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허벅지 옆에서 시작된 조그마한 온기가 몸 전체로 퍼지면, 웅얼거리는 듯한 속삭임이 귓가에 파고들면, 슬며시 눈을 뜬다. 고양이가 다리 옆에 붙어서 골골송으로 나를 깨우는 중이다. 살짝 쌀쌀한 새벽. 고양이 핫팩을 새벽마다 붙일 시기가 되었다. 다만 핫팩은 때론 말을 한다. 까까, 까까, 까까.


아침 9시. 반바지로 갈아입은 후 청소를 시작한다. 움직이면 몸에서 방출되는 열을 다 간직하기엔 아직은 조금 버겁다. 쓱쓱 밀대로 밀자, 고양이 털이 묻어 나온다. 슬슬 털을 찌워갈 시기라 빗질을 해봐도 예전만큼 털이 많이 빠지진 않는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캣타워 나무 숨숨집에 들어가 있는 고양이가 보인다. 입구를 제외하곤 막힌 곳이라 더울 땐 쓰지 않는 장소다. 고양이는 밀대를 무서워한다.


오후 2시. 뭐라도 끼적거리고 나오니 고양이가 따라붙는다. 까까 먹을 시각. 깨작거리던 녀석의 식욕이 폭발하는 요즘이다. 산이나 길에 사는 고양이와 달리 굶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츄르 한 사발 얻어먹고 한낮의 햇볕이 드는 창가에 누워 열심히 침을 펴 바른다. 녀석에겐 딱 기분 좋은 햇볕이다. 그러다 꾸벅 졸기도 한다.


저녁 7시. 저녁 먹고 TV를 보는데 시야 한쪽 구석에 까만 무언가가 등장한다. 고양이다. 애써 무시하지만 바로 내 앞까지 다가온 녀석은 철퍼덕 소리를 내며 옆으로 눕더니 갑자기 뒹굴 쇼를 펼친다. 시선 강탈. 정강이에 닿은 녀석의 체온을 통해 편안함을 나눠 갖는다.


나를 관찰하는 고양이의 시선은 의식적이지만, 고양이를 보는 내 시선에는 어떤 의식도, 어떤 저항도 들어있지 않다. 시공간이 고양이 중심으로 왜곡되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이 집에서 고양이는 블랙홀이자 중력이고, 그리고,


“이 자슥이,”


그래, ‘이 자슥’이다.


“까까 없다. 먹은 지 30분도 안 됐다. 꿈도 꾸지 마라, 이 자슥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오! 가위 끝이 왼손 중지 옆을 살짝 긁고 지나갔다. 끝이 뭉뚝해서 괜찮지 않을까?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니 결국 피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날이 무뎌졌어도 가위는 가위네. 집을 나서려다 빈 페트병이 눈에 들어와 분리수거만 할 생각이었는데 피를 보고 만다. 쩝.


명절에 누나네 식구들과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그곳에 가려면 두 시간을 가야 한다. 지금은 물리적 거리를 나타내는 수치이지만, 한때는 심리적 거리이기도 했다. 가급적 직접 마주치지 않기 위한, 불꽃이 튀지 않는 삶을 위한 거리. 시간이 흐르면서 불꽃은 사그라들었고, 그 자리엔 사소한 불평들이 들어찼다. ‘삼촌, 이쪽으로 이사 와라. 너무 멀다.’ 첫째 조카의 투정. ‘아니, 지하철을 몇 번을 갈아타야 하는 거야?’ 나의 투덜거림. ‘멀미약은 먹었니?’ 누나의 근심. ‘고양이는 잘 있나요?’ 고양이의 낯가림으로 아직 인사도 제대로 트지 못한 조카 손주의 불만 섞인 안부. 그런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특별할 거 없는 말들. 그렇게 원했지만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삶들.


약속 전날, 조카 손주 둘에게 줄 돈과 누나에게 줄 돈을 봉투에 나눠 담고 스티커를 붙여 마무리한다. 두께는 다르지만, 봉투 세 개가 똑같다. 누나한테 갈 돈이 애들한테 가면 어쩌나? 헷갈릴까 봐 잠시 걱정을 하지만 곧 피식 웃고 만다. 복에 겨운 걱정이다. 그 옛날의 난, 걱정에 짓눌렸던 난 헷갈림을 근심하지 않았다. 명확하게 알았지만 선택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보단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문이 닫혀 있어 건너편을 볼 수 없었지만, 그 문 앞에 서 있으면 어떤 윤곽이 그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걸 그리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이곳에 있는 나. 그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한 켜씩 쌓아 올려 촘촘하고 조밀하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문을 여는 순간, 그 촘촘함과 조밀함이 다시 조직될 수 있을까? 그래서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점심만 먹기로 했었지만, 먼 거리를 온 만큼 저녁까지 먹고 가기로 한다. 내가 중학생 때 태어난 첫째 조카는 갓 태어난 생명의 연약함으로 나를 압도하며 충격에 빠뜨리더니, 그것도 모자라 40대 초반이었던 나를 할아버지로 만들어 또다시 충격에 빠뜨렸다. 하고 싶은 게임을 하지 못해 훌쩍이며 울던 둘째도 어느새 아빠가 되어 내년이면 학부모가 된다. 아직도 아이 때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 둘을 보고 있으면, 사랑하는 감정과 미안한 감정이 항상 동시에 올라오곤 한다. 지금 이 풍경은 누나가, 내가 연 문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자연스럽게 열어준 문을 우리는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너무도 당연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 회피하지 않고 그때 그 문을 직접 열었다면, 우린 어떤 풍경 속에 들어와 있을까?


돌아오는 지하철 안. 누나와 두 조카가 준 세 뭉치의 선물을 들고 낑낑댄다. 자그마한 수박만 하던 멜론까지 덥석 받았더라면 너무 무겁다고 주저앉아서 울었을지도 모른다.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하고 넉넉하다. 집에서 출발하기 직전, 피를 보며 선홍빛 이미지가 뇌리에 가득했지만, 이날은 따뜻하고 푸근한 하루였다. 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말할 생각은 없다. 운명론까진 아니더라도 과거와 현재가 우리의 미래를 스케치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평온한 삶이라면 그 밑그림대로 색을 칠하며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이다. 하지만 때론 어긋나게 색을 칠하거나 아예 다른 밑그림을 그려야 할 때도 있을지 모른다. 그땐, 그때는 말이다... 미안하다.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다. 산다는 게 그런 거 같다.


AI가 제시한 문장 : 닫힌 문 뒤에서도 발소리는 자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보기 싫은 정치인이 있었다. 특정 지역에 기반이 있다는 것만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지역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그 지역과 아무 관련이 없으니, 내가 모르는 어떤 기여가 있겠지 싶다가도 하는 행동이나 말이 전해져 올 때마다 낯을 찌푸렸다. 뭐,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모든 정치인의 적절치 못한 언행이 트럼프의 등장으로 매운맛에서 보통 맛으로 상대적 절하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는 점. 그래도 보기 싫은 건 보기 싫은 거지만. 지난 선거에서 그 정치인은 선택받지 못했다. 한동안은 안 보겠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비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무언가 낯을 찌푸릴 대상을 반드시 하나라도 찾아내고 말겠다는, 그런 마뜩잖은 심보가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 둘이 사라지면 다음번엔 셋을 찾고, 그리고 나선 넷을 찾게 될까? 예전에 썼듯이 정치라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정치인을 생각해 본다. 그들이 판단한 가장 잘 되는 장사는 조롱과 비하와 혐오와 선동. 다시 말해 그걸 소비해 줄 대상이 있단 얘기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지 아마. 내가 낯을 찌푸리는 그 둘을 향해 나 역시 혐오를 되돌리는 거 같아 맘이 안 좋다. 이 무한 증식, 무한루프에서 발을 빼야 하는데, 세상에 관심을 유지한 채 그럴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현관문이 닫히면서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신호음이 다른 때와 좀 다른 거 같다. 제대로 잠긴 거야? 스쳐 지나가는 의문. 1년 전쯤 전자 도어락을 처음 설치한 이래로 여전히 의심을 내려놓지 못한다. 수동 자물쇠를 더 설치할까? 얼마 전 벽면에 걸쇠가 걸리는 부분이 나사가 살짝 헐거워지면서 실제로 잠기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자물쇠가 잠기지 않으면, 자물쇠의 존재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따라 도어락의 신호음이 머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2년쯤 됐나? 산 정상에 처음 오르던 날, 나를 불안하게 했던 건 두 가지였다. 산을 타는 행위에 익숙하지 않던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지금도 걷고 있는 이 길. 이 길을 얼마나 걸어야 꼭대기에 도달할까? 더 궁극적으론 이 길을 따라가면 정상에 닿을 수 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상에 도착했다. 잠깐의 휴식. 아쉬움에 억지로 발걸음을 떼어놓는데 저만치에 모지리가 보인다. 도시락을 먹는 등산객 뒤에 앉아 상황을 살피는 중이다. 아우, 모자란 녀석, 앞에서 굴러도 모자랄 판에. 다가가서 닭가슴살 포장을 뜯자, 얼른 달려와서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지난번 봤을 땐 배불리 먹은 거 같더니 오늘은 왜 이런대? 너, 이제 여기 혼자뿐인데 아직도 스텔스 모드 걸고 다니니? 좀 당차게 삥뜯고 다녀라, 응? 자꾸 도어락의 신호음이 내 안 어딘가에서 울려 퍼진다.


같은 날 밤. 마룻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다. 정확히는 쇼핑 앱에 찜해둔 경량 등산화를 보면서 갈등 중이다. 아직까진 일반 러닝화나 워킹화를 신고서 산에 다니는 게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더 높은 산, 암반이 많이 노출된 산에 갈 거면 지금 신는 신발들은 미끄럽다. 그래서 이 등산화를 예전에 찜해둔 건데…. 문제는 그땐 고관절이 불편하지 않았고, 지금은 무리하면 아프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두 번 정상에 오르는 건 괜찮은데, 세 번 오르면 다음 날 통증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앞으로 더 높은 산을 찾아 나설까? 어디선가 도어락의 신호음이 들린 거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집에 있을 때 점심을 먹으려고 상을 차리면, 고양이는 쪼르르 캣타워로 올라간다. 굳이 졸려 보이지 않는데도 그렇게 한다. 그럼 난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숟가락을 뜬다. 밥 먹는 시각이 딱 정해진 건 아니지만, 내가 행동을 취하면 녀석은 언제나 자신의 잠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휴식을 취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휴식을 취하려고 한다. 고양이는 경험상 내가 밥을 먹고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거창하게 양보나 배려란 단어를 쓰는 게 맞나 싶지만,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런 셈이다.


밤 9시 전후. 고양이가 내게 다가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사냥놀이를 시작한다. 이 시간에 해야 제맛이다. 반이 뚝 잘려 나간 너구리 꼬리를 5년 가까이 사냥했지만, 이 시간만큼은 항상 열정이 넘친다. 궁둥이를 실룩실룩. 실전은 고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으나 녀석의 사냥은 요란스럽다. 덮치면서 기합을 넣기도 하고, 저 멀리서 응응거리며 뛰어오기도 한다. 어차피 실전을 뛸 일은 없을 테니 봐준다. 귀여우니까. 하루 중 이때는 고양이의 시간이다.


같이 살다 보니, 서로 알아가다 보니 상대를 배려하면서 나를 맞춰가기도 한다. 하지만 간혹 이럴 때도 있다. 다섯 시간 정도 소요된 비일상적 외출 후 간식을 주고 숨을 돌리는데 녀석은 또 간식을 달라고 보챈다.


"조금 전에 줬잖아! 꿈도 꾸지 마라, 고양이!"

그 전에 다섯 시간 동안이나 까까를 못 먹었다. 그러니까 또 줘라, 까까!

"그래서 나가기 전에 미리 줬잖아!"

그래도 다섯 시간 동안 밥만 먹었으니까 더 내놔라, 까까!

"어림도 없다, 이 자슥아!"

냐앙! 삐뚜러질 테닷!


저만치 뛰어가는 녀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집에서 사람이랑 함께 살아본 게 거의 15년 전이다. 사실 그전에도 몇 사람을 제외하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내겐 아주 불편한 일이었다. 이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쪽으로 다시 뛰어오는 녀석을 향해 나도 마주 달려가자, 녀석이 급커브를 틀어 안방으로 뛰어든다. 이 자슥, 너 거기 안 서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