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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혼 2 - 오랜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김상대.성낙희 지음 / 청울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딱 1년 전 이맘때쯤 [논어]를 읽고 1년 만에 다시 [논어의 혼 2]를 읽었다.
[논어]는 동양의 고전 중 가장 많이 읽혀 온 책이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책이다.
지금까지 [논어]와 관련된 책이 3천여 권이나 발간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세상사는 이치나, 교육, 정치 등에 관해 논의한 이야기를 모은 책이며,
동양 고전 중 글이 간략하고 함축적이며 공자에 대해 가장 많이 알 수 있는 책이다.
그 안에는 공자의 혼잣말이나, 제자와의 질의응답이나, 제자들만의 대화 등이 기록되어 있다.
[논어의 혼 2]는 이전의 [논어] 번역본들과 많이 다르다.
[논어]의 제 2권 위정편의 중요한 몇 구절을 가지고 인생을 진지하게 이야기 한다는 점이 그렇다.
김상대, 성낙희 부부 저자가 논어를 통해 들려주는 인생이야기를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나는 몇 군데의 여울을 만났고, 거기서 잠시 숨을 고르며 읽고 또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을 거듭해서 읽었으나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어 조심스럽게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공자는 15살이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다.
공자가 말하는 학문이란 내면을 경작하고, 내면의 정원을 가꾸고, 내면을 농사짓는 기술이나 자세를 터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리다면 어린 열다섯 나이에 진리를 탐구하고 삶의 본질적인 것을 행하려 노력하며 내면의 성장을 위한 삶을 다짐하는
것은 놀라운 통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정보와 학교교육의 성취를 '쓰레기 같은' 것으로 매도하며
오늘날의 배움을 폄하하는 듯한 자세는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한다.
내면의 성장과 성숙이 '정보'와 '제도권 교육'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을 무시하고 쓰레기 취급하는 듯한 인상은 교육자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 정보의 시대를 지나 지식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은 지혜의 시대이며 앞으로 도래할 시대는 유비쿼터스 시대이다.
지혜와 유비쿼터스는 정보와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유비쿼터스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소견인지 모르겠으나 내면에 치중하여 정보와 지식을 쓰레기 취급하는 사람은 사람은 좋은데 실력이 없는 사람이거나,
진리나 종교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구도자의 삶을 살 수는 있으나 비현실적인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둘째,
공자는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다.
저자는 공자가 마흔에 불혹하였다는 것을 인류 최초의 유혹인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과 관련하여 소개한다.
저자는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고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지식의 나무 과실(선악과)을 따 먹음으로 해서 스스로 에덴에서 떠나버렸다고 한다.
때문에 신도 아담을 추방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아담이 스스로 에덴을 떠난 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순간, 삶이 우리에게 부어주는 아름다움으로부터, 축복과 즐거움과 행복으로부터
우리는 추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먼저 먹었다면 추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유는 지식이 삶을 통해 얻어지고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다면 추방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러나 아담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았기에, 불로소득으로 얻은 지식은 불완전한 것으로 가짜라고 주장한다.
빌려온 것이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질 때 진짜이며 즐거움을 더해주는데, 아담은 순서를 바꾸어 먹어서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위 내용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
선악과 사건은 신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과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이야기이지 지식이나 앎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신은 인간을 말 잘 듣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을 뿐더러 명령에 따라 생각이나 감정 없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도 원치 않는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인간이 설령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신의 명령에 불순종 하더라도 우리의 선택을 존중한다.
다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우리에게 물으신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을 자백하고 돌이키면 자비로움으로 용서하신다.
성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기록하고 있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으로 마땅히 죽어야 할 목숨이다.
그러나 신은 이들을 추방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매듭짓는다.
죽어야 할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에덴에서 쫓아내는 것이지 결코 아담 스스로 떠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둘.
저자는 아담이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먼저 먹고 금단의 열매를 나중에 먹었다면 추방되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먼저 먹으나 나중에 먹으나 범죄하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 즉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나중에 먹었더라도 추방당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신학자는 아니지만 이쯤에서 나는 내 상식을 동원해 생각해 보았다.
과연 그들이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은 상태에서 선악과를 먹었을까?
내 대답은 NO,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먼저 먹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뱀이 와서 유혹하기까지 아담과 하와에겐 따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생명 나무의 실과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따 먹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뱀이 와서 유혹할 때까지 그것을 먹지 않았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셋.
저자가 말한대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진짜 지식이고 책이나 사람들, 사회로부터 얻은 지식은
불로소득으로 얻은 지식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며 가짜라는 의견은 납득하기 어렵다.
저자는 이 논리를 내세워 아담이 자신의 경험으로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먼저 먹고
나중에 선악과를 먹었다면 추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뱀, 즉 사회로부터 얻은 지식은 자신이 경험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므로 불로소득이며 불완전하며 가짜이기 때문에
추방당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 논리라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식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지혜'라면 몰라도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은 경험에 의한 것보다는 학교나 책, 사람들에 의한 지식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유한한 인생이 어찌 그 많은 것을 언제 다 경험해서 자신의 온전한 지식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자신의 경험에서 오는 앎만큼 값지고 귀한 것은 없을 게다.
하지만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도 앎을 얻을 수 있고,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쌓으며 지식을 축적할 수도 있고,
선생님이나 부모님, 심지어 어린 아이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와 다른 내 생각이 주제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오해를 한 것 일 수도 있고 저자의 견해를 잘못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해를 줄이기 위해 거듭 읽었다.
그래도 잘못 해석한 거라면 반대 의견을 수용할 각오로 이 글을 썼다.
무례한 내용이긴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