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 가위 끝이 왼손 중지 옆을 살짝 긁고 지나갔다. 끝이 뭉뚝해서 괜찮지 않을까?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니 결국 피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날이 무뎌졌어도 가위는 가위네. 집을 나서려다 빈 페트병이 눈에 들어와 분리수거만 할 생각이었는데 피를 보고 만다. 쩝.
명절에 누나네 식구들과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그곳에 가려면 두 시간을 가야 한다. 지금은 물리적 거리를 나타내는 수치이지만, 한때는 심리적 거리이기도 했다. 가급적 직접 마주치지 않기 위한, 불꽃이 튀지 않는 삶을 위한 거리. 시간이 흐르면서 불꽃은 사그라들었고, 그 자리엔 사소한 불평들이 들어찼다. ‘삼촌, 이쪽으로 이사 와라. 너무 멀다.’ 첫째 조카의 투정. ‘아니, 지하철을 몇 번을 갈아타야 하는 거야?’ 나의 투덜거림. ‘멀미약은 먹었니?’ 누나의 근심. ‘고양이는 잘 있나요?’ 고양이의 낯가림으로 아직 인사도 제대로 트지 못한 조카 손주의 불만 섞인 안부. 그런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특별할 거 없는 말들. 그렇게 원했지만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삶들.
약속 전날, 조카 손주 둘에게 줄 돈과 누나에게 줄 돈을 봉투에 나눠 담고 스티커를 붙여 마무리한다. 두께는 다르지만, 봉투 세 개가 똑같다. 누나한테 갈 돈이 애들한테 가면 어쩌나? 헷갈릴까 봐 잠시 걱정을 하지만 곧 피식 웃고 만다. 복에 겨운 걱정이다. 그 옛날의 난, 걱정에 짓눌렸던 난 헷갈림을 근심하지 않았다. 명확하게 알았지만 선택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보단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문이 닫혀 있어 건너편을 볼 수 없었지만, 그 문 앞에 서 있으면 어떤 윤곽이 그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걸 그리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이곳에 있는 나. 그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한 켜씩 쌓아 올려 촘촘하고 조밀하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문을 여는 순간, 그 촘촘함과 조밀함이 다시 조직될 수 있을까? 그래서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점심만 먹기로 했었지만, 먼 거리를 온 만큼 저녁까지 먹고 가기로 한다. 내가 중학생 때 태어난 첫째 조카는 갓 태어난 생명의 연약함으로 나를 압도하며 충격에 빠뜨리더니, 그것도 모자라 40대 초반이었던 나를 할아버지로 만들어 또다시 충격에 빠뜨렸다. 하고 싶은 게임을 하지 못해 훌쩍이며 울던 둘째도 어느새 아빠가 되어 내년이면 학부모가 된다. 아직도 아이 때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 둘을 보고 있으면, 사랑하는 감정과 미안한 감정이 항상 동시에 올라오곤 한다. 지금 이 풍경은 누나가, 내가 연 문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자연스럽게 열어준 문을 우리는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너무도 당연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 회피하지 않고 그때 그 문을 직접 열었다면, 우린 어떤 풍경 속에 들어와 있을까?
돌아오는 지하철 안. 누나와 두 조카가 준 세 뭉치의 선물을 들고 낑낑댄다. 자그마한 수박만 하던 멜론까지 덥석 받았더라면 너무 무겁다고 주저앉아서 울었을지도 모른다.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하고 넉넉하다. 집에서 출발하기 직전, 피를 보며 선홍빛 이미지가 뇌리에 가득했지만, 이날은 따뜻하고 푸근한 하루였다. 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말할 생각은 없다. 운명론까진 아니더라도 과거와 현재가 우리의 미래를 스케치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평온한 삶이라면 그 밑그림대로 색을 칠하며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이다. 하지만 때론 어긋나게 색을 칠하거나 아예 다른 밑그림을 그려야 할 때도 있을지 모른다. 그땐, 그때는 말이다... 미안하다.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다. 산다는 게 그런 거 같다.
AI가 제시한 문장 : 닫힌 문 뒤에서도 발소리는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