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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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외로움이 가슴에 박히기 마련이다. 그땐 그저 가끔 혼자 있고 싶은, 사치스러운 외로움이다. 그러다 가슴에 박힌 씨앗이 자라 묘목이 되면 외로움은 스스로를 가두는 울타리로 변한다. 묘목이 자라 큰 나무가 되면 주변 다른 것들을 빨아들이고 가로막아 거대한 외로움 그 자체가 된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큰 나무가 거대한 고목이 되면 고목 주변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압도하는 두려움으로 변질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외부로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외부의 손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나를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 P433, 434


- 인간


인간은 크건 작건 문명을 이룬다. 아이러니한 건 기술이 발달할수록 문명은 자연과 공존하기보단 파괴하는 쪽을 선택하는 듯하다. 개발과 발전이 언제나 최우선 화두이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연과 선을 긋고 고립의 길을 택했고, 그렇게 많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외롭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 한가운데 파고든 외로움에 자기기만이란 돌연변이를 일으켜 자신을 스스로 자연의 수호자로 높였다. 고결하고 고독한 파수꾼.


- 카야


카야는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봤다. 이어 큰오빠와 언니가 떠나고, 함께 있어 줄 거라 믿었던 조디 오빠마저 떠났다. 지옥 같던 아빠가 잠깐의 햇살을 비춘 후 카야의 곁을 떠나자 6살 카야는 혼자가 됐다.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는 벅찬 상황이지만 카야는 습지의 아이로, '마시 걸'이란 멸칭을 안고서 성장한다. 10대가 되고, 20대가 되어 성인이 되지만 뒤에 남겨지는 건 항상 카야였다. 꼬리표처럼 들러붙은 이별과 차별은 카야의 마음속 외로움의 씨앗을 거대한 고목으로 자라게 한다. 카야에게 평범한 삶이란 이젠 불가능하다.


- 인간

 

자기기만의 길은 험난하다. 착취하면서도 보존하는 척해야 하고, 개발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환경 보호를 외쳐야 하고, 쓸 거 다 쓰면서도 고갈과 훼손은 기술 발달이 해결해 줄 거라 믿어야 한다. 자연은 묵묵히 견뎌내지만, 인간이 가한 압박은 변화의 속도를 조금씩 끌어 올리는 중이다. 게다가 자기기만의 돌연변이는 두려움까지 억눌렀다. 두려움이 제거된 인간은 자연이 내는 파열음을 마치 일회성인 듯 가볍게 소비한다. 인간은 어떻게 될까?


- 카야


하지만 아무리 험난한 여정이라도 그 여정을 비추는 빛이 있다. 어린 카야의 생존에 큰 몫을 담당한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주머니, 그리고 첫사랑인 테이트. 이들은 카야를 비추던 커다란 등불이었다. 그리고 도망치던 어린 카야를 못 본 척하면서 미소를 던져주던 사람, 셈을 못 하는 어린 카야에게 푼돈 몇 푼이라도 더 안겨 보내주던 상점 직원까지. 일급 살인으로 기소되어 법정에 선 카야의 뒤편엔 이들이 자리를 잡는다. 카야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 인간


자연은 차이를 두지 않는다. 자연이 재해를 일으킨다면, 자연을 옹호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연을 무엇인가 꺼내 쓸 창고처럼 여기는 사람이나 똑같이 피해를 볼 것이다. 그걸 배신이라고 해야 하나? 자연은 이치에 따라 인간에게 재난을 선사하고 많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 그걸 범죄라고 해야 하나? 자연이 무엇을 하든 인간이 그 행위를 이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카야


소설은 두 갈래로 시작해서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 하나는 시체가 발견되어 수사가 시작되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어린 카야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다. 늪지에 대한 작가의 전문 지식이 어우러져 카야의 성장 스토리는 아찔할 정도로 읽는 사람을 빨아들인다. 다른 한 갈래의 이야기 때문에 어떤 흐름으로 갈지 예측이 되지만, 그래서 더욱 카야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단 생각을 끝날 때까지 떨칠 수 없었던 소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나이가 들었거나 현실이 팍팍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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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984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55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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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중 대표 격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1948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49년에 출간됐고, 가까운 미래인 1984년을 배경으로 내용을 서술한다. 영국인인 작가는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에서 경찰이란 직업을 가졌었고, 그 후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 체제나 이념이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지 체험했고, 그 경험과 거기에서 비롯된 생각들을 소설에 그대로 녹여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니, 분명 누군가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이 소설의 핵심으로 파악할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더 유명한 건 ‘1984’란 소설 제목보다 ‘빅 브라더’란 단어일 거고, 그 단어는 대부분 감시와 통제를 상징하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게다가 요즘의 정보통신 기술은 이 소설에 나오는 감시 기술들을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이게 할 만큼 충분히 발달했다. 한 예로 AI와 결합한 거리의 CCTV는 이상 행동(담을 넘는다든지, 일정 장소를 오랜 시간 동안 배회한다든지)을 감지하면 관제 센터의 사람에게 통보하고, 지역 지구대에까지 연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개인정보와 사생활에 민감하다면, 이 소설에 내세운 감시와 통제는 끔찍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예전엔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이번엔 정치 체제가 구성원 개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말살하는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자신들은 순교자나 아이콘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 개인 내부의 마지막 피신처까지 싹싹 드러내서 텅 비어버리게 만드는 과정. 감시와 통제는 효율적이고 비인간적이지만, 말살은 역설적으로 인간적이며 건조하고 치밀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소설에 나오는 당의 표어가 갖는 모순이 말살 과정에서조차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더욱 아팠던 거 같다. 기술적 접근이 아닌 본질적 접근이라서. 그것이 사회 제도의 개혁이 아닌 개인 세계관의 파괴를 위한 수단이라서.


‘개인이 갖는 세계관의 파괴’라고 하니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주제가 하나 있는 거 같다. 세제 개편과 함께 시끌시끌한 부동산. 유일한 투자 수단이자 삶의 목표였던 1970, 80년대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동산은 세대에 따라, 아니, 세대와도 상관없이 개인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며 존재해 왔다. 안타깝게도 현재 2, 30대도 돈을 끌어모을 능력이 있는 개인에 한해서는 부동산에 대한 태도가 과거 세대와 다를 바 없지 싶다. 이쯤 되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 아닌가? 그럼, 개혁이나 개편이 아니라 세계관을 파괴해야 한다는 얘긴데. 뭐, <1984>랑 직접 상관은 없는 문제다. 그래도 궁금은 하네. 윈스턴이 고가 아파트 소유주였다면 끝까지 버텨냈을 것도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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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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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배리 로페즈는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를 쓰고자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여행을 다니며 깨우치고 쌓여가는 생각들을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 욱여넣을 의향이었고 그렇게 했다. 솔직히 책의 전체 모습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한번 제대로 완독하기 전까지 그의 글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워낙 방대하기도 하고, 오지에 가까운 낯선 곳들이 등장하는 데다 문장 자체가 길기도 해서다. 그래서 처음 책을 다 읽고 글을 써보려 했을 때, 내 계획은 내가 했던 여행을 소재로 배리 로페즈처럼 이야기를 구성해 보자는 거였다. 하지만 두 번째 읽으면서 그 계획은 바로 접었다. 그는 이 책을 위해 몇 군데의 여행지를 선택해서 글감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선택되지 못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다른 세 곳의 이미지를 언급했다. 중국과 캐나다와 아프가니스탄. 중국에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하층계급과 야시장에 전시된 각종 동물의 모습을, 캐나다의 북단에선 빙하가 사라져 북극곰이 사냥의 터전을 잃어가는 모습을,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회복 불가능 상태에 빠진 한 여인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가 이런 것이라면, 내 여행 글을 여기 덧붙일 순 없었다. 삶의 경중을 논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여행은 너무나 진지하고 압도적으로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책 첫머리쯤에서 했던, 같지만 다른 질문 두 개로 내 글을 시작한다.


"이 순간의 아름다움 속에서 갑자기 내 안에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P17)

"지금, 이 호전적인 파벌의 시대, 일상적인 폭력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P17)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과 하나의 질문. 이제 시작이다. 내 글도 길어질 거 같다. 내 탓이 아니다. 900여 페이지를 쓴 작가 때문이다.


- 파울웨더곶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월감을 가져본 적이 있다. 꼭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확신을 갖고서 상대방을 대할 때가 있다. 내가 옳다, 내가 더 낫다, 내가 더 많이 안다. 동일 분야, 특히 기술적 측면에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서 다른 분야,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가능할까? 더 크게 확장해서 다른 문명에 대해서도? 내가 옳고, 그래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뜻대로 해야 한다는 독선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우린 현실에서 너무 많이 목격하는 중이라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다. 작가는 그중에서도 제국주의가 한창일 때 서구 열강이 침범하고 무시했던 여러 문화를 바라본다. 그 말살에 대한 책임과 이후 이어져야 했던,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선주민들에 대한 사과를 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 사라지고 잊힌 문화가 제시했을 지혜, 현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그들만의 시각을 안타까워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요구되지만, 독선과 오만에 압살되어 버린 인류의 또 다른 시선을 말이다.


작가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주로 찾는 곳은 파울웨더곶이다. 이곳은 제임스 쿡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서해안에 도착했을 때 상륙한 곳이라고 한다. 제임스 쿡은 영국 군인이자 지도 제작자였으며 3차에 걸친 원정을 통해 남극 대륙 내부를 제외한 태평양의 모습을 대부분 그려낸 인물이다. 그리고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다. 래널드 맥도널드. 백인과 치누크족의 혼혈로 개항 전인 일본에 들어가 침략에 대응하도록 영어를 가르쳐준 인물이다. 작가가 이 둘을 집착에 가까운 관심으로 쫓는 것은 일단 그들이 제국주의 시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쿡 선장은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제국주의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맥도널드는 제국주의의 피해자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둘 다 작가에 따르면 미지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지녔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갈 수 있는 의지와 도전 정신을 갖췄다. 다만 어떤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종착역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으나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미숙함이나 갈등은 인간적인 면모이기에 그 또한 작가의 관심에 한몫한다. 작가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과거를 살피고 자신의 질문에 대응할 방법을 찾고 싶어 한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우월감과 확신을 바탕으로 소유와 소비를 위해 자연과 문명을 침범해 그들의 설 곳을 없애버리는 이 세상에 우린 무슨 대응을 해야 할까?


- 스크랠링섬


작가가 두 번째로 펼쳐내는 여행지는 그린란드 부근 스크랠링섬이다. 여행이란 단어에 헷갈릴 수 있지만, 작가는 이곳에 고고학자들의 유물 발굴에 참여하기 위해 온다. 이 섬엔 도싯 문화와 툴레 문화의 거주지가 있고, 두 문명은 몇백 년간 시기가 겹친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도싯인은 멸종했고, 툴레인은 흔히 에스키모라고 부르는 이누이트족의 직계 조상이 된다.


여기서도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고고학자들과 함께 작업할 때 신경 써야 할 점, 사라진 문명이 남긴 흔적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 비극으로 끝난 미국의 북극 원정대가 남긴 마지막 흔적들. 수많은 에피소드를 오가며 작가가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은 타인이나 다른 문화를 대하는 자세다. 그리고 그가 반복해서 그 의미를 찾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존중, 배려 등 타자에 대한 인정이 부족한, 어쩌면 아예 할 줄 모르는 현대문명의 우월한 이기심을 향한 걱정. 동시에 그 이기심을 극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유적지에서 작가 자신이 했던 부끄러운 행동을 통해서 읽는 이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하게 올바른 선물은 그들의 말을 듣는 것, 주의를 기울이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체로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충동에 굴복하는 것은 그저 자기 탐닉적이거나 이기적이기만 한 일이었다." (P339)


- 푸에르토아요라


저 지명만 놓고 보면 어디야 싶겠지만 갈라파고스 제도에 속한 지역이다. 맞다. 다윈과 종의 기원, 진화론으로 유명해진 곳. 따지고 보면, 이곳만큼 이 책의 주제 의식과 잘 맞아떨어지는 곳도 흔치 않다.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윈은 자신의 생물학적 이론으로 인간은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특별한 위치에 치명타를 가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 정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새로운 방식을 생각해 낸다. 인간은 완성을 위해 변화해 가는 중이며, 그래서 생태계의 최정점에 선 존재라는 식으로.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진화'라는 단어에 '진보'라는 단어를 덧씌운 개념이다. 그런데 정작 다윈은 진화를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성의 증가라고 판단하면서 '고등'이나 '하등'이란 단어를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윈의 의도와 다르게 그의 이론을 차별적인 방향으로 적용했다. 어찌 보면 배리 로페즈가 쫓던 제임스 쿡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인물이 찰스 다윈인 셈이다.


작가는 다윈의 그림자가 강력하게 드리워진 이곳의 섬들과 바다를 넘나들며 계속해서 사고를 확장한다. 특히 바다거북 새끼가 해변에 묻힌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포식자를 피해 바다로 향하는 장면과, 뒤이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야생화된 개들에게 쫓기는 작가의 모습이 연이어 배치된 부분에선 과연 인간은 이 생태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돌아보게끔 한다. 또한 이곳은 갈라파고스 특유의 삶과 죽음이 존재하지만, 상어 지느러미 획득과 같은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삶과 죽음이 침범해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각종 바다 생물과 함께 유영하며 실질적인 치유와 경이를 선사 받기도 하지만, 남태평양의 낙원이나 돈벌이 같은 환상이 들러붙어 기대와 실망, 희망과 반목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역적으론 특이하지만, 보편적으론 세상의 축소판 같은 곳. 사람들 사이에서 우월함을 주장했던 문명이 동식물을 대상으로 겸손할 리 없다. 이곳에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우린 지배자나 지도자가 아닌 생태계의 동등한 일원이어야 하지 않나?


"호모 사피엔스가 오로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생태학적 관점을 취하고, 물리적 환경이 인간 유전체에 선택압을 가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단순명료한 하나의 판단에 이르게 된다. 바로 환경을 보살피는 일이 자신을 보살피는 일이라는 깨달음이다." (P453~454)


- 자칼 캠프


아프리카 케냐의 나키라이라는 곳에 있는 발굴 캠프다. 나키라이는 이곳 선주민인 투르카나족의 언어로 '자칼들의 장소'라는 의미라고 한다. 작가는 이곳에서 발굴자들과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찾는 작업에 동참한다.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의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다. 화석 증거가 있어야 어떤 실체를 상정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통을 이어가야 하므로 현시점에서 과거의 모습은 뚜렷할 수가 없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생물 진화의 한 시점은 언제나 과도기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실체도 과도기에 해당하고, 미래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인류의 화석 증거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쿡 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했던 때처럼 도전 의식과 열린 사고를 갖추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작가는 장소와 대상만 바꾸며 같은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셈이다.


하지만 동어반복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이곳에서 인류 문명이 같은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결과의 불확실성 또한 포착한다. 선주민들 역시 사람이기에 똑같은 호기심과 욕심을 지녔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일구어낸 나라의 국민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거꾸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려고도 한다. 심지어 물질문명을 향한 광신으로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가치 없다고 판단하기까지 할 정도다. 작가는 이런 모습들을 캠프의 모습과 병치시키며 생각들을 풀어낸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모습이라는 듯이.


작가는 이번 여행지를 통해서 문명을 일구어낸 인류가 예외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단어는 '뛰어난'이 아닌 '예외적인'이다. 그가 인류의 기원, 정확히는 그 흐름을 찾고자 하는 것은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무분별함의 특별함을 추적하고자 함이 아니라 생태계 한 귀퉁이에서 출발한 생태계의 일원임을 확인하고픈 욕망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질문의 형태를 보다 근본적인 형태로 바꾼다. 인류의 기원을 찾듯이 모든 질문의 시작을 찾아서.


"호모 사피엔스가,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진보한 인간이 예외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도발적인 질문은 그 예외적인 성질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다." (P510)


- 포트아서에서 보타니베이까지


갑자기 친구의 불평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시험 문제였는데, 1950년 한국전쟁의 표기로 '6.25'와 '6·25' 중 어떤 것이 맞는지를 고르는 문제였다. 점을 가운데 찍는 것이 정답이었는데 친구는 오답을 선택했었다. 그는 두고두고 투덜거렸다. 점의 위치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사소한 일화지만 이건 우리 세대가 반공 교육의 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하나의 예시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조차 한국전쟁의 참사를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제주 4.3, 광주 5.18. 이 단어 배열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만, 요즘 세대가 이 의미를 삶의 주변부로 밀어냈다고 내가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만은 말하고 싶다. 이념이나 신념, 성향을 떠나 희생자가 존재한다면, 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또 그에 앞서 상대방의 입장을 미루어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런데 이 세상은 경쟁과 이익과 소비를 위해 그런 가치를 잃어버렸다.


공동체를 이루고 문명을 일구어낸 인류는 진보를 내세워 확장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문명을 억눌렀고, 심지어 자국의 국민에게까지 차별의 잣대를 들이댔다. 호주의 포트아서는, 영국이 자국의 죄수나 함량 미달이라 판단한 사람들을 격리 또는 교화시키려고 영국 밖으로 추방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작가가 방문했을 당시 이곳은 과거 교도소의 모습을 간직한 관광지였고, 얼마 후 한 남자에 의해 총기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는 포트아서를 거쳐, 자원 획득이란 명목으로 선주민을, 그들의 문화를, 자연을 대상으로 각종 수탈이 이루어지는 중인 호주를 둘러보며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사회 및 환경에 가해진 해악의 상당 부분에 대해 ‘터보차저를 장착한’ 자본주의가 극악무도한 원흉으로 수시로 지적되기는 하지만, 하이퍼 자본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것 같다. 그 핵심 질문이란, 우리 인간은 왜 서로에게 그토록 참혹한 해를 입히는가다." (P633~634)


이건 질문이기도 하지만 이전 장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호주의 어떤 공원을 거닐다 문득 희망을 붙잡는다. 어떤 종류의 희망인지 설명은 못 하겠지만 이런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살아남기 어렵다는 하지마비 새끼 고양이를 극진히 보살펴서 살려낸 노부부를 담은 유튜브 클립에서. 방송국의 도움으로 다리를 수술하고 더 개선될 가능성이 보이자, 눈물을 머금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에서.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는 안도 섞인 희망을.


- 그레이브스누탁스에서 포트패민 도로까지


지구상에서 아주 독특한 남극 대륙에 관한 얘기다. 선주민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고, 방문자의 위치에 따라 생명체라곤 자신 이외에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 역사상 드물게 이곳에서 얻은 지식을 나누겠다는 평등한 남극조약이 맺어진 곳. 뚜렷한 목적의식과 도전 정신을 지닌 과학자들과 개척자들을 불러 모으는 곳. 작가는 대자연의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 겸허하게 세상을, 인간을, 생명을 바라본다. 나 역시 책에 나온 문장들로 이 챕터의 감상을 대신하겠다. 절대 긴 글을 쓰다 지쳐버린 게 아니다.


“예전에 한 신학 교수님이 종교를 갖는다는 건 확신을 갖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지. 의심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어떤 심원한 신비에 대해 품었던 존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라고.” (P751)


이제 내 글도 끝이 보인다. 이 책은 작가의 생각들이 바다처럼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처음 접하면 그저 막연할 뿐이지만 해류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잡아내면 읽는 이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다. 해류와 바람이 각양각색이듯 도착지도 다들 다를 것이다. 심지어 한눈이라도 잠깐 팔면 자신도 모르게 일정 거리를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즉, 일관된 흐름은 있지만 생각의 방향이 사정없이 뻗어나갈 여지가 있고, 호흡이 긴 문체 특성상 집중하지 않으면 문장 단위로 헤맬 수도 있단 얘기다. 게다가 작가는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쓰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작정이라면 다독을 권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곳에 적어놓은 문장은 일부러 길게 늘여 쓴 편이다. 게다가 일관된 흐름 속에서도 챕터를 나눠 여러 에피소드를 집어넣었고 다소 산만한 느낌까지 줬다. 그러니 이 문장들이 읽기에 버겁거나 불편하다면, 사방팔방으로 펼쳐질 길이 부담스럽다면 시간을 투자할지 말지 신중히 결정했으면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번 독서가 내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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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왜 불평등한가 - 도심재개발 젠트리피케이션 빈부격차
리처드 플로리다 지음, 안종희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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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었던 <도시의 승리>의 저자인 에드워드 글레이저와 대척점에 있다기보단 관점이 다르다고 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플로리다 역시 도시화에 희망을 걸고 미래가 있다고 본다. 그 점에선 두 사람이 같다. 하지만 <도시의 승리>는 도시의 장점에 초점을 맞춘 채 그 장점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다고 보며,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다른 것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느낌으로 바라본다. 이에 반해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는 도시에 발생하는 위기, 특히 빈부에 따른 지역적, 경제적 격리와 중산층의 소멸이 자칫하다간 도시의 모든 장점을 삼켜버릴 수 있다고 여긴다. 게다가 그 위기가 바로 도시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그 힘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고 판단한다. 책의 내용을 자세히 요약하는 건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번 <도시의 승리>는 이런 취향을 무시한 채 책의 소개에 충실했지만, 이번엔 하던 대로, 내 맘대로 써 보겠다. 아래 내용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하거나 아니면 직접 읽어보시길. 자, 내 갈 길 가겠다.


고양이 마을이 있다. 해발 300m가 넘는 산 정상. 성곽이 정상을 휘돌아 나가고 길이 잘 닦여있으며 적절한 볼거리와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 접근성까지 갖춘 곳이다. 사시사철 사람들이 꾸준히 오르내리며 차나 자전거는 접근할 수 없다. 고양이 처지에선 최적의 장소다. 어린 고양이들이 자리를 잡았고, 입소문이 났는지 꼬맹이 고양이들이 계속 뒤를 이었다. 이곳의 고양이들은 등산객들에게 삥을 뜯는 것을 주요 직업으로 삼는다. 성곽 바깥쪽이나 정상 부근에서 잠을 자다 때가 되면 슬슬 본업을 위해 정상으로 출근한다. 좋은 기반 시설과 훌륭한 주변 환경과 양질의 일자리가 제공되는, 고양이 특급 마을이다.


귀여운 고양이를 끌어들이고 삥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이 마을의 장점이겠으나 모든 일에는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슬슬 고양이 밀도가 올라가면서 경쟁력에 차이가 발생한다. 귀여운 고양이는 더 많이, 그렇지 않은 고양이는 더 적게 삥을 뜯어 삥의 격차가 벌어진다. 정상 부근 한정된 토지로 인해 휴식 공간 또한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힘없고 약한 고양이는 점점 정상 주변에서 밀려남으로써 삥의 기회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진다. 그뿐인가? 냄새 나는 고양이 화장실 근처로 내몰리는 고양이도 생긴다. 더 있다. 소문을 듣고 어른 고양이라도 등장하면 기존 꼬맹이 고양이들은 속절없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다행히 어른 고양이는 이곳에 상주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자기 영역에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싫어해서 잠깐씩 정상을 차지하다 지나칠 뿐이다. 하지만, 이 잠깐의 순간이 쌓일수록 기존 어린 고양이들의 기회는 박탈된다.


그렇다면 고양이 마을은 어떻게 해야 지속가능한 성장과 안정을 할 수 있을까? 재개발? 의미 없다. 고양이는 환경을 중시하지만, 사람처럼 새집이나 지대를 추구하지 않는다. 저소득 직업군을 한 차원 높은 직업군으로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삥의 기회를 늘려주면 상황은 개선될 수 있다. 등산로 초입에 고양이 간식을 지참하도록 푯말을 세우는 식으로 등산객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사회기반시설 투자? 재개발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서 사람의 손길은 필요 없다. 자연 그 자체가 훌륭한 기반 시설이자 거주지다. 물론 그것은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한정된 정상 공간으로 인해 혜택받은 지역의 확장은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투자? 교육까진 필요 없겠으나 중성화 후 방사는 고려해 볼 여지는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산꼭대기에서 포획해서 수술 후 다시 산꼭대기에 방사해야 하니까. 자손이 계속 늘어난다면, 어미 세대에 비해 어렵게 살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지역에 권한 이양? 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특히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정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중앙정부인 척, 공공의 이득인 척 행동하지 말고, 고양이의 삶은 고양이에게 맡기는 게 좋다. 여름에 화장실 근처를 지나다 냄새가 난다고, 어른 고양이가 나타나 털 날리는 추격전을 벌여 소란스럽다고 민원을 넣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다만 그 산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살필 필요는 있겠다. 과거 일본 어느 지역에서 산에 늘어나는 고양이를 방치했다가 원 거주 동물인 삵의 개체수가 급감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한테 별 영향을 주지 않는 바이러스가 삵한테는 치명적이었던 까닭이었다.


재미 삼아 자주 다니는 산의 고양이들을 모델 삼아 이 책의 이론을 적용해 봤다. 저자는 주로 미국의 도시를 대상으로 연구하고 그 해법을 제시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도시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해법이 아니다. 당장 저 고양이 마을도 그렇고(흠...), 대한민국 서울에 적용해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정책이 있다. 한 예로 저임금 노동자들을 중산층으로 만들기 위해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독 자영업자 비중이 높다. 자영업자 중에서 프랜차이즈 형태가 특히 많다. 흔히 접하는 편의점, 치킨, 카페가 그렇다. 이런 곳은 장사의 이익을 본사와 나눠야 하지만 최저임금의 상승분은 고스란히 자영업자가 부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을 무작정 높게 책정하면, 저임금 노동자가 중산층으로 올라갈 기회를 엿보는 만큼 자영업자는 몰락할 위기로 내몰리게 될 거다. 그러니 단순히 자리바꿈을 원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향상을 원한다면 추가적인 대책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빛이 있고 존재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를 외면하고 사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슬금슬금 커지더니 존재 자체를 에워싸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요즘이다. 결국엔 존재를 잠식할까? 날뛰는 자본주의를 보완해서 나눔과 공존을 실행해야 할 시기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공존’이란 단어가 힘을 쓰지 못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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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승리 -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개정판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 해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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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때도 서울은 서울이었다. 물론 강남은 지금과 달랐지만. 십 대 초반쯤 되었으려나? 고속버스를 타고 5시간쯤 걸려서 온 가족이 큰아버지 댁에 간 적이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질린 누나는 그날로 서울로 복귀했고, 난 어떻게든 버텼다. 가로등 하나도 없던 동네. 자려고 불을 끄면 도시의 어둠과 차원이 다른 어둠이 주변을 감쌌다. 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봤지만 그게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그때 기억 때문일까? 난 도시를, 서울을 떠나 살아볼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문명과 편리함으로 대변되던 도시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끌어모은다. 이 책에 따르면, 그 같은 인접성은 도시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의 전파를 쉽게 한다. 동시에 여러 아이디어가 생겨나고 퍼지면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도시의 특성 중 하나인 혁신성이다. 이 둘은 도시를 양적, 질적으로 키우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도시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는 없다. 인접성은 질병과 범죄의 전파 역시 쉽게 하며, 혁신성은 때론 스스로 굴레가 되어 도시를 억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절히 개입하는 공공 부문이 필요하다. 깨끗한 물 공급과 안전한 치안, 접근성을 높이는 도로 등을 공급하는 것은 개인이 아닌 공공이 맡아야 할 역할이다. 또한 경쟁을 유도하고 교육에 투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수긍할 만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은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한다. 바로 고밀도 개발, 즉 도심에 고층 건물을 지어 사람과 건물의 밀도를 높여야 한단다. 다시 말해서, 이 얘기는 도심 내 개발에 제한을 두어선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이렇다. 건축에 제한을 두면 민간 회사는 수지가 맞지 않아 사업을 벌이지 않을 테고, 자연스레 주거 공급이 줄어들면 집값 상승이 유발된다. 그럼으로써 경제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도심 접근을 막게 된다. 또한 요즘처럼 자동차가 대중화된 시대에선 도시 주변부가 확장되는 스프롤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이럴수록 교외의 녹지를 침범하고 자가운전을 많이 하게 되어 더 탄소 집약적인 생활양식을 갖게 된다. 이런 양상을 줄이려면 이미 개발된 도심 내에서 제한 없이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문가가 하는 말이다 보니 일리가 있다. 게다가 실제 통계까지 제시하니 신빙성도 있다.


설명만 하면 딱딱하니 책에 있는 몇 가지 도시 사례를 살펴보겠다. 가장 먼저 디트로이트. 한때 자동차 제국을 상징하던 도시. 포드의 제조 혁신으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고, 도시는 초대형 자동차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동일 업종의 대형 회사 서너 군데가 도시를 독점함으로써 업종 간 아이디어 교류가 단절됐고, 포드의 혁신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교육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도시의 교육 수준을 떨어뜨렸다. 결국 일본에 밀려 자동차 제국은 무너졌고, 도시도 주저앉았다. 물론 이후 회복을 위한 꾸준한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장소를 중심에 둔 방향성 탓에 디트로이트는 실패한 도시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다음으론 텍사스에 있는 휴스턴. 이 도시는 개발 지향적이며 기업 친화적이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았으면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장소였겠지만 휴스턴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주거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졌고, 그것은 적정한 주거비와 물가로 보상받았다. 그 덕에 중산층과 교육을 많이 받은 우수 인력들을 꾸준히 끌어들이면서 도시의 성장을 일구어내는 중이다. 다만 이곳은 대중교통보단 자가운전 중심의 도시라 냉방이나 자동차 연료에서 배출되는 탄소의 양이 많다는 단점은 있다.


지금까지 써놓은 글에서 살짝 드러나기도 했지만, 저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을 옹호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개발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지만 주거 공급 측면에서 공공의 역할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는 공공이 주도하는 주택 공급은 시장 가격을 왜곡함으로써 민간 기업이 사업에 뛰어드는 걸 회피하게 하고, 장기적으로 공급 부족을 초래한다고 본다. 또한 도시의 핵심 지역에 공급되는 공공 주택은 그곳에 들어와 더 많은 일자리와 혁신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업이나 상업 시설이 들어설 기회를 영원히 박탈하게 된다. 기회비용의 문제다. 이건 오세훈 서울 시장이 서울에 적용하는 주거, 건설 정책과 맞닿아 보인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서울을 한 번 들여다보자. 고밀도 개발, 대중교통, 교육 수준. 도시를 살릴 수 있는, 저자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들여다보면, 서울은 완벽한 도시다. 높은 아파트와 사무용 빌딩들, 카드 하나만 들고서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 체계,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교육을 향한 열정. 게다가 완벽한 소비 도시이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람들이 주거를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를 모두 갖춘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밀도가 높아도 너무 높은 걸까? 취향이 너무 확고한 걸까? 밀려드는 사람에, 아파트를 향한 애정 공세에 주거 비용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지나친 교육열은 지식과 배움을 뛰어넘어 무한경쟁과 차별을 고착시키는 중이다. 완벽한 하드웨어에 과열되는 소프트웨어인가? 이게 말이 되나? 서울은 말도 못 하게 놀라운 도시구나.


<도시의 승리>는 2011년에 발행된 책이다. 무려 15년 전이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란 의문에 이것저것 검색해 보느라 읽는 시간이 배로 걸렸다. 또 하나, 읽는 내내 찜찜한 기분 때문에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시간이 더 걸리기도 했다. 저자도 인정했지만, 도시가 발전한다고 해서 세상을, 심지어 도시 내부조차 평준화시키지 못한다. 도시는 사람을 불러 모을 때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상호작용을 하며 기회를 제공하고 제공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빈곤은 계속해서 커진다. 저자는 성공한 사례를 들며, 도시가 아닌 시골 지역의 가난과 비교하며 더 나은 방향을 바라보지만, 더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더욱 많은 암담한 사례를 우리는 애써 외면해야 하는 걸까? 공공 부문은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도 되는 걸까? 책을 다 읽고서도 이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책은 리처드 플로리다가 지은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처럼 도시 찬양가였다 태도를 바꾼 사람이라고 한다. 찜찜함을 좀 걷어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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