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7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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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세 개가 떨어지다> /김채원


사는 게 명확했으면 싶다.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고. 이리 가면 이게 나오고 저리 가면 저게 나오고. 이름표나 도로 표지판처럼. 하지만 그런 삶은 많지 않다.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삶은 복잡해지고 돌변한다. 그렇다고 혼자 울타리를 둘러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다 끊임없이 상처를 헤집을 거고, 자신을 또는 타인을 용서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우리 삶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게 가장 먼저여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다시 시작해서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고, 그냥 보다 보면 알게 될 수도 있고, 이래서도 괜찮고 저래서도 괜찮을 수 있는.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원칙 아래에 모든 것은 우연과 찰나의 연속일 수도 있음을 수긍해야 한다. 그러면 버겁도록 환하고 무거운 개별적인 삶에서 우린 조금이나마 힘을 뺄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다 소중하지만, 모두가 별이 되어 어딘가 고정된 채 환히 빛나야 할 이유 또한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추도> /길란


가난이 맹목적으로 이 땅을 휩쓸던 때가 있었다. 어디에나 가난이 널려 있어서 그저 처절함을 즐기면 그만이었던 시기.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에게만큼은 이 가난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여겼다. 누군가는 밤을 새우고 누군가는 저 멀리 타국까지 가서 자신의 시간을 불태웠다. 그렇게 해서 가난은 점차 설 자리가 좁아졌다. 가난은 시대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휘적휘적 다니며 길거리 돌멩이처럼 발에 차이는 처절함은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았다. 가난은 조용히 기다리며 살폈다. 풍요 속 빈곤의 시대를 지나며 가난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허영과 욕심을 두 축으로 판을 다시 짰다. 진짜 가난한 자는 생존을 위해, 가난하지 않은 자는 투자란 이름으로, 부자인 자는 차별화를 위해 가난을 끌어들였다. 풍요 속 상대적 빈곤의 시대. 가난은 다시 세상을 휩쓴다.


2026년.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가 열리려고 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가난한 우린 많은 것을 잃었고,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을 언제든 놓아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가난은 진심을 담아 우리에게 댓글을 남기는 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꼭 죽어야만 죽은 건 아니다.


<나는 야구를 사랑해> /남의현


필드에 가만있는 사람이 많다. 필드에서 나가는 사람이 많다. 공을 노려보고 쫓다 한 사람이 잡는다. 공만 보고 뛰다 부딪혀 다칠 수도 있다. 몰랐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야구가 어떤 삶을 대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그의 삶이 반영됐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구야, 현실이든 허구든 자기 삶을 함께하기가 미안한 삶으로 규정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쳤을지 상상하기도 싫구나.


이야기에 묻어있던 많은 감정들을 돌이켜 본다. 희망? 오기? 집념? 그 어떤 것도 핵심은 아닌 거 같다. 무엇이라도 붙잡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셋 모두 가능하겠지만, 내가 느낀 건 어떤 절망이었다. 절망 앞에 ‘어떤’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온전한 절망이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나 하는 의문 때문에. 동력도 필요 없고, 그저 관성이었던 걸까? 등장인물인 ‘나’가 자신을 잘 돌봤으면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관성에 따라 흐를 뿐이다.


<히데오> /서장원


아파봤던 사람이 타인의 상처를 더 이해하기 쉽다.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당시 히데오는 어머니가 한국인이란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졌고, 그 일로 인해 그의 일본 생활은 끝을 맺는다. 대한민국에 와서 한국 이름으로 성장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연극 오디션에 지원한 그가 지원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자신도 사람을 때려 주고 싶었다고.


분하고 억울했을 거다. 어디에도 완벽히 속하지 못하고 차별받아야 한다는 게. 현실이 아닌 연극에서나마 그 마음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겠지.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받아들여질 거고, 소설의 이야기는 아마도 여기까지인 듯. 그런데 인정받지 못해서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씩 쌓인다면? 그래서 상처를 잘 아는 자들이 모여 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상처를 들쑤신다면? 우린 앞으로 수많은 히데오, 수많은 차별과 맞닥뜨릴 거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끔찍한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다.


<귀신이 없는 집> /위수정


옛날 교토에 코요라는 귀족 집안 여성이 있었다. 총애를 받았으나 모함으로 추방되었고, 유배된 시골 마을에서 능력을 발휘해 그 마을을 번성케 했다. 사람들은 코요를 귀녀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코요를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그 마을을 토벌하기로 한다. 코요는 서른셋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그 마을은 그 후 ‘귀신이 없는 마을’을 뜻하는 기나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우리는 한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며 모든 것을 바칠 듯 절실히 매달릴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 삶이 안정되면, 그 간절함과 절실함은 절대 예전 같을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겠지만, 종종... 어쩌면 상당수가 그것을 변질시킨 채 간직한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은 사라지고, 내 삶에 유용하게, 추하지 않고 번듯하게 가꾸고 누리려 한다. 그러다 보면, 공감대는 사라져 오직 자신만의 무언가가 되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나마 스스로 발견하면 다행이다. 깨닫지도 못하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일 테니.


작가에 따르면, 첫 번째 단락에 적은 일화를 기반으로 단편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귀신이 없는 마을. 코요가 없는 마을. 알맹이가 없는 마을. 우린 이런 일들을 많이 접한다. 기득권이 된 정치인들의 이념, 기득권을 쥔 중년 남성들이 외치는 여성 평등, 넉넉한 자들이 외치는 사회주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진정성과 정당성까지 복잡하게 얽혀 꼬여버린 갈등들.


“여기엔 아무도 없네요. 사람도. 귀신도.”

- <귀신이 없는 집> 중에서


난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제목을 <귀신‘도’ 없는 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일일야성/一日野性 > /이미상


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할 때가 있다. 단순히 비교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경수는 흐릿해지는 자신의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해 아내인 운주의 격을 떨어뜨린다. 같잖은 남편의 변화가 어이없지만, 한편으론 권태기와 함께 가라앉는 자신과 다르게 변화를 꾀하는 경수가 여러모로 달리 보이기도 한다. 운주는 중고등학교 때 놀던 시절을 함께 한 선숙에게 연락하고 추억에 빠져들어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다.

이후 운주가 맞닥뜨린 건 자신이나 선숙도 결국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서로를 끌어들였었다는 사실. 그나마 선숙은 현재 자기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듯 보이지만 운주는 그조차도 아니다. 게다가 권력관계가 명확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들은 운주를 계속 현실로 끄집어낸다. 돈과 폭력과 계급이 만들어내는 층위와 그것을 넘나드는 선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때론 자존감을, 때론 모멸감을 선사하기도 하는 법이다. 경수는 남성성을 상실한 대신 아내를 낮춤으로써 자신을 높였고, 선숙은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잃었지만 윤주를 통해 최고 의사에게 디스크 수술을 받을 기회라도 넓혔다. 상대방을 이용해 자존감을 얻는 이 게임에서 운주는 무엇을 건졌을까? 깨달음? 삶에서 얻는 깨달음은 보통 씁쓸하던데.

“산세가 깊어 캠핑 스폿으로 유명한 모 지역은 군의 슬로건까지 바꾸었다. J군에서 보내는 일일야성. 문명이 지워낸 나를 다시 찾는 하루.”
- <일일야성> 중


<적들이 산에 오를 때> /함윤이

"즐거울 테고,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 ... 그 말에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는 노아가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불현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노아의 양손을 쓰다듬곤 했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네 이름은 더 낫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모두를 인도하는 이름인걸. 그 새로운 세상에선 모두가 배부르고, 즐겁고, 따뜻할 테고..."
- <적들이 산에 오를 때> 중에서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상에선 '믿음'이란 단어는 종교와 가장 밀착되어 있었다. 물론 어디에나 쓰일 수 있는 단어지만, 단짝을 찾으라고 한다면 믿음과 종교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믿음의 단짝이 정치로 바뀐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게 맞다! 옳소! 그리고 내달린다. 넌 틀렸다! 옳소! 역시 내달린다. 확신에 찬 소리가 양쪽에서 울려 퍼지고, 거칠게 충돌하며 울리는 파열음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소란 속에서 정말 모두가 즐겁고 배부를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올까? 확신은 나와 우리를 견고하게 둘러싸고, 그 외부는 불신과 혐오가 넘친다. 믿음과 손을 잡은 정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불신과 의심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포섭한다. 내게로 오라. 저들을 물리쳐 우리가 즐겁고 배부른 세상을 만들어보자. 적들을 만들어내고 믿음을 강탈한 세상. 도대체 저 문장 어느 구석에서 '좋은' 세상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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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주일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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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매일 확인했다. 돈을 내는 자의 무례와 경멸을. 수치심까지 짓뭉개는 뻔뻔함을.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고서도 불공평이나 역차별이란 단어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을. 나는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했고 더 알아야 할 것들이 두려웠다."

- <일주일> 중 <일요일>에서


2010년쯤 됐을까? 남자 고등학생을 주말 오후 알바로 채용한 적이 있다. 용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어른과는 대화보단 대답을 했고, 무덤덤한 듯 조금은 뚱한,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이었다. 한 달이나 일했을까. 손님과 마찰이 생겼다. 기억은 안 나지만 사소한 문제였다. 손님이 본사로 클레임을 제기했고, 내게로 넘어와서 CCTV를 확인해 보니 근무자의 불찰이 분명했다. 아마 그 자리에서 근무자가 사과했다면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근무자는 사과 대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선택을 했다.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잘못을 인정했고, 고객이 찾아오면 함께 사과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다시 연락해 온 고객은 진정한 사과를 바란다고 했다. 근무자가 무슨 생각을 하며 일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어서 골머리를 앓던 나는 이 고객의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정한' 사과라니. 배를 할복하는 일본 사무라이의 이미지가 떠올라 순간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에게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얘긴가. 이 문제로 몇 주를 끌었던 거 같다. 결국 나는 그 고객과 언성을 높여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서로 보지 않는 걸로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오래전 일이라 완벽한 기억은 아니다. 아마 저 근무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뒀지 싶다. 내가 사람을 새로 구할 때까지만, 또는 앞으로 2주 후까지만 일해달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고객이 매장 근처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저 일을 겪으면서 많이 답답했다. 나와 다른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를 내 경험으론 유추할 수가 없어서. 청소년에게 필요 이상의 책임을 요구하는 어른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최진영 작가의 <일주일>은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다. 너무 전형적인 틀에 가두는 게 아닐까 하는 작가의 걱정처럼 각 캐릭터는 무미건조한 듯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무미건조하면서도 개별성이 있는 존재 아니던가? 문제라면,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의 개성이나 개별성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는 게 아니라 경쟁의 차별화 수단으로만 파악한다는 점. 그래서 어느 위치에 서든 아이들은 차별화를 위해 발버둥을 쳐야만 한다.


"돈과 명예 말고, 우리가, 또 다른 가치를 가져야만 해? 사랑, 희생, 정의, 존엄 같은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해버리면 삶이 복잡하게 꼬일 것만 같았다. 그런 가치를 추구하느니 조롱하는 편이 쉬웠다."

- <일주일> 중 <수요일>에서


어쩌다가 우리는 그 발버둥의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판별하게 됐을까? 왜 우리는 수직으로 늘어선 위치에서 벗어나려 하는 시도를 불손하다고 여기는 걸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아이들이 원하는걸, 찾으려는 걸 막아가면서 이 숨 막히는 사회의 축소판에 그들을 욱여넣고 있는 걸까? 온통 질문뿐이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게 편하니까. 답도, 원인도 내심 짐작되지만 해결할 순 없으니까. 흐지부지.


난 그때 그 아이에게 더 물어봐야 했을까? 참견이나 간섭이라 여겼을 것이다. 고맘때의 나도 그랬었다. 필요한 건 배려와 공감과 기다림과... 이런, 숨 막힌다. 어쩌겠나.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어놓은 세상이니 모두가 함께 숨 막힐밖에. 같이 숨이라도 막혀줄 수밖에.


"당신이 거기 잘 있으면 좋겠어."

- <일주일> 중 <사사롭고 지극한 안부를 전해요>에서


갑갑한 <일요일>에서 시작해 충격적인 <수요일>을 거쳐 희망적인 <금요일>을 지나면 작가의 에세이가 나온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안부를 전하고, 그 안부에 깃든 걱정과 잔잔한 고집을 뒤로하면, 진짜 청소년의 에세이가 버티고 있다. 움켜쥔 그 희망에 맘을 담뿍 담아 응원을 보낸다.


"짧은 생에 다 품기엔 무겁다 싶을 때마다 넓게 보고 많이 사랑할 것이다. 쫓기는 삶이 안정될 때까지 가끔은 도망치면서 살길. 이 결심에 죄책감은 느끼지 않기로 했다."

- <일주일> 중 <지금 도망칠 준비가 되면>,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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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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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외로움이 가슴에 박히기 마련이다. 그땐 그저 가끔 혼자 있고 싶은, 사치스러운 외로움이다. 그러다 가슴에 박힌 씨앗이 자라 묘목이 되면 외로움은 스스로를 가두는 울타리로 변한다. 묘목이 자라 큰 나무가 되면 주변 다른 것들을 빨아들이고 가로막아 거대한 외로움 그 자체가 된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큰 나무가 거대한 고목이 되면 고목 주변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압도하는 두려움으로 변질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외부로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외부의 손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나를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 P433, 434


- 인간


인간은 크건 작건 문명을 이룬다. 아이러니한 건 기술이 발달할수록 문명은 자연과 공존하기보단 파괴하는 쪽을 선택하는 듯하다. 개발과 발전이 언제나 최우선 화두이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연과 선을 긋고 고립의 길을 택했고, 그렇게 많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외롭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 한가운데 파고든 외로움에 자기기만이란 돌연변이를 일으켜 자신을 스스로 자연의 수호자로 높였다. 고결하고 고독한 파수꾼.


- 카야


카야는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봤다. 이어 큰오빠와 언니가 떠나고, 함께 있어 줄 거라 믿었던 조디 오빠마저 떠났다. 지옥 같던 아빠가 잠깐의 햇살을 비춘 후 카야의 곁을 떠나자 6살 카야는 혼자가 됐다.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는 벅찬 상황이지만 카야는 습지의 아이로, '마시 걸'이란 멸칭을 안고서 성장한다. 10대가 되고, 20대가 되어 성인이 되지만 뒤에 남겨지는 건 항상 카야였다. 꼬리표처럼 들러붙은 이별과 차별은 카야의 마음속 외로움의 씨앗을 거대한 고목으로 자라게 한다. 카야에게 평범한 삶이란 이젠 불가능하다.


- 인간

 

자기기만의 길은 험난하다. 착취하면서도 보존하는 척해야 하고, 개발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환경 보호를 외쳐야 하고, 쓸 거 다 쓰면서도 고갈과 훼손은 기술 발달이 해결해 줄 거라 믿어야 한다. 자연은 묵묵히 견뎌내지만, 인간이 가한 압박은 변화의 속도를 조금씩 끌어 올리는 중이다. 게다가 자기기만의 돌연변이는 두려움까지 억눌렀다. 두려움이 제거된 인간은 자연이 내는 파열음을 마치 일회성인 듯 가볍게 소비한다. 인간은 어떻게 될까?


- 카야


하지만 아무리 험난한 여정이라도 그 여정을 비추는 빛이 있다. 어린 카야의 생존에 큰 몫을 담당한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주머니, 그리고 첫사랑인 테이트. 이들은 카야를 비추던 커다란 등불이었다. 그리고 도망치던 어린 카야를 못 본 척하면서 미소를 던져주던 사람, 셈을 못 하는 어린 카야에게 푼돈 몇 푼이라도 더 안겨 보내주던 상점 직원까지. 일급 살인으로 기소되어 법정에 선 카야의 뒤편엔 이들이 자리를 잡는다. 카야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 인간


자연은 차이를 두지 않는다. 자연이 재해를 일으킨다면, 자연을 옹호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연을 무엇인가 꺼내 쓸 창고처럼 여기는 사람이나 똑같이 피해를 볼 것이다. 그걸 배신이라고 해야 하나? 자연은 이치에 따라 인간에게 재난을 선사하고 많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 그걸 범죄라고 해야 하나? 자연이 무엇을 하든 인간이 그 행위를 이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카야


소설은 두 갈래로 시작해서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 하나는 시체가 발견되어 수사가 시작되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어린 카야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다. 늪지에 대한 작가의 전문 지식이 어우러져 카야의 성장 스토리는 아찔할 정도로 읽는 사람을 빨아들인다. 다른 한 갈래의 이야기 때문에 어떤 흐름으로 갈지 예측이 되지만, 그래서 더욱 카야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단 생각을 끝날 때까지 떨칠 수 없었던 소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나이가 들었거나 현실이 팍팍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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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984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55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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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중 대표 격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1948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49년에 출간됐고, 가까운 미래인 1984년을 배경으로 내용을 서술한다. 영국인인 작가는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에서 경찰이란 직업을 가졌었고, 그 후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 체제나 이념이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지 체험했고, 그 경험과 거기에서 비롯된 생각들을 소설에 그대로 녹여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니, 분명 누군가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이 소설의 핵심으로 파악할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더 유명한 건 ‘1984’란 소설 제목보다 ‘빅 브라더’란 단어일 거고, 그 단어는 대부분 감시와 통제를 상징하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게다가 요즘의 정보통신 기술은 이 소설에 나오는 감시 기술들을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이게 할 만큼 충분히 발달했다. 한 예로 AI와 결합한 거리의 CCTV는 이상 행동(담을 넘는다든지, 일정 장소를 오랜 시간 동안 배회한다든지)을 감지하면 관제 센터의 사람에게 통보하고, 지역 지구대에까지 연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개인정보와 사생활에 민감하다면, 이 소설에 내세운 감시와 통제는 끔찍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예전엔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이번엔 정치 체제가 구성원 개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말살하는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자신들은 순교자나 아이콘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 개인 내부의 마지막 피신처까지 싹싹 드러내서 텅 비어버리게 만드는 과정. 감시와 통제는 효율적이고 비인간적이지만, 말살은 역설적으로 인간적이며 건조하고 치밀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소설에 나오는 당의 표어가 갖는 모순이 말살 과정에서조차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더욱 아팠던 거 같다. 기술적 접근이 아닌 본질적 접근이라서. 그것이 사회 제도의 개혁이 아닌 개인 세계관의 파괴를 위한 수단이라서.


‘개인이 갖는 세계관의 파괴’라고 하니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주제가 하나 있는 거 같다. 세제 개편과 함께 시끌시끌한 부동산. 유일한 투자 수단이자 삶의 목표였던 1970, 80년대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동산은 세대에 따라, 아니, 세대와도 상관없이 개인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며 존재해 왔다. 안타깝게도 현재 2, 30대도 돈을 끌어모을 능력이 있는 개인에 한해서는 부동산에 대한 태도가 과거 세대와 다를 바 없지 싶다. 이쯤 되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 아닌가? 그럼, 개혁이나 개편이 아니라 세계관을 파괴해야 한다는 얘긴데. 뭐, <1984>랑 직접 상관은 없는 문제다. 그래도 궁금은 하네. 윈스턴이 고가 아파트 소유주였다면 끝까지 버텨냈을 것도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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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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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배리 로페즈는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를 쓰고자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여행을 다니며 깨우치고 쌓여가는 생각들을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 욱여넣을 의향이었고 그렇게 했다. 솔직히 책의 전체 모습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한번 제대로 완독하기 전까지 그의 글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워낙 방대하기도 하고, 오지에 가까운 낯선 곳들이 등장하는 데다 문장 자체가 길기도 해서다. 그래서 처음 책을 다 읽고 글을 써보려 했을 때, 내 계획은 내가 했던 여행을 소재로 배리 로페즈처럼 이야기를 구성해 보자는 거였다. 하지만 두 번째 읽으면서 그 계획은 바로 접었다. 그는 이 책을 위해 몇 군데의 여행지를 선택해서 글감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선택되지 못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다른 세 곳의 이미지를 언급했다. 중국과 캐나다와 아프가니스탄. 중국에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하층계급과 야시장에 전시된 각종 동물의 모습을, 캐나다의 북단에선 빙하가 사라져 북극곰이 사냥의 터전을 잃어가는 모습을,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회복 불가능 상태에 빠진 한 여인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가 이런 것이라면, 내 여행 글을 여기 덧붙일 순 없었다. 삶의 경중을 논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여행은 너무나 진지하고 압도적으로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책 첫머리쯤에서 했던, 같지만 다른 질문 두 개로 내 글을 시작한다.


"이 순간의 아름다움 속에서 갑자기 내 안에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P17)

"지금, 이 호전적인 파벌의 시대, 일상적인 폭력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P17)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과 하나의 질문. 이제 시작이다. 내 글도 길어질 거 같다. 내 탓이 아니다. 900여 페이지를 쓴 작가 때문이다.


- 파울웨더곶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월감을 가져본 적이 있다. 꼭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확신을 갖고서 상대방을 대할 때가 있다. 내가 옳다, 내가 더 낫다, 내가 더 많이 안다. 동일 분야, 특히 기술적 측면에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서 다른 분야,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가능할까? 더 크게 확장해서 다른 문명에 대해서도? 내가 옳고, 그래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뜻대로 해야 한다는 독선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우린 현실에서 너무 많이 목격하는 중이라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다. 작가는 그중에서도 제국주의가 한창일 때 서구 열강이 침범하고 무시했던 여러 문화를 바라본다. 그 말살에 대한 책임과 이후 이어져야 했던,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선주민들에 대한 사과를 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 사라지고 잊힌 문화가 제시했을 지혜, 현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그들만의 시각을 안타까워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요구되지만, 독선과 오만에 압살되어 버린 인류의 또 다른 시선을 말이다.


작가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주로 찾는 곳은 파울웨더곶이다. 이곳은 제임스 쿡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서해안에 도착했을 때 상륙한 곳이라고 한다. 제임스 쿡은 영국 군인이자 지도 제작자였으며 3차에 걸친 원정을 통해 남극 대륙 내부를 제외한 태평양의 모습을 대부분 그려낸 인물이다. 그리고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다. 래널드 맥도널드. 백인과 치누크족의 혼혈로 개항 전인 일본에 들어가 침략에 대응하도록 영어를 가르쳐준 인물이다. 작가가 이 둘을 집착에 가까운 관심으로 쫓는 것은 일단 그들이 제국주의 시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쿡 선장은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제국주의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맥도널드는 제국주의의 피해자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둘 다 작가에 따르면 미지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지녔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갈 수 있는 의지와 도전 정신을 갖췄다. 다만 어떤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종착역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으나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미숙함이나 갈등은 인간적인 면모이기에 그 또한 작가의 관심에 한몫한다. 작가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과거를 살피고 자신의 질문에 대응할 방법을 찾고 싶어 한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우월감과 확신을 바탕으로 소유와 소비를 위해 자연과 문명을 침범해 그들의 설 곳을 없애버리는 이 세상에 우린 무슨 대응을 해야 할까?


- 스크랠링섬


작가가 두 번째로 펼쳐내는 여행지는 그린란드 부근 스크랠링섬이다. 여행이란 단어에 헷갈릴 수 있지만, 작가는 이곳에 고고학자들의 유물 발굴에 참여하기 위해 온다. 이 섬엔 도싯 문화와 툴레 문화의 거주지가 있고, 두 문명은 몇백 년간 시기가 겹친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도싯인은 멸종했고, 툴레인은 흔히 에스키모라고 부르는 이누이트족의 직계 조상이 된다.


여기서도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고고학자들과 함께 작업할 때 신경 써야 할 점, 사라진 문명이 남긴 흔적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 비극으로 끝난 미국의 북극 원정대가 남긴 마지막 흔적들. 수많은 에피소드를 오가며 작가가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은 타인이나 다른 문화를 대하는 자세다. 그리고 그가 반복해서 그 의미를 찾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존중, 배려 등 타자에 대한 인정이 부족한, 어쩌면 아예 할 줄 모르는 현대문명의 우월한 이기심을 향한 걱정. 동시에 그 이기심을 극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유적지에서 작가 자신이 했던 부끄러운 행동을 통해서 읽는 이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하게 올바른 선물은 그들의 말을 듣는 것, 주의를 기울이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체로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충동에 굴복하는 것은 그저 자기 탐닉적이거나 이기적이기만 한 일이었다." (P339)


- 푸에르토아요라


저 지명만 놓고 보면 어디야 싶겠지만 갈라파고스 제도에 속한 지역이다. 맞다. 다윈과 종의 기원, 진화론으로 유명해진 곳. 따지고 보면, 이곳만큼 이 책의 주제 의식과 잘 맞아떨어지는 곳도 흔치 않다.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윈은 자신의 생물학적 이론으로 인간은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특별한 위치에 치명타를 가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 정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새로운 방식을 생각해 낸다. 인간은 완성을 위해 변화해 가는 중이며, 그래서 생태계의 최정점에 선 존재라는 식으로.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진화'라는 단어에 '진보'라는 단어를 덧씌운 개념이다. 그런데 정작 다윈은 진화를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성의 증가라고 판단하면서 '고등'이나 '하등'이란 단어를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윈의 의도와 다르게 그의 이론을 차별적인 방향으로 적용했다. 어찌 보면 배리 로페즈가 쫓던 제임스 쿡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인물이 찰스 다윈인 셈이다.


작가는 다윈의 그림자가 강력하게 드리워진 이곳의 섬들과 바다를 넘나들며 계속해서 사고를 확장한다. 특히 바다거북 새끼가 해변에 묻힌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포식자를 피해 바다로 향하는 장면과, 뒤이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야생화된 개들에게 쫓기는 작가의 모습이 연이어 배치된 부분에선 과연 인간은 이 생태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돌아보게끔 한다. 또한 이곳은 갈라파고스 특유의 삶과 죽음이 존재하지만, 상어 지느러미 획득과 같은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삶과 죽음이 침범해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각종 바다 생물과 함께 유영하며 실질적인 치유와 경이를 선사 받기도 하지만, 남태평양의 낙원이나 돈벌이 같은 환상이 들러붙어 기대와 실망, 희망과 반목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역적으론 특이하지만, 보편적으론 세상의 축소판 같은 곳. 사람들 사이에서 우월함을 주장했던 문명이 동식물을 대상으로 겸손할 리 없다. 이곳에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우린 지배자나 지도자가 아닌 생태계의 동등한 일원이어야 하지 않나?


"호모 사피엔스가 오로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생태학적 관점을 취하고, 물리적 환경이 인간 유전체에 선택압을 가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단순명료한 하나의 판단에 이르게 된다. 바로 환경을 보살피는 일이 자신을 보살피는 일이라는 깨달음이다." (P453~454)


- 자칼 캠프


아프리카 케냐의 나키라이라는 곳에 있는 발굴 캠프다. 나키라이는 이곳 선주민인 투르카나족의 언어로 '자칼들의 장소'라는 의미라고 한다. 작가는 이곳에서 발굴자들과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찾는 작업에 동참한다.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의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다. 화석 증거가 있어야 어떤 실체를 상정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통을 이어가야 하므로 현시점에서 과거의 모습은 뚜렷할 수가 없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생물 진화의 한 시점은 언제나 과도기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실체도 과도기에 해당하고, 미래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인류의 화석 증거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쿡 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했던 때처럼 도전 의식과 열린 사고를 갖추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작가는 장소와 대상만 바꾸며 같은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셈이다.


하지만 동어반복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이곳에서 인류 문명이 같은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결과의 불확실성 또한 포착한다. 선주민들 역시 사람이기에 똑같은 호기심과 욕심을 지녔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일구어낸 나라의 국민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거꾸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려고도 한다. 심지어 물질문명을 향한 광신으로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가치 없다고 판단하기까지 할 정도다. 작가는 이런 모습들을 캠프의 모습과 병치시키며 생각들을 풀어낸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모습이라는 듯이.


작가는 이번 여행지를 통해서 문명을 일구어낸 인류가 예외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단어는 '뛰어난'이 아닌 '예외적인'이다. 그가 인류의 기원, 정확히는 그 흐름을 찾고자 하는 것은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무분별함의 특별함을 추적하고자 함이 아니라 생태계 한 귀퉁이에서 출발한 생태계의 일원임을 확인하고픈 욕망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질문의 형태를 보다 근본적인 형태로 바꾼다. 인류의 기원을 찾듯이 모든 질문의 시작을 찾아서.


"호모 사피엔스가,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진보한 인간이 예외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도발적인 질문은 그 예외적인 성질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다." (P510)


- 포트아서에서 보타니베이까지


갑자기 친구의 불평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시험 문제였는데, 1950년 한국전쟁의 표기로 '6.25'와 '6·25' 중 어떤 것이 맞는지를 고르는 문제였다. 점을 가운데 찍는 것이 정답이었는데 친구는 오답을 선택했었다. 그는 두고두고 투덜거렸다. 점의 위치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사소한 일화지만 이건 우리 세대가 반공 교육의 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하나의 예시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조차 한국전쟁의 참사를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제주 4.3, 광주 5.18. 이 단어 배열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만, 요즘 세대가 이 의미를 삶의 주변부로 밀어냈다고 내가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만은 말하고 싶다. 이념이나 신념, 성향을 떠나 희생자가 존재한다면, 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또 그에 앞서 상대방의 입장을 미루어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런데 이 세상은 경쟁과 이익과 소비를 위해 그런 가치를 잃어버렸다.


공동체를 이루고 문명을 일구어낸 인류는 진보를 내세워 확장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문명을 억눌렀고, 심지어 자국의 국민에게까지 차별의 잣대를 들이댔다. 호주의 포트아서는, 영국이 자국의 죄수나 함량 미달이라 판단한 사람들을 격리 또는 교화시키려고 영국 밖으로 추방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작가가 방문했을 당시 이곳은 과거 교도소의 모습을 간직한 관광지였고, 얼마 후 한 남자에 의해 총기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는 포트아서를 거쳐, 자원 획득이란 명목으로 선주민을, 그들의 문화를, 자연을 대상으로 각종 수탈이 이루어지는 중인 호주를 둘러보며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사회 및 환경에 가해진 해악의 상당 부분에 대해 ‘터보차저를 장착한’ 자본주의가 극악무도한 원흉으로 수시로 지적되기는 하지만, 하이퍼 자본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것 같다. 그 핵심 질문이란, 우리 인간은 왜 서로에게 그토록 참혹한 해를 입히는가다." (P633~634)


이건 질문이기도 하지만 이전 장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호주의 어떤 공원을 거닐다 문득 희망을 붙잡는다. 어떤 종류의 희망인지 설명은 못 하겠지만 이런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살아남기 어렵다는 하지마비 새끼 고양이를 극진히 보살펴서 살려낸 노부부를 담은 유튜브 클립에서. 방송국의 도움으로 다리를 수술하고 더 개선될 가능성이 보이자, 눈물을 머금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에서.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는 안도 섞인 희망을.


- 그레이브스누탁스에서 포트패민 도로까지


지구상에서 아주 독특한 남극 대륙에 관한 얘기다. 선주민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고, 방문자의 위치에 따라 생명체라곤 자신 이외에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 역사상 드물게 이곳에서 얻은 지식을 나누겠다는 평등한 남극조약이 맺어진 곳. 뚜렷한 목적의식과 도전 정신을 지닌 과학자들과 개척자들을 불러 모으는 곳. 작가는 대자연의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 겸허하게 세상을, 인간을, 생명을 바라본다. 나 역시 책에 나온 문장들로 이 챕터의 감상을 대신하겠다. 절대 긴 글을 쓰다 지쳐버린 게 아니다.


“예전에 한 신학 교수님이 종교를 갖는다는 건 확신을 갖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지. 의심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어떤 심원한 신비에 대해 품었던 존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라고.” (P751)


이제 내 글도 끝이 보인다. 이 책은 작가의 생각들이 바다처럼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처음 접하면 그저 막연할 뿐이지만 해류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잡아내면 읽는 이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다. 해류와 바람이 각양각색이듯 도착지도 다들 다를 것이다. 심지어 한눈이라도 잠깐 팔면 자신도 모르게 일정 거리를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즉, 일관된 흐름은 있지만 생각의 방향이 사정없이 뻗어나갈 여지가 있고, 호흡이 긴 문체 특성상 집중하지 않으면 문장 단위로 헤맬 수도 있단 얘기다. 게다가 작가는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쓰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작정이라면 다독을 권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곳에 적어놓은 문장은 일부러 길게 늘여 쓴 편이다. 게다가 일관된 흐름 속에서도 챕터를 나눠 여러 에피소드를 집어넣었고 다소 산만한 느낌까지 줬다. 그러니 이 문장들이 읽기에 버겁거나 불편하다면, 사방팔방으로 펼쳐질 길이 부담스럽다면 시간을 투자할지 말지 신중히 결정했으면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번 독서가 내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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