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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평점 :
해미는 마음의 짐이 있다. 어린 시절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 어린 나이에 제대로 의식하진 못했겠지만, 그는 그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열심이었던 그 시도는 또 하나의 상처로 다가왔고, 해미의 삶은 이후 그 묵직함에 짓눌리듯 끌려갔다. 어느덧 마흔이 가까워진 현재,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해미는 자신의 기억들과 맞닥뜨린다. 언니의 죽음, 독일에서 3년간 살았던 일, 파독 간호사 이모들, 친구들과 함께했던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그리고 거짓말. 해미는 이번에도 알게 모르게 열심히 그 시절의 흔적을 뒤쫓는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이번엔 거짓말에 대한 사죄가 필요했으니까.
사람이 겪는 무례함이나 부당함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물에 녹듯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침전할 뿐이라는 걸 알았고, 침전물이 켜켜이 쌓여있을 그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면 씁쓸해졌다.
(본문 중)
대다수 사람은 마음의 짐을 하나씩은 지고 산다. (아닌가?) 그냥 지고 살면 그뿐이겠지만 그 묵직함은 그 사람의 삶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나 역시 짐이 있다. 공교롭게 내가 가장 싫어했던 존재와 관련이 있고, 미움과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뒤죽박죽된, 회색빛 묵직한 짐이다. 서로에게 주었던 상처들은 흉터로 남아 뜬금없이 선명하게 자국을 드러내곤 한다. 아무리 내던지려 해도, 아무리 가라앉히려 해도 이제는 소용없다는 것도 안다.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본문 중)
다시 한번 어렸던 그 시절을 돌이켜본다. 지금 50대의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다른 선택, 다른 대응을 할 수 있을까? 결론은 언제나 한 가지. NO! 게을렀던 걸까? 지금도 여전히 게으른 걸까? 아니다. 게으르지 않은 거 같다. 아니, 모르겠다. 다만... 무엇보다 무서웠다. 내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릴까 봐. 다름을 인정하는 건 그저 시작일 뿐이다. 그 이후 이어질 지난한 과정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모든 게 부서질까 봐.
어찌 됐든 지금은 그 짐조차 내 삶의 완벽한 일부가 되어 있다. 내 경우는 털어냈다기보단 짊어지고 일어섰다고 해야겠다. 시간의 힘?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은 모든 걸 퇴색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거든. 그런데 나한텐 하나가 더 있었다.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을 수도 있다. 꼭 있었으면 좋겠다.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본문 중)
해미 역시 기억을 쫓으며 자신을 향한 애정과 관심을 깨닫는다. 자신이 거리를 두며 스스로 거부해 왔다는 사실까지도. 그리고 기억의 종착점에 도달했을 때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미, 자신이 친구들과 담을 쌓는 원인이 되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구원의 문이 열려 있었음을.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본문 중)
<눈부신 안부>는 이모들로 대변되는 파독 간호사들의 삶의 이야기와 우재, 한수, 레나로 대변되는 해미의 개인적 인연들에 관한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해미가 선자 이모에 대해, 한수에 대해, 우재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다면 해미의 삶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만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삶은 인연의 엇갈림으로, 수많은 갈등으로 괴로울 필요가 없을 거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선 자리에서 생각하는 게 익숙하니까. 미루어 짐작하는 게 최선이고,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가는 중이고 또 살아내야 한다. 파독 간호사들이 그랬듯이, 또 해미가 그렇듯이. 대부분 사람에게 삶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본문 중)
내가 아끼는 모든 사람에게 안부를 물어야겠다. 관심과 애정을 담뿍 담아.
우리는 모두 그 자체만으로도 태초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존재들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말이야.
(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