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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 왕을 꾸짖은 반골 선비들
정구선 지음 / 애플북스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조선은 519년이란 긴 기간을 존속한 왕조였다.
이렇게 긴 왕조국가는 동, 서양의 다른 나라 역사에서는 찾기 힘들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보다 왕권이 약했던 조선이 왕조의 존속 기간은 가장 길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선의 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가 아니라 절대권력자였다.
중국의 황제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왕은 곧 법이고 왕의 말 또한 법이었으며 어명을 어기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감히 왕의 말을 거역하고, 왕을 부름을 외면하고, 심지어 왕을 준열하게 꾸짖고,
왕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은 인물들을 만났다.
이들은 권력과 벼슬에 연연하지 않으며,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으며,
청렴하게 살며, 자연을 유람하며 시를 읊은 재야의 선비들이다.
이들은 처사(處士) 또는 유일(遺逸), 은일(隱逸) 등으로 불린다.
처사는 아예 벼슬하지 않은 선비나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출사하지 않은 선비,
몇 번 출사했다가 초야로 돌아와서 은거 생활을 한 사람을 말한다.
성수침, 조식, 윤선거, 성혼, 최영경 등이 이에 속한다.
[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이러한 처사들의 대쪽같은 선비정신과 신념을 소개하고 있다.
책은 송도삼절로 유명한 서경덕,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 왕을 진노하게 만든 송명흠,
벼슬을 마다하고 처사로 살다가 반란의 주모자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
영조를 감탄케 한 김창흡, 당쟁의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한 성혼 등을 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사를 만날 때마다 그들의 올곧은 정신과 '아니오'라고 거절할 줄 아는 단호함,
타협하지 않으며 정의로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용기에 그들이 우리 조상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해 식구들이 굶어죽거나, 억울하게 죽었거나,
왕의 부름을 번번히 거절하며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은 점이나,
쟁쟁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한 점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고급 인력의 손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지럽고 혼탁한 조정 뒤에서 나라를 걱정했다고 소임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임금의 책사가 되어 측근에서 임금을 돕는 게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자세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처사들의 지조와 신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나 온몸으로 부딪혀 나라를 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오죽했으면 여북했을까 하는 생각도 떨쳐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이 썩기는 매한가지.
차라리 눈에 안 보고 학문에 정진하며 명대로 살다 가는 게 신간 편한 일이다.
물론 처사들이 모두 명대로 살다 간 것도 아니고, 신간 편한 한량으로 산 것도 아니고,
돌아가는 나라꼴에 나 몰라라 한 것도 아니다.
항상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고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던 조식은 명종의 거듭되는 부름에 사직 상소를 올린다.
조식은 사직 상소에서
임금의 정치는 하늘과 인심도 떠나갈 정도로 망가졌고,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모두 썩어 문드러졌다고 비난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은 조식은 천하를 쥐고 흔들었던,
왕보다 더 막강한 권력자였던 천하의 여인 문정왕후를 향해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목숨을 건 발언이었다.
저자는 오늘날의 공직자들이 조식과 같은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부정부패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윗사람의 불의한 행동에 분연히 일어나서 항의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밥그릇 날아갈까 두려워 불의에 눈 감는다면 정의로운 나라는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명종에 이어 선조도 애타게 조식을 불렀지만 조식은 끝내 출사하지 않고 재야선비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기개있고 양심적이며 단호한 남명 조식과 처사들의 기백이 그리워진다.
오늘날 청와대 임명을 거듭거듭 거절할 인사가 몇이나 될까 싶다.
대통령을 준열하게 꾸짖고, 상관의 불의에 서릿발 같은 항의와 명예와 권력을 멀리하며 청렴하게 살 공무원이 몇이나 될까?
운명을 바꾸고 팔자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박차고 마다할 관료들이 있기나 할까?
우리의 정치는 오히려 처사들이 살았던 조선조보다 퇴보한 것 같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수준이나 의식, 그리고 애국심이 조선조 처사들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