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오페라의 유령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52
가스통 르루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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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큰 기대를 하며 첫 표지를 넘기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일 때 어떤 설렘 같은 건 있지만 딱 거기까지만이다. 그런데 간혹 나도 모르게 큰 기대를 품고 책을 읽기 시작할 때가 있다. 지금 이 책이 그랬다. 작가나 소설 자체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단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원작이라는 사실, 그 한 가지가 모든 기대의 원인이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출간 당시 이 소설에 대한 반응이 어땠는지 검색해 보기. 1909년부터 1910년에 걸쳐 프랑스 일간지에 연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땐 별다른 화제가 되지 않음. 그러다 1925년에 무성영화로 개봉되어 큰 성공. 현재 명성의 가장 결정적 원인은 1986년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다음으로 한 일은, 이 소설이 다른 장르의 원작으로 선택된 이유를 생각해 보기. 일단 다채로운 시각적 이미지. 화려한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그곳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그리고 지하에 펼쳐진 어둡고 음침한, 정반대의 다른 세계. 다음으론 음악 자체가 소설의 중요한 소재. 마지막으로 미녀와 야수라는 가장 대중적이며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 그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다음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 검색하기. 설계자의 이름을 따 오페라 가르니에라고도 불림. 건설 과정에서 지하에 물이 차올랐으나 빼낼 수가 없어 그대로 완공. 공연 중 샹들리에가 떨어져 관객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 발생. 소설은 이 둘을 내용에 맞게 차용. 그렇군. 그래.


마지막으로, 작가 가스통 르루 검색하기. 특종 기자 출신의 프랑스 장르 문학의 개척자. <오페라의 유령>보다 먼저 출간된 <노란 방의 비밀>로 명성을 얻음. 밀실 살인을 다룬 추리소설로 아서 코난 도일(셜록 홈스)과 모리스 르블랑(아르센 뤼팽)에 비견될 정도. 그래, 그랬어. 어쩐지.


그러니까. 현실적 배경을 바탕으로 트릭과 구조를 짜서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그 모든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후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게 작가의 핵심이라는 건가? 그런데 문제는 그 설명이 내겐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거. 사랑 얘기는 흥미롭지만, 인물의 심리 변화나 특정 캐릭터들의 역할이 내겐 잘 수긍되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정말 마지막으로 한 일은, 내가 멍청한 게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그래. 그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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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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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바다>

--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 <본문 중>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이돌 그룹이 있고, 그들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을 추종하는 팬덤은 그 아이돌이 튼 물꼬를 더욱 거대한 흐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흐름은 세상을 바꾸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린 때론 대중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안다. 집단 지성 또는 대중의 급격한 쏠림은 옳고 그름을 떠나 최악의 상황으로 돌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단편엔 '세상 모든 바다'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한다. 세상의 모든 바다가 연결되어 있듯이 사람들도 차별 없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는 의미 정도. 여기까진 분명 맞다. 그런데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여야 한다는, 그러니까 '모두'와 '하나'란 단어가 합쳐질 때 은연중에 휘둘러지는 불편함을 우리는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롤링 선더 러브>

-- 퇴근 후에 청계천 끄트머리에서 리아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나타난 리아는 슬랩스틱코미디언처럼 우당탕 넘어지는 척을 하더니 말했다.

“안 해요? 왜 안 해요? 와아 조맹희 개멋있어.”
-- <본문 중>


뜻대로 될 리 없지. 세상이. 삶이. 치한이나 왕자님을 대비했으나 뜬금없는 호랑이 인형과 마주치고, 짝짓기 예능에 출연해서 출연자가 아닌 PD에 꽂혀 버리는. 그런 우당탕한 어떤. 나이는 차오르는데 이룬 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 같고. 상호작용 충만한 찐한 사랑 한번 해보고 싶지만 나도, 상대방도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그렇게 엇나가기만 하는. 그래도. 아무리 삽질만 한다 하더라도. 돌멩이는 이리 데굴, 저리 데굴. 여기서 차이고 저기서 밟히고. 그냥 데굴데굴. 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진짜 개멋있어.



<전조등>

-- “잠깐.”

그가 엉거주춤 멈춰 “왜?”라고 묻자 그녀는 깜빡한 무엇을 떠올리려는 듯 그를 보다가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본문 중>


급히 집을 나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매장에 있는 근무자는 오늘 중요한 시험이 있다. 올해 예정된 마지막 시험. 내가 늦으면 그는 올 한 해를 날려버리는 꼴이다. 속도를 높여 걷는데 저만치서 술에 취한 듯한 걸음걸이로 노숙자 한 명이 걸어온다. 비틀비틀. 교차하는 순간 비틀대던 노숙자는 길에 넘어지고 난 찰나의 고민과 함께 그대로 앞을 향한다. 이번 지하철을 놓치면 난 지각이다. 그리고 그는 시험을 놓치게 될 것이다. 지나가던 차의 경적 소리. 하지만 무시하고 지하철역 안으로 뛰어든다. 늦은 밤, 퇴근하며 그 자리를 다시 지난다. 거꾸로. 아까 낮에 그 노숙자는 괜찮은 걸까? 샤워 후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다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든다. 흠.
 
베듯이 일상을 침범하는 비일상. 그리고 흉터처럼 남는 불안. 흉터는 다시 벌어질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옛날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투덕거린 적이 있었다. 니가 노동의 맛을 알어? 소리치면, 다른 한쪽에서, 니가 돈맛을 알아? 맞대꾸했다. 얼굴을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치면, 퍼렇게 질려서 악다구니를 내뱉었다. 그렇게 붉으락푸르락 기싸움을 하더니만 결국 옆 동네 돈 냄새를 참지 못하고 사회주의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형님. 이제 사회주의는 무대 뒤에서 자본주의의 뒤치다꺼리나 한다. 사람들 사이에 맥락 없이 떠도는 '기립하시오, 당신도'와 같은 이모티콘 문구가 한때나마 투톱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다. 물론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노동의 맛을 외치던 사회주의가 퇴장한 탓일까? 요즘을 사는 근로자는 영혼까지 탈탈 털어 자본주의 팬덤에 빠져든다. 하지만 '좌절 금지'라는 머리띠 질끈 동여맨 우리의 주인공들은 출발점이 어디든, 현재 위치가 어디든 주저앉지 않는다. 쿨내까진 아니더라도 찌질하지 않게, 함께, 발걸음을 내디딘다. 내딛으려 한다. 평범함에 대한 이 밑도 끝도 없는, 그야말로 무데뽀 같은, 작가의 애정과 함께.

--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본문 중>


<보편 교양>

-- 곽은 은재와 함께 도서를 정리했다. 『도련님』은 우측 중단에, 『수레바퀴 아래서』는 중앙 상단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트롤리에 두고 『시민의 불복종』은 좌측 하단에, 『노인과 바다』는…… 자신의 손에서 은재의 손으로, 은재의 손에서 자신의 손으로 건네지는, 함부로 펼친 적 없는 새 책들의 반듯함. 축하의 말과 감사의 말. -- <본문 중>

손에서 손으로. 마음을 다한 자와 진심을 받아들인 자의 이중주. 다가올 날을 준비하고 지나갈 날에 감사할 줄 아는 자들의 평온함. 마음에서 마음으로.
 
글을 쓰다 문득 고양이를 바라본다. 어이, 고양이, 아저씨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뭔 소리 하나 잠깐 바라보더니 다시 햇볕에 몸을 맡기는 녀석. 이 자식이…. 까까 줄까? 'ㄲ'이 들어가는 단어의 잇따른 출현에 반색하며 달려온다. 까까로 통하는 우리네 진심. 룰루랄라 냉장고를 열다 눈에 들어온 파란색 우유갑. 파란색으로 도배되었던 주식창이 떠오르며 마음이 튀어 오른다. 아니야, 아니야, 심호흡. 후우, 후우.



<로나, 우리의 별>

소설을 다 읽고 생각을 하다 몇 번이나 멈췄다. 마치 학창 시절 조회 시간에 들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되씹는 기분이랄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려본다. 내가... 나이가 들었나? 이 이야기가 실현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단편 중 가장 강한 어조의 작품이었다. '우리는 가능하다.' 너무 강하면, 때론 불가능을 향한 기약 없는 희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나 아직 안 늙었거든! 난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결과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태엽은 12와 1/2 바퀴>

그는 지방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한다. 나이 들어가는 자신처럼 게스트 하우스도 서서히 쇠락하는 중이다. 이곳에 내일 딸인 은혜가 오기로 했다. '명절도 생일도 기일도' 아닌데. 서울에서 취업한 딸이 자주 오기엔 지나치게 먼 거리라 그런 날에만 만나는 게 자연스러웠다. 모처럼 1층 한구석에 멈춰버린 채 서 있는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아본다. 12바퀴 하고도 반 바퀴가 더 감긴다. 원래는 12바퀴였었는데.
 
일상이 깨지는 건 때론 활력이 된다. 하지만 여기선 아니다. 시작부터 죽음의 이미지를 던진 이야기는 그 어두운 분위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둔다. 야금야금 잠식되어 푹 잠겨 든 순간, 이야기는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서 갑자기 쑥 빠져나가 버린다. 그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자리에 서 있고, 그런 그의 모습은 바닷가의 풍경과 함께 놀러 온 서퍼들의 시야에 담긴다.
 
-- "그런데 저 사람은 뭐하냐?" -- <본문 중>
 
주체에서 배경으로 내동댕이쳐짐으로써 이제 다가올 불확실성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이른 아침, 딸은 아직 출발조차 안 했을지도 모른다.
 
-- 멀리 길가에 검은 봉지를 들고 서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몰라.”
-- <본문 중>



<무겁고 높은>

한때 탄광촌이었지만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선 도시. 고3인 송희는 그곳에서 밀려나는 모든 것들을 지켜봤다. 왜 그것들은 속절없이 떨궈져야만 했을까? 송희가 역도를 선택한 건 그 무기력함에 대한 오기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들어 올리고 놓아 버린다. 내려놓는 과정은 없다. 들면 그걸로 끝이라 던지듯이, 버리듯이 떨구면 된다. 이건 나의 삶이야. 그러니 버리는 것도 내가 하겠어.

-- 송희는 단호해졌다. 아니. 이건 영광이 아니야. 이건 미래도 아니고 꿈도 희망도 아니야.

그럼 뭐야?

젖은 머리가 물었다. 송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 흥하지도 망하지도 않는, 값이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운이 좋아도 나빠도 그대로인 것. 어떤 비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닌, 말하자면 그냥 100킬로그램의 손때 묻은 쇳덩이.

나도 몰라. 어쨌든 들 거야.
-- <본문 중>


소설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 의지의 발현이다. '그날이 송희가 정말로 역도를 그만둔 날이었다.' 그날 송희는 목표인 100kg 바벨을 들어 올렸을까? 젖은 머리는 알겠지만, 그 애는 귀신 같은 존재다. 산 자들은 그저 살아낼 뿐이다.


<팍스 아토미카>

-- 돌아서서 침대로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문을 떠나기 힘들었다. 한 가지 의심이 되풀이됐다.

내가 문을 닫았나. -- <본문 중>


하나의 맥락은 있지만 의식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글. 난 이런 글의 정체를 알 듯도 하다. 예전에 분열과 경계에 몰두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쓴 글은 소재에 상관없이 저 두 단어에 젖어 있었다. 아무 상관 없는 일에서조차 어떻게든 스며 나왔다. 지금 이 단편이 딱 그런 느낌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고 아우르면서 불확실함의 정서에 푹 잠긴 이야기. 어쩌면 정말 작가 자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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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6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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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우리 집 근처엔 재래시장이 있다. 그 안에 정육점이 몇 개 있는데 아마도 내장을 제거한 돼지를 통째로 받아서 직접 부위별로 잘라 판매하는 듯하다. 어느 날 시장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지나다가 차량의 열려있는 짐칸 문 너머로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배가 갈린 채 사지를 쭉 뻗고서 짐칸에 실려있는 돼지를. 트라우마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정육점 앞을 지나칠 때마다 자연스럽게 하나의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문밖으로 튀어나와 있던 돼지 뒷다리 한쪽. 하지만 누군가에겐 트라우마가 될 장면이라면, 그 사람은 정육점을 지나칠 때마다 어떤 느낌을 받을까?
 
이 소설은 사람들이 건강 검진을 받으려 대기하는, 아주 일상적인 장면에서 시작한다. 신오는 이곳에서 종양이 발견되고 뒤이어 암 확진 판정을 받는다. 그는 생각한다. "술도 담배도 즐기지 않았고, 헬스는 주 삼 회씩 벌써 오 년째 다니고 있었다. 주말에는 등산도 가끔 했다. 주중 점심은 한식 위주로 나오는 구내식당에서 먹었고 저녁은 주로 닭가슴살 샐러드를 사 먹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신오는 자기 인생이 엇나가기 시작한 시점을 원경과의 이별이라 생각한다. 함께 할 미래를 계획할 정도였는데 원경 집안에 유방암 내력이 있단 얘기를 듣고 신오는 이별을 결심한다. 그는 그렇게 사랑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암에 걸린 현재, 원경을 떠올리며 연락을 취한다. "나 운주에 있어." 신오는 바로 운주로 향한다.
 
운주는 원경의 이모님이 물려받은 산이 있는 곳이다. 이모님은 그곳에 직접 집을 짓고 산다. 이곳은 회복의 공간이다. "원경은 허리가 아플 때 버섯 방에 누워 있다 오면 몸이 가뿐해진다고 말하곤 했다." 신오 역시 다리에 수시로 올라오는 쥐 때문에 고생했지만, "거짓말처럼 신오는 그 버섯 방에서 자는 동안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이 변해 있었다. 산불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이모님의 집과, 같은 산에 있던 암자가 홀라당 탔고, 암자의 비구니 스님도 화마에 휩쓸렸다. 다행히 이모님과 암자의 유일한 신도였던 보살님의 존재가 이 공간에 여전히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원경이 있다. 원경은 이제 신오의 사랑이 아니라 희망이다. 미래를 부탁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희망일 테고, 과거의 자신을 고백하고 사죄를 구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덜어보려는 이기적인 희망. 하지만 신오는 거짓말을 한다. “나 사실 좀 아팠거든. 말기 암이었어. 오 년 생존율이 십 퍼센트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보다시피 살아남았어. 어제 정기검진 다녀왔어. 깨끗하대. 네 생각이 제일 먼저 나더라고. 그때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통보하고 연락을 끊었잖아. 꼭 다시 제대로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어.”
 
이유가 무엇이든 신오가 한 이 거짓말 이후로 회복의 공간이 무너져 내린다. 사정없이 밀려드는 현실로 인해 그것도 아주 급격하게. 구덩이를 파던 그들 앞에 쏟아져 내린 하얀 그 무엇. 그것을 보며 신오는 군대에서 경험했던 사건을 떠올린다. 그리고,
 
"신오는 이 여자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신오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신오는 모두로부터 분리된다.
 
지금 이 글이 이 소설을 말해주기엔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돼서 무언가를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때론 설명보단 감정이 훨씬 가치가 있으니까.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마지막 부분에서 신오와 함께 구덩이에 나뒹굴기를 바란다.
 
<꼬리말> 인용부호 안의 문장은 모두 본문 인용 글.


<최애의 아이>

집착 : 어떤 대상에 마음이 쏠려 계속해서 매달리는 것
 
집착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있다. 당시엔 몰랐고 다 자라서 돌이켜보니 '아, 그랬었구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광적인 어떤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착하는 쪽이 품은 기대와 쏟아붓는 그 모든 것들은 내게 고스란히 압박감으로 되돌아왔다. 그 시절의 난 input에 비례해 output이 꽤 좋은 편이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끝이 없는 것이라서. 다행히 상황을 알아챈 누군가에 의해 그 집착은 제동이 걸렸다. 그 누군가는 집착의 소유자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 아이에게 자유를 주면 자기 할 일을 알아서 할 거라고.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아이라고. 그 이후 상황이 변했다. 기대는 여전했지만 내겐 어떤 여지가 생겼다. 숨을 쉴 수 있는 여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지, 실수할 수 있는 여지. 그리고 어쩌면 기대를 저버려도 괜찮을 여지까지.
 
이 소설은 아이돌 팬덤을 기반으로 한 얘기다. 지금과 크게 다를 거 없는, 가까운 미래의 대한민국인 듯하지만, 정말 큰 차이가 하나 있다. 팬들이 덕질할 수 있는 상품 중에 남성 아이돌의 공여된 정자가 있다는 거. 그래서 가임 여성은 심사를 거쳐 그 정자로 아이를 가질 수 있다. 물론 비싸고, 해당 여성은 그 아이돌의 팬이다. 뜨악한 설정에 혀를 내두를 수 있지만 결말에 도달하면 더 경악할 테니 시작부터 놀랄 필요는 없겠다.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단순히 개인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에서 아이돌 팬덤에 이미 사회적 해석이 첨부되는 데다가 이 소설에선 아이돌의 지나친 상품화, 출산에 대한 인식, 성에 대한 고정된 사고방식 등 시스템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넓은 시각으로 소설을 대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지 싶다. 예전이라면 분명 나도 그랬을 거다. 시스템과 개인에 대해서 정말 할 말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생각이 바뀐 건 아니고... 태도의 변화랄까.
 
기왕 덧붙이는 거 딱 하나만 더 처음에 썼던 이야기에 추가하자. 나 이전에 한 명 더 있었다. 집착의 대상이. 그런데 내가 등장하면서 집착의 정도와 흐름이 바뀌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그 변화를, 특히 그 흐름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등장했다고 해서 이걸 꼭 개인적인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한다.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을 뿐 이 바탕엔 아주 다른 많은 것들이 깔려있다. 이건 가부장에 관한 이야기고, 전통적이고 편향적인 성 인식에 관한 이야기며, 무엇보다 그 시대상과 시스템에 갈려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장면.
 
보자마자 우미는 남자의 뇌 속 극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오 분의 시술이 강간 포르노로 뒤바뀌어 상영되는 걸 알았다. 그가 우미를 정복했다고 여기는 걸 알았다. 뒤이은 상영작은 가난한 정부가 아이를 내세워 동정을 구하는 삼류 멜로일 것이다. 당신 아이예요. 한 번만 안아주세요. 꺼져! 그런 더러운 아일! 우미는 이어질 영화를 무대예술로 바꾸기로 했다. 무대예술의 진정한 묘미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발생한다. 우미는 손을 높이 들었다. -<본문 중>
 
우미는 자신의 최애 아이돌인 유리의 정자를 받아 아이를 낳은 인물이다. 그런데 우미는 아이를 낳은 후, 공여된 정자가 어떤 이들의 농간 탓에 다른 사람의 정자로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그 농간을 부린 자 중 한 명이다. 우미의 높이 든 손엔 무엇인가 들려 있다. 그리고 일종의 복수를 한다. 보는 시각에 따라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랄 수도 있다. 극단으로 밀어붙인 아이돌 팬덤의 폐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눈엔 무엇보다 시스템에 갈려버린 한 명의 개인이 보인다. 아, 한 명이 아니구나.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

여기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에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자신을 부랑자로 불러달라고 고집하는 손님. 또 한 명은 아르바이트생 K. 부랑자는 자신이 '지구'에 빙의되었다며 하나의 얘기를 꺼낸다.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본문 중>
 
이런 식의, 마치 구전 설화 같은 얘기를. '지구'의 얘기다. 먼 미래의 '지구'일 수도, 다른 차원의 '지구'일 수도 있다. 발 디딜 땅이 모두 물에 잠겨버려 물의 행성이 되어버린 곳에서 여기 이렇게 남은 자들의 심정이 저렇단다. 여기 있다는 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글이 너어무 길어질 거 같으니까 '지구'의 얘기는 여기서 그만두자. K? K는 '지구'의 탄생 설화와 비슷한 설정을 지닌 인물이다. 무엇보다 K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K도 여기까지. 이제 여느 때처럼 내 얘기를 해야겠다.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일하던 시절, 그러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에 떠내려가던 시절,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해서 엘리베이터에 타곤 했다. 엘리베이터 양쪽 벽에 커다란 거울이 붙어있었는데,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수많은 내가 그 안에 존재했다. 세어볼까 하다가 포기한 적도 있고, 괜히 손을 한 번 흔들어본 적도 있다. 다 난데... 저 많은 나를 내가, 내 안에 다 가질 수 있을까? 저건 분노하는 나, 저건 침울한 나, 저건 이기적인 나, 기뻐하는 나, 약삭빠른 나, 양심적인 나. 그리고 또... 땡. 집이 있는 층에 도달한 소리. 무심코 하품하며 내리다가 깨달았다. 지금은 저 모든 나를 압도하는 건 일에 시달려 피곤한 나구나. 사회가 요구한 이런저런 역할들에 시달리다 생각할 겨를 없이 앞으로 내달리는,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그냥 여기 이렇게 있는 나.
 
'나'에 대한 생각은 '나' 말고 다른 이가 해줄 수 없다. 그러니 '지구'와 K의 이야기를 저기서 끊어버렸다고 내 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직접 읽어보자. 내가 왜 이런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를 하는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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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6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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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반의반>

모성은 정말 한도 끝도 없을까? 모성은 굳이 비유하자면, 고무줄과 같지 않을까? 어느 한도까진 늘어나지만, 더 힘이 가해지면 끊어지기도 하고, 한도 이내의 힘이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탄성이 약해져서 길게 늘어지기도 하는. 이렇게 여러 유형이 존재할 수 있음에도 우린 최고 품질을 넘어서, 절대 끊어지지 않는 고무줄만을 상정한다. 어쩌면 모성을 너무 이상화시킨 나머지 거의 신격화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강요하기까지 한다. 엄마라면, 할머니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영실은 최근 수술을 받은 후 섬망 증세를 겪었고, 24시간 가까이 자다 깬 적도 있다. 혼자 살고 있으며 이제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나이다. 은미는 영실의 하나뿐인 딸이다. 우유부단하고 다소 무책임했던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지금은 자기 앞가림은 하면서 산다. 현진은 영실의 손녀이자 은미의 딸이다. 엄마와 함께 살고 직장에 다니는 중이며, 큰 말썽 없이 살아왔다. 어느 날, 영실이 5천만 원을 도난당하면서 이들 사이에 잔잔한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은미와 현진은 저 5천만 원의 존재가 당혹스럽다. 자신들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영실은 저 돈의 존재를 숨겼으니까. 서운할 만도 하다. 물론 서운함이란 감정 역시 당혹스럽다. 자신들이 속물처럼 느껴져서. 그들이 영실에게 투영했던 건 모성애였다. 모든 걸 베푸는 이상적인 모성애. 하지만 영실은 그러지 않았다. 과거 조금은 젊었을 땐 이 돈을 자식에게 써봤자 소용없다 여겼을 것이다. 은미가 자신에게 기댄 나머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거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영실은 그럴 수 없었을 거다. 나이 들어 죽음과 혼자서 마주해야 한다는 건 그 세대만이 알 수 있는 엄청난 공포일 테니 말이다. 노화에 잠식당한 영실에겐 공포와 맞설 유일한 수단이 그 5천만 원뿐인 거다. 이제 은미와 현진의 '저 5천만 원'과 영실의 '그 5천만 원'은 같은 돈이지만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고 말았다. 희생을 수반한 모성애와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
 
자신을 보살피던 존재가 자신이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전환될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난감해한다.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지만 물리법칙인 관성은 뜬금없게도 이곳까지 적용됨으로써 이전 잣대와 기대를 들이밀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나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쳤고, 나이를 앞서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단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우린 나이와 나란히 걸으면서 그의 옆모습만 볼 뿐, 그의 앞모습은 절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끝부분, 영실이 자신의 요양보호사였던 수경에게 보인 자기기만에 가까운 믿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현진은 수경이 돈을 훔쳤다고 의심한다. 영실은 현진에게 그 얘기를 듣고서 수경을 두둔하며 역정을 낸다. 그리고,
 
수경이 정말 돈을 가지고 갔을까? 영실은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다. 왜인지 그 애가 자신을 여기에 붙들어두려고 그런 것만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유력했다. 실버타운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나를 말리더니, 바보 같은 것. - <본문 중>
 
이건 뭔지는 모르겠으나 믿음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그게 무엇이기에 영실이 수경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 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난 지금 은미와 현진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바라본다. 그들의 나이가 내가 지나온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죽음을 더 가까이 마주하게 되면, 그땐 영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지금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영실의 고집스러움과 괴팍함이. 영실을 바라보는 은미와 현진의 실망하는 시선이. 그들의 해결되지 않을 갈등이.



<바우어의 정원>

저는 지난 삼 년 동안 세 번의 유산을 겪었습니다. -<본문 중>
 
배우란 직업은 주목과 관심을 받을 때만 의미가 있다. 배우의 내면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바탕으로서만 그렇지 그 자체로 중요하진 않다. 외부로 드러난 부분만으로 평가받는 가장 대표적인 직업인 셈이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다를까? 우린 타인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 판단한다. 물론 그 사람의 내면이 일부 반영되었겠으나 그 정도로 만족할 뿐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진 않는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세상이란 무대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일 수도 있겠다.
 
은화는 배우다. 늦깎이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지만 지난 3년간 임신과 유산을 세 번이나 겪으면서 자기 안으로 침전된 상태다. 그런 은화가 지금 모처럼 오디션을 받으러 간다. 여성으로서 겪었던 이야기를 독백으로 풀어내는 연극의 배역을 맡기 위해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이 글의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면의 상처를 고백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름을 밖으로 짜내야 하듯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앙금들도 발산시켜야 하는 건 분명하다. 고통을 나누고 누군가의 공감을 얻는다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일은 없으니까.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은화가 무명 시절 했던 드라마 치료 워크숍도 그런 방편의 일환일 것이다. 다만, 그 공감이 진실되어야 하고, 타인의 아픔을, 그 크기를 넘겨짚지 말아야 한다. 섣부른 위로는 마음의 문을 더 닫게 할 수도 있다.
 
실은 나 아까 속으로 선배 질투했어. 선배한테 아이가 있는 줄 알고…. 차 뒤에 붙은 스티커를 봤거든. -<본문 중>
 
그래서 은화는 오디션장에서 한 고백이 아닌, 그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 정림의 말에서 회복의 씨앗을 찾는다. 내면의 상처는 단순하지 않다. 원인만 해결된다면 끝일 거라 여기겠지만 그 또한 섣부른 오판이다. 은화가 배우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보자.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고 나온 은화는 크리스마스 풍경이 한창인 길거리에서 통쾌함이 아닌 비참함을 느낀다. 그 비참함의 원인은 자신 또한 그들과 똑같은 인물이 되었다는 모멸감에서 오지 않았을까?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던 은화의 심리는 직접 묘사되진 않았으나 미루어 보건대 정림과 다르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오디션이 끝나고 정림과 함께 있는 차 안에서 정림의 저 고백을 듣는 순간, 은화는 자신 내부에 깊숙이 숨어있던 커다란 상처와 마주한다. 동질감, 공감, 그리고 화해. 은화는 정림을 통해 은밀한 자아와 마주 섰고, 그로 인해 회복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렇게 믿어본다.
 
상처, 공감, 회복을 얘기하는 이 소설은 은화가 자신과 비슷한 괴롭힘을 당한 초원이라는 학생과 만나봐야겠단 결심하면서 마무리된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이 만남을 주저했던 은화의 모습과 비교하면 은화는 분명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모양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세상의 공감 능력은 여전히 떨어지고, 자기중심적이다. 관심을 가졌다가도 어쩔 줄 몰라 하고, 결과에 환호하나 그뿐이다. 정림이 했던 연극의 마지막은 상처 입은 자와 외부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리틀 프라이드>

오스틴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토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어요. 우린 그러니까, 전우 같은 거잖아요." 나는 '전우'라는 말에 다시 어안이 벙벙해져 커튼이 둘러진 병실 내의 다른 침대들과 창 너머의 맞은편 건물을 바라봤다. "아니요...... 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혀 달라요." -<본문 중>

무언가를 써볼까 하다 그만뒀다. 그러니까... 난 소설 속 토미(회사에서 부르는 영어 예명)와 같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없다. 내 삶은 내게 주어진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잠식당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온 탓에 태생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에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내 이해력을 뛰어넘는 수준일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내용을 끄적인다? 그들의 근본적 욕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다음에 뒤따르는 문제점들을 이야기한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오스틴의 저 말처럼 일부분만 붙잡고서 동질감을 호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싶다. 그러니 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그들 또한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존재임이 분명하므로, 그래서 그런 존재로서 바라보고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할 뿐이다. 지금으로선.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

작가 노트에서 쳇 베이커의 음악과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고백을 읽었다. 그리고 예술가와 개인 사이의 간극을 매개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다음 따라온 감정은 당혹함이었다. 뭐라도 써볼까 했는데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소설이 전달하려는 바가 너무 명확한가? 은유조차 비껴갈 수 없는 명확함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는 걸까? 뭘 써도 동어반복이나 설명이 될 거 같은 아득한 느낌에 어느 순간부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작가, 뭐지? 30대 이후로 무언가에 덤벼든 적이 없었는데 묘하게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소설이다.


꼬리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이 세대 간 갈등과 개인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인데 하필 그 둘이 처음 두 편의 단편이었다. 글이 길어지면서 다른 단편들 역시 따라 길어졌다.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보다 감상을 적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던 기묘한 상황. 그래서 감상도 둘로 나눠 올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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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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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근무시간에 담배 피우는 시간만 줄여도 일을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30대의 어느 시절, 태풍이 드물게 서울 시내 한복판을 훑고 지나가는 중이었다. 고층 건물 꼭대기에 달린 간판이 위태롭게 건들거리고, 바람에 부러진 가로수 토막이 길바닥을 사람 대신 누볐다. 태풍의 위력에 혀를 내두르던 나는, 그 순간 길 건너편 건물 귀퉁이에 몸을 숨기고 담배를 피우는 직장인들을 목격했다. 그 난리판 와중에! 물론 근무시간이었다. 책 제목을 보고서 자연스럽게 이 두 장면이 떠올랐다. 빈둥댐으로써 노동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리는 비효율의 사례들로.

     

그런데, 책에 나와 있는 이 문장들을 보자.

     

이 논문에서 케인스는 1930년까지의 추세에 근거해 “100년 내로 경제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거나 적어도 해결 방법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 2030년까지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이 될 것이며 그 시간조차 경제적이기보다는 인간적 필요를 반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 <본문 중>

     

인류가 한때 견뎌야 했던 고된 노동에서 빠져나왔냐고, 그리고 빠져나왔다면 자신의 환경을 처리하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느냐고 말이다. - <본문 중>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뭔가 방향이 달라 보이지 않나? 평균 노동시간 주 15시간. 인간적 필요. 자신을 발견할 방법. 피곤함에 찌든 현대의 직장인에겐 꿈같은 이야기다. 맞다. 이 책은 비효율의 책임을 근로자들에게 두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어째서 우리 평균 노동시간이 아직도 주30-60시간인지, 어째서 사람들은 그 근무시간 동안 집중하지 못하고 허우적대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우린 자신을 위해 일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캐묻는 책이다.

     

이번엔 나름 충실하게 책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 보겠다. 그 해답은 바로 관리직군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는 거. 이쯤에서 또 한 번의 본문 인용.

     

파킨슨의 법칙은... 일은 그것의 완수에 허용된 시간을 채우도록 늘어난다. - <본문 중>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인류는 엄청난 생산성의 향상을 마주했고, 그와 함께 노동을 계량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육체노동을 벗어나 대상을 관리하는 직업군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향상된 생산성에 대응할 만큼은 아니지만 이때 이후로 근무시간은 꾸준히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육체노동이 계량화된 것과 달리 관리직들의 업무는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 육체노동은 숨 막힐 정도로 효율성이 추구됐으나 관리직의 시간은 남아돌았다. 여기서 파킨슨의 법칙이 적용된다. 관리직들은 남는 시간을 위해 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관리하고, 그 관리를 관리하고, 그 관리를 또 관리하고. 문제는 늘어나는 그 관리가 효율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심지어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새로운 발명은 원래 일을 더 쉽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종종 온갖 종류의 새로운 절차와 새로운 형태의 감독,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요구했다. - <본문 중>

     

그렇다면 효율과 합리와 동떨어졌고, 필요하지도 않지만 만들어낸 그것. 그것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직장인들이 쉽게 공감할 만한 대상으론 너무나 많은 회의, 엄청난 양의 보고서와 문서들, 과도한 절차와 승인들이 있겠다. 그리고 하나 더. 모두가 공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책은 전략과 비전을 만드는 작업도 여기 포함했다. 구체적으론 거창한 슬로건이나 추상적인 브랜드 전략 같은 것들이 여기 해당한다. 구체적 실천 방안도 없고, 그저 홈페이지의 문구나 브랜드명만 바꾼다는 식의 보여주기 또는 모방하기(유행 따라 하기)가 전형적인 예다. 모두 비대해진 관리직들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바로 이런 것들 모두가 사람들을 가짜 노동에 빠져있게 만든다.

     

혹시 여기까지 읽고서 지금 고개를 끄덕였나? (그런 적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도 가짜 노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지한 상태임이 분명하다. 그럼 하나만 묻자? 그 가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봤는가? 책에 따르면, 일이 없을 땐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라고 한다. 주변 눈치 보지 말고.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거 누구나 잘 안다.

     

집에 간다는 건 바쁘지 않다는 뜻이고 바쁘지 않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 <본문 중>

     

이 문장만 보면 이게 뭔가 싶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회사에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필수 인력이 아닌 잉여란 의미이고 그건 그 사람에게 어떤 불이익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일이라고. 여기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왜 가짜 노동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단순하게는 저 문장이 내포하듯 잉여로 분류될까 봐. 그리고 또 하나는...

     

백수로 길게 살아본 적이 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어느 시점부터 사람 만나는 걸 꺼리기 시작했다. 돈이 없으니까? 맞다. 자존심 때문에? 그것도 맞다. 그런데 그 둘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명백히 할 일이 적을 때도 바쁘다고 주장하는가? 조너선 거셔니에 따르면, 자유 시간을 특권으로 간주하던 시대가 끝나고 일에서 특권이 나오는 시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 <본문 중>

     

우리는 일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시대를 산다. 일이 곧 나를 말해주는 시대. 그런 시공간에서 잉여로 분류되는 것도 참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 일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행위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니요’에 대한 두려움은 ‘네’에 대한 갈망으로 대체됐다. 비판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남들과 연결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긍정성의 문화로 향하는 길을 닦아놓은 이 같은 변화는 이제 SNS의 ‘좋아요’로 표현된다. 긍정적이 된다는 것은 또한 남들에게 관심받는 한 방법이 되었다. - <본문 중>

     

이런 세상에서 가짜 노동을 부정하는 '아니요'를 외쳤다간 그 사람은 외톨이가 되는 것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이 책은 다양한 실제 사례를 들면서 가짜 노동의 여러 유형을 보여준다. 내가 지금껏 써 내려온 글은 그중 일부만 끌어왔고, 그 속에서 하나의 답과 하나의 질문을 끄집어냈다. 그 답은 정확히 그 질문에 상응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이 전혀 상관없지도 않다. 그 연관성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가짜 노동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책을 읽어보면 된다. 내 노동은 딱 여기까지. 시간이 많다고 책 전체를 요약해 줄 만큼 친절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다만,

     

성취 과정이 가치 있다는 관념은 끈기 있게 이어졌다. 서구, 특히 근대에 칭찬의 대상이 된 것은 최종 결과물뿐 아니라 작업 과정에 투입된 노력 그 자체였다. - <본문 중>

     

우리가 가짜 노동에서 벗어나는 건 전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앞으로 AI가 불러올 생산성 향상이 '작업 과정에 투입될 노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복잡해질 거 같거든. 혼돈은 차라리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앞서 언급했던 파킨슨의 법칙은 여전히 작동될 것이고, AI가 불러올 효율성마저 그것에 삼켜진다면 우린 변함없이 가짜 노동에 휘둘릴 거다.

     

마지막으로 그냥 인상 깊었던 문장으로 끝을 내야겠다.

     

우리가 우선순위를 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안 돼’라든지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더 이상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 <본문 중>

     

내 글은 이걸로 충분하다. 오랜만에 책 내용에 충실한 리뷰어 역할을 했다.


꼬리말) 그동안 AI를 거의 사용하지 않다 최근 들어 그 쓰임새를 모색 중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 AI와 상호작용을 거쳐 완성되었다. 처음 썼던 글을 AI에게 보여주면서 평가와 보완을 부탁했고, 두어 가지 추가할 부분과 한가지 삭제할 부분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 중 추가할 부분 하나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여서 글을 보강했다. 처음엔 글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 뺐던 내용이었는데 AI에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문장을 대신 써 달라거나 구조를 설계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내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이미 꽤 보여줬던 터라 내가 글을 쓰는 스타일, 사고방식, 내용을 설계하는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여서 뜬금없는 얘기를 하지는 않더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 이 글을 처음 쓸 때부터 제목을 AI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꽤 많은 제목을 만들어 보여줬는데 그중 하나를 보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글의 내용과 기가 막히게 연결되는 문장이기도 했고, 과거에 내가 썼던 글(AI에게 보여줬던 글) 중 하나에서 시도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학습했구나... 그 제목이 지금 이 포스팅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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