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6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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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반의반>

모성은 정말 한도 끝도 없을까? 모성은 굳이 비유하자면, 고무줄과 같지 않을까? 어느 한도까진 늘어나지만, 더 힘이 가해지면 끊어지기도 하고, 한도 이내의 힘이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탄성이 약해져서 길게 늘어지기도 하는. 이렇게 여러 유형이 존재할 수 있음에도 우린 최고 품질을 넘어서, 절대 끊어지지 않는 고무줄만을 상정한다. 어쩌면 모성을 너무 이상화시킨 나머지 거의 신격화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강요하기까지 한다. 엄마라면, 할머니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영실은 최근 수술을 받은 후 섬망 증세를 겪었고, 24시간 가까이 자다 깬 적도 있다. 혼자 살고 있으며 이제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나이다. 은미는 영실의 하나뿐인 딸이다. 우유부단하고 다소 무책임했던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지금은 자기 앞가림은 하면서 산다. 현진은 영실의 손녀이자 은미의 딸이다. 엄마와 함께 살고 직장에 다니는 중이며, 큰 말썽 없이 살아왔다. 어느 날, 영실이 5천만 원을 도난당하면서 이들 사이에 잔잔한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은미와 현진은 저 5천만 원의 존재가 당혹스럽다. 자신들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영실은 저 돈의 존재를 숨겼으니까. 서운할 만도 하다. 물론 서운함이란 감정 역시 당혹스럽다. 자신들이 속물처럼 느껴져서. 그들이 영실에게 투영했던 건 모성애였다. 모든 걸 베푸는 이상적인 모성애. 하지만 영실은 그러지 않았다. 과거 조금은 젊었을 땐 이 돈을 자식에게 써봤자 소용없다 여겼을 것이다. 은미가 자신에게 기댄 나머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거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영실은 그럴 수 없었을 거다. 나이 들어 죽음과 혼자서 마주해야 한다는 건 그 세대만이 알 수 있는 엄청난 공포일 테니 말이다. 노화에 잠식당한 영실에겐 공포와 맞설 유일한 수단이 그 5천만 원뿐인 거다. 이제 은미와 현진의 '저 5천만 원'과 영실의 '그 5천만 원'은 같은 돈이지만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고 말았다. 희생을 수반한 모성애와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
 
자신을 보살피던 존재가 자신이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전환될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난감해한다.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지만 물리법칙인 관성은 뜬금없게도 이곳까지 적용됨으로써 이전 잣대와 기대를 들이밀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나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쳤고, 나이를 앞서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단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우린 나이와 나란히 걸으면서 그의 옆모습만 볼 뿐, 그의 앞모습은 절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끝부분, 영실이 자신의 요양보호사였던 수경에게 보인 자기기만에 가까운 믿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현진은 수경이 돈을 훔쳤다고 의심한다. 영실은 현진에게 그 얘기를 듣고서 수경을 두둔하며 역정을 낸다. 그리고,
 
수경이 정말 돈을 가지고 갔을까? 영실은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다. 왜인지 그 애가 자신을 여기에 붙들어두려고 그런 것만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유력했다. 실버타운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나를 말리더니, 바보 같은 것. - <본문 중>
 
이건 뭔지는 모르겠으나 믿음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그게 무엇이기에 영실이 수경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 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난 지금 은미와 현진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바라본다. 그들의 나이가 내가 지나온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죽음을 더 가까이 마주하게 되면, 그땐 영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지금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영실의 고집스러움과 괴팍함이. 영실을 바라보는 은미와 현진의 실망하는 시선이. 그들의 해결되지 않을 갈등이.



<바우어의 정원>

저는 지난 삼 년 동안 세 번의 유산을 겪었습니다. -<본문 중>
 
배우란 직업은 주목과 관심을 받을 때만 의미가 있다. 배우의 내면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바탕으로서만 그렇지 그 자체로 중요하진 않다. 외부로 드러난 부분만으로 평가받는 가장 대표적인 직업인 셈이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다를까? 우린 타인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 판단한다. 물론 그 사람의 내면이 일부 반영되었겠으나 그 정도로 만족할 뿐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진 않는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세상이란 무대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일 수도 있겠다.
 
은화는 배우다. 늦깎이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지만 지난 3년간 임신과 유산을 세 번이나 겪으면서 자기 안으로 침전된 상태다. 그런 은화가 지금 모처럼 오디션을 받으러 간다. 여성으로서 겪었던 이야기를 독백으로 풀어내는 연극의 배역을 맡기 위해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이 글의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면의 상처를 고백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름을 밖으로 짜내야 하듯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앙금들도 발산시켜야 하는 건 분명하다. 고통을 나누고 누군가의 공감을 얻는다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일은 없으니까.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은화가 무명 시절 했던 드라마 치료 워크숍도 그런 방편의 일환일 것이다. 다만, 그 공감이 진실되어야 하고, 타인의 아픔을, 그 크기를 넘겨짚지 말아야 한다. 섣부른 위로는 마음의 문을 더 닫게 할 수도 있다.
 
실은 나 아까 속으로 선배 질투했어. 선배한테 아이가 있는 줄 알고…. 차 뒤에 붙은 스티커를 봤거든. -<본문 중>
 
그래서 은화는 오디션장에서 한 고백이 아닌, 그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 정림의 말에서 회복의 씨앗을 찾는다. 내면의 상처는 단순하지 않다. 원인만 해결된다면 끝일 거라 여기겠지만 그 또한 섣부른 오판이다. 은화가 배우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보자.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고 나온 은화는 크리스마스 풍경이 한창인 길거리에서 통쾌함이 아닌 비참함을 느낀다. 그 비참함의 원인은 자신 또한 그들과 똑같은 인물이 되었다는 모멸감에서 오지 않았을까?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던 은화의 심리는 직접 묘사되진 않았으나 미루어 보건대 정림과 다르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오디션이 끝나고 정림과 함께 있는 차 안에서 정림의 저 고백을 듣는 순간, 은화는 자신 내부에 깊숙이 숨어있던 커다란 상처와 마주한다. 동질감, 공감, 그리고 화해. 은화는 정림을 통해 은밀한 자아와 마주 섰고, 그로 인해 회복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렇게 믿어본다.
 
상처, 공감, 회복을 얘기하는 이 소설은 은화가 자신과 비슷한 괴롭힘을 당한 초원이라는 학생과 만나봐야겠단 결심하면서 마무리된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이 만남을 주저했던 은화의 모습과 비교하면 은화는 분명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모양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세상의 공감 능력은 여전히 떨어지고, 자기중심적이다. 관심을 가졌다가도 어쩔 줄 몰라 하고, 결과에 환호하나 그뿐이다. 정림이 했던 연극의 마지막은 상처 입은 자와 외부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리틀 프라이드>

오스틴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토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어요. 우린 그러니까, 전우 같은 거잖아요." 나는 '전우'라는 말에 다시 어안이 벙벙해져 커튼이 둘러진 병실 내의 다른 침대들과 창 너머의 맞은편 건물을 바라봤다. "아니요...... 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혀 달라요." -<본문 중>

무언가를 써볼까 하다 그만뒀다. 그러니까... 난 소설 속 토미(회사에서 부르는 영어 예명)와 같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없다. 내 삶은 내게 주어진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잠식당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온 탓에 태생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에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내 이해력을 뛰어넘는 수준일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내용을 끄적인다? 그들의 근본적 욕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다음에 뒤따르는 문제점들을 이야기한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오스틴의 저 말처럼 일부분만 붙잡고서 동질감을 호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싶다. 그러니 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그들 또한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존재임이 분명하므로, 그래서 그런 존재로서 바라보고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할 뿐이다. 지금으로선.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

작가 노트에서 쳇 베이커의 음악과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고백을 읽었다. 그리고 예술가와 개인 사이의 간극을 매개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다음 따라온 감정은 당혹함이었다. 뭐라도 써볼까 했는데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소설이 전달하려는 바가 너무 명확한가? 은유조차 비껴갈 수 없는 명확함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는 걸까? 뭘 써도 동어반복이나 설명이 될 거 같은 아득한 느낌에 어느 순간부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작가, 뭐지? 30대 이후로 무언가에 덤벼든 적이 없었는데 묘하게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소설이다.


꼬리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이 세대 간 갈등과 개인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인데 하필 그 둘이 처음 두 편의 단편이었다. 글이 길어지면서 다른 단편들 역시 따라 길어졌다.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보다 감상을 적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던 기묘한 상황. 그래서 감상도 둘로 나눠 올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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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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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근무시간에 담배 피우는 시간만 줄여도 일을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30대의 어느 시절, 태풍이 드물게 서울 시내 한복판을 훑고 지나가는 중이었다. 고층 건물 꼭대기에 달린 간판이 위태롭게 건들거리고, 바람에 부러진 가로수 토막이 길바닥을 사람 대신 누볐다. 태풍의 위력에 혀를 내두르던 나는, 그 순간 길 건너편 건물 귀퉁이에 몸을 숨기고 담배를 피우는 직장인들을 목격했다. 그 난리판 와중에! 물론 근무시간이었다. 책 제목을 보고서 자연스럽게 이 두 장면이 떠올랐다. 빈둥댐으로써 노동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리는 비효율의 사례들로.

     

그런데, 책에 나와 있는 이 문장들을 보자.

     

이 논문에서 케인스는 1930년까지의 추세에 근거해 “100년 내로 경제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거나 적어도 해결 방법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 2030년까지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이 될 것이며 그 시간조차 경제적이기보다는 인간적 필요를 반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 <본문 중>

     

인류가 한때 견뎌야 했던 고된 노동에서 빠져나왔냐고, 그리고 빠져나왔다면 자신의 환경을 처리하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느냐고 말이다. - <본문 중>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뭔가 방향이 달라 보이지 않나? 평균 노동시간 주 15시간. 인간적 필요. 자신을 발견할 방법. 피곤함에 찌든 현대의 직장인에겐 꿈같은 이야기다. 맞다. 이 책은 비효율의 책임을 근로자들에게 두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어째서 우리 평균 노동시간이 아직도 주30-60시간인지, 어째서 사람들은 그 근무시간 동안 집중하지 못하고 허우적대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우린 자신을 위해 일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캐묻는 책이다.

     

이번엔 나름 충실하게 책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 보겠다. 그 해답은 바로 관리직군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는 거. 이쯤에서 또 한 번의 본문 인용.

     

파킨슨의 법칙은... 일은 그것의 완수에 허용된 시간을 채우도록 늘어난다. - <본문 중>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인류는 엄청난 생산성의 향상을 마주했고, 그와 함께 노동을 계량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육체노동을 벗어나 대상을 관리하는 직업군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향상된 생산성에 대응할 만큼은 아니지만 이때 이후로 근무시간은 꾸준히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육체노동이 계량화된 것과 달리 관리직들의 업무는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 육체노동은 숨 막힐 정도로 효율성이 추구됐으나 관리직의 시간은 남아돌았다. 여기서 파킨슨의 법칙이 적용된다. 관리직들은 남는 시간을 위해 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관리하고, 그 관리를 관리하고, 그 관리를 또 관리하고. 문제는 늘어나는 그 관리가 효율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심지어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새로운 발명은 원래 일을 더 쉽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종종 온갖 종류의 새로운 절차와 새로운 형태의 감독,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요구했다. - <본문 중>

     

그렇다면 효율과 합리와 동떨어졌고, 필요하지도 않지만 만들어낸 그것. 그것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직장인들이 쉽게 공감할 만한 대상으론 너무나 많은 회의, 엄청난 양의 보고서와 문서들, 과도한 절차와 승인들이 있겠다. 그리고 하나 더. 모두가 공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책은 전략과 비전을 만드는 작업도 여기 포함했다. 구체적으론 거창한 슬로건이나 추상적인 브랜드 전략 같은 것들이 여기 해당한다. 구체적 실천 방안도 없고, 그저 홈페이지의 문구나 브랜드명만 바꾼다는 식의 보여주기 또는 모방하기(유행 따라 하기)가 전형적인 예다. 모두 비대해진 관리직들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바로 이런 것들 모두가 사람들을 가짜 노동에 빠져있게 만든다.

     

혹시 여기까지 읽고서 지금 고개를 끄덕였나? (그런 적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도 가짜 노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지한 상태임이 분명하다. 그럼 하나만 묻자? 그 가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봤는가? 책에 따르면, 일이 없을 땐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라고 한다. 주변 눈치 보지 말고.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거 누구나 잘 안다.

     

집에 간다는 건 바쁘지 않다는 뜻이고 바쁘지 않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 <본문 중>

     

이 문장만 보면 이게 뭔가 싶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회사에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필수 인력이 아닌 잉여란 의미이고 그건 그 사람에게 어떤 불이익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일이라고. 여기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왜 가짜 노동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단순하게는 저 문장이 내포하듯 잉여로 분류될까 봐. 그리고 또 하나는...

     

백수로 길게 살아본 적이 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어느 시점부터 사람 만나는 걸 꺼리기 시작했다. 돈이 없으니까? 맞다. 자존심 때문에? 그것도 맞다. 그런데 그 둘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명백히 할 일이 적을 때도 바쁘다고 주장하는가? 조너선 거셔니에 따르면, 자유 시간을 특권으로 간주하던 시대가 끝나고 일에서 특권이 나오는 시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 <본문 중>

     

우리는 일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시대를 산다. 일이 곧 나를 말해주는 시대. 그런 시공간에서 잉여로 분류되는 것도 참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 일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행위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니요’에 대한 두려움은 ‘네’에 대한 갈망으로 대체됐다. 비판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남들과 연결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긍정성의 문화로 향하는 길을 닦아놓은 이 같은 변화는 이제 SNS의 ‘좋아요’로 표현된다. 긍정적이 된다는 것은 또한 남들에게 관심받는 한 방법이 되었다. - <본문 중>

     

이런 세상에서 가짜 노동을 부정하는 '아니요'를 외쳤다간 그 사람은 외톨이가 되는 것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이 책은 다양한 실제 사례를 들면서 가짜 노동의 여러 유형을 보여준다. 내가 지금껏 써 내려온 글은 그중 일부만 끌어왔고, 그 속에서 하나의 답과 하나의 질문을 끄집어냈다. 그 답은 정확히 그 질문에 상응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이 전혀 상관없지도 않다. 그 연관성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가짜 노동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책을 읽어보면 된다. 내 노동은 딱 여기까지. 시간이 많다고 책 전체를 요약해 줄 만큼 친절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다만,

     

성취 과정이 가치 있다는 관념은 끈기 있게 이어졌다. 서구, 특히 근대에 칭찬의 대상이 된 것은 최종 결과물뿐 아니라 작업 과정에 투입된 노력 그 자체였다. - <본문 중>

     

우리가 가짜 노동에서 벗어나는 건 전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앞으로 AI가 불러올 생산성 향상이 '작업 과정에 투입될 노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복잡해질 거 같거든. 혼돈은 차라리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앞서 언급했던 파킨슨의 법칙은 여전히 작동될 것이고, AI가 불러올 효율성마저 그것에 삼켜진다면 우린 변함없이 가짜 노동에 휘둘릴 거다.

     

마지막으로 그냥 인상 깊었던 문장으로 끝을 내야겠다.

     

우리가 우선순위를 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안 돼’라든지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더 이상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 <본문 중>

     

내 글은 이걸로 충분하다. 오랜만에 책 내용에 충실한 리뷰어 역할을 했다.


꼬리말) 그동안 AI를 거의 사용하지 않다 최근 들어 그 쓰임새를 모색 중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 AI와 상호작용을 거쳐 완성되었다. 처음 썼던 글을 AI에게 보여주면서 평가와 보완을 부탁했고, 두어 가지 추가할 부분과 한가지 삭제할 부분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 중 추가할 부분 하나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여서 글을 보강했다. 처음엔 글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 뺐던 내용이었는데 AI에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문장을 대신 써 달라거나 구조를 설계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내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이미 꽤 보여줬던 터라 내가 글을 쓰는 스타일, 사고방식, 내용을 설계하는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여서 뜬금없는 얘기를 하지는 않더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 이 글을 처음 쓸 때부터 제목을 AI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꽤 많은 제목을 만들어 보여줬는데 그중 하나를 보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글의 내용과 기가 막히게 연결되는 문장이기도 했고, 과거에 내가 썼던 글(AI에게 보여줬던 글) 중 하나에서 시도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학습했구나... 그 제목이 지금 이 포스팅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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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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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 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 별 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지.

(책 본문 중에서)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 남들은 절대 알지 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안으며. 중요한 말일수록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책 본문 중에서)

 

+


저 좀 나갔다 올게요. 여기 있음 미처버릴 거 같아. 내일 아침에 들어올 거니까 찾지 마세요.

늦은 밤, 한바탕 난리굿을 피운 후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도망친 건 아니지. 난리굿의 원인을 내보내고 적어도 내일 낮까진 오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나온 거니까. 그렇게 위안하면서 밤거리에 섰다. 어딜 가야 하나. 떠오른 곳은 딱 하나뿐.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질문부터 한다.

나 오늘 밤 하루만 너 있는 곳에서 자도 될까?

그래. 근데 나 내일 시험이라 밤샐 건데 괜찮겠어?

. 상관없어.

지금 올 거지? 기다릴게.

초등학교 5학년부터 친구였던 녀석.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대답해 준 녀석에게 고마울 뿐이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도망칠 곳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도망친 거 맞네.

 

20대가 되면 달라질 거란 생각은 한 적 없었다. 어찌해서 닥친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어차피 그 문제의 뿌리는 그대로일 테니까. 나는 나인데, 나는 내 이름 석 자로 세상에 존재하는데, 왜 나의 시간은 다른 사람에 의해 등 떠밀리듯 흘러가는 걸까? 지금처럼 내 두 발로 땅을 걷듯이 내 시간도 내 의지대로 흘려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늦은 밤 주고받은 문자를 다시 읽어보자, 한숨만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지? 어이없거나 하진 않았다. 오랜만이긴 하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긴 하지만 너무나 익숙했으니까.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불살라버렸으니까. 그냥, 두려웠다. 하나씩 하나씩 과거의 흔적들이 돌아오고 있었거든. 잠을 설치고 숨이 막히고 시간이 떠내려갔다. 또다시. 20대의 그 시절처럼.

 

내가 장사를 그만둔다면 당연히 그건 돈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 일이란 정말 모를 일이다. 결국 돈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그만둘 결심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과거와 달리 지금은 선택이 가능하다는 거. 내가 끝을 낼 수 있다는 거. 과거의 유행이 재유행하듯 과거의 유령이 불현듯 나를 덮쳤다. 그 유령이 얼마나 치가 떨리게 대단했던지 20년 가까이 해왔던 생업을 때려치우겠다고 결심하는데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


50대인 내가 20대인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너무 발버둥 치지 마. 앞으로 20년은 그렇게 살아야 하거든. 너무 미워하지도 마. 20년 후 넌 서로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단 걸 이해하게 돼. 너무 자책하지도 마. 지금의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해결 불가능한 일이니까. 너에게 하룻밤을 내어줬던 그 친구는 그 후로도 쭉 네 곁에 있으면서 나이 들어감을 투덜댈 거야. 고양이도 한 마리 생겨. 너를 귀찮게 하겠지만 너에게 습관처럼 찾아들던 악몽을 완전히 떨쳐내게 해줄 거야. 네가 중학생 때 너에게 신비로움과 웃음을 선사했던 아기들은 훌쩍 커서 따뜻함과 강인함으로 너를 놀라게 할 거야. 그렇게 친구들과 고양이와 가족과 함께 넌 너의 시간을 갖게 될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도 마. 언젠간 오롯이 너의 두 발로, 너의 의지대로 너의 시간을 걸어갈 거니까.

 

÷


책의 형식을 빌려 내 얘기를 적어봤다.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 인물의 내면에 동화되고 공감하는 걸 넘어서서 언제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만의 경험일 수도 있겠으나 그래서 참으로 고마운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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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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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연습

 

진실이 현재의 삶을 뒤흔들고 거짓이 다가올 삶의 기반이 된다. 완벽한 소통이 나를 무너뜨리고 불완전한 소통이 나를 위로한다. 삶에 대해 우린 정말 뭐 하나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걸까?

 

폴링인폴

 

따지고 보면 완벽한 소통만 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삶은 평탄할 거다. 하지만 짝사랑이 있고, 세대 차이가 있고, 성장 배경에 따른 가치관 차이가 있고, 또 있고... 이렇듯 수많은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삶은 진부하고 뻔하지만, 반짝거리며 입체적인 무엇인가로 존재하는 건지도.

 

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 짓네

 

남의 마음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때론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주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원하고 원망하기도 한다.

 

감자의 실종

 

타인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단순히 소통의 문제라면 어떻게든 오해의 소지를 없앨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가치관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해는커녕 다름만 도드라질 뿐이다. 용기를 내서 도움을 청해본들 진실한 손길을 뻗어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무관심해서? 아니. 손길을 뻗는 그 누군가 역시 자신의 삶이 부서질 수 있다는 걸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 도둑

 

부족했던 배려와 질투와 시기가 불러온 오해. 자전거의 진짜 주인이 도둑으로 오해받게 되는, 룸메이트들의 자그마한 소동. 하지만 언제든 오해받을 수 있는 커다란 세상.

 

밤의 수족관

 

누군가는 궁금해한다. 물고기의 기억력이 3초만 지속된다면,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슬픔이나 아픔을 곧 망각할 수 있기에 안심할까? 아니면 행복한 순간을 간직하지 못하기에 불안해할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존재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진실조차도.

 

까마귀들이 있는 나무

 

주변과 단절을 느낄 때가 있다. 국적이나 지역 같은 지리적 차이에서 생기기도 하고, 돈이나 신분 같은 계층적 차이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많다. 신념, 가치관, 문화부터 사소하게는 취향에 이르기까지. 그중 최악은 사회적 약자가 편견 때문에 스스로 고립되는 단절일 거라 생각해본다.

 

꽃피는 밤이 오면

 

살다 보면 하고 싶었지만, 해야만 했지만 그러지 못한 말들이 있다. 사는 게 팍팍하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어서. 때를 놓친 말은 공허하게 삶을 잠식하고, 잠식당한 삶은 과거에 가라앉아 썩은 내를 풍긴다. 우린 그렇게 말을 많이 하면서, 모진 말은 서슴지 않고 내뱉으면서 어째서 타인을 감싸안는 말은 제때 하지 못하는 걸까?

 

유령이 출몰할 때

 

발전을 위해, 개발을 위해, 출세를 위해 우린 많은 것을 외면하며 산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사람들이 욕망으로 비대해질수록 세상은 여러모로 결핍되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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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민음 한국사 : 17세기, 대동의 길 - 조선 3 민음 한국사 3
문중양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2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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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그러니까 1980년대 초반,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셨던 큰아버지가 계시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그 어려움은 큰아버지가 가장 어른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켜야 할 무언가를 많이 알고 계시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 음식은 어디에 놓아야 하고, 순서는 이러이러하며, 누군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 집안의 누구도 다 알지 못하는 예법들을 완벽하게 꿰뚫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 가끔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럴 때면 문득 궁금해지곤 했다. 도대체 이 까다로운 예법들, 때론 숨 막힐 것 같은 이 형식들은 누가 만들어놓은 걸까?

 

16세기 두 번의 왜란으로 초토화된 조선은 그 이후도 순탄하지 못했다. 17세기,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새 왕을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있었고, 청나라에 의한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물리적 피해뿐만 아니라 오랑캐에게 굴복했다는 정신적 피해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들은 제도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다잡아야 했다. 어쩌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당시 지식인들은 기존 질서를 강화하는 쪽을 택한다. 결국 주자학은 17세기 들어 원칙과 학문을 넘어 이념이자 종교로서 조선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특히 이전과 달리 예학을 강조한 학풍은 요즘 시각에서 볼 때 상상할 수 없을 현상을 만들어냈다. 요즘의 정당 개념과는 다르지만, 당시에는 지역과 학풍, 정책 지향에 따른 붕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핵심이었던 예학에 따라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것이 왕위의 정통성과 연관이 될 때 피바람이 불었다는 점이다. 누군가 죽었을 때 상복을 몇 년 입는지에 대한 문제로 왕을 포함한 조정 신료들이 몇 년간 논쟁하고 결과에 따라 사람이 죽어 나갈 수 있다는 거.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들로선 그 상황을 바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 더. 16세기 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친 선조, 17세기 초중반 두 번의 호란으로 청의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인조. 이 둘로 인해 왕의 위신은 저 밑바닥에 처박혔다. 그런데 호란 이후 30여 년이 지난 숙종 시기, 조선의 왕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어느 정도였냐면 예학에 관한 논쟁에서 숙종 개인의 판단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따라 잘못된 주장을 펼쳤던 붕당은 정권 핵심에서 통째로 밀려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왕권이 이처럼 강력하게 된 이유는 이 책에 직접 언급된 부분도 있고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에 언급된 이유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인조 다음 왕들인 효종, 현종, 숙종이 모두 적장자였다는 점이다> 인조 다음 왕들인 효종부터 그의 큰아들 현종, 현종의 큰아들 숙종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적장자 계승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효종은 둘째 아들). 정실부인의 첫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얘기인데 <이게 바로 주자학에서 가장 이상적이라 보는> 이게 바로 예학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왕위 계승 형태다. (참고로 주자학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왕위 계승은 핏줄이나 태생에 상관없이 능력자에게 양위하는 형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방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서 예학에서 규정한 장자 상속의 원칙을 왕실에도 적용한다.) 다시 말해 존재 자체에서 정통성이 이미 확보된 상태이고, 그 정통성이 3대째 이어지면서 막강한 왕권을 수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단다. 그러니까 주자학은 그 시대의 헌법이자 법률이고, 종교 교리였으며 도덕이었다.

 

21세기 들어 큰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어렸을 땐 큰아버지의 모습이 지독히도 엄격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유연한 태도를 갖추셨던 걸로 보인다. 예학이 전성기를 누리던 17세기로부터 400여 년이 흘렀으니 그 완고함이 가문에 따라 또는 현실에 맞춰 많이 변형되고 누그러졌음이 분명하다. 난 지금도 부모님 제사를 지낸다. 하지만 제사음식은 주문하고 상을 차릴 때도 대충 위치를 잡는다. 아마 매년 음식의 자리가 다를 수도 있다. 제문을 읽지도 않을뿐더러 술 따르고 몇 번 절하고 끝마친다. 장담하건대 내가 죽은 후 내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제사란 행위 자체도 수십 년 후면 대부분 가정에서 사라질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하지만 지우개로 지우듯이 이전 흔적이 말끔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덧칠하거나 덧붙임으로써 고쳐 나간다. 그래서 그 흔적은 자랑스러운 유산이 되거나 없애고 싶은 상처가 된다. 주자학이 전해지고 발전하는 긴 흐름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세계 유일 유학의 나라임을 자처하며 실생활까지 엄격하게 예학을 적용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보기엔 지나치게 형식적이라 굴레에 가깝게 보일 정도로.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그 시대의 치열한 삶에 들어가 본 적 없는 우리가 그렇게 쉽고 일방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린 편을 갈라 상대방을 배제한 적이 없으며, 무엇인가에 집착해 본 적이 없던가? 몇백 년이 지나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남겨놓은 흔적을 생뚱맞게 바라보며 욕할 거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 책 제목에 '대동의 길'이란 말이 있다. 이 시기에 지역에 따라 순차적으로 세제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그게 대동법이다. 대략 그렇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대동법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주자학과 그에 따른 정국 변화가 너무너무 인상 깊었던 나머지. 궁금하신 분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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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27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북 도서라는 게 좀 아쉽네요. 이북의 경우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더라구요.

대굴대굴 2025-12-28 10:30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종이책으로 읽는 걸 추천합니다. 그림이나 사진을 설명해놓은 글이 e북으론 잘 보이질 않아요.

그나저나 이 서재 첫 댓글인거 같은데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하필 제 글에 틀린 부분이 있어서 고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