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기온이 26도라고? 바깥 기온을 살피다 깜짝 놀란다. 하지만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산에 오르기 위해 밖에 나섰다가 내리쬐는 햇볕에 화들짝 놀란다. 어깨부터 등판까지 뜨뜻한 게 영락없는 여름 햇볕이다. 5월도 아니고 4월 중순에 이 무슨. 봄인데. 아직 나뭇잎들도 다 나지 않은 봄인데. 무엇인가 봄을, 계절을 잊은 듯하다.


산에 오르면 괜찮겠지. 사방이 뻥 뚫린 곳에 가면 바람이 땀과 열기를 식혀 줄 거야. 정상에 가기 전 그런 장소가 한 군데 있다. 겨울엔 모자를 손으로 누르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바람이 위세를 떨치는 곳. 오르고 올라 도달했건만 손은 갈 곳을 잃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항상, 당연히 불어올 거라 여겼던 바람인데. 부는걸, 잊었다.


정상을 찍고 내려온다. 그곳에서도 바람은 보지 못했다. 정상 바로 아래쪽 내려가는 길목에 사람들이 조그만 돌탑들을 쌓아놓았다. 무엇을 소원했을까? 무엇을 바랐을까? 정월대보름이나 추석에 달을 향해 쏘아 올린 수많은 소원으론 부족했던 모양이다.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달에서 방아 찧던 토끼가 도망갔다고 하던데. 이 산의 호랑이는 이 돌탑 때문에 시끄러워 사라진 것일지도. 그래서 호랑이도 잊혔다. 지금은 고양이 뿐. 돌탑을 쌓은 사람들은 그것에 갈무리한 소원을 잊지 않았을까?




토끼와 호랑이로 흘러가는 생각에 넋을 놓다가 정신을 차려본다. 어느새 산 중턱, 도로가 있는 곳이다. 벌써 여기까지 내려왔다고? 자주 가는 길이라 그런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로 하산했다. 미쳤구나, 미쳤어. 뒤를 돌아보니 내가 내려온 계단이 저만치 위까지 이어지다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문득 궁금해진다. 난, 뭘 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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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잎이 흩날린다. 비가 내리기도 했고, 예년보다 벚꽃 개화 시기가 일주일 정도 빨랐던 터라 서서히 꽃이 질 때도 됐다. 벚꽃은 꽃이 피어있을 때도 예쁘지만, 질 때는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매년 피고 지지만, 매년 똑같지만, 사람들은 그 반복을 즐거운 마음으로 반긴다.


집에 들어와 청소를 한다. 10년 넘게 쓴 진공청소기는 나이 먹었다고 큰 소리로 어찌나 유세를 떠는지 일 안 시킨 지 오래다. 그래서 선택한 건 돌돌이. 다른 집에선 보통 옷이나 천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데 쓴다. 하지만 우리 집에선 밀대에 연결해 바닥을 밀고 다닌다. 그런데 문제는 고양이. 청소할 때 가만히 있어 주면 좋겠는데 이 녀석 사방팔방 뛰어다닌다. 놀이라 생각하는 모양. 결과는? 돌돌이로 밀고 지나간 자리에 바로 고양이 털 투척. 이 짓거리를 매일 반복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매년 피는 꽃과 매일 반복하는 짓거리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뭐, 어쨌든, 난 매일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한다.


이눔의 자슥, 거기 가만히 안 서냐!

(우다다 우다다)

말을 들으면 고양이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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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페라의 유령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52
가스통 르루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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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큰 기대를 하며 첫 표지를 넘기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일 때 어떤 설렘 같은 건 있지만 딱 거기까지만이다. 그런데 간혹 나도 모르게 큰 기대를 품고 책을 읽기 시작할 때가 있다. 지금 이 책이 그랬다. 작가나 소설 자체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단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원작이라는 사실, 그 한 가지가 모든 기대의 원인이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출간 당시 이 소설에 대한 반응이 어땠는지 검색해 보기. 1909년부터 1910년에 걸쳐 프랑스 일간지에 연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땐 별다른 화제가 되지 않음. 그러다 1925년에 무성영화로 개봉되어 큰 성공. 현재 명성의 가장 결정적 원인은 1986년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다음으로 한 일은, 이 소설이 다른 장르의 원작으로 선택된 이유를 생각해 보기. 일단 다채로운 시각적 이미지. 화려한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그곳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그리고 지하에 펼쳐진 어둡고 음침한, 정반대의 다른 세계. 다음으론 음악 자체가 소설의 중요한 소재. 마지막으로 미녀와 야수라는 가장 대중적이며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 그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다음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 검색하기. 설계자의 이름을 따 오페라 가르니에라고도 불림. 건설 과정에서 지하에 물이 차올랐으나 빼낼 수가 없어 그대로 완공. 공연 중 샹들리에가 떨어져 관객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 발생. 소설은 이 둘을 내용에 맞게 차용. 그렇군. 그래.


마지막으로, 작가 가스통 르루 검색하기. 특종 기자 출신의 프랑스 장르 문학의 개척자. <오페라의 유령>보다 먼저 출간된 <노란 방의 비밀>로 명성을 얻음. 밀실 살인을 다룬 추리소설로 아서 코난 도일(셜록 홈스)과 모리스 르블랑(아르센 뤼팽)에 비견될 정도. 그래, 그랬어. 어쩐지.


그러니까. 현실적 배경을 바탕으로 트릭과 구조를 짜서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그 모든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후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게 작가의 핵심이라는 건가? 그런데 문제는 그 설명이 내겐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거. 사랑 얘기는 흥미롭지만, 인물의 심리 변화나 특정 캐릭터들의 역할이 내겐 잘 수긍되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정말 마지막으로 한 일은, 내가 멍청한 게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그래. 그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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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특히나 사람 때문에 울고 웃을 거야.


10년도 훨씬 전에. 그러니까 장사를 하고 있을 때. 나와 함께 오래 일하던 알바들에게 고전적인 방식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준 적이 있었다. 다섯 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중 한 명에게 적어준 문장. ‘넌, 특히나 사람 때문에 울고 웃을 거야.’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관계를 지옥이라 여기던 때. 딱히 결심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한 적이 있었다. 지금 여기에 더 이상의 관계를, 소중한 관계를 덧붙이지 않겠다. 이 이상 아무도 무너뜨리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지금. 비 때문에, 날리는 벚꽃잎을 볼 수 없게 되어 의기소침해진 고양이가 느닷없이 뜀박질이다. 조그마한 날벌레 하나 잡겠다고 촐랑거리는 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벌레 따라 소파 위로 뛰어오른 녀석은 발을 헛딛고 마루로 떨어진다. 아우, 저 허당. 부끄러웠을까? 벌레는 놔두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우다다. 저거, 저거, 구조 안 됐으면 길에서 어떻게 살려고 했던 거야?


카드를 받았던 그 아이는 요 며칠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다. 그것도 3~4년 전 일로. 그때 모질지 못했던 게 지금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걸까? 그 시절의 나는 결국 사람이 답이란 걸 알았지만 당시 했던 다짐을 지금껏 어찌저찌 지키며 산다. 그런데 요즘, 생각이 많다. 촐랑거리는 이 고양이 녀석. 4kg이 채 못 되는 이 가벼운 녀석이 내 삶에 이렇게 무게감을 더할 줄은 몰랐다. 맞고 틀리고. 그런 문제가 아니란 걸 안다. 선택의 문제다. 오래전 내 선택은 상처를 정말 최소화할 수 있던 길이었을까?


간식을 그릇에 담아 몸을 돌리자, 고양이가 먼저 먹을 자리로 종종거리며 뛰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면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난, 삶의 뒤꽁무니만 쫓아왔다는. 그래도 웃을 수 있으니 괜찮은 거겠지. 어이, 고양이. 넌 나보다 꼭 먼저 죽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야 해. 가뜩이나 사람 무서워하는 녀석이 어딘가에 맡겨져서 풀 죽어 있는 꼴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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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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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바다>

--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 <본문 중>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이돌 그룹이 있고, 그들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을 추종하는 팬덤은 그 아이돌이 튼 물꼬를 더욱 거대한 흐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흐름은 세상을 바꾸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린 때론 대중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안다. 집단 지성 또는 대중의 급격한 쏠림은 옳고 그름을 떠나 최악의 상황으로 돌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단편엔 '세상 모든 바다'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한다. 세상의 모든 바다가 연결되어 있듯이 사람들도 차별 없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는 의미 정도. 여기까진 분명 맞다. 그런데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여야 한다는, 그러니까 '모두'와 '하나'란 단어가 합쳐질 때 은연중에 휘둘러지는 불편함을 우리는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롤링 선더 러브>

-- 퇴근 후에 청계천 끄트머리에서 리아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나타난 리아는 슬랩스틱코미디언처럼 우당탕 넘어지는 척을 하더니 말했다.

“안 해요? 왜 안 해요? 와아 조맹희 개멋있어.”
-- <본문 중>


뜻대로 될 리 없지. 세상이. 삶이. 치한이나 왕자님을 대비했으나 뜬금없는 호랑이 인형과 마주치고, 짝짓기 예능에 출연해서 출연자가 아닌 PD에 꽂혀 버리는. 그런 우당탕한 어떤. 나이는 차오르는데 이룬 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 같고. 상호작용 충만한 찐한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만 나도, 상대방도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그렇게 엇나가기만 하는. 그래도. 아무리 삽질만 한다 하더라도. 돌멩이는 이리 데굴, 저리 데굴. 여기서 차이고 저기서 밟히고. 그냥 데굴데굴. 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진짜 개멋있어.



<전조등>

-- “잠깐.”

그가 엉거주춤 멈춰 “왜?”라고 묻자 그녀는 깜빡한 무엇을 떠올리려는 듯 그를 보다가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본문 중>


급히 집을 나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매장에 있는 근무자는 오늘 중요한 시험이 있다. 올해 예정된 마지막 시험. 내가 늦으면 그는 올 한 해를 날려버리는 꼴이다. 속도를 높여 걷는데 저만치서 술에 취한 듯한 걸음걸이로 노숙자 한 명이 걸어온다. 비틀비틀. 교차하는 순간 비틀대던 노숙자는 길에 넘어지고 난 찰나의 고민과 함께 그대로 앞을 향한다. 이번 지하철을 놓치면 난 지각이다. 그리고 그는 시험을 놓치게 될 것이다. 지나가던 차의 경적 소리. 하지만 무시하고 지하철역 안으로 뛰어든다. 늦은 밤, 퇴근하며 그 자리를 다시 지난다. 거꾸로. 아까 낮에 그 노숙자는 괜찮은 걸까? 샤워 후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다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든다. 흠.
 
베듯이 일상을 침범하는 비일상. 그리고 흉터처럼 남는 불안. 흉터는 다시 벌어질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옛날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투덕거린 적이 있었다. 니가 노동의 맛을 알어? 소리치면, 다른 한쪽에서, 니가 돈맛을 알아? 맞대꾸했다. 얼굴을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치면, 퍼렇게 질려서 악다구니를 내뱉었다. 그렇게 붉으락푸르락 기싸움을 하더니만 결국 옆 동네 돈 냄새를 참지 못하고 사회주의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형님. 이제 사회주의는 무대 뒤에서 자본주의의 뒤치다꺼리나 한다. 사람들 사이에 맥락 없이 떠도는 '기립하시오, 당신도'와 같은 이모티콘 문구가 한때나마 투톱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다. 물론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노동의 맛을 외치던 사회주의가 퇴장한 탓일까? 요즘을 사는 근로자는 영혼까지 탈탈 털어 자본주의 팬덤에 빠져든다. 하지만 '좌절 금지'라는 머리띠 질끈 동여맨 우리의 주인공들은 출발점이 어디든, 현재 위치가 어디든 주저앉지 않는다. 쿨내까진 아니더라도 찌질하지 않게, 함께, 발걸음을 내디딘다. 내딛으려 한다. 평범함에 대한 이 밑도 끝도 없는, 그야말로 무데뽀 같은, 작가의 애정과 함께.

--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본문 중>


<보편 교양>

-- 곽은 은재와 함께 도서를 정리했다. 『도련님』은 우측 중단에, 『수레바퀴 아래서』는 중앙 상단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트롤리에 두고 『시민의 불복종』은 좌측 하단에, 『노인과 바다』는…… 자신의 손에서 은재의 손으로, 은재의 손에서 자신의 손으로 건네지는, 함부로 펼친 적 없는 새 책들의 반듯함. 축하의 말과 감사의 말. -- <본문 중>

손에서 손으로. 마음을 다한 자와 진심을 받아들인 자의 이중주. 다가올 날을 준비하고 지나갈 날에 감사할 줄 아는 자들의 평온함. 마음에서 마음으로.
 
글을 쓰다 문득 고양이를 바라본다. 어이, 고양이, 아저씨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뭔 소리 하나 잠깐 바라보더니 다시 햇볕에 몸을 맡기는 녀석. 이 자식이…. 까까 줄까? 'ㄲ'이 들어가는 단어의 잇따른 출현에 반색하며 달려온다. 까까로 통하는 우리네 진심. 룰루랄라 냉장고를 열다 눈에 들어온 파란색 우유갑. 파란색으로 도배되었던 주식창이 떠오르며 마음이 튀어 오른다. 아니야, 아니야, 심호흡. 후우, 후우.



<로나, 우리의 별>

소설을 다 읽고 생각을 하다 몇 번이나 멈췄다. 마치 학창 시절 조회 시간에 들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되씹는 기분이랄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려본다. 내가... 나이가 들었나? 이 이야기가 실현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단편 중 가장 강한 어조의 작품이었다. '우리는 가능하다.' 너무 강하면, 때론 불가능을 향한 기약 없는 희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나 아직 안 늙었거든! 난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결과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태엽은 12와 1/2 바퀴>

그는 지방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한다. 나이 들어가는 자신처럼 게스트 하우스도 서서히 쇠락하는 중이다. 이곳에 내일 딸인 은혜가 오기로 했다. '명절도 생일도 기일도' 아닌데. 서울에서 취업한 딸이 자주 오기엔 지나치게 먼 거리라 그런 날에만 만나는 게 자연스러웠다. 모처럼 1층 한구석에 멈춰버린 채 서 있는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아본다. 12바퀴 하고도 반 바퀴가 더 감긴다. 원래는 12바퀴였었는데.
 
일상이 깨지는 건 때론 활력이 된다. 하지만 여기선 아니다. 시작부터 죽음의 이미지를 던진 이야기는 그 어두운 분위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둔다. 야금야금 잠식되어 푹 잠겨 든 순간, 이야기는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서 갑자기 쑥 빠져나가 버린다. 그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자리에 서 있고, 그런 그의 모습은 바닷가의 풍경과 함께 놀러 온 서퍼들의 시야에 담긴다.
 
-- "그런데 저 사람은 뭐하냐?" -- <본문 중>
 
주체에서 배경으로 내동댕이쳐짐으로써 이제 다가올 불확실성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이른 아침, 딸은 아직 출발조차 안 했을지도 모른다.
 
-- 멀리 길가에 검은 봉지를 들고 서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몰라.”
-- <본문 중>



<무겁고 높은>

한때 탄광촌이었지만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선 도시. 고3인 송희는 그곳에서 밀려나는 모든 것들을 지켜봤다. 왜 그것들은 속절없이 떨궈져야만 했을까? 송희가 역도를 선택한 건 그 무기력함에 대한 오기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들어 올리고 놓아 버린다. 내려놓는 과정은 없다. 들면 그걸로 끝이라 던지듯이, 버리듯이 떨구면 된다. 이건 나의 삶이야. 그러니 버리는 것도 내가 하겠어.

-- 송희는 단호해졌다. 아니. 이건 영광이 아니야. 이건 미래도 아니고 꿈도 희망도 아니야.

그럼 뭐야?

젖은 머리가 물었다. 송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 흥하지도 망하지도 않는, 값이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운이 좋아도 나빠도 그대로인 것. 어떤 비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닌, 말하자면 그냥 100킬로그램의 손때 묻은 쇳덩이.

나도 몰라. 어쨌든 들 거야.
-- <본문 중>


소설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 의지의 발현이다. '그날이 송희가 정말로 역도를 그만둔 날이었다.' 그날 송희는 목표인 100kg 바벨을 들어 올렸을까? 젖은 머리는 알겠지만, 그 애는 귀신 같은 존재다. 산 자들은 그저 살아낼 뿐이다.


<팍스 아토미카>

-- 돌아서서 침대로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문을 떠나기 힘들었다. 한 가지 의심이 되풀이됐다.

내가 문을 닫았나. -- <본문 중>


하나의 맥락은 있지만 의식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글. 난 이런 글의 정체를 알 듯도 하다. 예전에 분열과 경계에 몰두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쓴 글은 소재에 상관없이 저 두 단어에 젖어 있었다. 아무 상관 없는 일에서조차 어떻게든 스며 나왔다. 지금 이 단편이 딱 그런 느낌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고 아우르면서 불확실함의 정서에 푹 잠긴 이야기. 어쩌면 정말 작가 자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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