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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2년 1월
평점 :
작가는 어린 시절, 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우리는, 너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란 얘기를 듣는다. 이 방대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이란 그저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란 얘기.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을 꿈꾸지만 예기치 않았던 일로 이별을 겪는다. 자신의 정체성과 삶이 흔들리며 스스로 똑바로 서있기 힘든 시기, 그녀는 우연히 과거의 인물인 한 남자의 삶과 마주친다. 분류학자이자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면서 평화주의자였던 인물. 물고기의 매력에 빠져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고기를 수집해 그 대상에 이름(학명)을 부여했고, 지진으로 인해 모든 표본이 파괴되면서 자신의 모든 업적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지만 굴하지 않고 일어서 삶을 회복시킨 남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 작가는 그 남자가 지녔던 불굴의 의지에 주목하고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었는지 그의 삶을 뒤쫓기 시작한다. 자기 삶도 그처럼 다시 설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삶의 열정, 삶의 원동력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살았던 삶의 굴곡을 추적하는 작가의 행적과 의견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질 때쯤, 이야기가 갑자기 방향을 튼다. 조던의 삶을 살핀다는 큰 줄기는 그대로지만 그 내용이 예상치 않았던 방향으로 이어진다. 응? 아니, 정말? 이 정도쯤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준의 전환. 건조한 기삿거리에서 흥미로운 가십난으로 넘어갔다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읽다 보면 이야기는 또 한 번 튀어 오른다. 이거 뭐야! 이게 이렇게 된다고? 이번엔 가십난에서 폭로 기사로 넘어가는 전개다. 내용은 얘기하지 않겠다. 그 내용 자체가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핵심일 테니까. 직접 읽어보시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어류는 잘못된 분류체계란 거다.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등은 계통학적으로, 또는 발생학적으로 그들 고유의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그 공통점을 기반으로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다. 그런데 어류는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물에 산다는 이유로 하나의 범주로 묶였지만 파고 들어가 보면 어떤 것은 포유류에 가깝고 어떤 것은 양서류나 파충류에 가깝다. 그러니까 어류는 당시 사람들의 지식수준에서 편의상 하나로 뭉쳐진, 잘못된 분류였던 셈이다. 사람들은 대상에 질서와 가치를 부여하려 한다. 그래야 삶이, 사회가 굳건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이 부여한 질서나 가치가 언제나 옳은 것이냐 하면 분명 그렇지 않다. 사회적, 역사적 가치야 말할 것도 없고 과학적 가치조차 어류의 예에서 보듯 옳음을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물고기에서 시작된 조던의 확신, 인간을 최상위로 놓은 분류학에 대한 그의 신념, 거기에서 이어지는 조던의 삶의 경로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다수 사람이, 또는 뛰어난 사람들이 부여한 질서와 가치를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에 맞지 않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 게 적합한 일일까? 질서와 가치만이 의미 있는 것일까?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러니 우린 잘못된 토대를 바탕으로 적절치 못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질서나 가치, 기준은 세상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완벽하다고 맹신해서도, 그것들이 모든 것이라 고집해서도 안 될 일이다. 아무것도 부여받지 못한 혼돈 또한 우리 삶의 일부이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삶에 대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한낱 티끌 같은 생명체에 무한한 가능성을 선사한다. 그래서 삶은 더욱 경이롭고 다양해져서 뭐라 정의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그런 삶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 다름을, 그 독특함을, 때론 그 가벼움까지도.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 (본문 1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