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판타지
김별아 지음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족처럼 허물 없고 편한 관계는 아마 없을 것 같다.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부시시한 얼굴과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보여줘도 아무렇지 않고,

무릎 나온 추리닝을 입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고,

굳이 예의를 갖춰 대하지 않아도 괜찮고,

신경질이 났을 때도 일부러 고상한 척 하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이다.

 

적당히 신비로운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신비로움을 유지하려면 가릴 것도 많고 차릴 것도 많아서 귀차니스트인 나는 신비로움 대신 편안함을 택했다.

외출을 하지 않는 날에는 양치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랑할 만한  백색 피부를 가진 자연미인도 아닐뿐더러 미인형의 외모도 아니면서 세수 안한 맨얼굴로

무릎 나온추리닝을 입고 당차게 활보한다.

그래도 예의 없다고 나무라거나 불결하다고 흉보는 이 없다.

 

이렇듯 편하고 익숙한 관계가 가족이나 때론 이런 편함이나 익숙함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예의를 갖추어 대하지 않아도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편해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대한다.

하지만 그건 무례이며 독선이다.

가족간에도 적당한 예의는 필요하고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본인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본인만큼 모른다.

알아주겠지하는 기대가 무너지면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사람이 안고 있는 상처 중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제일 많고 깊다는 점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것도 떳떳하게, 가끔은 위협적으로, 때론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리고 함부로.

 

 

[가족 판타지]는 가족에 대한 신선하고 산뜻한 시선이다.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녀만의 독특한 시선과 신선한 감각으로 당차게 허물고 있다.

그녀가 희망하는 가족 판타지는 "내일에 저당 잡히지 않은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족,

혼자서도 행복하고, 헤어져도 행복하고, 다시 만나서도 행복하고,

상처와 장애와 실패와 절망 속에서마저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저자 김별아 씨는 매서움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닌 작가가 아니가싶다.

가족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부드럽고 섬세하나 

가족 구성원에 대한 하나하나의 입장은 단호하며 날카롭다.

그리고 솔직하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듯한 필체에 힘이 실려있고 당당함이 느껴진다.

그녀의 이런 자신감이 좋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나

세상의 모든 아내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싶다는 소신엔  동참하고 싶었고,

가정은 부모의 뜻에 맞는 '좋은 아이'를 제조하는 곳이 아니라는 조언과

결혼 10년 후  자연스레 변해버린 부부관계를 엿보면서는 나와 닮은 구석을 발견하고  반기기까지 했다.

아이와 좌충우돌하는 모습이나 젊은날 유난했던 방황은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올 정도였다.

방황의 원인은 다르지만, 반항의 강도는 그녀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나도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가족 판타지]에는 가족에 대한 저자의 확고하고 분명한 신념을 만날 수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가족에 대한 개념도 많이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조건 희생과 헌신을 하는 어머니는 더이상 현모양처가 아니며,

희생과 헌신을 '무기'로 가족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남편과 아이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한다.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와 아내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나

그 의미와 표현의 양식은 분명히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넘어 가족 모두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판타지를 그녀와 함께 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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