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난 매번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삶이 도돌이표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반목과, 그때그때를 넘기는 미봉책과, 다시금 쏟아지는 불만과…. 그런 것들이 쌓여 딱딱하게 다져지면 그곳에서 분노와 두려움이 자라났다. 분노는 충돌을, 두려움은 회피를 낳았고, 돌고 도는 순환의 끝에 설 때면, 나는 항상 같은 생각과 마주쳤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그 해결책은 누구를 위한 것이지?


그 답은 지금도 모른다. 시간이 질문을 묻었고, 날뛰던 감정도 바람결에 날리듯 흩어버렸다. 그 시절, 뱅뱅 돌며 떠밀리듯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생각해 보면 내 감정의 자리는 언제나 달랐다. 어리둥절함에서 연민과 당혹으로, 분노와 혐오로, 아득한 막연함으로. 자리가 바뀔 때마다 질문을 대하는 내 태도도 바뀌었다. 하지만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답을 얻지 못한 난 또다시 쳇바퀴를 돌아야만 했다. 무한히 돌 것만 같던 그 쳇바퀴도 이젠 시간에 녹슬어버렸다.


고양이를 뒤쫓는다. 그렇게 악착같이 쫓지는 않는다. 고양이가 멈추면 다가가고, 다시 움직이면 또 쫓는다. 그러다 보면 내 무릎도 이제 녹이 슬어간다는 걸 깨닫곤 한다. 고양이는 곧 멈출 것이다. 그럼 서너 번에 걸쳐 귓속을 닦아줄 거고. 이걸 하기 싫어서 녀석은 나를 꼬리에 붙이고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방문을 닫아본 적이 없다. 화장실 문을 제외하곤 항상 열려 있어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들락날락한다. 이제 와 든 생각이지만, 언제나 질문에 가로막혔던 나는, 그럼에도 해결책을 알고 있었던 나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문을 이미 열어젖혔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었다고 해서 꼭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안방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있자, 방 안에서 고양이가 무슨 일인가 싶어 빤히 쳐다본다. 그 시절, 방 안에 있던 건 고양이가 아니었다.


AI가 제시한 문장 : 같은 문 앞에 몇 번을 서든, 여는 손은 매번 다른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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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전이었다. 조카에게 카톡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희 엄마, 뭐 필요한 거 있어 보이든? 돌아온 답은 예상대로였다. 엄마 까다로워. 뭘 사줘도 맘에 안 들어 해. 사실이다. 예민하고 까탈스럽다. 곧이어 추가 답변. 그래서 오히려 편해. 그냥 돈으로 담아 드리면 되거든. 그래, 취향이 까다로운 사람한텐 돈을 주고 알아서 사게 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이긴 하다. 봉투에 돈을 담는다. 사실 이미 예상했던 터라 봉투도 미리 준비해 뒀었다. 그냥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컴퓨터를 켜지도 않았는데 책상 앞에 앉아 고민 중이다. 스마트폰 검색 내용을 살피면서 아래로 스크롤 하는데 고양이가 의자 밑으로 지나가더니 급식기 앞에 선다. 깔짝깔짝. 한입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만 나를 쳐다본다. 사료가 먹고 싶은 게 아니다. 까까를 먹고 싶어서 나를 떠보는 중이다. 녀석과 마주 보던 눈을 매몰차게 돌린다. 가서 자라, 잘 시간이다. 다시 스마트폰에 집중. 화면엔 자동 화장실과 관련된 후기들이 쭉 떠 있다. 적당한 가격대와 적은 소음과 낮은 오작동 빈도와 편리한 AS, 마지막으로 아이의 배변 행위에 걸맞은 작동 방식까지. 제품 하나를 정했고, AI에게 질문해서 비교·분석까지 했다. 사실 이미 두어 달 전에 끝냈다. 그리고 지금 또 고민 중이다.


고양이가 터덜터덜 문밖으로 걸어가더니 캣타워로 들어간다. 까까는 포기한 모양이다. 저 녀석한테 돈봉투를 건넬 수는 없고. 이걸 사면 저 녀석이 써 줄까? 그동안 돈 들여 샀지만, 그 제품이 담겨온 박스만큼도 사용해 주지 않은 상품들이 느닷없이 마루를 행진한다. 숨숨집, 장난감, 물그릇, 전기방석(온), 또 전기방석(냉), 입맛에 맞지 않는 간식들. 열린 베란다 창문으로 하나씩 하나씩 밑으로 떨어진다. 이번에 사는 건 무게나 비용 모두 묵직해서 타격감이 꽤 클 텐데. 내년에 맘 편히 여행 다녀오려면 이 녀석이 이 제품을 써 줘야 하는데. 걱정을 한가득 품고서 녀석을 살피니 방석에 머리 박고 잠을 청하는 모양이다. 저 얄미운 녀석. 봉투에 돈을 담아서 머리통을 한 대 갈기고 올까? 참자.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더불어 녀석이 우리 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날이다. 조그맣고 귀엽고 모든 걸 좋아했던 녀석. 그러고 보니, 나 사기당했네, 사기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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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유난히 미적거렸다. 산에 가야 하는데. 누가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왜 가야 하는 걸까? 지난주는 고관절이 아파서 운동을 쉬었고, 지지난주는 산에 갔었는데 모지리를 못 봤다. 모지리를 꼭 봐야 하나? 그래도 잘 있는 거 보면 좋잖아. 어기적대다가 어차피 쓰레기도 버려야 해서 꾸역꾸역 길을 나섰다. 다른 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서니 아파트 단지 후문 앞쪽 신호등이 막 빨간불로 바뀌는 게 보였다. 후문 쪽으로 가는데 왼쪽에서 승용차 하나가 나온다. 후문은 오전 출근 시간대만 차량이 통행할 수 있어서 이 시각엔 차가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차가 진행할 방향은 내가 걸어 나오던 길뿐이다. 먼저 지나가라고 길옆으로 물러섰는데 차도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다. 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아서 잠깐 주저하다가 내가 먼저 차 앞을 가로질러 지나친다. 그 순간 경적 소리. 아주 짧게. 나한테 그런 건가 싶어 차 쪽을 뒤돌아 봤지만 별 반응이 없다. 햇빛이 창에 반사돼서 내부가 보이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후문을 벗어나 건널목 앞에 섰는데 다시 짧게 빵. 내 시야에선 담에 가려 차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누굴 부르는 건가 싶어 잠시 두리번거린다. 그 주변이 마침 그늘에 벤치들이 있는 자리라 어르신들과 아파트 주민들이 주르륵 앉아 쉬고 계시는 곳이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두리번. 어르신들도 두리번.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 관심 끄고 신호등을 바라본다. 모지리 보러 가야지.


그리고 쿵. 충돌하는 소리, 아니면 넘어지는 소리. 이어 브레이크 밟는 소리. 걸음을 옮겨 소리가 난 쪽을 봤더니 오토바이 한 대가 땅에 쓰러져 있었다. 아까 그 차는 우회전한 상태로 멈췄고,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앞서 있었다. 소리가 한 번만 났던 걸로 봐서 둘이 부딪쳤다기보단 오토바이가 차를 피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듯하다. 다친 사람은 오토바이 운전자 한 명뿐인 거 같다. 불행 중 다행인 게 쓰러진 오토바이가 벤치 쪽을 덮치진 않았다. 많이 다치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몸이 재산인데.


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내가 집에서 1분만, 아니 몇십 초만 늦게 나왔으면 저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내가 똑같은 경로를 걸었다면, 차도, 오토바이도 나를 보고 멈췄거나 방향을 바꿨을 테니 아예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예 내가 그 사고에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 미끄러져 넘어진 오토바이가 후문을 나가려던 나를 덮쳤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애초에 난 왜 미적거렸지? 다른 때처럼 나왔다면 이 상황을 아예 몰랐을 거다. 2주간 모지리를 못 봤고, 지난 주엔 고관절이 불편해서 운동을 쉬었다. 고관절 쪽이 불편한지는 한 달 정도 되어 간다. 가까이 벌어진 현상으론 이런 것들 때문에 산에 갈지 말지 고민했었다. 그런데 따지고 들어가면, 오른쪽 고관절이 불편한 건 내 무게 중심이 오른쪽으로 쏠린 자세 탓이고, 십몇 년 동안 장사하면서 같은 자세로 서 있을 때가 많았던 탓이다. 모지리가 신경 쓰이는 건 작년 9월 이후에 봤던 고양이 중 유일하게 이 녀석만 자리를 지킨 탓이고, 더 멀리는 내가 고양이를 입양하면서 고양이에 대한 관점이 바뀐 탓이기도 하다. 내가 저 사고에 포함되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켜켜이 쌓여 기반을 다진 꼴이 되나? 세상에나, 줄줄이 낚여 올라오는 생각에 숨 막혀 죽겠다. 이래서 ‘운명’이란 단어가 신비하고 모호하고 매력적인 거구나. 이래서 ‘우연’이란 단어가 삶에 숨통을 틔워주는 거구나. 에라, 모르겠다. 걷자. 목표는 산 정상. 중간에 뭐가 있든 내 알 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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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을 쫙 피고 들여다본다. 올해 들어서 오른쪽 손가락 관절 일부가 통증을 호소하곤 한다. 청소하거나 무언가 무거운 물건을 나를 때처럼 일정 시간 이상 힘이 가해지면 그렇다. 그럴 때마다 손가락을 쫙 펴보지만, 축 처진 어깨처럼 금방 오그라든다. 하아, 세월 진짜. 아직 다섯 살인 고양이가 높은 곳에 올라앉아 바닥에 있는 나를 내려다본다. 언젠가 고양이도 예전 같지 않을 텐데, 그때가 되면 나처럼 무심한 세월에 투덜댈까?


오른손을 쥐락펴락 해본다. 움직일 때마다 감각이 느껴진다. 내 모든 감각은 나를 정의한다. 정의한다고? 그보단 인식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를 인식하고, 고양이를 인식하고, 그 너머 세상을 인식한다. 세월이 흘러서 죽음과 맞닥뜨리면, 무(無)가 된다면, 대상을 인식하던 나는 증발하듯 단절되는 걸까? 누구나 몸의 퇴행을 겪으며 육체의 소멸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정신의 소멸은 그만큼 확신하지 않는다. 물질의 영역을 넘어서 종교나 철학, 또는 미지의 영역이라 그러겠지. 지금 나를 인식하고 있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완전히 지워질까?


오른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뒤집어본다. 이 모든 걸 인식하는 나는 태어나기 전엔 무엇이었을까? 아니, 사실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다. 죽음 이후가, 완전한 무(無)가 된다는 게 가장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이 의문에도 내 이기심이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이전에 무엇이었든, 이후에 무엇이든, 지금의 내가 완전히 지워지듯이 사라지는 게 살짝 억울한 거 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의 내가 있었을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후의 내가 존재할까? 생각 속에서 방향을 상실하면 언제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또 나뿐이다. 계속 나를 쳐다보는 고양이에게 묻는다. 고양이, 너는 이 막막함과 이 또렷함이 뒤섞인 이질감을 어떻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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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입양하고 나서 가장 많이 집을 비웠던 시간이 53시간이었던 듯싶다. 2박3일 일정의 일본 여행이었지만 느낌상 1박2일 같았던 교토 구경. 내년 계획 중인 여행은 그보다 10시간 정도 더 길듯한데. 여러모로 고민이다. ***


아저씨가 사라진 지 삼 일째. 밤이 두 번 지나갈 동안 간식을 못 먹었다. 해가 세 번째 아침 인사를 건넸는데 아직도 변기 물이 안 내려가고 있다. 내내 켜져 있는 마루 전등불이 두 번이나 기세를 잃었는데도 사냥놀이 한 번 하지 못했다. 이, 이 형편없는 복지를 내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화장실을 하나 더 만들었을 때, 커다란 가방을 등에 둘러맸을 때, 두세 배나 길게 열심히 빠이빠이를 할 때, 난데없이 간식을 퍼줄 때, 알아챘어야 했다. 이 멍청한 고양이 같으니. 까까에 히죽대던 과거의 난 얼마나 바보 같았던가. 앞으론 절대 까까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별에 연락해서 감시 모드를 암살 모드로 바꿀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돌아오기만 해 봐라. 자고 있을 때 명치를 꾹 밟고 지나갈 테다. 냥, 까까 먹고 싶다. 밥통이 무미건조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밥알을 내뱉는다. 하루 세 번. 이 좁은 세상에 나를 생각하는 건 밥통뿐이구나. 미안한데, 밥통아, 밥 말고 까까를 뱉어주면 안 될까? 이런! 이런! 미안하다니! 고양이가 미안하다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내가 미쳐가는 중인가? 아악, 집고양이가 어떻게 밥만 먹고 살 수가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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