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술작품이었을 때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은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각각의 매력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매력보다는 잘생긴 사람의 외모를 부러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매력에 매력을 더 느낀다.

특별히 우리의 주인공 피렐리처럼 잘생기기도 않은데다가, 눈에 띄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평면인간에다가,

주목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비교의식은 더욱 심할 것이다.

 

피펠리의 비극은 희대의 미남이자 최고의 인기스타를 형으로 두었다는 데 있다.

그것도 둘씩이나.

그러니 밤낮 잘나고 인기 좋은 쌍둥이 형들과 비교하며 서글프게 산다.

형들과 비교해볼 때 피렐리는 볼품없고, 못나고, 싱겁고, 부족한 것 투성이의 초라한 동생이다.

주목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해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번번히 실패한다.

그러다 지난 수천년 동안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성공확률 100%를 자랑하는 자살방법에 도전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패가 아니라 유보한 것이다. 24시간 동안.

 

하루 동안 자살을 유예시킨 피렐리는 프랑스에서 가장 추앙받는 예술가 제우스 페테르 라마와 계약을 맺는다.

제우스 페테르 라마는 돈 많고, 인기 좋고, 잘 생긴, 그야말로 피렐리와 정반대의 사내이다.

이 예술가에게 피렐리는 영혼과 육신을 맡긴 채 죽고 '아담 제 2호'라는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몸을 판 대가로 피렐리는 그렇게도 바라던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과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이뤄 세상의 찬사를 한몸에 받는다. 

원하던 것을 성취한 피렐리는 이제 행복한 일만 남았다.

이젠 행복을 누릴일만 남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가 예술작품이었을 때]는 번역서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문장이 매끄러워 막히는 데가 없는 소설이다.

때문에 몰입해서 일을 수 있었고, 독특하고 기발한 소재와 스토리 전개도 독자를 작품에 빠지게 만드는 데 한몫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 사랑, 예뻐지고 싶은 욕망과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등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지난 주에도 젊은 연예인의 자살 소식을 접했다.

예쁘고 유명하고 인기 좋은 그녀가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런데 요 며칠 그녀의 죽음을 두고 시끌한 인터넷과 후끈 달아오른 네티즌을 볼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머릿속을 멤돈 생각은 그녀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피렐리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면,

그가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 자신을 영원히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예술작품이 된 후에야 비관하고 우울해하며 삶을 낭비하던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다.

 

인간이라는 것이 참 어리석다.

우리는 현재의 불행 속에서 과거의 행복을 찾고, 오늘의 불평 속에서 어제의 감사를 발견한다.

그도 아니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며 감사할 거리를 찾던가.

피렐리 역시 자유 잃은 문화재 신세가 되고 나서야 과거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그때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했던 것을 괴로워하며 통곡한다.

어디 피렐리 뿐이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편한 시골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과거의 편리한 생활에 감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불편함과 수고로움을 끝없이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이다.

오늘의 슬픔은 과거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한다.

과거의 기억은 오늘의 동력이 되어 피렐리를 끌어준다.

피렐리를 한 남자로 받아주고 인정해주고 사랑해준 피오나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도 그는 멈출 수 없다.

 

두 사람이 평범한 사람으로 만나 서로 사랑했다면 더 좋을법도 하지만,

생명의 소중함이나 인생의 소중함을 늦게나마 발견한 것으로 위안삼는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에 자신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그 시간에 자신만의 실력을 키우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를 탓하기 전에 나부터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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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이종호 지음 / 글로연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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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외국의 초, 중, 고, 대학생 및 교사들이 세계사 수업시간에 즐겨 찾는 교육 포털사이트가

한국의 삼국시대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했던 것을 시정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삼국의 건국 연도를 고구려는 BC 37년 대신 AD 100년으로,

백제는 BC 18년 대신 AD 250년으로, 신라는 BC 57년 대신 AD 350년으로 각각 기술했다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고구려는 137년, 백제는 268년, 신라는 407년의 역사사 사라져 버린 셈이다.

 

그런데 더 기막힌 사실은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외국 포털사이트가 기술한 그대로 쓰여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교과서는 역사를 왜곡해도 괜찮고 외국은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인가 보다.

그쪽에게 수정을 요구하기 앞서 우리 교과서부터 고치는 게 바른 수순일진대,

우리의 것은 고칠 생각도 않고 외국에다가는 왜곡된 역사니까 수정하라는 앞뒤 안 맞는 행동을 한 것이다.

우리의 앞뒤 안 맞는 모순된 행동을 저들이 알게 된다면 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스럽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식민사학의 영향이다.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고대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때 한국사는 식민사관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의 왜곡은 식민사학의 잔재이다.

 

우리 역사는 식민사학과 중화주의로 인해 심하게 왜곡되고 뒤틀렸다.

일제 식민사학은 단군 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 일대라고 주장했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강 이북이 중국사의 영역이라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관이나 중국 동북공정이 단군 조선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단지 한국 고대사를 빼앗고 말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궁긍적인 목적은, 특히 동북공정의 경우 현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를 모두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것과

우리의 영토 한강 이북 지역을 중국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속셈이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는 사료가 턱없이 부족하고, 의도적인 왜곡과 국수주의나 보수주의자들의 조작 등으로

수많은 학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우리 역사의 아킬레스건이다.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은 고조선 역사 논란의 대상과 고대 국가의 근원을 과학적인 자료를 통해

과학자의 시각으로 눈으로 설명하는 책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 뿌리 내린 실증사학을 비롯한 역사관에 대한 전말에서부터

동북공정의 전후와 동양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중화 5천 년', 동이족과 한민족의 연계관계를 설명한다.

이어 고대 국가 성립의 증거를 거쳐 대동강 중심설, 하기점하층문화고조선과 한강 유역 고조선설을 지나

동이에 의해 건설된 고대국가 상나라와 고조선, 고조선의 의문점을 다룬다.

 

저자의 지적처럼,

고조선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 논리가 부메랑이 되어 중국인들이 한국의 역사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현실이 어처구니 없고 답답했다.

"동북공정은 분명히 잘못된 시도이지만 중국 탓으로만 돌릴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윤내현 박사의 지적에 공감하는 바이다.

중국이 역사찾기를 할 때 우리는 고조선은 없었다거나 단지 신화일 뿐이라는 논쟁만 일삼고 있었다.

중국은 동북방(요하 일대)에 대한 고대사 유물 발굴과 과학적 조사를 치밀하게 진행하며 매섭게 한국사를 공격하고 있다.

중국은 유물과 과학적 검증을 통해 동북방 동이족 고대사를 자국사로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자기들의 논리를 내세워  그것을 대외에 발표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한민족 것이라고, 우리의 역사라고 목소리만 높였다.

그러나 목소리에 힘만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사학계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와  올바른 정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변국들의 도전에 대응해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고조선에 대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모아지고 우리도 우리의 역사찾기에 나서게 되길 바란다.

 

* 오타 신고*

10 페이지 밑에서 4번째 줄 [과학이 찾아준 잃어버린 고조선]이 아니라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11페이지 책제목 [과학이 찾아준 고조선]에서 띄어쓰기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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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중 처세어록 - 경박한 세상을 나무라는 매운 가르침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정민 교수님의 [미쳐야 미친다]는 1년 내내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나 마음이 울적한 날에 습관처럼 이 책을 펼쳐든다.

옛 선비들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지고 따뜻해진다.

화려한 삶은 아니었으나 감동적일 만큼 성실히 노력한 흔적이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스러움이나,

스승을 대하고 벗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그 어떤 삶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신분이 미천하고 평생 가난 가운데 허덕이는 질곡의 세월을 살았던 이들의 열정은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성대중 처세어록]은 18세기 영정 시대에 활동한 서얼 출신 문인 성대중의 가르침을 담았다.

이 책은 저자 이름만 보고 망설임 없이 선택한 책인데,

성대중이 이덕무와 가깝게 지내며 서로의 글을 평해주는 사이라고 하니 더욱 반가웠다.

이덕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비다.

서얼 출신의 두 사람이 규장각에서 함께 일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 책은 성대중의 저서 [청성잡기靑城雜記] 가운데 '처세'와 관련된 내용을 선별한 후 저자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성대중의 짧막한 경구를 저자답게 쉽고 담백하게 풀어놓아서 읽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책은

호랑이 처럼 매섭게 보고 소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는 호시우행(虎視牛行)을 말하고 있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중용을 강조하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오는,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실패의 경험이 성공을 만들고, 역겨이 있어야 순경(順境)이 달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 등을 말한다.

이밖에도 겸손과 기다림, 은혜, 가난과 도리와 배움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대중 처세어록]은 바른 몸가짐과 행실에 대한 교훈을 짧지만 굵은 어조로, 단순하지만 깊은 가르침으로,

소박하지만 매서운 목소리로 들려준다.

성대중은 '해로움을 멀리하는 법'을 이렇게 말한다.

"아침 해와 저녁 해는 한 햇빛이 옮겨간 것이다. 무더위와 매서운 추위는 같은 기운이 변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얻으면 반드시 저기에서 잃게 마련이다. 처음에 장하면 끝에 거서 만드시 시들게 된다.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까닭에 지극한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높은 자리를 사양하여 낮은 곳에 거하고,

부유함을 사절하여 가난하게 지낸다. 영화로움이 없으면 시듦도 없고, 공이 없으면 죄도 없으며, 복이 없으면 화도 없다.

몸을 온전히 하고 해악을 멀리함에 이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일시적인 기분에 교만하고 잠깐의 좌절에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햇빛과 계절에 비유한 문장이 탁월하다.

모든 만물에는 다 때가 있기 마련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영화로울 때가 있으면 시들 때가 있고, 부유할 때가 있으면 가난할 때도 있다.

해가 뜰 때가 있으면 해가 질 때도 있는 법이며,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도 있다.

영원한 여름이 없고 영원한 겨울이 없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세상만사도 영원히 지속되는 건 없다.

그러니 대비하는 인생, 욕심없는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지는 자세로, 검소한 생활로, 베푸는 마음으로,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 추운 겨울과 모진 가난과 저물어가는 권력의 때에도 서럽지 않을 것이며 해로움도 없다는 얘기다.

 

이렇듯 그의 가르침은 요란하고 거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은 결코 아니다.

내공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내공을 쌓으려면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마음을 휑궈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어찌보면 원론적인 이야기를 넘지 못하는 옛 선비의 고리타분한 이야기 같지만

처세에 있어서 몸가짐이야말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이 아닌가 한다.

겉모습을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한들 부실한 기본 위에서는 오래 버텨주지 못한다.

우리의 행실과 마음가짐을 돌아보게 하는 이 책은 천천히 읽을수록 깊고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옛 선비의 따끔한 가르침을 배우고 싶은 분들,

내면을 살찌우고 싶은 분들, 진정한 처세를 배우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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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 왕을 꾸짖은 반골 선비들
정구선 지음 / 애플북스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조선은 519년이란 긴 기간을 존속한 왕조였다.

이렇게 긴 왕조국가는 동, 서양의 다른 나라 역사에서는 찾기 힘들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보다 왕권이 약했던 조선이 왕조의 존속 기간은 가장 길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선의 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가 아니라  절대권력자였다.

중국의 황제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왕은 곧 법이고 왕의 말 또한 법이었으며 어명을 어기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감히 왕의 말을 거역하고, 왕을 부름을 외면하고, 심지어 왕을 준열하게 꾸짖고,

왕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은 인물들을 만났다.

이들은 권력과 벼슬에 연연하지 않으며,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으며,

청렴하게 살며, 자연을 유람하며 시를 읊은 재야의 선비들이다.

이들은 처사(處士) 또는 유일(遺逸), 은일(隱逸) 등으로 불린다.

처사는 아예 벼슬하지 않은 선비나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출사하지 않은 선비,

몇 번 출사했다가 초야로 돌아와서 은거 생활을 한 사람을 말한다.

성수침, 조식, 윤선거, 성혼, 최영경 등이 이에 속한다.

 

[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이러한 처사들의 대쪽같은 선비정신과 신념을 소개하고 있다.

책은 송도삼절로 유명한 서경덕,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 왕을 진노하게 만든 송명흠,

벼슬을 마다하고 처사로 살다가 반란의 주모자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

영조를 감탄케 한 김창흡, 당쟁의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한 성혼 등을 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사를 만날 때마다 그들의 올곧은 정신과 '아니오'라고 거절할 줄 아는 단호함,

타협하지 않으며 정의로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용기에 그들이 우리 조상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해 식구들이 굶어죽거나, 억울하게 죽었거나,

왕의 부름을 번번히 거절하며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은 점이나,

쟁쟁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한 점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고급 인력의 손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지럽고 혼탁한 조정 뒤에서 나라를 걱정했다고 소임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임금의 책사가 되어 측근에서 임금을 돕는 게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자세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처사들의 지조와 신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나 온몸으로 부딪혀 나라를 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오죽했으면 여북했을까 하는 생각도 떨쳐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이 썩기는 매한가지.

차라리 눈에 안 보고 학문에 정진하며 명대로 살다 가는 게 신간 편한 일이다.

물론 처사들이 모두 명대로 살다 간 것도 아니고, 신간 편한 한량으로 산 것도 아니고,

돌아가는 나라꼴에 나 몰라라 한 것도 아니다.

 

항상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고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던 조식은 명종의 거듭되는 부름에 사직 상소를 올린다.

조식은 사직 상소에서

임금의 정치는 하늘과 인심도 떠나갈 정도로 망가졌고,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모두 썩어 문드러졌다고 비난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은 조식은 천하를 쥐고 흔들었던,

왕보다 더 막강한 권력자였던 천하의 여인 문정왕후를 향해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목숨을 건 발언이었다.

저자는 오늘날의 공직자들이 조식과 같은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부정부패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윗사람의 불의한 행동에 분연히 일어나서 항의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밥그릇 날아갈까 두려워 불의에 눈 감는다면 정의로운 나라는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명종에 이어 선조도 애타게 조식을 불렀지만 조식은 끝내 출사하지 않고 재야선비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기개있고 양심적이며 단호한 남명 조식과 처사들의 기백이 그리워진다.

 

오늘날 청와대 임명을 거듭거듭 거절할 인사가 몇이나 될까 싶다.

대통령을 준열하게 꾸짖고, 상관의 불의에 서릿발 같은 항의와 명예와 권력을 멀리하며 청렴하게 살 공무원이 몇이나 될까?

운명을 바꾸고 팔자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박차고 마다할 관료들이 있기나 할까?

우리의 정치는 오히려 처사들이 살았던 조선조보다 퇴보한 것 같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수준이나 의식, 그리고 애국심이 조선조 처사들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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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여행 - 약속의 땅을 향한 삶의 로드맵
이동원 지음 / 두란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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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집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내게 묻는다.

그러면 나는 천연덕스럽게 "여기가 어때서요?" 라고 반문한다.

사람들에게 이곳이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환경, 불편하기 짝이없는 환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맞다. 정확히 맞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내가 살고 있다.

여기가 어때서요, 라고 되물었지만 나도 속으로 여기는 야생짐승이 사는 곳이지 사람이 살만한 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겨우내 눈속에 파묻혀 있는 곳에서, 겨울만 되면 물이 끊기는 곳에서,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지는 강추위 속에서,

여름이면 온갖 벌레와 까치독사와 살모사가 우글거리는 속에서,

벌들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공장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처럼 크게 들리는 위험한 곳에서

내가 산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되었다.

애굽에서 호위호식하던 백성들은 아니었지만 그들 눈에는 적어도 광야보다는 애굽이 살만한 곳이다.

광야는 사람이 살만한 땅이 아니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툭하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잊고,

마라에서 기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잊고,

르비딤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을 잊고,

시내산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을 잊고 불평하고 원망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비난했다.

바다를 가르는 것을 목격하고도 저렇게 불평할 수 있을까,

쓴물이 단물된 것을 보고도 어쩜 저리 원망이 많을까 하면서.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내 믿음이 훨씬 좋다고 자만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날 때마다, 최소한  나는 저들보다는 믿음이 견고하다고 우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광야에 놓이게 되고 보니, 광야생활을 실제로 겪고 보니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음을,

아니 저들과 똑같은 나를 발견했다.

이곳으로 몰고온 남편을 원망하고, 남편에게 짜증을 부리고, 불평하고 화를 내는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게 아니고 남편을 원망한다고 어줍잖은 변명으로 나를 보호했다.

하나님께 불평하는 게 아니라 남편을 향한 불평이라고 하나님을 속이려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하고 믿음 없음을 한탄하던 내가 저들과 똑같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믿음없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날 시작된 기도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겐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인데 과연 나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하는.

목적지를 알게 되면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명확해질 것이다.

나는 여기에 왜 있어야 하는지,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는다.

궁금하다고 조르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빨리 옮겨달라고 채근하지도 않는다.

그저 기도하며 기다릴뿐이다.

이 훈련을 잘 통과하길 바라면서.

이동원 목사님은 훈련은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며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훈련을 받는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세우신 최고의 학교인 광야학교의 재학생이다.

이 최고의 학교에서 훈련을 잘 마치고 모범생으로, 장학생으로 졸업한 뒤 하나님이 이끄시는 데로 살기를 원한다.

그 일이 언제인지, 그것이 무슨 일인지, 그곳이 어디인지 아직 모르지만,

분명한 건 그렇게 사는 것이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사는 것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장식하고 싶다.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든 [인생 여행], 지금 이 자리를 견고하게 다져준 [인생 여행], 후반부 인생을 그리게 해준 [인생 여행]에

감사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하시고 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도 경외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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