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내 얘기를 할 때가 많다. 특히 소설을 읽고 나서 그런 경우가 많은데, 등장인물의 감정이나 변화, 가치관을 바탕으로 개인적 경험을 풀어내는 방식이라 책 자체에 대한 직접적 정보 전달은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방식이 사실 하루이틀 일은 아니라서 책이나 영화 등 감상의 본체보다 글쓴이를 더 돋보이게 하는 글쓰기 방식이란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칭찬 같기도 하고 비난 같기도 하고. 나 역시 인식은 하고 있던 터라 크게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것 또한 단점이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작은 걱정거리 정도는 남겨둔 상태였다.


누군가의 글을 좋아했다. 위에서 말한 단점이 해결된 글쓰기였다. 난 소설이 열어준 문을 통해 들어가 그 환경에 머리끝까지 잠긴 채 이야기를 흡수한 후 한숨을 쉬듯이 쏟아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두 발을 담그고서 관조하듯 이야기를 바라보며 들숨과 날숨을 통해 편안하게 뱉어낸다. 그래서 그 글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묘하게 끌렸다. 첫 만남이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난다. 3년쯤 됐나? 그보다 더 오래 전일 수도 있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아, 지금도 좋아한다. 푹 빠져드는 수준에선 벗어났지만. 무슨 일인지 그 사람의 글이 건조하게 느껴진다. 글을 쓰는 방식은 여전한데, 내부에 집중하던 시선이 외부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발을 뒤로 물린 채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조절하는 듯한 느낌.


며칠 전 무엇을 찾기 위해 서랍을 뒤지다 미니카 하나를 발견했다. 이거... 작년에 집수리하기 전 짐 정리하면서 안 버렸어? 어렸을 때 참 아끼던 미니카였다. 분류를 잘못해서 다시 살아남았든지,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맘이 바뀌었든지. 지금은 추억만 묻어있을 뿐 애정은 남지 않은 대상.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다 중얼거렸다. 얘는 그대로인데 내가 변했네. 그 사람의 글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내 태도가 바뀐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스친다. 동시에 한결같고 싶다는 욕망이 맘 한 귀퉁이에서 불끈 솟아오르며 미니카를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본다.


고양이, 아저씨 집에 귀신 있나 보다. 이거 분명히 버렸는데 다시 서랍에 넣어놨어. 귀신 보거든 아저씨한테 얘기 좀 해줘라.


잠깐 생각해 보니, 귀신을 보면 무서울 거 같다.


그냥, 아저씨 물건 만지지 말라고 전해줘. 알겠지?


호기심에 바짝 따라왔던 고양이가 말소리에 반응한다. 알기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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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아니면 몇 달 전일 수도 있다. 마루에 있는데 보일러가 설치된 베란다 쪽에서 ‘쩡’하는 금속성 소리가 크게 들렸다. 간혹 새들이 연통에 앉았다 날아갈 때면 비슷한 소리가 들리곤 했었는데 이번엔 좀 과하게 컸다. 가서 살펴봤지만 내 눈엔 특별히 잘못된 건 없어 보였다. 같이 들어온 고양이에게 의견을 묻듯 쳐다봤지만 녀석이라고 별다른 게 있겠나. 그저 눈만 크게 뜨고 놀란 표정만 지을 뿐. 그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고, 시간이 흘렀다.


며칠 전, 1년에 두 번 있는 도시가스 점검이 있었다. 점검하시던 분이 나를 부르더니 보일러 연통이 어긋나 있다면서 해당 부분을 가리켰다. 연통을 바로 맞추고 그 주변에 내열 실리콘을 바르셔야 할 거라고 했다. 처음엔 내가 직접 해 보려 했다. 하지만 연통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얼마 전 그 금속성 소리의 정체가 이거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AS를 신청. 그 후 도착한 AS 기사분 말씀하시기를, 연통 자체의 어긋남도 문제지만 연통의 방향도 잘못되어 있어서 일산화탄소 유출뿐 아니라 누전의 위험까지 있단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시작된 국지성 집중 호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결론은? 보일러와 연통을 새로 다시 설치했다. 보일러도 수명이 거의 다 된 상태여서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교체하는 게 좋다는 얘기를 이미 들었던 터였다. 아우, 작년 집수리할 때 한꺼번에 할 걸. 연통 주변 창문이 열리지 않아 외부 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그쪽으로 또 비 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다음 날 아침,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보다가 참 용감하게 잘도 살아왔단 생각이 들었다. 일산화탄소 유출에 누전이라. 소설 <1984>에 ‘무지가 힘’이란 구호가 있었는데, 딱 맞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 문장이 확 다가왔다. 50년을 넘게 살면서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내 삶의 위험 요소는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창문을 살짝 열어보니 시원함보단 눅눅함이 훅 덮쳐온다. 얼른 창문을 닫았는데 몸을 휘감았던 습기로 인해 어떤 생각이 떠올랐고, 인상을 찌푸린다. 제습기를 산다고 돈을 썼고, 내년 1월 예정인 일본 여행을 위해 비행기표를 구매했고, 어제는 보일러까지. 갑자기 흥분해서 방언이 터지듯 고양이에게 주절거린다.


고양이, 아저씨가 요즘 돈을 저렇게 쓰거든. 국지성 폭우가 내리듯 큰돈을 펑펑. 요 몇 달 카드 대금이 밑으로 내려갈 생각을 안 해요! 저 비야 자연이 제공하는 빵빵한 습기를 등에 업고 인정사정없이 뿌려대지만, 이 아저씨 돈은 뭐를 등에 업어야 하냐?! 고양이, 너 확신의 유튜버가 돼라! 요즘은 그게 돈벌이가 되는 모양이더라.


고양이가 말할 수 있었다면, 대번에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이 무지렁뱅이 아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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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도 제사를 지낸다. 결혼을 안 했으니, 자식이나 며느리, 사위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제사에 대한 내 생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지만, 내 부모님 땐 거의 절대적인 관념이라 그분들의 뜻을 따르고 있다. (언젠가 적었지만 난 늦둥이로 태어났고, 부모님 모두 1920년대 출생이다) 그 얘기는 1년에 한두 번씩 수십 년에 걸쳐 제사상을 지켜봤단 의미다. 그런데 지금도 내 상차림은 그때마다 모양새가 다르다. 음식의 위치와 방향이 있지만 잊어버린 지 오래다. 이젠 쉬이 가르쳐줄 사람도 없다. 다행히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니 그걸 찾아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제사의 방식이나 상차림은 집안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띤다. 그러니 내가 큰집 형님에게 굳이 연락해서 물어보지 않는 한, 우리 집 제사상의 모습은 앞으로도 천차만별일 예정이다.


정보 단절의 예로 제사를 들었지만, 사실 제사는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우리 주변에서 밀려나는 중인 행사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이것도 언젠가 적었지만, 우리 어머니는 서울의 교통체계가 현재처럼 바뀌던 순간, 흐름을 쫓아갈 자신감을 상실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변화의 속도가, 특히 전자기기로 인한 변화의 속도가 어지러울 만큼 빨라졌다. 앞으로 어느 시점엔 어떤 기기를 다룰 수 있는지에 따라 한 세대를 구분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세상이 그렇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엔 그 파장이 너무 클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나이 든 사람이 전자 기기를 통한 의사소통의 뉘앙스를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경우 앞으로 사라지게 될 지식의 저장고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또한 인류 역사에서 지배적 사회가 학살이라는 방법 대신 해당 문화에 속한 연장자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어린이들을 집중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작은 문화를 말살한 붕괴의 과정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 배리 로페즈 <호라이즌> P345~346


지역 문화와 국가의 정체성보단 디지털 문화와 디지털 정체성이 특정 세대를 하나로 묶어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경제력에 따른 지역별 경계와 출생 연도에 따른 시간별 경계가 훨씬 중요해지겠구나. 이미 그런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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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은총만을 바라던 시대는 지났다. 지극히 불손하고 신성모독에 준하는 발언 같지만, 인간의 이해타산은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 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사람에게 겸손함보다 오만함을 부여했고, 그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 자들조차 인간을 알게 모르게 생태계의 최상단에 놓았다. '만물의 영장.' 요즘은 이런 표현 잘 안 쓰지만 한때 기고만장함의 극치를 달리던 사람들이 두루 썼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을 밑으로 끄집어 내렸다. 바벨탑을 쌓는 건 시대착오적이니, 필요할 때만 찾던 평등을 내세워 신을 인간의 영역으로 강등시킨 셈이다. 그러니 자리를 바꾼 신도 이제 책임을 져야 했다. 세상이 힘들고 불평등하며 부조리할 때 당신이 만든 세상이니 당신도 책임을 지라고, 뭐라도 말을 해보라고 사람들은 요구했다. 신은 응답했을까?


호주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는 어디선가 현재 인류의 과제는 “인간 이외 존재들을 윤리의 영역에 재배치하고 인간을 생태의 영역에 재배치하는 것”이라고 썼다. - 배리 로페즈 <호라이즌>, P453, 454


요즘 세상은 자유와 권리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춘 문명이라 그럴 것이다. 개인을 억압하고 짓누르면 그 집합체인 사회도 억압하고 짓누르는 꼴이 될 터이니 모든 것의 기반인 개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 개인이 모두가 똑같을 리 없다. 우린 보편적 개인을 상정하고 그에 맞춰 어떤 원리를 적용하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쪽에 자리한 평등과 의무 또는 책임을 위한 무게추를 고려하지 않으면 저울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질 게 뻔하다. 결국 개인은 ‘나’만 존재하고, 공동체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진작에 그런 상태였을 지도 모르겠다.


신은 사람들의 줄기찬 질문과 힐난에 답했을까? 아마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외쳤을 것이다. 자유와 권리만큼,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염치는 있을 만큼만 평등과 책임을 생각해 보라고. 제발 좀 귀를 열라고. 우린 언젠가부터 원하는 답만 듣는 재주를 부린다. 그래서 우린, 너희들 꼬락서니부터 살피라는 신의 비꼼도 안중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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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을 하면서 깨달았던 건, 가장 큰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출몰한다는 점. 사실 매장을 운영하는 사장과 직원 사이에 일을 향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는 건 당연하다. 사장은 생계나 다름없는 일에 모든 것이 얽매이지만, 직원은 아니다 싶으면 떠나면 되니까. 그런데 여기서부터 파생되는 책임감이나 열정의 차이가 업주 처지에선 참으로 치명적일 때가 있다. 조금만 조심했으면, 조금만 사려 깊었으면, 조금만 참았으면 거기서 멈출 상황이었는데, 그러지 않음으로써 일이 크게 번진다. 물론 대부분은 업주 관점에서다. 직원은 그만두고 나가서 다시 안 보면 그만이다.


장사를 하던 십수 년 동안 내가 봤던 사달은... 쳐다봤다고 분을 못 이겨 손님과 진심으로 물건 집어 던지기 놀이를 하거나, 출근 첫날 교육 중에 아무 말없이 출입구 앞에 유니폼 벗어 던져놓고 사라지거나, 선임자의 교육을 고까워해 바로 그만두고 가 버리거나, 자신은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지만 외국인 근로자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매장 카운터 앞 공간에 모여 앉아 친목을 다지거나. 신규로 채용했지만 연락도 없이 안 나오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퇴근 후 메시지로 내일부터 못 나간다고 통보받은 경우도 수두룩하다. 처음엔 기가 차서 연락도 해 보고 설득도 해 봤지만, 어느 순간부턴 그러려니 했다. 그 이후 내게 돌아오는 건 업무량의 폭주. 하루 3시간씩 자면서 두 달 가까이 일해보기도 했고, 명절 연휴엔 48시간을 매장에서 보낸 적도 있다. 잠이 부족해 지하철에서 서서 졸다가 무릎이 꺾여 바닥에 넘어져 보기도 했다. 창피? 일어서서 손잡이 붙들고 다시 조느라 그런 거 느낄 새도 없었다.


당연히 선물 같았던 좋은 근무자들도 많았다. 반대로 쓰레기 같은 업주들도 많다는 것 역시 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을 압도하는 기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빌어먹을 기억들. 지금은 장사를 때려치우고 남의 밑에서 일하지만, 바로 그 ‘남’이 겪는 최근 상황들이 남 일 같지 않아 예전 일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자영업자들 대부분은 미래의 건강을 현재로 끌어와서 쓴다. 그만큼 육체와 정신을 혹사하기 마련이다. 부디 현재와 미래의 균형을 잘 맞추었으면 한다. 빌어먹게 날씨도 다시 한여름으로 회귀했다. 더위와 기억이 서로 뒤엉켜 만든 진흙탕에 발이 빠진 채 머리만 긁적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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