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나 같으면 나중에 꼭 거기 가서 살겠다고. 진지하게 그 말씀을 듣던 어머니는 후에 삶을 정리할 시기에 다다르자 반드시 그 단체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집을 세우셨다. 그곳은 뭔가 분명치 않은, 사이비 같은 집단이라고 내가 아무리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의 의지가 강할수록 어머니의 모습은 젊음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젊어진 모습을 한편으론 기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러다 내 방에 들어와서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누나에게 물어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누나라면 내 편이 되어 주겠지 하면서. 어느덧 '에라, 모르겠다'란 심정이 되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는데 책장 위에 자리 잡은 고양이가 보였다. 그런데 눈이 빨간 가짜였다. 진짜는 어디 갔냐며 내가 덤벼들었고, 가짜는 눈이 부풀어 오르더니 나를 할퀴었다. 그 사이비 단체가 벌써 힘을 발휘한다고 탄식하던 나는 가짜의 빨간 눈 한쪽을 발로 밟아 터뜨렸고, 진짜 고양이의 행방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짜의 남은 한쪽 빨간 눈을 밟기 직전, 내 옆구리에 붙어있는 진짜 고양이를 발견하고서 모호한 감정을 담아 외쳤다. 이 자슥이!


눈을 떴다. 멍한 정신이 가장 먼저 낚아챈 것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시계였다. 새벽 4시가 조금 안 된 시각. 두 번째로 건져 올린 건 내가 꿈을 꿨다는 자각이었다. 그리고 현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마루 소파에서 잠을 청했고, 고양이가 내 옆구리 자리를 차지했고, 그런 고양이한테 밀려서 하체와 상체가 따로 노는 이상한 자세로 소파에 낑겨 있다가 결국 그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다는, 그런 집사의 현실.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는다. 당연하게도 꿈의 이미지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 모습인데….


어째서 이런 꿈일까? 과거의 장소, 과거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 모두가 그 당시 실제 모습과 반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뼈대는 지금 읽는 소설에서 비롯된 걸로 보이는데 배우 캐스팅은 기존 이미지와 역으로 간 셈이다. 그 시절의 갈등 관계가 사라지고 피붙이의 질긴 인연을 깨달아서일까? 가짜 고양이와 벌이는 난투극은 며칠 전 봤던 새의 모습 때문이다. 로드킬로 형태를 잃고 바닥에 찌부러진 비둘기와 그 옆에서 얼쩡거리던 까마귀 한 마리. 그리고 까마귀 부리에 걸려있던 비둘기 깃털. 가짜 고양이의 눈이 붉게 변하면서 커질 때 그 모습은 흡사 까마귀의 모양과 비슷했다. 고양이가 사라지면 나의 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까 하는 의구심. 그 의구심이 고양이와 까마귀를 같은 선상에 놓고 말았다.


저만치 옆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 고양이와 눈을 맞춘다. 그래, 개꿈인 것을. 꿈에 의미를 지나치게 부여해 내 실체를 흔드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지.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진짜 싸운 것처럼 허리와 등이 뻐근하다. 너무 이상한 자세로 잤다.


고양이, 아저씨는 다시 자러 간다.


침대로 가면서 문득 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야, 그러고 보니 너는 어떻게 꿈에서도 한결같냐? 아저씨가 니 짝퉁이랑 그렇게 싸우는데 옆구리에 붙어서 구경만 하고. 실생활엔 하나도 도움이 안 돼요.


이 녀석이 말할 줄 알았다면, 분명 이렇게 내질렀을 것이다. 개꿈은 개한테 가서 따져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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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랄라. 이른 아침부터 살짝 들떠있다. 아침 먹고 청소하면서 접혀있던 이동장을 슬쩍 빼내서 모양을 갖춘다. 아니나 다를까. 이동장이 펼쳐진 걸 알고는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낌새를 살핀다.


고양이, 너 오늘 병원 간다. 광견병 백신 맞아야 해서 살짝 따끔할 거다.


이동장엔 관심 없는 척 마루로 나와서 다시 청소.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얄미운 고양이를 골탕 먹이려는 악동 같은 기분이다. 고양이는 다시 마루로 달려 나와 나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본다. 그 눈에 담긴 질문은 단 하나다. 저걸 왜 꺼내는 건데?


빨래까지 마친 후 드디어 병원에 갈 시간. 내가 바지를 갈아입자, 고양이는 재빨리 침대 밑으로 피신한다. 모른 체 하면서 녀석의 물그릇과 밥그릇을 가져와 씻는다. 안방으로 따라 들어가면 녀석은 절대 침대 구석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참아야 한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절반쯤 씻었는데 녀석이 쪼르르 나와서 내 옆으로 다가온다. 병원에 가지 않는다면, 지금 이 상황의 마무리는 보통 간식 급여다. 간식 그릇을 꺼내고 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익숙한 말을 건넨다.


까까 먹을까?


함정의 완성. 나에게 바짝 다가온 고양이를 수월하게 들어 올리자, 그제야 고양이는 직감한다. 망했다냥. 두 앞발로 내 팔을 꼭 부여잡고 고개를 내 품에 파묻어보지만, 소용없다. 1년에 한 번 꼭 맞아야 할 주사고, 무엇보다 내 안의 악동이 오늘따라 기세가 등등하다. 우하하, 요 녀석, 따끔할 것이다!


20여 분 후. 집에 돌아와 이동장을 열자, 고양이가 튕기듯 나온다. 고양이가 그러든 말든 나는 얼른 바람막이부터 벗는다. 온몸이 땀투성이다. 20초나 됐을까? 의사 선생님 책상 위에서 도망치기 위한 고양이의 그 짧은 난동을 막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한 데다, 바람막이의 차단 기능이 그 열을 완벽하게 내부에 가두는 통에 거의 한여름 수준의 땀을 흘리고 말았다. 악동은 사라지고 퀭한 눈의 지친 중년 아저씨만 덩그러니 서 있다. 살면서 사람이 심보는 곱게 써야지. 아우, 힘들어라. 이동장을 접어서 보관하고 어디 있는지 모를 고양이를 향해 말한다.


까까 먹자. 진짜로.


다음 달에 종합 백신 맞으러 한 번 더 가야 되는데. 남은 한 달 동안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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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장사를 하면서 겪게 된 가장 큰 변화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최진영의 <일주일>에 관한 글에서 언급했듯 ‘고객은 왕이다’란 고리타분한 명제를 폐기 처분했다는 거. 다른 하나는, 내가 뽑은 근무자들을 내 동료이자 내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거. 사실, ‘나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확률이 가장 높은 존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문장을 20대 때 적어놓은 걸 보면, 이미 비슷한 개념을 깨달은 상태긴 했다. 다만 장사를 시작할 땐 그 개념을 근무자들에게 적용하지 못했을 뿐이었지.


그 인식을 촉발한 가장 일반적인 예는, 느닷없는 결근이나 퇴사다. 대체 또는 보완 인력이 전혀 없는 소규모 자영업 특성상 그 공백의 여파는 고스란히 나 아니면 남아 있는 근무자에게 전가된다. 다른 예라면, 성격상 문제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사고방식 덕에 다른 근무자들과 화합이 안 되거나 상대방의 말이나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조직을 아예 와해시키는 경우다. 이럴 때마다 더 나를 가라앉게 만드는 건 내가 알면서도 그 사람을 뽑았다는 점이다. 비논리적인 얘기이지만, 다양한 사람을 자주 접하게 되면 어떤 사람을 볼 때 감이라고 해야 할까, 느낌 같은 게 있다. 이 사람은 같이 일하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런데도 뽑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가 아주 많다. 일하는 사람의 공백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견뎌낼 수 없을 때가.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알게 됐다. 언젠가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도래할 텐데, 그 순간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경제적 문제도, 진상 손님도 아닌 내 손으로 뽑은 근무자일 거라고. 장사를 시작하고 16년쯤 지났을 때 그 일은 현실이 됐다.


살면서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선택을 한다. 다만, 그 선택의 대부분은 삶의 연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마치 우리가 집안의 문을 아무 생각 없이 여닫고 지내는 것처럼. 하지만 흐름을 깨고 변화해야 할 순간이 닥치면, 우린 그 선택의 순간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바뀔 것인가, 그냥 흘러갈 것인가. 변화를 택했다면 삶은 전과 다른 방향을 잡을 테고, 똑같은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린 다른 시각으로 그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만 더. 오래 같이 일하던 근무자들과 매장에서 수다를 떨 때가 있곤 했다.


“진짜 신기한 게 점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일할 수가 있어요? 난 절대 나중에 편의점은 안 할 거야.”

“너도 장사해 봐. 네 일이면 너도 이러고 있을걸?”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한 녀석이,

“나는 더 신기한 게 점장님 어떻게 안 죽고 살아있어요?”

“... 이 자슥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내 옆에서 자리를 지켜준 근무자들 덕에 16년이 넘게 버텨낼 수 있었다. 언제나 희망은 사람에게, 절망도 사람에게 있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자각도 내 선택 중 하나였을 것이고, 지금은 딱히 일부러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 삶의 일부일 뿐.


AI가 제시한 문장 : 문을 나서면, 그 문은 더 이상 내가 알던 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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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 중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래 쓸데없다고 생각하던 짓을 나이 들어 시도하는 중이라고 해야겠다. ‘나이 들어’란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둘 다 건강에 관련된 행위다. 첫 번째는 건강기능식품 섭취. 예전엔 선물이 들어오면 먹곤 했는데 지금은 내 돈으로 사 먹는다. 검색을 통해서 그나마 효능에 대한 검증이 조금이라도 더 이루어진 성분 중심으로 내용물을 구성했다. 당장의 효과를 보겠다는 건 피로 회복과 관련한 비타민B 정도고, 나머지는 예방 차원이다. 먹은 지 3개월쯤 됐는데, 노란색 영롱한 오줌 빛깔을 볼 때마다 돈을 입으로 넣어서 오줌으로 빼는, 착즙기가 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두 번째는 손가락 패치 부착. 오른쪽 손가락 일부가 무언가를 꽉 쥐고 힘을 줄 때마다 불편함이 느껴진다. 직업병일 가능성이 크다. 병원에 가면 어째 뻔한 얘기를 들을 것만 같다. 관절이 아프면 그 관절을 덜 쓰면 된다는 식의. 그렇다고 고양이한테 청소를 시킬 수도 없고. 로봇 청소기를 사야 하나? 어쨌든 그래서 선택한 게 원적외선 패치인데, 하루 8시간 정도 부착하면서 경과를 살피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정도로 완치된다면, 20년 가까운 내 장사 경력을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억울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단 말이지. 지금 억울한 게 중요한 건 아닌데.


뭐, 알면서도 하고 있다. 얄팍한 희망에 기대 그래도 무언가는 해 보겠다고. 게다가 지금 이 글은 그런 나를 나름 합리화하는 과정이고. 아무것도 아닌 글이지만, 내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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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사소했다. 고양이 장난감 중에 털로 짜서 만든 캣닢볼이 있다. 공 모양에 고양이 얼굴 크기 정도고 털실을 뭉쳐놨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의 말캉함을 지녔다. 고양이와 놀아주다가 이 볼을 고양이 쪽으로 굴렸는데, 이 녀석 피할 생각 없이 멀뚱히 보고 있다가 얼굴에 정면으로 맞았다. 물컹하다고 해도 부피가 있으니, 녀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충격보단 놀라움이 더 컸겠지만. 그 즉시 숨숨집으로 달려가더니 콕 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쫄보 녀석 같으니.


이 사소한 일상에 평소 하던 생각이 들러붙었다. 고양이와 함께하면서 밤의 일상이 완전한 평온함으로 가라앉았다는 내 평소 생각. 세상에, 이런 쫄보 덕에? 그러니까 그 평온은 어떤 물리력이나 권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고양이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외로움이 끌려 나왔다. 내가 외로움을 탔던가? 그 틈을 고양이가 채워준 건가? 꼬리를 물던 의문은 어떤 의문에 도달하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고양이가 부재하면, 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나?


새벽에 고양이에게 간식을 주려고 잠에서 깼다. 식탁 위쪽 불을 켜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거실 쪽 베란다 창에 식탁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4인용 식탁이지만 벽에 붙여놓은 관계로 2인용 식탁이 되어 버렸고, 각종 잡동사니를 올려놓아서 실제론 나 혼자 쓰기에 딱 적당한 공간만 남은 식탁. 어쩌면 내 생활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그 후로 며칠 동안 첫날의 오싹함까진 아니지만, 창에 투영된 이 모습을 볼 때마다 꺼림직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어떤 날의 비슷한 시각. 부스스 일어나서 다용도실에 있는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몸을 일으키다가 창밖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가로등 불빛 아래 주차된 자동차 하나. 주변의 어둠으로 인해 그 존재감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처음엔 빛 때문에 차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눈을 한참 깜빡이고 나서야 모든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20년을 넘게 봐온, 별다를 것 없는 익숙한 공간. 그런데도 잠깐의 낯섦이 그 공간을 아주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게 했었다. 낯섦이라. 공간은 그대로인데 빛과 어둠과 내 시력만으로 그 공간을 왜곡 해석한 것을 낯섦이라 할 수 있나?


마루로 나와 베란다 창을 바라봤다. 식탁은 여전히 창에 선명히 맺혀있었다. 하얀색 식탁과 파스텔톤 의자와 식탁 위에 놓인 다양한 색깔의 잡동사니들. 하지만 창에 맺힌 그것들은 모두 식탁 위 조명색인 주황색 한 가지로 뭉뚱그려진 채 현실감을 상실하고서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저 창, 스크린 역할을 하는 저 창은 새벽에 선선해지면서 최근에야 ‘다시’ 닫기 시작했다. 그 얘기는 4~5개월 전에 이와 똑같은 장면을 분명 오랜 기간 봐왔을 거라는 의미다. 고작 4~5개월이 나에게 낯섦을 선사한 것이었던가? 그런 걸 낯섦이라고 해도 되나? 식탁 위 조명이 애초에 주황색이 아닌 하얀 형광등 불빛이었다면, 저 반사된 장면이 내게 어떤 인상이라도 남겼을까? 내 인식과 감정의 흐름이 고양이와 한밤의 평온을 거쳐 외로움으로 지나가지 않았다면, 일련의 상황이 일어나기나 했을까?


‘나’라는 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틀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불명확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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