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왜 불평등한가 - 도심재개발 젠트리피케이션 빈부격차
리처드 플로리다 지음, 안종희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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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었던 <도시의 승리>의 저자인 에드워드 글레이저와 대척점에 있다기보단 관점이 다르다고 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플로리다 역시 도시화에 희망을 걸고 미래가 있다고 본다. 그 점에선 두 사람이 같다. 하지만 <도시의 승리>는 도시의 장점에 초점을 맞춘 채 그 장점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다고 보며,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다른 것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느낌으로 바라본다. 이에 반해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는 도시에 발생하는 위기, 특히 빈부에 따른 지역적, 경제적 격리와 중산층의 소멸이 자칫하다간 도시의 모든 장점을 삼켜버릴 수 있다고 여긴다. 게다가 그 위기가 바로 도시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그 힘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고 판단한다. 책의 내용을 자세히 요약하는 건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번 <도시의 승리>는 이런 취향을 무시한 채 책의 소개에 충실했지만, 이번엔 하던 대로, 내 맘대로 써 보겠다. 아래 내용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하거나 아니면 직접 읽어보시길. 자, 내 갈 길 가겠다.


고양이 마을이 있다. 해발 300m가 넘는 산 정상. 성곽이 정상을 휘돌아 나가고 길이 잘 닦여있으며 적절한 볼거리와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 접근성까지 갖춘 곳이다. 사시사철 사람들이 꾸준히 오르내리며 차나 자전거는 접근할 수 없다. 고양이 처지에선 최적의 장소다. 어린 고양이들이 자리를 잡았고, 입소문이 났는지 꼬맹이 고양이들이 계속 뒤를 이었다. 이곳의 고양이들은 등산객들에게 삥을 뜯는 것을 주요 직업으로 삼는다. 성곽 바깥쪽이나 정상 부근에서 잠을 자다 때가 되면 슬슬 본업을 위해 정상으로 출근한다. 좋은 기반 시설과 훌륭한 주변 환경과 양질의 일자리가 제공되는, 고양이 특급 마을이다.


귀여운 고양이를 끌어들이고 삥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이 마을의 장점이겠으나 모든 일에는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슬슬 고양이 밀도가 올라가면서 경쟁력에 차이가 발생한다. 귀여운 고양이는 더 많이, 그렇지 않은 고양이는 더 적게 삥을 뜯어 삥의 격차가 벌어진다. 정상 부근 한정된 토지로 인해 휴식 공간 또한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힘없고 약한 고양이는 점점 정상 주변에서 밀려남으로써 삥의 기회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진다. 그뿐인가? 냄새 나는 고양이 화장실 근처로 내몰리는 고양이도 생긴다. 더 있다. 소문을 듣고 어른 고양이라도 등장하면 기존 꼬맹이 고양이들은 속절없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다행히 어른 고양이는 이곳에 상주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자기 영역에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싫어해서 잠깐씩 정상을 차지하다 지나칠 뿐이다. 하지만, 이 잠깐의 순간이 쌓일수록 기존 어린 고양이들의 기회는 박탈된다.


그렇다면 고양이 마을은 어떻게 해야 지속가능한 성장과 안정을 할 수 있을까? 재개발? 의미 없다. 고양이는 환경을 중시하지만, 사람처럼 새집이나 지대를 추구하지 않는다. 저소득 직업군을 한 차원 높은 직업군으로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삥의 기회를 늘려주면 상황은 개선될 수 있다. 등산로 초입에 고양이 간식을 지참하도록 푯말을 세우는 식으로 등산객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사회기반시설 투자? 재개발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서 사람의 손길은 필요 없다. 자연 그 자체가 훌륭한 기반 시설이자 거주지다. 물론 그것은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한정된 정상 공간으로 인해 혜택받은 지역의 확장은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투자? 교육까진 필요 없겠으나 중성화 후 방사는 고려해 볼 여지는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산꼭대기에서 포획해서 수술 후 다시 산꼭대기에 방사해야 하니까. 자손이 계속 늘어난다면, 어미 세대에 비해 어렵게 살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지역에 권한 이양? 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특히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정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중앙정부인 척, 공공의 이득인 척 행동하지 말고, 고양이의 삶은 고양이에게 맡기는 게 좋다. 여름에 화장실 근처를 지나다 냄새가 난다고, 어른 고양이가 나타나 털 날리는 추격전을 벌여 소란스럽다고 민원을 넣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다만 그 산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살필 필요는 있겠다. 과거 일본 어느 지역에서 산에 늘어나는 고양이를 방치했다가 원 거주 동물인 삵의 개체수가 급감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한테 별 영향을 주지 않는 바이러스가 삵한테는 치명적이었던 까닭이었다.


재미 삼아 자주 다니는 산의 고양이들을 모델 삼아 이 책의 이론을 적용해 봤다. 저자는 주로 미국의 도시를 대상으로 연구하고 그 해법을 제시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도시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해법이 아니다. 당장 저 고양이 마을도 그렇고(흠...), 대한민국 서울에 적용해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정책이 있다. 한 예로 저임금 노동자들을 중산층으로 만들기 위해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독 자영업자 비중이 높다. 자영업자 중에서 프랜차이즈 형태가 특히 많다. 흔히 접하는 편의점, 치킨, 카페가 그렇다. 이런 곳은 장사의 이익을 본사와 나눠야 하지만 최저임금의 상승분은 고스란히 자영업자가 부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을 무작정 높게 책정하면, 저임금 노동자가 중산층으로 올라갈 기회를 엿보는 만큼 자영업자는 몰락할 위기로 내몰리게 될 거다. 그러니 단순히 자리바꿈을 원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향상을 원한다면 추가적인 대책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빛이 있고 존재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를 외면하고 사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슬금슬금 커지더니 존재 자체를 에워싸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요즘이다. 결국엔 존재를 잠식할까? 날뛰는 자본주의를 보완해서 나눔과 공존을 실행해야 할 시기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공존’이란 단어가 힘을 쓰지 못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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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승리 -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개정판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 해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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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때도 서울은 서울이었다. 물론 강남은 지금과 달랐지만. 십 대 초반쯤 되었으려나? 고속버스를 타고 5시간쯤 걸려서 온 가족이 큰아버지 댁에 간 적이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질린 누나는 그날로 서울로 복귀했고, 난 어떻게든 버텼다. 가로등 하나도 없던 동네. 자려고 불을 끄면 도시의 어둠과 차원이 다른 어둠이 주변을 감쌌다. 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봤지만 그게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그때 기억 때문일까? 난 도시를, 서울을 떠나 살아볼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문명과 편리함으로 대변되던 도시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끌어모은다. 이 책에 따르면, 그 같은 인접성은 도시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의 전파를 쉽게 한다. 동시에 여러 아이디어가 생겨나고 퍼지면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도시의 특성 중 하나인 혁신성이다. 이 둘은 도시를 양적, 질적으로 키우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도시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는 없다. 인접성은 질병과 범죄의 전파 역시 쉽게 하며, 혁신성은 때론 스스로 굴레가 되어 도시를 억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절히 개입하는 공공 부문이 필요하다. 깨끗한 물 공급과 안전한 치안, 접근성을 높이는 도로 등을 공급하는 것은 개인이 아닌 공공이 맡아야 할 역할이다. 또한 경쟁을 유도하고 교육에 투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수긍할 만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은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한다. 바로 고밀도 개발, 즉 도심에 고층 건물을 지어 사람과 건물의 밀도를 높여야 한단다. 다시 말해서, 이 얘기는 도심 내 개발에 제한을 두어선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이렇다. 건축에 제한을 두면 민간 회사는 수지가 맞지 않아 사업을 벌이지 않을 테고, 자연스레 주거 공급이 줄어들면 집값 상승이 유발된다. 그럼으로써 경제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도심 접근을 막게 된다. 또한 요즘처럼 자동차가 대중화된 시대에선 도시 주변부가 확장되는 스프롤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이럴수록 교외의 녹지를 침범하고 자가운전을 많이 하게 되어 더 탄소 집약적인 생활양식을 갖게 된다. 이런 양상을 줄이려면 이미 개발된 도심 내에서 제한 없이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문가가 하는 말이다 보니 일리가 있다. 게다가 실제 통계까지 제시하니 신빙성도 있다.


설명만 하면 딱딱하니 책에 있는 몇 가지 도시 사례를 살펴보겠다. 가장 먼저 디트로이트. 한때 자동차 제국을 상징하던 도시. 포드의 제조 혁신으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고, 도시는 초대형 자동차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동일 업종의 대형 회사 서너 군데가 도시를 독점함으로써 업종 간 아이디어 교류가 단절됐고, 포드의 혁신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교육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도시의 교육 수준을 떨어뜨렸다. 결국 일본에 밀려 자동차 제국은 무너졌고, 도시도 주저앉았다. 물론 이후 회복을 위한 꾸준한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장소를 중심에 둔 방향성 탓에 디트로이트는 실패한 도시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다음으론 텍사스에 있는 휴스턴. 이 도시는 개발 지향적이며 기업 친화적이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았으면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장소였겠지만 휴스턴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주거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졌고, 그것은 적정한 주거비와 물가로 보상받았다. 그 덕에 중산층과 교육을 많이 받은 우수 인력들을 꾸준히 끌어들이면서 도시의 성장을 일구어내는 중이다. 다만 이곳은 대중교통보단 자가운전 중심의 도시라 냉방이나 자동차 연료에서 배출되는 탄소의 양이 많다는 단점은 있다.


지금까지 써놓은 글에서 살짝 드러나기도 했지만, 저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을 옹호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개발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지만 주거 공급 측면에서 공공의 역할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는 공공이 주도하는 주택 공급은 시장 가격을 왜곡함으로써 민간 기업이 사업에 뛰어드는 걸 회피하게 하고, 장기적으로 공급 부족을 초래한다고 본다. 또한 도시의 핵심 지역에 공급되는 공공 주택은 그곳에 들어와 더 많은 일자리와 혁신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업이나 상업 시설이 들어설 기회를 영원히 박탈하게 된다. 기회비용의 문제다. 이건 오세훈 서울 시장이 서울에 적용하는 주거, 건설 정책과 맞닿아 보인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서울을 한 번 들여다보자. 고밀도 개발, 대중교통, 교육 수준. 도시를 살릴 수 있는, 저자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들여다보면, 서울은 완벽한 도시다. 높은 아파트와 사무용 빌딩들, 카드 하나만 들고서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 체계,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교육을 향한 열정. 게다가 완벽한 소비 도시이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람들이 주거를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를 모두 갖춘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밀도가 높아도 너무 높은 걸까? 취향이 너무 확고한 걸까? 밀려드는 사람에, 아파트를 향한 애정 공세에 주거 비용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지나친 교육열은 지식과 배움을 뛰어넘어 무한경쟁과 차별을 고착시키는 중이다. 완벽한 하드웨어에 과열되는 소프트웨어인가? 이게 말이 되나? 서울은 말도 못 하게 놀라운 도시구나.


<도시의 승리>는 2011년에 발행된 책이다. 무려 15년 전이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란 의문에 이것저것 검색해 보느라 읽는 시간이 배로 걸렸다. 또 하나, 읽는 내내 찜찜한 기분 때문에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시간이 더 걸리기도 했다. 저자도 인정했지만, 도시가 발전한다고 해서 세상을, 심지어 도시 내부조차 평준화시키지 못한다. 도시는 사람을 불러 모을 때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상호작용을 하며 기회를 제공하고 제공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빈곤은 계속해서 커진다. 저자는 성공한 사례를 들며, 도시가 아닌 시골 지역의 가난과 비교하며 더 나은 방향을 바라보지만, 더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더욱 많은 암담한 사례를 우리는 애써 외면해야 하는 걸까? 공공 부문은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도 되는 걸까? 책을 다 읽고서도 이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책은 리처드 플로리다가 지은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처럼 도시 찬양가였다 태도를 바꾼 사람이라고 한다. 찜찜함을 좀 걷어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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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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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의 장점 중 하나는 동시대의 서양사를 짧게나마 정리해 준다는 점이다. 내가 요약해도 되겠지만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18세기 세계의 흐름을 살펴보자.


===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신의 이름 아래 굴종을 강요당하던 시민계급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었고, 이는 프랑스대혁명으로 폭발했다. 시민계급을 포함한 대중은 절대왕정에서 사제와 귀족에 이은 제3신분으로 불렸다. 이 미천한 제3신분은 시에예스의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과 함께 카페에서 거리로 뛰쳐나갔다. “제3신분은 무엇인가? 전부이다. 제3신분은 지금의 정치 질서에서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제3신분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무언가가 되고자 한다!” (본문 중) ===


=== 서유럽이 상업적 이윤을 좇아 아시아 대륙 곳곳을 식민지로 삼아 나가는 역사적 과정을 ‘서세동점’이라 한다. 18세기에 밝게 빛나고 있던 서유럽의 뒤안길에는 노예무역과 서세동점이라는 어둡고 처참한 아비규환이 있었다. 이제 지구상에서 서유럽의 발길에 유린되지 않은 지역은 오스만튀르크제국이 버틴 이슬람 세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뿐이었다. (본문 중) ===


=== 앞뒤 맥락 없이 18세기만 놓고 보면 국력의 크기나 문화의 성숙도에서 동아시아는 서유럽을 능가한다. 그러나 19세기에 서유럽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완성하고 절정의 문학예술을 꽃피우며 전 세계의 지배자로 우뚝 선 반면, 동아시아는 이전 세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이 겪었던 식민지의 길을 더 비참한 모습으로 답습한다. (본문 중) ===


마지막 인용은 질문이기도 하다. 조선은 왜 영조와 정조에 이르는 76년간의 개혁과 발전을 뒤로 한 채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을까?


책의 제목이 ‘왕의 귀환’이기도 하니, 우선 영조부터 살펴보자. 역사책이나 드라마를 통해 흔히 접하는 부분은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긴 재위 기간(52년), 탕평책, 균역법, 사도세자(영조의 아들) 등이다. 극적인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는 게 사도세자 관련 문제겠지만 공교롭게도 영조의 정치적인 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들이 현재의 정국을 헤쳐 나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판단, 살려두었다간 분쟁의 씨앗이 되어 세손마저 위험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 어떤 행위를 했을 때 특정 분파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 이런 정치적 판단을 근거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세자시킨 후 뒤주 속에 그냥 방치한다. 그가 자신의 위치를 얼마나 처절하게 파악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균역법 시행 과정을 통해서 다른 면모를 살피는 것도 가능하다. 균역법은 17세기 대동법에 이어 세제 개혁을 끌어낸 주요 정책 중 하나다. 대동법 시행이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균역법 역시 그랬다. 이해당사자인 양반이 개혁의 주체이자 대상이었던데다 중앙 재정에 막대한 지분을 가진 분야였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필요성은 조선 전체가 공감했지만, 실행 여부가 난관을 거듭하자 영조는 독단적인 결단을 내린다. 양민(평민)들의 세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후, 자신은 대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 역할이고 그에 따라 해법을 모색하는 것은 탕평 관료의 몫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니까, ‘일 제대로 안 해? 너희만 세금 안 내겠다고 버티면 왕이고 양반이고 나발이고 다 죽는 거야!’라고 협박한 셈이다. 그 결과, 균역법이 시행되고 양반들도 세금 체계 안에 포함된다. 당시 왕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영조란 인물이 관료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물론 독재자의 측면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 “백성을 위해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임금의 자리에 있어도 독부(獨夫)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 중) ===


다행히 영조는 깨어있는 군주였다. 또한 앞서 보았지만, 말만 앞서는 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개천 바닥을 파내는 준설 작업과 주변 정비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도시 빈민들의 삶을 보살폈고, 상업 발달의 흐름을 알아채고 상인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붕당을 억제하고 백성을 바라본 52년의 긴 재위 기간. 그것은 조선으로선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리고 1776년, 숱한 시련을 극복하고 드디어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 반면 일체의 사정을 배제하고 공의에 준거하고자 했던 정조는 의리론을 둘러싸고 각 정파의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러한 대립과 갈등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서 공론 대결에 의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한 것이다. (본문 중) ===


정조는 영조와 결이 다른 왕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은 같다. 규장각을 세워 젊은 학자들을 관료로 키워내고, 장용영을 만들어 무예가 뛰어난 군관들을 배출했다. 그들이 문무 관료로 자리 잡으면서 정조는 자연스럽게 정국을 장악했다. 그 장악력을 바탕으로 정조의 탕평책은 훨씬 범위가 넓어졌다. 다시 말해 사용할 수 있는 인재의 범위가 풍부해졌다. 문장으론 몇 문장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붕당이 대립하던 시기에 상당한 정치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일들을 정조는 재위 기간에 꾸준히 해 나간다. 최근 10여 년 우리 정치에 부족했던 점들, 즉 갈등과 충돌을 조절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을 조장한다는 것과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정조는 해냈다. 그것도 억압이나 권력이 아닌 정치력으로. 다른 어떤 실질적인 업적보다 정조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쯤에서 왕을 떠나 당시 사회 분위기를 살짝 요약해 보겠다. 책의 문장을 조금 바꿔본다면, 18세기 조선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청을 등한시하던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북학’이란 이름으로 청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흐름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처음엔 교리 연구 중심이었지만 최초의 세례자가 나왔고, 양반에서 하층 계급까지 영향력이 확산한다. 상공업의 발달로 17세기부터 진행되었던 신분의 분화는 그 양상이 더욱 다양해지는 중이었다. 과거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문학 활동에 중인과 하층 계급까지 참여함으로써 신분 상승 욕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광대들 역시 궁중이나 높으신 분들 앞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장터로, 바다로, 농경지로 민간의 수요가 있는 곳을 찾아 움직였으며 독자적인 영리활동을 시작했다. 이처럼 조선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꿈틀대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은 왜 18세기의 흐름을 살리지 못하고 다가오는 세기에 그토록 무너져 내렸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정조의 죽음 때문. 정조가 죽고 즉위한 순조의 나이는 11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료들을 장악하면서 정국을 이끌어가던 영조, 정조와 달리 순조는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대리청정이 이루어졌으나 곧 권력 싸움으로 변했고 세도 정치의 시대로 넘어간다. 왕권을 강화했던 모든 조치가 되돌려졌고, 탕평은 무너졌으며, 인재들도 쫓겨났다. 개혁은 그렇게 무너졌다. 이런 이유로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이란 가정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일 테다. 다른 이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서유럽과 미국이 19세기에 강자로 등장한 원인 중 하나는 과학 기술을 산업화에 적극적으로 적용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정조는 기술을 우대했지만 어디까지나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접근했다. 이 방향성의 차이가 두 세계의 극명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 정조가 가다가 멈춘 지점, 정조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 지점에서 조선은 급속히 쇠락의 징후를 드러냈다. (본문 중) ===


영조와 정조는 분명 뛰어난 군주였다. 그들의 업적 뒤에는 시대와 변화를 읽어낸 두 왕의 날카로운 안목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이란 공간은 여전히 주자학의 공간이었다. 이질적인 것들이 자생적으로 꿈틀거리고, 외부에서도 억지로 밀고 들어왔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던 시대. 조선 후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정조는 그와 같은 시대의 흐름을 간파했지만, 단 한 발짝도 앞서 나가지 못했다. 그들이 부족해서가 아닌, 그것이 인간이 갖는 한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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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페라의 유령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52
가스통 르루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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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큰 기대를 하며 첫 표지를 넘기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일 때 어떤 설렘 같은 건 있지만 딱 거기까지만이다. 그런데 간혹 나도 모르게 큰 기대를 품고 책을 읽기 시작할 때가 있다. 지금 이 책이 그랬다. 작가나 소설 자체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단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원작이라는 사실, 그 한 가지가 모든 기대의 원인이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출간 당시 이 소설에 대한 반응이 어땠는지 검색해 보기. 1909년부터 1910년에 걸쳐 프랑스 일간지에 연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땐 별다른 화제가 되지 않음. 그러다 1925년에 무성영화로 개봉되어 큰 성공. 현재 명성의 가장 결정적 원인은 1986년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다음으로 한 일은, 이 소설이 다른 장르의 원작으로 선택된 이유를 생각해 보기. 일단 다채로운 시각적 이미지. 화려한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그곳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그리고 지하에 펼쳐진 어둡고 음침한, 정반대의 다른 세계. 다음으론 음악 자체가 소설의 중요한 소재. 마지막으로 미녀와 야수라는 가장 대중적이며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 그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다음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 검색하기. 설계자의 이름을 따 오페라 가르니에라고도 불림. 건설 과정에서 지하에 물이 차올랐으나 빼낼 수가 없어 그대로 완공. 공연 중 샹들리에가 떨어져 관객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 발생. 소설은 이 둘을 내용에 맞게 차용. 그렇군. 그래.


마지막으로, 작가 가스통 르루 검색하기. 특종 기자 출신의 프랑스 장르 문학의 개척자. <오페라의 유령>보다 먼저 출간된 <노란 방의 비밀>로 명성을 얻음. 밀실 살인을 다룬 추리소설로 아서 코난 도일(셜록 홈스)과 모리스 르블랑(아르센 뤼팽)에 비견될 정도. 그래, 그랬어. 어쩐지.


그러니까. 현실적 배경을 바탕으로 트릭과 구조를 짜서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그 모든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후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게 작가의 핵심이라는 건가? 그런데 문제는 그 설명이 내겐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거. 사랑 얘기는 흥미롭지만, 인물의 심리 변화나 특정 캐릭터들의 역할이 내겐 잘 수긍되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정말 마지막으로 한 일은, 내가 멍청한 게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그래. 그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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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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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바다>

--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 <본문 중>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이돌 그룹이 있고, 그들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을 추종하는 팬덤은 그 아이돌이 튼 물꼬를 더욱 거대한 흐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흐름은 세상을 바꾸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린 때론 대중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안다. 집단 지성 또는 대중의 급격한 쏠림은 옳고 그름을 떠나 최악의 상황으로 돌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단편엔 '세상 모든 바다'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한다. 세상의 모든 바다가 연결되어 있듯이 사람들도 차별 없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는 의미 정도. 여기까진 분명 맞다. 그런데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여야 한다는, 그러니까 '모두'와 '하나'란 단어가 합쳐질 때 은연중에 휘둘러지는 불편함을 우리는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롤링 선더 러브>

-- 퇴근 후에 청계천 끄트머리에서 리아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나타난 리아는 슬랩스틱코미디언처럼 우당탕 넘어지는 척을 하더니 말했다.

“안 해요? 왜 안 해요? 와아 조맹희 개멋있어.”
-- <본문 중>


뜻대로 될 리 없지. 세상이. 삶이. 치한이나 왕자님을 대비했으나 뜬금없는 호랑이 인형과 마주치고, 짝짓기 예능에 출연해서 출연자가 아닌 PD에 꽂혀 버리는. 그런 우당탕한 어떤. 나이는 차오르는데 이룬 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 같고. 상호작용 충만한 찐한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만 나도, 상대방도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그렇게 엇나가기만 하는. 그래도. 아무리 삽질만 한다 하더라도. 돌멩이는 이리 데굴, 저리 데굴. 여기서 차이고 저기서 밟히고. 그냥 데굴데굴. 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진짜 개멋있어.



<전조등>

-- “잠깐.”

그가 엉거주춤 멈춰 “왜?”라고 묻자 그녀는 깜빡한 무엇을 떠올리려는 듯 그를 보다가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본문 중>


급히 집을 나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매장에 있는 근무자는 오늘 중요한 시험이 있다. 올해 예정된 마지막 시험. 내가 늦으면 그는 올 한 해를 날려버리는 꼴이다. 속도를 높여 걷는데 저만치서 술에 취한 듯한 걸음걸이로 노숙자 한 명이 걸어온다. 비틀비틀. 교차하는 순간 비틀대던 노숙자는 길에 넘어지고 난 찰나의 고민과 함께 그대로 앞을 향한다. 이번 지하철을 놓치면 난 지각이다. 그리고 그는 시험을 놓치게 될 것이다. 지나가던 차의 경적 소리. 하지만 무시하고 지하철역 안으로 뛰어든다. 늦은 밤, 퇴근하며 그 자리를 다시 지난다. 거꾸로. 아까 낮에 그 노숙자는 괜찮은 걸까? 샤워 후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다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든다. 흠.
 
베듯이 일상을 침범하는 비일상. 그리고 흉터처럼 남는 불안. 흉터는 다시 벌어질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옛날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투덕거린 적이 있었다. 니가 노동의 맛을 알어? 소리치면, 다른 한쪽에서, 니가 돈맛을 알아? 맞대꾸했다. 얼굴을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치면, 퍼렇게 질려서 악다구니를 내뱉었다. 그렇게 붉으락푸르락 기싸움을 하더니만 결국 옆 동네 돈 냄새를 참지 못하고 사회주의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형님. 이제 사회주의는 무대 뒤에서 자본주의의 뒤치다꺼리나 한다. 사람들 사이에 맥락 없이 떠도는 '기립하시오, 당신도'와 같은 이모티콘 문구가 한때나마 투톱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다. 물론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노동의 맛을 외치던 사회주의가 퇴장한 탓일까? 요즘을 사는 근로자는 영혼까지 탈탈 털어 자본주의 팬덤에 빠져든다. 하지만 '좌절 금지'라는 머리띠 질끈 동여맨 우리의 주인공들은 출발점이 어디든, 현재 위치가 어디든 주저앉지 않는다. 쿨내까진 아니더라도 찌질하지 않게, 함께, 발걸음을 내디딘다. 내딛으려 한다. 평범함에 대한 이 밑도 끝도 없는, 그야말로 무데뽀 같은, 작가의 애정과 함께.

--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본문 중>


<보편 교양>

-- 곽은 은재와 함께 도서를 정리했다. 『도련님』은 우측 중단에, 『수레바퀴 아래서』는 중앙 상단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트롤리에 두고 『시민의 불복종』은 좌측 하단에, 『노인과 바다』는…… 자신의 손에서 은재의 손으로, 은재의 손에서 자신의 손으로 건네지는, 함부로 펼친 적 없는 새 책들의 반듯함. 축하의 말과 감사의 말. -- <본문 중>

손에서 손으로. 마음을 다한 자와 진심을 받아들인 자의 이중주. 다가올 날을 준비하고 지나갈 날에 감사할 줄 아는 자들의 평온함. 마음에서 마음으로.
 
글을 쓰다 문득 고양이를 바라본다. 어이, 고양이, 아저씨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뭔 소리 하나 잠깐 바라보더니 다시 햇볕에 몸을 맡기는 녀석. 이 자식이…. 까까 줄까? 'ㄲ'이 들어가는 단어의 잇따른 출현에 반색하며 달려온다. 까까로 통하는 우리네 진심. 룰루랄라 냉장고를 열다 눈에 들어온 파란색 우유갑. 파란색으로 도배되었던 주식창이 떠오르며 마음이 튀어 오른다. 아니야, 아니야, 심호흡. 후우, 후우.



<로나, 우리의 별>

소설을 다 읽고 생각을 하다 몇 번이나 멈췄다. 마치 학창 시절 조회 시간에 들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되씹는 기분이랄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려본다. 내가... 나이가 들었나? 이 이야기가 실현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단편 중 가장 강한 어조의 작품이었다. '우리는 가능하다.' 너무 강하면, 때론 불가능을 향한 기약 없는 희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나 아직 안 늙었거든! 난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결과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태엽은 12와 1/2 바퀴>

그는 지방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한다. 나이 들어가는 자신처럼 게스트 하우스도 서서히 쇠락하는 중이다. 이곳에 내일 딸인 은혜가 오기로 했다. '명절도 생일도 기일도' 아닌데. 서울에서 취업한 딸이 자주 오기엔 지나치게 먼 거리라 그런 날에만 만나는 게 자연스러웠다. 모처럼 1층 한구석에 멈춰버린 채 서 있는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아본다. 12바퀴 하고도 반 바퀴가 더 감긴다. 원래는 12바퀴였었는데.
 
일상이 깨지는 건 때론 활력이 된다. 하지만 여기선 아니다. 시작부터 죽음의 이미지를 던진 이야기는 그 어두운 분위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둔다. 야금야금 잠식되어 푹 잠겨 든 순간, 이야기는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서 갑자기 쑥 빠져나가 버린다. 그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자리에 서 있고, 그런 그의 모습은 바닷가의 풍경과 함께 놀러 온 서퍼들의 시야에 담긴다.
 
-- "그런데 저 사람은 뭐하냐?" -- <본문 중>
 
주체에서 배경으로 내동댕이쳐짐으로써 이제 다가올 불확실성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이른 아침, 딸은 아직 출발조차 안 했을지도 모른다.
 
-- 멀리 길가에 검은 봉지를 들고 서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몰라.”
-- <본문 중>



<무겁고 높은>

한때 탄광촌이었지만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선 도시. 고3인 송희는 그곳에서 밀려나는 모든 것들을 지켜봤다. 왜 그것들은 속절없이 떨궈져야만 했을까? 송희가 역도를 선택한 건 그 무기력함에 대한 오기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들어 올리고 놓아 버린다. 내려놓는 과정은 없다. 들면 그걸로 끝이라 던지듯이, 버리듯이 떨구면 된다. 이건 나의 삶이야. 그러니 버리는 것도 내가 하겠어.

-- 송희는 단호해졌다. 아니. 이건 영광이 아니야. 이건 미래도 아니고 꿈도 희망도 아니야.

그럼 뭐야?

젖은 머리가 물었다. 송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 흥하지도 망하지도 않는, 값이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운이 좋아도 나빠도 그대로인 것. 어떤 비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닌, 말하자면 그냥 100킬로그램의 손때 묻은 쇳덩이.

나도 몰라. 어쨌든 들 거야.
-- <본문 중>


소설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 의지의 발현이다. '그날이 송희가 정말로 역도를 그만둔 날이었다.' 그날 송희는 목표인 100kg 바벨을 들어 올렸을까? 젖은 머리는 알겠지만, 그 애는 귀신 같은 존재다. 산 자들은 그저 살아낼 뿐이다.


<팍스 아토미카>

-- 돌아서서 침대로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문을 떠나기 힘들었다. 한 가지 의심이 되풀이됐다.

내가 문을 닫았나. -- <본문 중>


하나의 맥락은 있지만 의식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글. 난 이런 글의 정체를 알 듯도 하다. 예전에 분열과 경계에 몰두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쓴 글은 소재에 상관없이 저 두 단어에 젖어 있었다. 아무 상관 없는 일에서조차 어떻게든 스며 나왔다. 지금 이 단편이 딱 그런 느낌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고 아우르면서 불확실함의 정서에 푹 잠긴 이야기. 어쩌면 정말 작가 자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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