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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ㅣ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실제로 행사한 대통령은 모두 여덟 명이다. 현직 대통령을 제외한 일곱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어떠하며 역사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역사가 전직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그리 후한편이 아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뚜렷하게 나뉘어져 있고, 박정희 대통령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금기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국민들의 평가가 그리 후하지 않더라도 분명한 건 역대 대통령마다 분명한 ‘자기역할’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대립양상의 띄더라도 분명 그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대통령이며 그것이 그분의 역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꺼내면 안 되는 인물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이 나라의 경제발전의 초석을 세우며 가난과 빈곤의 사슬을 끊은 대통령이다. 그것이 그분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이며 사명이었다. 나머지 다섯 대통령 역시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이 있었고 그 역할에 충실했다.
대한민국에 8명의 전·현직 대통령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27명의 임금이 있었다. 스물일곱의 임금에게도 시대적 사명과 주어진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임금들은 과연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며 국정을 운영했는지 궁금하다. 이덕일 선생님은 조선의 여덟 왕을 골라 사료에 기초해 그들의 치세와 면면을 재조명했다. 보통 조선의 성군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세종과 정조를 떠올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만큼 많은 이들의 뇌리에 성군으로 입지를 굳혔기 때문이리라. 반대로 폭군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연산군을 떠올린다. 몰인정한 임금은 인조, 무능한 임금으론 선조를 꼽는다. 이덕일 선생님은 누구를 조선 최고의 왕으로 뽑고, 누굴 최악의 왕으로 꼽았을까?
[조선 왕을 말하다]는 악역을 자처한 두 임금으로 태종과 세조를 들고, 신하들에게 쫓겨난 임금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을 소개한다. 선조와 인조는 전란을 겪은 임금으로, 성종과 영조는 절반만 성공한 임금으로 소개하고 있다. 태종과 세조, 연산군과 광해군, 선조와 인조, 성종과 영조의 치적과 인물됨을 사료에 근거해 재조명한 이번 책은 그동안 우리에게 전해진 역사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알려주었다. 특히 연산군에 대한 이덕일 선생님의 재해석은 날카롭고 명쾌하다. 연산군이 폭군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던 데에는 사관의 붓의 위력이었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자를 밝히는 임금으로 묘사된 것도 붓의 힘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연산군 비판에 몰두한 사관의 기록을 진실인양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저자는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의 잘못을 사료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바로 세워준다. 역사는 연산군이 백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고, 임신한 박씨는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때 연산군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고, 박씨의 나이는 쉰세 살에서 쉰다섯 살이었다고 말하며 당시 이 나이의 여성이 잉태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50대 중반 여성이 임신하기는 지금도 어려운 일인데 그때는 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연산군은 대궐의 깊은 곳이나 연회장, 혹은 백주대낮 야외에서 집단 혼음을 벌이는 임금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러한 오류를 모두 바로 잡아준다. 연산군에 대해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읽은 독자들이 꽤 많을 듯싶다. 이는 저자의 말처럼 연산군 자신도 모르고 있을 게다. 자신이 역사상 가장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기록될 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사관과 사대부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색마로 기록한 이유는 반정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이 외에도 민간의 부잣집만도 못한 침실을 사용하며 지나치리만큼 근검절약한 영조,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악역의 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 태종, 유난히 험난하고 지리한 길을 걸으며 왕이 되었으나 쿠데타로 쫓겨난 광해군, 집권 내내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린 선조,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인조 등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담고 있다. 이덕일 선생님의 책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주어서, 재미있고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즐겨 읽는 편이다. 아니 빼놓지 않고 읽는다. 이번 책에서도 조선 왕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교정해주며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려준다. 보다 깊고 넓고 바른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만나도록 앞장서 이끄시는 이덕일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