 국립극장 앞에서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산책하기 좋은 코스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어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영화배우 하정우가 아니라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었을 때, 화려한 배우의 삶 뒤로 끊임없이 걷고 고민하고 조금씩 나아가는 인간 하정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걷기 예찬을 읽으며 아무 것도 아닌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재의 나는, 긴 인생을 두고 보았을 때 1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세상 모든 고통과 우울을 껴안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29.p

 

-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34.p

 

  그런 우울한 기분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20대 초중반의 아름다운 청춘이 잉여 인간처럼 자신의 존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참 쉽다. 기분의 힘이 세다는 것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때 나는 열심히 걸었다. 걸으면서 산에 핀 꽃들도 많이 보았다. 아기였을 때, 우리는 걷기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았던가. 기억나지 않겠지만 온 힘을 다해 한발을 내딛었을 것이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앞을 향해 걸으면서 환희의 함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걸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9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8키로가 조금 안 되는 배낭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는 걸 그때 느꼈다. 발의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팔에 깁스를 했을 때, “너는 다리를 다친 것이 아니고 팔을 다친 것이니 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 라고 말해준 의사 덕분에 열심히 걸어서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착했다. 배낭과 한 몸이 되어 끝까지 걷겠다는 나의 결심은 운반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삶의 변수는 나의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고 다른 방법과 타협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는 조금 불편하지만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걸어보니 알 수 있었다. 오롯이 두 발로 걸어간다는 것, 그것이 자유라는 것을.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지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291.p

 

  여행이란, 두 다리를 움직여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걸을 수 있기에, 아니 혹여 걸을 수 없다 하더라도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훌훌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이니까. 걸으면서 시작되고 다시 걸어서 돌아올 수 있는 우리의 여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3. 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내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을 때, 아빠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201812, 폐렴으로 입원하신 아빠는 담낭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아빠는 항암치료를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담당 의사도 80세가 넘은 어르신께 항암치료 보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추천했다. 자신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하셨다면서. 그때쯤 마스다 미리의 <영원한 외출>이 나왔다. 마음을 잡지 못해 힘겨워하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누구나 부모의 죽음을 맞이한다. 명백한 사실이지만 애써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가까운 미래. 누군가 모두 겪는 일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슬픔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구나. 저자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 속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은 본인에게나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앞으로 하루하루 체력이 떨어질 거란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25.p

 

  우리 가족은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깊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족티를 맞춰 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주말이 되면 교외로 나가 외식을 했다. 한편으로 나는 1년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취소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빠는 내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으셨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여비까지 보태주었다. 자신의 병과 나의 여행은 무관한 것이며, 삶의 계획은 각자 다른 것이라고. 다행히 아빠는 내가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다.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나를 독려해 주신 것과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신 것. 그리고 나 혼자 걸어갈 수 있도록 80여 년 동안 내 인생의 여행길에 동행자가 되어 주었던 모든 것이 말이다.

 

사람은 먹으면 힘이 나는 것 같다.

그 핑계로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온 죽음을 앞에 두고 일을 하고, 가을옷과 구두를 사고, 카페에서 케이크를 먹으면서 책을 읽었다.

퇴원 후 아버지의 취미는 오로지 식(). 다음 식사 때는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저녁 식사 후, 내일 아침은 어묵을 먹고 싶어.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는 어묵 재료로 어떤 게 좋을까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두부, 엄마는 곤약, 나는 무, 평화로운 한때였다. 아버지는 내일 아침 세븐일레븐에 어묵을 사러 가겠다고 선언하고, 침실로 사라졌다. 39.p

 

  어느 날, TV를 보시던 아빠는 푸른바다를 보고 저기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화면 속에는 남해바다가 사파이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아빠와의 여행을 준비했다. 아빠와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느 한 때의 봄맞이 여행처럼 하동의 매화를 구경하고, 섬진강 재첩국을 맛있게 먹으며 남해로 내려가 23일을 보냈다.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매화나무 아래서 엄마와 나란히 서서 웃고 계시는 아빠사진을 보면, 인간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 처음 사랑했을 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웃음을 잃지 않을 것, 자연의 변화를 함께 느끼며 떠나간 이를 그리워할 수 있도록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줄 것.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연습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온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작해도 아무도 볼 수 없는 작품.

그 작품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를 아는 데 의미가 있다.

 

가지 못해도 좋다. 보이지 않아도 좋다. 아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97.p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그것이 흰나비를 대신하는 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힌트는 바깥에, 사람 수만큼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98.p

 

  비록 핸드폰 영상 통화와 메시지로 보낸 동영상뿐이었지만, 아빠는 내가 바로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있을 때 함께 계셨고, 포르투의 동루이스 다리에서 맞았던 바람 소리도 함께 들었다. 지금은 곁에서 함께 할 수 없지만, 나는 아빠가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을 여행 중이라고 믿는다. 병들고 나약한 노인이 아니라 걱정 없이 상쾌하고 가뿐한 여행자가 되어서 말이다. 먼 훗날 나도 그 여행에 동참하게 되겠지.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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