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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3월 하순에 때아닌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아침부터 내린 눈이 벌써 발목까지 쌓였다.
달래와 돈나물이 올라온지가 언제고 뒤란에 다람쥐가 출몰한지가 언젠데 무슨 눈이람.
이대로 계속 내리면 지난번처럼 고립될텐데, 버스도 일찍 끊길텐데,
학교에 간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올지 걱정되어 창밖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하늘이 온통 하얗다.
산안개인지 산안개구름인지 정체모를 거대한 흰 기류가 파란 하늘을 감쪽같이 하얗게 물들이고,
저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산마루를 떡하니 가렸다.
하늘도 가리고 산등성이도 숨긴 눈은 앞산 소낭밭과 뒤곁 밤나무숲과 고로쇠나무 위에 환상적인 눈꽃을 피우고도 부족했는지
솔잎 하나하나와 갈아엎은 채마밭과 외딴집 빨간 지붕까지, 골짜기 구석구석을 하얀 세상으로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러 내려운 눈송이들은 무에 그리 신이 났는지 바람 장단에 맞춰 사뿐사뿐 춤까지 추어댄다.
'눈송이 저것들이 지금 누굴 약올리나. 심란해서 손에 일도 안 잡히는데 뭐가 좋다고 춤바람이야.'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하루에 세 번 다니는 마을버스가 일찍 끊긴다.
학교에서 마을까지 오려면 한계령에 버금가는 고성재를 넘어야 한다.
오늘 같은 눈길에는 강원도 굽이길에 익숙한 토박이 운전자라도 그 험준산령을 넘으려고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도 어지간한 위급상황이 아니면 볼일을 다음으로 미루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눈이 잦았던 지난 겨울에 아이들은 이를 핑계로 툭하면 결석을 하거나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오후에 등교 했다.
눈 오는 날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다가 실제로 결석을 하자 쾌재를 부르며 신나했다.
두 녀석은 도시생활을 못잊고 불편한 산골생활에 툴툴거리다가도 눈 때문에 결석을 할라치면
하늘에 감사하고 산골로 이사한 부모에게 넘치게 감사한다.
"그래,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 너희들이 산골에서 버티지. 눈 오는 날에나 마음껏 놀아라."
그렇게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는 것은 곧 나를 위로하는 일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종일 혼자서 지내는 갑갑한 산골생활이 어느새 2년째다.
지금은 이곳 생활에 적응해서 외로움이나 그리움이 덜한데, 이사하고 1년 가까이 혼자서 속울음을 많이 울었다.
연고도 없고, 같은 또래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올 사람도 없고,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첩첩산중에 종일 혼자 있자니
종종 유배 온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마을과 뚝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한 집이며, 가끔 약초캐는 할머니가 산에 오르는 것 말고는 지나는 사람이 없는 것이며,
오는 사람도 오라 하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일상이 유배지와 진배없다.
처음 몇 달은 이사람 저사람의 안부전화로 그럭저럭 견딜만 했으나 반년이 지나면서부터 전화가 뜸해지고
그러면서 마음의 병이 찾아왔다.
아프다고 소리쳐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 만큼 서러운 일도 없을 게다.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쓸쓸하게 귓전을 울리는 내 신음소리를 눈물과 함께 삼키며 나는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책에 매달렸다.
미련할 정도로 읽었고 닥치는대로 읽었다.
읽을 책이 없을 때에는 같은 책을 거듭 읽었다.
그 중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정민 교수님의 [미쳐야 미친다]이다.
이 책을 베개 옆에 두고 잠이 안 오는 날이나 헛헛한 날에 수시로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채찍한다.
처음에는 무언가에 미쳤던 사람들처럼 나도 무언가에 미치기 위해 읽었다. 그래야 산 속에서 버틸 수 있으니까.
그러다 내가 미칠 그 무언가를 책 속에서 발견하기 위해 읽었고
나중에는 무언가에 미친 사람들의 삶이 미치도록 아름다워서 읽었다.
책 속 인물들은 처절한 가난이나,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한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적 성취에 온몸을 내던져 부딪혔다.
이들의 열정과 광기가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대부분 천대받고 멸시받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저자가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이름없고 힘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질곡의 세월을 산 이들이지만 누구보다 자유롭고 맑은 심성을 소유한 사람들이며
환경과 시련에 무릎꿇지 않고 열정과 광기로 당당히 맞섰던 사람들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주변 혹은 경계를 비껴간 마이너들이자 작은 영웅들이다.
궁벽한 두메산골을 불평하다가
고단하고 척박한 삶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성취'에 제 목숨을 걸 정도로 미쳤던 저들을 생각하면 입이 다물어진다.
황량한 광야에서의 고립무원 생활은 이제 더이상 유배가 아니다.
나는 지금 산골에서 하프타임을 맞고 있다고 나를 다독인다.
산골은 내 후반부 인생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묵묵히 준비하는 공간이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혹독하게 단련하는 장소이다.
물을 길어 먹고 땔나무를 나르고 매서운 골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힘겨운 생활은 단련의 과정으로,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과 그리움은 내가 미쳐야 할 것에 더욱 매진하게 하는 이유로 받아들인다.
뭔가에 미쳤던 저들처럼 나도 기꺼이 미쳐가기를 원하고, 그렇게 미쳐가고 있는 중이다.
눈발이 차츰 수그러들더니 햇살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대지를 감싼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 귀가 걱정도, 만산에 핀 눈꽃도 봄날에 눈 녹듯이 사라진다.
때 아닌 함박눈 때문에 쥐 죽은 듯이 고요했던 숲속이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 바스락거리며 내빼는 다람쥐 소리,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르는 산새들 소리,
집 밖으로 나온 몽이와 똘이의 개 짖는 소리, 눈꽃을 털어내는 나뭇가지 소리,
햇살에 녹은 눈이 처마 밑으로 미끄러지는 소리로 활기차다.
단잠에서 깬 숲이 기지개를 크게 편다.
나도 따라 기지개를 활짝 켜고 다시 미쳐가는 일상에 탐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