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굽는 가게로 초대합니다, 좋은 일은 언제 시작될까>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좋은 일은 언제 시작될까?
에이브러햄 J. 트워스키 지음, 최한림 옮김, 찰스 M.슐츠 그림 / 미래사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기 전, [피너츠]란 만화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어린 시절에 어디선가 많이 봤었을 것이고, 또한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만화의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이 만화는 나에겐 그리 가까운 대상이 아니었고,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보다 인기가 없었다. 아마도 화려한 그림과 서사를 지니고 있어야 관심이 있는 내 개인적 취향으로 인해 [피너츠]란 만화는 나에겐 멀리만 있었다. 그래서 [When do the good things start?]란 책은 각별하다. 이 책을 통해 [피너츠]가 담고 있는 사고와 상징성에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책은 많은 여백을 담고 있다. 한 단락이라고 할 수 없는 문장으로만 계속 이어진 이 책은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많은 여운을 담겨주고 있다. 또한 매 쪽마다 실려있는 만화들은 읽는 내내 지루함을 덜어주듯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무척 인상 깊은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깊은 철학이 담겨 있고, 인간의 본성을 담은 내용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인간적인 부분은 ‘찰스 M. 슐츠’란 만화작가를 왜 저자가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언급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신과 의사로서 저자는 랍비이기도 하다. 아마도 유태인이인 것 같고 유대교를 믿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런 그는 만화라는 소재를 통해 무척 독특한 방식으로 정신과 치료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피너츠]가 없었다면 그의 시도는 결코 완벽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피너츠]를 통해 볼 수 있는 인간적인 특성과 의사이기에 관심이 있을 허약성은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를 이끌어가는 소재들이다.
  만화에서 표현되는 인간은 허약하기 그지 없다. 근대문명이 도시와 함께 성장하면서 탄생한 도시인은 도시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내적, 심리적 고통을 갖고 있다. 허약함, 자신감 부족, 위선, 자책감, 그리고 우울 등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내적 고통을 현재도 인간은 겪고 있다. 이런 질병들이 [피너츠]란 만화엔 풍부한 예로 구체화된다. 만화는 잔혹하리만치 인간의 약한 면들을 절묘하게 파고들고 그것을 즐겁지만 씁쓸한 마지막을 만들면서 짧은 만화를 끝내고 나서의 어딘지 모를 문제의식을 일깨우게 한다. 만화는 쉽지도 않지만 마냥 웃게만 하지 않은 것이다.
  큰 화면을 통해 매 쪽을 차지하는 만화와 단락이라고 할 수 없이 끊어진 채로 서술되는 문장들은 풍부한 여백을 만들고 그러면서 마치 공원의 어느 벤치에 앉아서 풍부한 사색을 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런 내용에 저자의 감수성 있는 뛰어난 비유와 글솜씨는 내용을 표류 없이 떠돌지 않도록 인도한다.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상징과 만화는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움과 사색이란 매우 모순적인 구성임에도 전혀 그것을 못 느끼도록 했다. 저자의 배려가 무척 빛난 부분이다.
  책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허약함, 모든 이들의 가슴에 다가오는 부분일 것이다. 어느 순간 다 아는 주제이지 해결방법이긴 하지만, 현재의 인간들은 그런 것을 자주 기억하지 못하며, 언제나 새로운 날의 시작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듯, 과거에 대한 망각 속에 반성을 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당하는 피해를 언제나 겪으면서도 말이다. 인간의 한계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바로 이 때를 이 책은 경고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자책이나 반성, 혹은 자괴감 등으로 더 큰 상처를 당하지 말도록 배려 깊은 충고를 잊지 않는다. 책 전체가 충고이겠지만 한 글 한 글 읽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후회는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이며, 역시나 책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두껍거나 무겁지 않고, 또한 촘촘하게 쓰인 책이 아니면서도 책이 감당하고 있는 무게감을 크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할 시간을 갖게 된다. 아마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가치이리라. 그것, 이후엔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마 이 책에서 쓰이지 않았지만 분명 저자가 내게 이야기하는 충고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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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매싱>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스매싱 - 아이디어가 막힐 때 돌파하는 힘
정상수 글.그림 / 해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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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사는 지혜랄까? 아니면 세상의 적나라한 면을 드러낸 것이랄까? 책 저자는 광고업계종사자였단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광고회사라는 좁은 분야를 일반화시키면 모든 이들이 경험하는 회사라는 냉혹한 정글이 느껴진다. 즉, 이 책엔 광고회사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닌 직장인들이라면 다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내음이 난다. 아마 치열함이 예외인 곳은 없나 보다. 그래서 ‘아이디어가 막힐 때 돌파하는 힘’이란 부재는 무척 인상 깊었다. 힘, 그 단어가 가슴 깊게 다가왔다.
  현실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현장감이 풍부하다. 광고 세계에서의 긴장감이 다양한 이 책에 상존한다. 이 책의 주요무대는 광고회사이며, 그곳에서 상당시간을 보낸 현직 교수가 썼다. 자본주의의 꽃이자, 현대사회의 매력을 자아내는 광고는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책 속에선 그렇게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지 못하다. 그래서 현장감이 살아있고 또한 풍부하다.
  공격적이다. 착한 것보다 미치고 독해지란 표현이 이 책엔 넘친다. 아마도 상대를 꺾어야 하는 직장인인 입장이라 현장감 속에 묻어있는 공격성이 표현에서도 느껴지도록 했나 보다. 이런 표현, 직장인이라면 모두 공감하고, 그것을 따르지 못했을 경우를 살다 보면 확실히 경험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리이겠지만 경쟁상대의 존재는 불멸의 원칙이다. 그래서 상대와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은 예술을 겸하고 있는 광고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광고에서의 화면과 디자인에서 엿볼 수 있는 아름다움은 그래서 냉혹하게만 느껴졌다. 저자의 표현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철두철미한 경쟁본능은 결코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에 대한 거친 분석과 함께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이 돋보인다. 단순히 무엇인가를 사고 파는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이 통찰력이 깊이 배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딘지 모를 짙은 회의와 소외의식도 느낄 수 있다. 경쟁해야만 하는 인간들 속에서 살아야 하는 평범한 인간의 슬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책은 희망을 담고 있다. 거친 표현과 진솔한 마음 속에서 힘든 사회생활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살아가고자 하는 의욕도 느낄 수 있다. 생명력이 강하기에 거칠고 공격적인 표현이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한 인간이 아닌 행복한 인생을 위한 의욕을 느낄 수 있고 그 점이 이 책의 생명력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강한 호흡 속에서 느껴지면서도 의욕을 북돋는 강한 힘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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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이론 - Parallel Lif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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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똑 같은 인생의 반복,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많은 인생 중에 비슷하거나, 아니면 정말 똑 같은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소위 ‘평행이론’이란 이론이 화제를 끄는 이유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도 믿기 힘들 뿐만 아니라 확률적으로도 믿기 힘든 일로 판단한다.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런 믿기 힘든 이론을 갖고 이론의 이름을 딴 [평행이론]은 매우 모험적인 시도를 한다. 실현되기 힘든 것을 영화화하는 것, 분명 영화의 뒤에 있는 주제의식과 고민, 그리고 현대 사회에 대한 성찰은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큰 인상을 남길 것임이 확실하다.
  영화는 똑 같은 인생의 반복을 갖고 있는 어느 두 젊은 판사의 인생을 보여준다. 그런데 똑 같은 인생의 실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반복해서 신기해서일까? 영화 [평행이론]은 극단적인 설정을 갖고 그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관객의 가슴을 슬프게 만든다.
  같은 나이에 같은 과정을 통해 같은 위치는 물론 같은 혼란을 겪은 두 명의 판사의 인생의 형상화를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신기한 인생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더욱 본질적인 현실의 인간관계를 통찰력 있게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 없는 인간의 불운한 속성을 기이한 한 편의 서사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이다. 30년 차이를 두고 같은 시간에 같은 날짜에 유사한 인간들의 인생 반복에서 보이는 불변하는 불행한 인간관계를 통해 인간의 불행을 보여주고 있다. 같다고 할 수는 없는 인생이지만 비슷한 불운을 겪고 있는 인간사의 불행, 바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슬픈 세계관인 것이다. 

  최연소의 부장판사가 된 김석현(지진희), 그 어떤 불행도 그의 인생에 끼여들 여지가 없어 보였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살았다. 그런 관점 속에서 맺고 있는 그의 주변의 사회와 인간관계는 굳건하고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믿음직스럽다고 믿었고, 자신의 사무관은 자신의 충실한 아랫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장인, 그의 상사, 그리고 그의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과 탄탄한 인간관계를 형성, 자신을 믿어주었고, 또한 그런 믿음 속에 살았다. 그러나 기이하지만 그에겐 필연적인 인연으로 만난 평행이론으로 그가 생각한 모든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서사가 진행되면서, 최연소 부장판사 석현은 결코 믿을 수 없는 인간들 사이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 와중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그의 인간적 매력에 기인해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을 소비하기 위해 그들이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는 스스로 믿었던 모든 것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확인하고 자신을 빼곤 믿을 수 없는 인물들로 가득한 현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판결에 따른 보복행위를 통해 과거의 판결을 돌아보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었던 사실에 경악하게 되고 자책하게 된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은 판사로서 그에겐 너무 가혹한 결과물인 것이다.
  판사,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사회적 정의를 수호하는 사회의 버팀목이다. 판사는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사회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사의 확신은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소신이다. 그러나 김석현 판사는 무너졌다. 그것은 마치 현실에서의 정의가 무너지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는 순간처럼 보였다. 또한 자신이 알려고 하는 진실에 다가가면서 만나게 되는 인간관계의 허약함은 그를 점차 나락으로 빠뜨리고, 가장 자신이 믿었지만 사람들의 위선과 배신이 폭로되면서 그는 인간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의 서글픔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핏줄이란 것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고통은 가장 극적이다. 영화는 그런 비극을 넘어 더욱 극단적인 비극을 향해 마지막으로 가고 있었다. 결코 변하지 않은 인간의 불행은 그 끝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믿었던, 그리고 믿고 싶었던 것 하나하나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신도 믿지 못한 상황을 상기하게 하는 비극이야말로 이 영화의 압권인 것 같다. 반전을 위한 것이겠지만 그 반전 뒤에 있는 인간의 허약함이 서글프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영화의 비극성은 능력 있는 판사의 몰락이 아니다. 그것이 30년 전 이미 발생했다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런 반복은 더 중요한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그것은 같은 시간대와 같은 날짜의 반복을 넘어 시간과 날짜가 다르지만 유사한 사건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반복된다는 점이다. 신뢰했던 사람들의 배신은 일상의 다반사이며,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족 구성원의 배신 역시 그다지 진귀한 경험도 아니다. 영화에서의 평행이론은 현실적이라 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극단적 현실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면 인간사에선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벌어진 인간의 불행이 바로 일반적인 것이다. 특히 인간은 허약한 인간관계의 위험함을 알면서도 그런 위험을 도피하지 못하고 재생반복만 하도록 하는 인간의 본질적 탐욕을 이 영화는 공포스럽고 신비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이 영화는 매력적이다. 평행이론의 극단적 설정을 넘어 인간관계의 허약함이 무한히 반복되고 있으며, 또한 순서와 방법, 그리고 인물의 차이야 있겠지만 그런 상황의 유사성은 언제나 반복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디어에서 들려오거나 보여주는 정보들엔 그런 비극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화는 그것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은 유사성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무엇보다 파멸의 순간으로 갈 수밖에 없으면서도 즐거움과 탐욕이란 마약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인간사의 비극성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탐욕과 기분으로 인해 파멸하는 인간군상에 대해, 인간은 얼마나 생각하며 사는지, 그리고 과연 해결할 의지는 있는지, 영화를 보면서 성찰하게 됐다.
  지진희의 원숙한 연기력은 그의 연기가 점차 물이 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감 있는 매력적인 판사에서 어느덧 손과 옷에 피를 튀기면서 인간 내면의 파멸을 경험하는 판사의 역할을 무척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마지막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현실로 밀리면서 고뇌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가장 잘 형상화하고 있었다. 과연 지진희임을 확인케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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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0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이군요. 볼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던 영화인데
봐야겠어요. 리뷰 감사합니다.^^

novio 2010-03-05 01:57   좋아요 0 | URL
전 무척 즐겁게 봤습니다. 꼭 같은 경험을 공유하셨으면 합니다.

Seong 2010-03-1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다고 할 수는 없는 인생이지만 비슷한 불운을 겪고 있는 인간사의 불행, 바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슬픈 세계관인 것이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novio 2010-03-11 12:19   좋아요 0 | URL
공포영화가 귀신이 나오거나 피가 낭자한 것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어쩌면 가장 무서운 영화 같았습니다. 엉망인 글,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MIJI - The Challenge
미지 (MIJI 未知) 연주 / Kakao Entertainment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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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악의 대중화, 언제부터인가 한국음악의 당면과제이자 목표가 됐다. 서양음악이 범람하면서 어느 사이에 비주류로 전락한 국악은 5000년 역사에서 자리매김한 그 자리를 서양문화가 들어온 근 100년도 안 되는 시간에 그렇게 절치부심하고 있다. 이런 국악에 새로운 기운을 일깨우기 위해 국악을 전공한 이들의 많은 땀과 열망이 가세하고 있다. ‘미지’ 역시 그런 이들에 끼어 있다.
  국악의 대중화가 무척 중요하다. [K-new]의 형태는 서구적이다. 악기가 국악이란 것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러나 국악에서 느끼는 한국적 미를 느낄 수 있기에 크로스 오버와 같은 효과를 지니면서 다양한 음악과 바이브레이션을 들려주는 절묘한 가야금 소리와 대금 소리들은 서구적인 취향의 음악에서도 진가를 발휘하며 대중성도 아울러 갖췄다. 한국형 음악의 슬기로움을 잘 표현한 음악이다. [흐노니]는 대중성을 높인 음악이다. 보컬과 가야금의 매력적인 조응은 수준 높은 발라드를 듣는 느낌이다. 특히 음의 애절한 정서를 높이는 부분에서의 국악의 향기로움을 잘 느낄 수 있다. 창에서 느낄 수 있는 음감 역시 멋지다.
  국악을 단순히 서양음악 악기들 사이에 위치하는 것만으로 과연 국악의 목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서양음악이 대세라면 국악은 당연히 그런 류의 음악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지’의 도전은 반갑다. 국악기로 해외음악의 느낌을 재현하려는 점이다. 어색하지만 그래도 한국적 질감과 서양의 화려함이 절묘하게 결합됐다. 특히 Track 8인 [Vivid Rainbow]에서 서양악기의 기타를 대신한 가야금 연주와 트럼펫을 대신한 대금과 피리의 연주는 색다른 시도이면서도 서양음악의 음악적 흥취를 잃지 않으면서도 국악의 매력을 결합시킨 의미 있는 노래이다. 또한 Tango의 리듬을 국악으로 표현한 Track 9의 [Romantic Tango] 역시 비올라의 격한 리듬을 대금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한국 악기의 새로운 일면을 보여줬다. 어떤 점에선 더욱 탱고와 같은 느낌을 주는 비장미를 국악을 통해 만들어 냈다는 점은 분명 주시해야만 할 내용이다.
  마지막 곡인 [군밤타령]은 정겨운 한국의 흥취를 느끼게 하면서도 서양적 구성과 음률을 결합시킴으로써 또 다른 느낌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소소한 군밤타령이 웅장한 스케일로 변신했음은 물론, 가야금의 전통적 음색뿐만 아니라 하프와 서구의 악기들의 뒷받침을 통해 보다 웅장한 스케일로 변신한 것은 무척 인상 깊은 시도다.
  미지란 여성그룹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음악그룹이다. 다만 그들이 실험성만을 얻지 말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국악의 대중성을 이뤘으면 한다. 분명 그들의 미래를 위해 후크송과의 강한 결합도 시도해야 한다. 잠시나마 ‘티아라’가 [Bo Peep Bo Peep] 송에 국악을 첨가했던 작업이 있었지만 단순한 실험에 국한될 뿐이다. 보다 우리 곁에, 그리고 보다 가까이 국악과 서양음악의 결합을 들었으면 한다. 미지의 작업, 그래서 기다려지고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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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잭슨과 번개도둑 - Percy Jackson and the Lightning Thief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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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동화다. 그러나 동화 같은 구성과 내용을 한 꺼풀 벗기면 동화 속에 감춰진 현실세계가 드러난다. 동시에 이 영화, 10대를 위한 영화다. 미국의 10대들의 불만과 불안, 그리고 갈망을 담은 내용을 통해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세상으로 나가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못한 10대들의 인간적 고뇌가 이 영화에 물씬 풍긴다. 미국의 10대의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 한국의 10대도 느껴지는 그런 상징들로 가득하다. 경제적 고충이 심화되면서 깨지기 시작한 가족의 유대는 편모슬하의 10대를 양산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인간적 고민은 더욱 심화된다. 특히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내적인 Trauma는 그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고민덩어리다. 그래서일까? 이 동화 같은 영화 속엔 10대의 위기 의식과 비현실적인 욕망이 표출된다. 주요 관객의 요구에 대한 당연한 감정노동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저려 왔다. 그들의 고민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해결은 결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한계를 넘는 것들이었고, 단지 극장이란 암실에서나마 위로를 받을 뿐이었다.
  10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것은 주인공 Percy Jackson(Logan Lerman)이다. 10대의 어느 학교에 다닐 성 싶은 이 소년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홀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다. Percy는 누군가의 자랑스런 아들로 자리매김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은 물론, 그의 앞에 있는 현실은 잔인할 뿐이다. 이런 현실적인 바탕 위에 영화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그에게 제시해줌으로써 그의 멋지고 새로운 인생을 실현시켜준다. 그것도 신화의 세계로만 구성된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과의 연결을 통해서 말이다. 비록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영화가 만들어 준 진실을 알기 전까지 그는 어느 Loser 집안의 자식일 뿐이며, 그의 아버지는 의붓아버지로서, 그의 행실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남일 뿐이다. 그런 불행 속에 있는 Percy에게 그리스 신화로 채색된, 영화가 제공한 환상의 세계를 통해 그는 영웅으로 탈바꿈한다. 마치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 앞에 아버지가 걸림돌로 남아 있다. 

  아버지, 언제부터인가 가족 구성원들 중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게 된 가족 구성원이다. 세계 문학은 물론 한국문학에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로서, 아버지는 가족의 화목을 깨거나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상징으로 언제나 묘사된다. 가부장적이란 표현은 집안의 사회,경제적 책임을 지는 굳건한 토대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즉 부정적인 대상을 상징하기 시작했다. ‘서경석’의 표현처럼 ‘긍정적 부성’의 부재라고까지 표현된 근대 이후의 아버지의 위상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다. ‘기러기 아빠’도 존재하지만 그런 희생적인 내용보다 신경숙은 물론 많은 여성작가들조차도 공포스럽고 권위적이고 무능하기까지 한 존재로만 묘사한다. 이런 현상이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영화 역시 이런 분위기에 편승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우아한 세계’나 ‘즐거운 인생’과 같은 아버지의 입장을 대변한 영화도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영화에서 아버지는 ‘똥파리’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갈등의 원천으로서 언제나 부정적으로 기억될 뿐이다. 아버지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가장 먼저 개선되어야 할 가족 구성원일 뿐이다. 이런 아버지가 이 영화에도 역시 존재한다. 그것도 비겁한 모습으로 말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가장 강력한 파수꾼이다. 아버지란 존재가 붕괴하면 가족 전체의 안녕이 무너진다는 점은 이 영화에서도 간헐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Percy의 가정적인 위기와 아버지의 부재를 연결시키면서 아버지에 대한 Percy의 분노와 미움은 이 영화의 보이지 않은 핵심 축이자, 미국 청소년들이 현재의 불운한 상황을 막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자신의 경제적, 그리고 정신적 고충에 대한 버팀목이 없는 10대에게 좋은 아버지는 갈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자 갈망의 대상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Percy는 현대판 남자 신데렐라이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안 순간 그는 강한 자이자, 책임 있는 행동을 아는 청소년으로 성장한다. 기이하게도 그 시점이 바로 자신도 아버지가 있으며, 그 아버지는 대단한 신이란 사실을 아는 순간이었고, 어린 학생에 대한 대우도 크게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번개도둑이란 오명을 썼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탄생 신화에 의해 백조로 거듭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 없는 불운한 청소년의 인생이 순식간에 재벌 아들로 변하는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이 점에서 물론 영화를 보면서 현실의 불우한 자신을 저주하며 새롭게 권력 있고 돈 많은 멋진 왕자와 공주를 꿈꾸는 수많은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멋진 Fantasy를 제공하는 시점이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난 아버지의 위상은 자식의 인생을 화려하게 해줄 수 있는지 아니면 Loser의 인생을 대물림 시킬 수밖에 없을 만큼 무능한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확실히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Fantasy다. 물을 통해 조화를 부리는 모습은 한국의 홍길동이나 전우치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류의 Fantasy는 세계 어디에서나 있으며, 전설이든 설화든, 아니면 민담이든 하루 노고에 지친 어느 불쌍한 인생들에게 잠시나마 활력을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영화 역시 그와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영화 뒤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청소년의 갈망은 사실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사회적 Loser들이 양산되는 이 시점에서 위기에 몰린 청소년들이 자신의 희망을 그래도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공교롭게도 신자유주의로 인해 버팀목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기 힘들어진 아버지란 사실이다. 좋은 아빠, 착한 아빠에 능력 있는 아빠까지 겸해야 하는, 즉 'Super Papa'가 되어야 하는 오늘의 아버지들은 한국문학에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폄하해도 결국 그 존재가치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아버지의 노고를 생각해주기 보단 그들을 너무 수단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신으로서의 포세이돈이 ‘데미갓’인 아들 Percy에게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용서를 비는 장면은 그래서 슬프다. 아들에겐 아버지의 피치 못할 사정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지금까지의 번뇌에 대한 아쉬움이 우선이었던 Percy의 모습은 아버지란 존재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했다. 그리움의 대상이기보다 자신의 버팀목으로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내게 해주는 아버지가 더 필요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 이 구도는 경쟁만 가열되는 지금의 신자유주의의 시대인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가족 내의 서글픈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가족이란 공동체 속에서도 아버지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는 냉엄한 현실도 알게 됐다. 즉,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중요한 존재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Happy Ending이었지만 그 과정은 그렇게 힘든 모습이었다. 오늘의 아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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