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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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연이 베풀었던 위로와 치유, 경이로움, 나를 작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었던, 그래서 행복했고 고마웠던 수많은 순간이 수시로 떠올랐다. 제주도 여행 중 친구와 심하게 다투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쏟아질 듯 끝없이 펼쳐져 있던 반짝거리는 별들을 보며 갑자기 화가 풀리고 함께 웃었던 일, (정말로 그 순간 친구와 싸웠던 일이 별거 아닌 일이 되었다.)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던 중 넘어져서 어깨에 가늘게 금이 갔지만, 반 깁스를 한 채 천천히 걸어가며 사람들과 나무, 공기, 심지어 북스페인 소들에게까지 받았던 위로와 도움은 나를 끝까지 산티아고를 향해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장소와 기후까지 포함하여)들을 통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자원을 얻을 뿐 아니라 한없는 지혜와 치유까지 선물 받고 있다.


 

 저자는 일관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가 생명과 삶이자 동반자임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의 편한 삶을 추구하며 도시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그것을 알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지만. 자연은 인간을 오래 기다려주고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라고. 조물주가 심어 놓은 자연 속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을 통해 인공으로 해결할 수 없는 힘을 찾아보라고.


 

아동 성도착자에게 시달린 4년 반, 그리고 우리 세 식구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을 겪고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캘리포니아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일까? 삶의 방향이 꺾이고 고통에 봉착할 때마다 나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28~29.p



동틀 녘 구슬피 우는 산비둘기 소리, 인적 없는 토팡가협곡과 로렐협곡,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산토끼들, 주마와 레오카릴로의 긴 해변들, 그 해변에서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거대했던 파도. 이 소리들과 장소들이 없었다면, 주삿바늘처럼 날카롭게 (또 다른 날에는) 연기처럼 자욱하게 벨리에 쏟아지던 햇살이 없었다면, 갓 맺힌 단추 모양 유칼립투스 꼬투리의 톡 쏘던 내음과 내 손가락에 달라붙던 후추나무 이파리들이 없었다면, 이것들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소멸되었을 것이다. 짐승의 침대에 축축한 헝겊 인형처럼 팽개쳐져 있다가 다른 문을 통과해버렸을지도. 74~75.p



 저자는 어린 시절 소시오패스의 병적 자아도취자이자 아동 성도착자인 쉰여섯 살의 남자에게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성폭행을 당했다. 힘없는 어린 남자아이는 자기가 잘못하여 병에 걸린 것이란 협박과 폭력에 대항하지 못했다. 심리적으로 엄마와 어린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그에게 벗어나 도망갈 수 없다는 절망에 제압 당한 채 새아버지를 따라 맨해튼으로 이사가 기 전까지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때 받았던 고통은 저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따라다녔고, 수십 년 동안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랬던 그가 순간 순간 고통을 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주는 위로와 치료가 아닌 자연의 경이로움과 동물들이 살아가는 매일의 모습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상처를 회고해 나가는 글의 소제목을 무섭도록 풍부한 물하늘 한 조각이라고 정하였다.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이 숨 쉴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는 것에 어떤 것이 있을까? 어린 소년에게는 캘리포니아의 물과 햇살, 동물과 나무들, 소리가 구원이자 힘이었다. 자연의 광대함과 성실함, 황폐한 환경과 무언가를 덮친 것 같은 공포를 뚫고 기어이 존재를 드러내는 자연의 구성원들이 소년의 삶을 붙잡아 주었다. 자연은 저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글로 남겨 주었다. 나는 그 고백이 눈물 나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물이 상처 입은 소년의 몸과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내 안에서 점점 커지는 광막한 사막을, 나를 위협하는 그 무엇을 나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라고 물을 찾기만 하면 될 거라고.

알고 보니 나의 물은 보통의 삶이었다.…… 자기 삶 깊숙이 무언가를 간직하려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결심이 물이었다. 그것은 한눈팔기를 멀리하는 태도였다. 75.p

 


 사막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물은 생명이다. 그 물이 있어 타는 갈증을 견디고 모래바람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저자가 자연에서 얻은 힘은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고, 먼 훗날 고통의 현장에 직면하게 했으며,(물론 너무나 힘겹고 역겨운 고통의 과정이었지만) 몸과 마음을 옥죄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온몸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자연이 준 선물이자 그에 대한 은혜 갚음이다.



 나는 요즘 고래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 고래에 관한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며 글을 쓰고 공부하면서 나 자신부터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고 반성하게 된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얼마나 많은 수의 종을 멸종 시켜야 사라질까?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다른 종에 대하여 알아가면 갈수록 멸종의 끝에 인간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확실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충분히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 교만해 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가 속한 세상은 많이 부서지고 병들고 부패해가고 있다. 자연 보호와 환경오염에 대해 외치는 것이 너무나 촌스러운 슬로건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렇지만 우리는 3년의 코로나 시대를 겪지 않았나. 나는 비교적 뒤늦게 코로나에 전염되어 다른 사람들처럼 매우 심하게 앓지는 않았지만 메마르고 갈라진 목을 약과 따뜻한 물로 버티면서 앞으로 또 다른 전염병이 유행하게 될지 지레 겁을 먹었었다. 우리가 다른 종의 영역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고, 그들의 삶을 파헤치고, 포획하고 죽이기를 반복한다면 자연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반격해 올지 겁이 난다.



 고래를 공부하면서 내가 깨닫게 된 건 우리가 다른 종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지구의 다른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그들이 자연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자연은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구라는 공간을 함께 공유하며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분명히 좋은 일일 것이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때 나는 엄마와 강릉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식당에서 20분 가량 떨어져 있는 숙소까지 엄마와 함께 바다를 보며 걸었다. 중간 중간에 모래사장에 놓여 있는 나무 그네에 앉아 말없이 바다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하고 따뜻한 저녁이었다. 멀리 떨어진 깊은 바다에 향유고래들이 서서 잠을 잔다고 한다. 바닷속에서 나무처럼 서서 잠든 향유고래들의 모습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바다 어디에서도 혹시 잘못 알고 헤엄쳐온 향유고래가 서서 잠을 자고 있지 않을까. 나는 강릉 경포 바다에서 향유고래가 서서 자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 했다. 그리고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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