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민음 한국사 : 19세기, 인민의 탄생 - 조선 5 ㅣ 민음 한국사 5
김정인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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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른 기울기의 변화 속도


18세기 영·정조 때에도 이미 상업의 확장은 전국을 아우르고 있었다. 한양 중심으로 정책적 육성 대상이었던 시전 상인과, 개성상인이나 경강상인처럼 지역과 유통망을 기반으로 해서 대규모 부를 이룬 상인들, 거기에 지방 장시에서 무엇이라도 팔았던 농민들까지. 이처럼 조선은 일부 지배층부터 일반 백성까지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상업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철저한 유교 국가였다. 심지어 개혁 군주라 일컬어지는 정조조차 상업의 필요성만 인정하며 배척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런 체제 아래서 부를 쌓은 상인들이 한 선택은 개혁이 아닌, 기존 세력을 등에 업는 편입이었다. 세도가나 권력에 줄을 댄 상인들은 그들의 보호 아래 세를 늘렸고, 유통과 공급 등 물자의 흐름뿐만 아니라 생산까지 장악했다. 19세기 조선의 상인들은 상업 자본으로 가는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하지만 돈과 권력의 결탁은 언제나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법이다. 대상인은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세도가는 그 이익을 나누기 위해 서로를 이용했고, 그 과정에서 중소 상인이 몰락하고 빈민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날 지경인데도 상업에서 비롯되는 이익을 조세 체계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권력의 사익을 챙기는 돈 보따리로 보았고, 그 결과 민의 근본이라던 농민들은 세금에 짓눌려 압사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서북지방에서 홍경래의 난이, 서울에서 빈민들의 쌀 폭동이 일어나고 만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벅찬 판국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드디어 은둔의 나라 조선에 본격적으로 이양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은 유교적 측면에서 봤을 때 느껴지는 격세지감이었다. 그러나 이양선의 출몰과 그들의 통상 요구는 조선 전체에 던져진 급격한 충격파였다. 결국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일본과 체결하면서 조선은 강제로 개항하게 된다. 힘에서 밀린 탓에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고, 이후 다른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기초가 됐다. 하지만 더욱 어이없는 건 우리 스스로 관세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당시의 관료들은 새로운 무역 질서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2026년. 세계는 AI와 전쟁의 열풍이다. 그 둘과 연관된 산업이 활활 불타오르며 경제를 이끌어가지만, 공교롭게도 그 둘 덕에 한 치 앞을 내다보기도 쉽지 않다. 산업 혁명과 인터넷 혁명에 이어 AI는 또 하나의 혁명이 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 활용의 가능성은 한도 끝도 없지만 그 가능성이 오히려 앞길을 막고 있고, 그 가능성을 애초에 뜬구름처럼 보는 관점도 있다.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의 논쟁을 넘어 SF적이고 묵시록적인 관점에 집착하다 AI는 어느새 전쟁의 도구로, 해킹의 도구로, 더욱 광범위하게는 일상에서 남을 해코지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러시아와 미국이 각각 한쪽을 차지하는 두 개의 전쟁은 그들의 명성(?)답지 않게 장기전에 돌입한 상태고, 전장에서 인명 피해는 물론 솟구치는 물가로 온 세상이 들썩거린다. 한편, 그동안 세상을 지배했던 자유무역도 미국에 의해 기세가 꺾였다. 트럼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다며 관세를 대폭 높였고, 관세를 낮추는 대가로 미국 내 직접 투자를 원했다. 외교적 결례와 돌발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최강국 대통령 덕에 대한민국은 또 한 번 새로운 무역 질서와 맞닥뜨렸다. 변화의 기울기가 너무 가팔라 어느 순간 아무도 모르게 임계점을 돌파해 버릴 것만 같은 요즘이다.


● 터져 나오는 갈등들


19세기 조선은 세도 정치의 시대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대표적인 외척이자 세도 가문이었고, 흥선대원군 이후론 기존의 세도 가문과 딱 들어맞진 않지만, 전주 이씨 종친들과 명성황후의 본가인 민씨 가문이 권세를 누렸다. 그들은 때론 손을 잡고 때론 견제하면서 권력을 탐했고, 이 시기의 왕들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때때로 이들을 이용했다. 더구나 이 시기는 일본과 청이 본격적으로 우리 내정에 간섭하던 때였다. 유학을 고수하는 유생들을 중심으로 외래 문물을 거세게 반대하는 세력이 한쪽에 있었다면, 그 반대쪽엔 고종을 중심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력이 자리를 잡았다. 그뿐이 아니다. 정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것이냐, 아니면 현실에 등 돌린 채 학문에만 정진할 것이냐, 외래 문물을 배척하고 화이사상을 지켜낼 것이냐, 아니면 시대에 맞춰 유학도 변화를 택할 것이냐. 또는 점진적으로 개방할 것이냐, 아니면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청을 모델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일본을 모델로 삼을 것이냐. 척화를 주장하는 쪽도, 문호를 개방하자는 쪽도 그야말로 가지각색이었다. 심지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청을 등에 업었다가도 곧 일본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터져 나오면서 개혁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2026년.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지금의 양상은 다른 때와 달라 보인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매몰된 진보는 개혁에 대한 추진력을 상실한 채 실용과 원칙 사이에서 방황하고, 보수는 철저한 차별과 배제를 바탕으로 극우가 모든 것을 휩쓴다. 세대 간의 갈등도 있다. 거칠게는 대략 20년 터울로 묶여서 다른 집단과 가치관의 차이가 드러나고, 그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연히 구별된다. 경계를 뭉뚱그려 길을 터야 할 정치는 그럴 생각은커녕 경계를 더욱 확실히 새기는 중이고, 자본주의의 단물을 고르게 퍼뜨려야 할 경제 역시 구조적 모순에 허우적대며 특정 집단에게만 그 과실을 허용하고 있다. 얼핏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듯하지만, 핵심엔 딱 하나, 아주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나의 이익. 지극히 원초적인 욕구고, 지극히 원초적인 충돌이라 어쩌면 해소하고 중재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 민(民)의 저항


세도 정치 아래의 조선은 그야말로 탐학의 시대였다. 조정의 대신부터 지방의 하급 관리까지, 그들이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뽑아 먹으려 들었다. 한계에 몰린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들고 일어나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민란이 번졌고, 중앙 정부는 때론 힘으로, 때론 회유로 버텼다. 천주교와 동학은 사람들 사이에 평등과 존엄이란 개념을 퍼뜨렸다. 신분제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이 개념을 지배 계급은 용납할 수 없었기에 박해와 탄압으로 맞섰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동학농민운동은 외세까지 동원된 무력에 무참히 짓밟혔지만, 그 변화의 흐름과 의지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조선은 어떤 방식으로든 바뀌어야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890년대, 독립협회가 만들어지고 만민공동회가 열린다. 독립협회는 초기에만 해도 보수와 개화가 모두 모인 친목 단체의 느낌이었지만, 서서히 정부를 견제하고 시대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결사체로 변모한다. 독립협회가 처음 주체했던 만민공동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 민중들이 주체가 되었고, 토론과 시위와 집회를 통해 정부를 압박하면서 일정 성과를 거두어냈다. 이처럼 19세기의 마지막 거대한 흐름은 유학도, 양반도 아닌, 평등과 자강을 꿈꾸는, 민중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1897년에 수립된 대한제국은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맞섰고, 전제군주제를 더욱 명확히 하며 19세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21세기. 예전과 달리 정보의 흐름은 정말 다양해졌고, 그 속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물론 고급 정보는 예나 지금이나 접근이 제한적이다. 그러다 보니 양만큼 질은 따라가지 못하고, 심지어 오류투성이인 정보가 사실인 양 세상에 유포된다. 사람들은 지위를 막론하고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표출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정보가 불확실하다 보니 결과가 어디로 튈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까지 나타나는 경향은, 정말 못 살겠으니 우리만이라도 잘살아 보자. 현대 사회에선 민란이나 변란의 형태보단 참정권의 행사로 저항이 표출된다고 봤을 때, 바로 저 경향이 극우 정권이나 정당이 득세하고 보호주의가 되살아난 이유일 테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런 건 아니다. 정보가 불확실하고 파편화되었다는 것은, 사람들 역시 이리저리 쪼개져 있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경향성은 나타났지만 그 방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게 현재 상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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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누적되어 온 오류와 모순을 세상은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 ‘못 살겠으니 좀 바꿔보자’라고 외치며 사람들은 참정권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지만, 정치 또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공교롭게도 정치 자체가 그 변화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권력의 사유화에 대해선 아직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로 반대를 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아직 기회는 있을 것이다. 19세기의 조선은 무척이나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그래도 움켜쥘 수 있었던 기회들을 날려버린 채 암울한 20세기의 시작을 맞이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 나만 잘 살면, 우리만 잘 살면 그만일까? 모든 게 연결된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수없는 싸움과 좌절을 거치며 22세기를 열 때, 아무리 못해도 우리 손에 희망 한 줌을 꼭 쥐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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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ㅣ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7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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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세 개가 떨어지다> /김채원


사는 게 명확했으면 싶다.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고. 이리 가면 이게 나오고 저리 가면 저게 나오고. 이름표나 도로 표지판처럼. 하지만 그런 삶은 많지 않다.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삶은 복잡해지고 돌변한다. 그렇다고 혼자 울타리를 둘러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다 끊임없이 상처를 헤집을 거고, 자신을 또는 타인을 용서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우리 삶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게 가장 먼저여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다시 시작해서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고, 그냥 보다 보면 알게 될 수도 있고, 이래서도 괜찮고 저래서도 괜찮을 수 있는.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원칙 아래에 모든 것은 우연과 찰나의 연속일 수도 있음을 수긍해야 한다. 그러면 버겁도록 환하고 무거운 개별적인 삶에서 우린 조금이나마 힘을 뺄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다 소중하지만, 모두가 별이 되어 어딘가 고정된 채 환히 빛나야 할 이유 또한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추도> /길란


가난이 맹목적으로 이 땅을 휩쓸던 때가 있었다. 어디에나 가난이 널려 있어서 그저 처절함을 즐기면 그만이었던 시기.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에게만큼은 이 가난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여겼다. 누군가는 밤을 새우고 누군가는 저 멀리 타국까지 가서 자신의 시간을 불태웠다. 그렇게 해서 가난은 점차 설 자리가 좁아졌다. 가난은 시대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휘적휘적 다니며 길거리 돌멩이처럼 발에 차이는 처절함은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았다. 가난은 조용히 기다리며 살폈다. 풍요 속 빈곤의 시대를 지나며 가난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허영과 욕심을 두 축으로 판을 다시 짰다. 진짜 가난한 자는 생존을 위해, 가난하지 않은 자는 투자란 이름으로, 부자인 자는 차별화를 위해 가난을 끌어들였다. 풍요 속 상대적 빈곤의 시대. 가난은 다시 세상을 휩쓴다.


2026년.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가 열리려고 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가난한 우린 많은 것을 잃었고,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을 언제든 놓아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가난은 진심을 담아 우리에게 댓글을 남기는 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꼭 죽어야만 죽은 건 아니다.


<나는 야구를 사랑해> /남의현


필드에 가만있는 사람이 많다. 필드에서 나가는 사람이 많다. 공을 노려보고 쫓다 한 사람이 잡는다. 공만 보고 뛰다 부딪혀 다칠 수도 있다. 몰랐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야구가 어떤 삶을 대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그의 삶이 반영됐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구야, 현실이든 허구든 자기 삶을 함께하기가 미안한 삶으로 규정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쳤을지 상상하기도 싫구나.


이야기에 묻어있던 많은 감정들을 돌이켜 본다. 희망? 오기? 집념? 그 어떤 것도 핵심은 아닌 거 같다. 무엇이라도 붙잡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셋 모두 가능하겠지만, 내가 느낀 건 어떤 절망이었다. 절망 앞에 ‘어떤’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온전한 절망이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나 하는 의문 때문에. 동력도 필요 없고, 그저 관성이었던 걸까? 등장인물인 ‘나’가 자신을 잘 돌봤으면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관성에 따라 흐를 뿐이다.


<히데오> /서장원


아파봤던 사람이 타인의 상처를 더 이해하기 쉽다.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당시 히데오는 어머니가 한국인이란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졌고, 그 일로 인해 그의 일본 생활은 끝을 맺는다. 대한민국에 와서 한국 이름으로 성장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연극 오디션에 지원한 그가 지원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자신도 사람을 때려 주고 싶었다고.


분하고 억울했을 거다. 어디에도 완벽히 속하지 못하고 차별받아야 한다는 게. 현실이 아닌 연극에서나마 그 마음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겠지.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받아들여질 거고, 소설의 이야기는 아마도 여기까지인 듯. 그런데 인정받지 못해서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씩 쌓인다면? 그래서 상처를 잘 아는 자들이 모여 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상처를 들쑤신다면? 우린 앞으로 수많은 히데오, 수많은 차별과 맞닥뜨릴 거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끔찍한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다.


<귀신이 없는 집> /위수정


옛날 교토에 코요라는 귀족 집안 여성이 있었다. 총애를 받았으나 모함으로 추방되었고, 유배된 시골 마을에서 능력을 발휘해 그 마을을 번성케 했다. 사람들은 코요를 귀녀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코요를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그 마을을 토벌하기로 한다. 코요는 서른셋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그 마을은 그 후 ‘귀신이 없는 마을’을 뜻하는 기나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우리는 한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며 모든 것을 바칠 듯 절실히 매달릴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 삶이 안정되면, 그 간절함과 절실함은 절대 예전 같을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겠지만, 종종... 어쩌면 상당수가 그것을 변질시킨 채 간직한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은 사라지고, 내 삶에 유용하게, 추하지 않고 번듯하게 가꾸고 누리려 한다. 그러다 보면, 공감대는 사라져 오직 자신만의 무언가가 되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나마 스스로 발견하면 다행이다. 깨닫지도 못하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일 테니.


작가에 따르면, 첫 번째 단락에 적은 일화를 기반으로 단편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귀신이 없는 마을. 코요가 없는 마을. 알맹이가 없는 마을. 우린 이런 일들을 많이 접한다. 기득권이 된 정치인들의 이념, 기득권을 쥔 중년 남성들이 외치는 여성 평등, 넉넉한 자들이 외치는 사회주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진정성과 정당성까지 복잡하게 얽혀 꼬여버린 갈등들.


“여기엔 아무도 없네요. 사람도. 귀신도.”

- <귀신이 없는 집> 중에서


난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제목을 <귀신‘도’ 없는 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일일야성/一日野性 > /이미상


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할 때가 있다. 단순히 비교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경수는 흐릿해지는 자신의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해 아내인 운주의 격을 떨어뜨린다. 같잖은 남편의 변화가 어이없지만, 한편으론 권태기와 함께 가라앉는 자신과 다르게 변화를 꾀하는 경수가 여러모로 달리 보이기도 한다. 운주는 중고등학교 때 놀던 시절을 함께 한 선숙에게 연락하고 추억에 빠져들어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다.

이후 운주가 맞닥뜨린 건 자신이나 선숙도 결국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서로를 끌어들였었다는 사실. 그나마 선숙은 현재 자기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듯 보이지만 운주는 그조차도 아니다. 게다가 권력관계가 명확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들은 운주를 계속 현실로 끄집어낸다. 돈과 폭력과 계급이 만들어내는 층위와 그것을 넘나드는 선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때론 자존감을, 때론 모멸감을 선사하기도 하는 법이다. 경수는 남성성을 상실한 대신 아내를 낮춤으로써 자신을 높였고, 선숙은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잃었지만 윤주를 통해 최고 의사에게 디스크 수술을 받을 기회라도 넓혔다. 상대방을 이용해 자존감을 얻는 이 게임에서 운주는 무엇을 건졌을까? 깨달음? 삶에서 얻는 깨달음은 보통 씁쓸하던데.

“산세가 깊어 캠핑 스폿으로 유명한 모 지역은 군의 슬로건까지 바꾸었다. J군에서 보내는 일일야성. 문명이 지워낸 나를 다시 찾는 하루.”
- <일일야성> 중


<적들이 산에 오를 때> /함윤이

"즐거울 테고,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 ... 그 말에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는 노아가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불현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노아의 양손을 쓰다듬곤 했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네 이름은 더 낫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모두를 인도하는 이름인걸. 그 새로운 세상에선 모두가 배부르고, 즐겁고, 따뜻할 테고..."
- <적들이 산에 오를 때> 중에서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상에선 '믿음'이란 단어는 종교와 가장 밀착되어 있었다. 물론 어디에나 쓰일 수 있는 단어지만, 단짝을 찾으라고 한다면 믿음과 종교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믿음의 단짝이 정치로 바뀐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게 맞다! 옳소! 그리고 내달린다. 넌 틀렸다! 옳소! 역시 내달린다. 확신에 찬 소리가 양쪽에서 울려 퍼지고, 거칠게 충돌하며 울리는 파열음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소란 속에서 정말 모두가 즐겁고 배부를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올까? 확신은 나와 우리를 견고하게 둘러싸고, 그 외부는 불신과 혐오가 넘친다. 믿음과 손을 잡은 정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불신과 의심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포섭한다. 내게로 오라. 저들을 물리쳐 우리가 즐겁고 배부른 세상을 만들어보자. 적들을 만들어내고 믿음을 강탈한 세상. 도대체 저 문장 어느 구석에서 '좋은' 세상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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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주일 ㅣ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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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매일 확인했다. 돈을 내는 자의 무례와 경멸을. 수치심까지 짓뭉개는 뻔뻔함을.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고서도 불공평이나 역차별이란 단어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을. 나는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했고 더 알아야 할 것들이 두려웠다."

- <일주일> 중 <일요일>에서


2010년쯤 됐을까? 남자 고등학생을 주말 오후 알바로 채용한 적이 있다. 용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어른과는 대화보단 대답을 했고, 무덤덤한 듯 조금은 뚱한,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이었다. 한 달이나 일했을까. 손님과 마찰이 생겼다. 기억은 안 나지만 사소한 문제였다. 손님이 본사로 클레임을 제기했고, 내게로 넘어와서 CCTV를 확인해 보니 근무자의 불찰이 분명했다. 아마 그 자리에서 근무자가 사과했다면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근무자는 사과 대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선택을 했다.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잘못을 인정했고, 고객이 찾아오면 함께 사과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다시 연락해 온 고객은 진정한 사과를 바란다고 했다. 근무자가 무슨 생각을 하며 일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어서 골머리를 앓던 나는 이 고객의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정한' 사과라니. 배를 할복하는 일본 사무라이의 이미지가 떠올라 순간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에게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얘긴가. 이 문제로 몇 주를 끌었던 거 같다. 결국 나는 그 고객과 언성을 높여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서로 보지 않는 걸로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오래전 일이라 완벽한 기억은 아니다. 아마 저 근무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뒀지 싶다. 내가 사람을 새로 구할 때까지만, 또는 앞으로 2주 후까지만 일해달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고객이 매장 근처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저 일을 겪으면서 많이 답답했다. 나와 다른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를 내 경험으론 유추할 수가 없어서. 청소년에게 필요 이상의 책임을 요구하는 어른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최진영 작가의 <일주일>은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다. 너무 전형적인 틀에 가두는 게 아닐까 하는 작가의 걱정처럼 각 캐릭터는 무미건조한 듯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무미건조하면서도 개별성이 있는 존재 아니던가? 문제라면,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의 개성이나 개별성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는 게 아니라 경쟁의 차별화 수단으로만 파악한다는 점. 그래서 어느 위치에 서든 아이들은 차별화를 위해 발버둥을 쳐야만 한다.


"돈과 명예 말고, 우리가, 또 다른 가치를 가져야만 해? 사랑, 희생, 정의, 존엄 같은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해버리면 삶이 복잡하게 꼬일 것만 같았다. 그런 가치를 추구하느니 조롱하는 편이 쉬웠다."

- <일주일> 중 <수요일>에서


어쩌다가 우리는 그 발버둥의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판별하게 됐을까? 왜 우리는 수직으로 늘어선 위치에서 벗어나려 하는 시도를 불손하다고 여기는 걸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아이들이 원하는걸, 찾으려는 걸 막아가면서 이 숨 막히는 사회의 축소판에 그들을 욱여넣고 있는 걸까? 온통 질문뿐이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게 편하니까. 답도, 원인도 내심 짐작되지만 해결할 순 없으니까. 흐지부지.


난 그때 그 아이에게 더 물어봐야 했을까? 참견이나 간섭이라 여겼을 것이다. 고맘때의 나도 그랬었다. 필요한 건 배려와 공감과 기다림과... 이런, 숨 막힌다. 어쩌겠나.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어놓은 세상이니 모두가 함께 숨 막힐밖에. 같이 숨이라도 막혀줄 수밖에.


"당신이 거기 잘 있으면 좋겠어."

- <일주일> 중 <사사롭고 지극한 안부를 전해요>에서


갑갑한 <일요일>에서 시작해 충격적인 <수요일>을 거쳐 희망적인 <금요일>을 지나면 작가의 에세이가 나온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안부를 전하고, 그 안부에 깃든 걱정과 잔잔한 고집을 뒤로하면, 진짜 청소년의 에세이가 버티고 있다. 움켜쥔 그 희망에 맘을 담뿍 담아 응원을 보낸다.


"짧은 생에 다 품기엔 무겁다 싶을 때마다 넓게 보고 많이 사랑할 것이다. 쫓기는 삶이 안정될 때까지 가끔은 도망치면서 살길. 이 결심에 죄책감은 느끼지 않기로 했다."

- <일주일> 중 <지금 도망칠 준비가 되면>,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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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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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외로움이 가슴에 박히기 마련이다. 그땐 그저 가끔 혼자 있고 싶은, 사치스러운 외로움이다. 그러다 가슴에 박힌 씨앗이 자라 묘목이 되면 외로움은 스스로를 가두는 울타리로 변한다. 묘목이 자라 큰 나무가 되면 주변 다른 것들을 빨아들이고 가로막아 거대한 외로움 그 자체가 된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큰 나무가 거대한 고목이 되면 고목 주변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압도하는 두려움으로 변질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외부로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외부의 손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나를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 P433, 434


- 인간


인간은 크건 작건 문명을 이룬다. 아이러니한 건 기술이 발달할수록 문명은 자연과 공존하기보단 파괴하는 쪽을 선택하는 듯하다. 개발과 발전이 언제나 최우선 화두이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연과 선을 긋고 고립의 길을 택했고, 그렇게 많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외롭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 한가운데 파고든 외로움에 자기기만이란 돌연변이를 일으켜 자신을 스스로 자연의 수호자로 높였다. 고결하고 고독한 파수꾼.


- 카야


카야는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봤다. 이어 큰오빠와 언니가 떠나고, 함께 있어 줄 거라 믿었던 조디 오빠마저 떠났다. 지옥 같던 아빠가 잠깐의 햇살을 비춘 후 카야의 곁을 떠나자 6살 카야는 혼자가 됐다.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는 벅찬 상황이지만 카야는 습지의 아이로, '마시 걸'이란 멸칭을 안고서 성장한다. 10대가 되고, 20대가 되어 성인이 되지만 뒤에 남겨지는 건 항상 카야였다. 꼬리표처럼 들러붙은 이별과 차별은 카야의 마음속 외로움의 씨앗을 거대한 고목으로 자라게 한다. 카야에게 평범한 삶이란 이젠 불가능하다.


- 인간

 

자기기만의 길은 험난하다. 착취하면서도 보존하는 척해야 하고, 개발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환경 보호를 외쳐야 하고, 쓸 거 다 쓰면서도 고갈과 훼손은 기술 발달이 해결해 줄 거라 믿어야 한다. 자연은 묵묵히 견뎌내지만, 인간이 가한 압박은 변화의 속도를 조금씩 끌어 올리는 중이다. 게다가 자기기만의 돌연변이는 두려움까지 억눌렀다. 두려움이 제거된 인간은 자연이 내는 파열음을 마치 일회성인 듯 가볍게 소비한다. 인간은 어떻게 될까?


- 카야


하지만 아무리 험난한 여정이라도 그 여정을 비추는 빛이 있다. 어린 카야의 생존에 큰 몫을 담당한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주머니, 그리고 첫사랑인 테이트. 이들은 카야를 비추던 커다란 등불이었다. 그리고 도망치던 어린 카야를 못 본 척하면서 미소를 던져주던 사람, 셈을 못 하는 어린 카야에게 푼돈 몇 푼이라도 더 안겨 보내주던 상점 직원까지. 일급 살인으로 기소되어 법정에 선 카야의 뒤편엔 이들이 자리를 잡는다. 카야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 인간


자연은 차이를 두지 않는다. 자연이 재해를 일으킨다면, 자연을 옹호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연을 무엇인가 꺼내 쓸 창고처럼 여기는 사람이나 똑같이 피해를 볼 것이다. 그걸 배신이라고 해야 하나? 자연은 이치에 따라 인간에게 재난을 선사하고 많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 그걸 범죄라고 해야 하나? 자연이 무엇을 하든 인간이 그 행위를 이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카야


소설은 두 갈래로 시작해서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 하나는 시체가 발견되어 수사가 시작되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어린 카야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다. 늪지에 대한 작가의 전문 지식이 어우러져 카야의 성장 스토리는 아찔할 정도로 읽는 사람을 빨아들인다. 다른 한 갈래의 이야기 때문에 어떤 흐름으로 갈지 예측이 되지만, 그래서 더욱 카야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단 생각을 끝날 때까지 떨칠 수 없었던 소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나이가 들었거나 현실이 팍팍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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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984 (한글판) ㅣ 더클래식 세계문학 55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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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중 대표 격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1948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49년에 출간됐고, 가까운 미래인 1984년을 배경으로 내용을 서술한다. 영국인인 작가는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에서 경찰이란 직업을 가졌었고, 그 후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 체제나 이념이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지 체험했고, 그 경험과 거기에서 비롯된 생각들을 소설에 그대로 녹여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니, 분명 누군가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이 소설의 핵심으로 파악할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더 유명한 건 ‘1984’란 소설 제목보다 ‘빅 브라더’란 단어일 거고, 그 단어는 대부분 감시와 통제를 상징하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게다가 요즘의 정보통신 기술은 이 소설에 나오는 감시 기술들을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이게 할 만큼 충분히 발달했다. 한 예로 AI와 결합한 거리의 CCTV는 이상 행동(담을 넘는다든지, 일정 장소를 오랜 시간 동안 배회한다든지)을 감지하면 관제 센터의 사람에게 통보하고, 지역 지구대에까지 연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개인정보와 사생활에 민감하다면, 이 소설에 내세운 감시와 통제는 끔찍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예전엔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이번엔 정치 체제가 구성원 개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말살하는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자신들은 순교자나 아이콘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 개인 내부의 마지막 피신처까지 싹싹 드러내서 텅 비어버리게 만드는 과정. 감시와 통제는 효율적이고 비인간적이지만, 말살은 역설적으로 인간적이며 건조하고 치밀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소설에 나오는 당의 표어가 갖는 모순이 말살 과정에서조차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더욱 아팠던 거 같다. 기술적 접근이 아닌 본질적 접근이라서. 그것이 사회 제도의 개혁이 아닌 개인 세계관의 파괴를 위한 수단이라서.


‘개인이 갖는 세계관의 파괴’라고 하니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주제가 하나 있는 거 같다. 세제 개편과 함께 시끌시끌한 부동산. 유일한 투자 수단이자 삶의 목표였던 1970, 80년대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동산은 세대에 따라, 아니, 세대와도 상관없이 개인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며 존재해 왔다. 안타깝게도 현재 2, 30대도 돈을 끌어모을 능력이 있는 개인에 한해서는 부동산에 대한 태도가 과거 세대와 다를 바 없지 싶다. 이쯤 되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 아닌가? 그럼, 개혁이나 개편이 아니라 세계관을 파괴해야 한다는 얘긴데. 뭐, <1984>랑 직접 상관은 없는 문제다. 그래도 궁금은 하네. 윈스턴이 고가 아파트 소유주였다면 끝까지 버텨냈을 것도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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