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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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후에 남은 것들

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산문집

 

 

  사람이 호감을 갖고 다가왔을 때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잡아 주는 것이다. 서로 손을 잡음으로써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조금씩 마음을 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존재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손을 내미는 것은 최초의 용기이고, 떨림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도 우정도 그렇게 시작된다.

 

 

기꺼이 원했던 건

손을 내미는 것.”

 

이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우리 삶은 결코 돌이킬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원했던 건,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고. 12.p

 

 

 

  그래서인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초등학교 수업시간, 선생님과 친구들 몰래 짝꿍이 내민 손을 잡고 가슴 뛰게 행복해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철없던 어린 소녀였지만, 그 감정의 시작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사랑도 현재 진행 중일 때보다 그 열기가 식고 끝났을 때 그 실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사랑하던 대상이 변했거나 사라졌을 때, 그 뒤에 남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 느끼고 체험했던 기억과 그것들의 변주이다. 그래서 그 이후 남겨진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사랑이 삶을 확장시키거나 갉아먹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을 갈망하고 또 다른 사랑 속에 뛰어들게 만든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 사랑은 큰 에너지이자 환상이다. 아름답지만 슬픈 환상.

 

 

언젠가부터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과 맞닿은 무수한 기억의 편련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미지들은 하나의 확고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돌연히 나타나는 섬광과도 같다. 그 빛은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강타하여 잠식한 뒤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그런 빛들이 없었다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 빛들의 자취는 내가 캄캄한 삶 속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지도와도 같았다. 14.p

 

  만약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이 없다고 믿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삶은 더 효용적이고 간결해졌겠지만, 그만큼 건조하고 재미없는 삶이 되었을 것이다. 깊은 밤, 눈을 감고 감미로웠던 순간을 되씹어 보는 시간과 나 아닌 타인의 슬픔에 가슴저려가며 눈물 흘려주던 보석 같은 사랑을 잃고 어떻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름다워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눌 줄 알기에 사람들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그 잔상들을 붙잡으며 단단히 견디고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

 

 

  장혜령의 문장은 산문이면서 시이다. 사랑의 잔상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풀어놓았고, 소유했다. 그러나 그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또 다른 자신만의 사랑과 문장을 갖게된다. 그리고 나아가 읽는 이의 마음을 감싸준다. 사랑의 잔상들이 사랑을 잃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들의 버팀목 같다고 속삭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면서도 힘이 있다.

 

 

영어 단어 'deliver'에는 전달하다라는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뜻 외에 구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손에서 손으로 무엇을 전한다는 것,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그 무엇을 옮겨놓는 일에 구원의 의미가 담긴다는 것은 무척 상징적이다. 205.p

 

 

  사랑은 작가에게 수많은 잔상을 남겨 주었다. 그 잔상들은 우리에게 사랑의 문장이 되어 다가왔다.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아주며, 손에 담긴 무언가를 소중히 받고, 다른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건넨다는 것은 참 떨리면서도 무언가 벅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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