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페이스 - North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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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여인이 펼치는 노트 속에 담긴 어느 남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비극임을 눈치챘다. 자신이 직접 적은 내용이 아닌 노트를 펼치는 모습은 영화가 비극을 시작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니까. 낯선 여인의 독백으로부터 시작하는 독일영화 [North Face (Nortwand)]에 대한 내 예측은 그리 빗나가지 않았다.
  [North Face], 평범한 나에게도 이상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단순한 표현으론 ‘북벽’이란 표현인 이 단어는 사실 어느 산악의류용품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악인들의 도전을 무참히 짓밟은 알프스 북쪽 면의 [아이거 북벽]을 의미한다. 전설 속의 괴물의 이름을 딴 이 알프스 북면은 산악인들에겐 공포를 느끼게 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많은 이들의 환상과 정복이라는 염원의 대상이란 역설적인 상징을 담고 있는, 매력적인 정복지인 곳이다. 위험한 산이 도리어 매력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산, 그런 표현 속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공포와 위험이 존재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도전적이고 모험에 찬 인간들의 도전을 이끌기도 한다. 특히 첫 등정이란 최고의 영예는 1936년, 수많은 산악인들의 유혹이기도 했다. 이런 유혹에 빠진 이들 중 토니 (벤노 퓨어만)와 앤디(플로리안 루카스)이란 독일인도 있었다.
  산 타기를 좋아한 이들은 평범한 산악인이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것, 산악인에겐 당연한 목표다. 산이 있으니 산에 오른다는 것은 선문답과 같지만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아이거 북벽’은 그들의 평범한 즐거움과 용기로는 쉬운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취미를 넘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들의 산 타기는 결국 그들을 위험한 매력으로 이끌었다. 문제는 그들의 순수한 정열을 시대적 분위기는 객관적이고 평범한 눈으로 보지 않았던 것에 문제가 있었다. 그들의 열정을 두고 당시 시대의 인간군상들은 다양한 잣대를 대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고 만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시기, 세상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다. 개인의 승리가 집단과 민족, 그리고 체제와 국가의 우월을 상징해주는 세상에서, 소소한 욕심은 과대 포장되기 일쑤고, 그렇게 해야만 좋은 신문사에겐 상업적 정보가 됐다. 이런 조류가 ‘아이거 북벽’과 관련된 산악 등정에까지 미쳤다. 스위스에 있는 ‘아이거 북벽’을 처음 등정하려는 자들의 도전정신과 운명은 시대적 환경으로 인해 민족의 우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신문의 좋은 기사거리로 취급 받게 됐다. 그들의 감상적 열정이 많은 이들에겐 좋은 수단과 방법으로 악용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순수했던 산악인의 열정인 산의 정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열정은 그렇게 상품화되고 도구화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의 Gossip거리 기사로서 관심이 받게 되면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특파된 기자들에게 주목을 받게 됐고, 그들의 요구에 맞출 수 있도록 정상을 꼭 정복해야 했다. 이런 과도한 취재경쟁과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합병, 거기에 베를린 올림픽 개최 이전에 벌어진 과도한 민족주의는 순수한 열정의 산악인들을 과도한 열병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위험한 산악 등정에 위험한 투기적 열병까지 가세, 시작부터 위험한 등정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말았다. 토니와 앤디는 위험한 산악등정을 그런 환경 속에서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그 둘의 등정은 무조건 성공해야만 할 대업이 되고 말았다. 이제 순수했던 두 명의 독일 산악인들의 열정은 작아지고 점차 탐욕으로 일그러진 채로 타인들의 탐욕은 물론, 위험한 상황을 무릅쓰고라도 오르려는 탐욕을 품게 됐다. 과도한 경쟁으로 일그러진 채, 독일 산악인 둘은 오스트리아 산악인과 위험천만한 경쟁을 하며, 위험한 등정을 시작한다. 그 등정 속에 담긴 과도한 경쟁의식과 탐욕은 위험한 등반을 더욱 위험하게 하면서, 인간적인 면의 파멸조차도 보였다. 그들은 이제 순수한 열정만으로 등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위험한 산악 등정에서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이들은 다름아닌 산악인들, 그들 자신이었다. 국가가 달라서 경쟁해야 했던 두 팀은 위기 상황이 전개되면서 위기에 처한다. 그나마 타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정상에 서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오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위험한 상황을 무릅써야 하는 하산이었다. 인간이기에 외면할 수 없었던 생명의 가치를, 어쩌면 수많은 등반 속에서 깨우쳤으리라. 하지만 ‘아이거 북벽’은 객관적일 뿐이고, 냉정한 돌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 속에서의 아름다운 인간미도 알프스의 ‘노스 페이스’는 알 리 없고, 또한 외면했다.
  이런 자연물의 냉정함은 인간에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더욱 비극적인 것은 기사거리가 없어지고, 더 이상 상품성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에서의 기자들과 관람객들의 외면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산악인들이 등정을 포기하고 고귀한 생명을 구하고자 하산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그들에겐 가장 허탈하고 자신이 소비한 시간과 돈이 낭비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등정을 포기하고 인간의 순수한 면을 지키기 위해 내려오는 그들을, 기자와 관람객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버렸던 것이다. 인간 관계의 비극의 한 단면을 가장 비극적으로 형상화한 순간이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 1936년 당시엔 그것만이 정의였고 옳았다. 그렇다고 지금의 이 시점에서도 그런 세상의 법칙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변한 것이 있나 보다. 1936년 산악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도, 남의 위한 배려도, 지금까지 주목 받지 못하고 나서 거의 80년 이후에 그들의 이야기는 작품화됐고, 그들을 기리는 영화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활동 역시 또 다른 소비와 상품화를 위해 1936년의 ‘아이거 북벽’의 비극을 이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이용된 이야기는 어느 산악인들의 슬픈 이야기였고, 패배자들의 이야기였고, 또한 인간의 자성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인간의 반성을 이야기하는 시대이고 그것이 환영 받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오늘이라도 그런 이야기들이 이야기되는 것, 분명 우리 인간은 조금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은 그렇게 성숙해가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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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화다 - Rough Cu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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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세계 사이의 소통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마 이 영화의 시도는 매우 근본적인 차이를 두고 있는 두 세계의 기이한 접촉을 통해 양자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무섭게 느껴졌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매우 독특한 영화제목이 갖고 있는 힘은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 힘만큼이나 영화가 갖고 있는 주제의식은 신선했고 무거웠다. 무엇보다 다른 세계 간의 만남이 과연 좋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제기는 인간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될 수 있고, 이에 대한 결과는 매우 의미심장했다. 다른 세계의 타인을 이해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을까? 영화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갖고 관객들에게 다가왔다.
  별개의 두 세계의 남성이 그저 그런 이유로 함께 영화를 찍는다. 암흑의 세상과 화려한 연예계의 두 남자,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모였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영화라는 환상 속이든, 공포를 무기로 일하는 어두운 사회 속에서 둘 다 주먹을 통해 액션을 업으로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곳에 대한 은근한 환상이 있었고 동시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자격지심이 존재한다. 자신과 반대되는 영역에 있고 싶어 하는 이상한 욕망, 그래서 그들은 이상한 인연으로 서로 영화를 찍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의 세계관 속에서 충돌한다. 

  영화 속에 또 다른 영화 찍기. 마치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갖고 있는 이 영화는 두 세계의 남자가 현실 속에서나, 환상의 영화 속에서나 역시 경쟁하고 결투한다. 현실에서도 부딪히고 영화 속에서도 싸우는 이 황당한 구성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그들은 각자의 현실 생활을 하고 있으며, 고달파하고 힘들어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영화 속이나 현실이란 영화의 밖이나 두 곳 다 불편해 보였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영역은 지구 위에선 다 같은가 보다.
  그런데 시작이 달랐고 세계가 달랐던 그들이 닮아간다. 그리고 상대 세계에 대한 묘한 환상, 혹은 기대감을 갖고 있다. 부적절한 사실을 기반으로 한 Fantasy 세상, 그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동경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 이 영화에선 가능했고 그것이 바로 영화의 매력을 이끈 힘이었다. 그로 인해, 각자 다른 세계로부터 왔지만 어느 순간 그들은 상대를 동경하면 비슷해져 간다. 영화 속에 보이는 곳은 암흑의 세계, 아니 깡패의 세계이다. 지금까지 그 곳을 배경으로 찍었지만 그들은 분명 다른 곳에서 왔지만 현실과 영화의 이분법은 어느 순간 무너지고 폭력이란 동질감을 통해 그들은 서로 닮아간다.
  인생을 직접 체험하면서 배역을 담당한 배우들은 극히 드물다. 그러기에 극장 상영을 위해 만든 액션영화는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주 배경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런데 암흑의 세계의 중간보스가 영화라는 공간에 대한 묘한 기대와 여운을 갖고 있기에 과감히 자신의 직분을 어기면서까지 그곳에서의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한다. 변하고 싶은 욕망은 다른 세계 출신의 인물들 역시 공유하고 있었으며, 서로를 닮고 싶은 욕망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행동변화를 일으키고 그것이 결국 그들을 힘들게 한다. 두 세계의 이질감 극복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고, 그런 차이만을 확인하면서 방황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세계에서조차 방황하고 만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영화는 영화다’에서 보인 다른 세상에 대한 Fantasy가 여지없이 깨진다. 익숙하지 않았기에 동경했을지 모를 다른 세상은 언제나 동경만으로 이루어졌기에 언제나 그곳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부적응은 물론 실패를 동반한다. 마치 바다에 대한 공포를 모른 채 뛰어들어간 나비처럼, 여행을 동경하면서도 여행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초보 여행가가 겪는 고통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고통이 심해지면서 겪는 패배감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이 영화엔 그런 고민과 불안, 그리고 파괴가 서정적으로 형상화된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의 비극 장면은 더욱 잔인할 만큼 비극적이었다. 

  그 자체가 환상적인 세상이긴 하지만 그러나 가능하면 현실이란 것에 기반을 두면서 현실을 상당부분 담으려 노력한다. 사랑하면서 깨지고, 그러면서 갈등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실성의 비극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비현실적인 영화 속에 살면서 도리어 그것이 현실인양 거만한 액션배우의 모습은 깡패의 눈엔 세상의 어느 철부지와 다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잠깐 담갔던 그 세계에 대한 동경은 거친 세계에 대한 그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고, 잠시나마 이상향 속에서 그의 비극적인 인생의 뜨거움을 식히고자 했고, 어느 순간 거친 면보다 따뜻함을 지닌 인간으로 변하게 됐다. 그러나 그 점이 그에겐 자신이 살고 있는 거친 사회엔 부적절할 뿐이고, 또한 그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에서의 반대파에게 당하고 만다.
  영화를 다 끝낸 후, 그의 상대역이었던 깡패의 마지막 행동을 보면서 그는 현실과 영화의 구분을 어쩌면 처음 하게 됐을 것이다. 그 거친 모습 속에서 어쩌면 그는 영화의 비현실성을 적나라하게 느낄 만큼 공포를 느꼈을 것이고, 그가 격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느꼈던 깡패의 무서움을 또 한 번 느꼈을 것이다.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세계를 그냥 베낀 영화는 과연 현실과 너무 차이가 났고 날것에 대한 공포를 처음 느꼈을 것이다. 정말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두 세계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은 결코 화합할 수 없나 보다. 어쩌면 거짓된 매력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영화, 그 자체의 모순이 가장 큰 문제인지 모르겠다. 영화는 언제나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관객으로 초청해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충족시키지만, 그 기대감 속에 감추어진 현실이란 이야기, 그리고 영화의 반대편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란 냉혹성을 자주 잊게 만드는 야멸찬 속성을 지녔다. 이 때문에 현실적인 곳에서 영화처럼 행동할 경우의 위험성에 대해선 경고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환상에 젖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 여기에 각자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방식은 서로 너무 달라서 영화의 허구성을 폭로함은 물론 자기 세계의 살아가는 방식을 다른 세계에 함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적용일 뿐일지 모른다. 그런 위험성에 상시로 노출되어 버린 현대사회는 그래서 너무 위험하고 무섭다. 영화의 마지막의 공포스런 이분법적 구성은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나 보다. 정말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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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5-13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파라이징의 결과를 누구나 좋다고 할 순 없죠

novio 2010-05-14 00:59   좋아요 0 | URL
그렇겠네요. 이질적인 두 세계의 만남이 언제나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는 없겠죠.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네요, 이 영화는...

stella.K 2010-05-14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참 괜찮은 영화죠? 저도 인상 깊게 봤습니다.
특히 소지섭의 포스 장난 아니던데요?^^

novio 2010-05-14 19:51   좋아요 0 | URL
소지섭의 재기작이자 강지환의 첫영화였죠. 둘 다 기대이상을 해줬습니다. 저예산영화였지만 매우 고급스런 수준작이 됐죠. 돈이 명품의 조건이 아님을 보여준 멋진 영화입니다.
 
김윤아 3집 - 315360
김윤아 노래 / 티엔터테인먼트/코너스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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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노래는 외로와 보인다. 김윤아의 이번 앨범에서의 노래하는 화자는 도시 속에서 기댈 곳이 없어 보인다. 소외라고 할까? 혼자라는 인식이 노래 곳곳에 보인다. 혼자는 아니지만 혼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되어버린 도시인들의 외로운 삶의 모습과 방식이 노래 전편들을 수놓고 있다. 그녀가 담은 시간과 장소는 노래마다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공통점으로 수렴된다. 도시적인 공간의 속성을 지녔으면 그곳에서의 화자들은 방황하고 있다
  타인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노래가 표현하고 형상화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공간들은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현대 도시인의 자화상이 슬픈 모습으로 투영된다. 그래서일까? 노래는 먼 시간으로의 여행을 하듯 과거의 어떤 시대로 이끄는 것만 같다.
  그녀는 이 앨범에선 결코 Rock의 그녀는 아니다. 마치 먼 과거로 돌아간 듯 그녀의 노래엔 현실적인 감각보단 과거의 따뜻하고 우아한 세계가 보이고, 환상적이면서도 몽상적인 과거 역시 보인다. 아마도 현실에 대한 고독이 새로운 모습을 담은 음악세계를 만들었나보다.
  [이상한 나라의 릴리스], 몽환적이다. 환상적인 목소리와 거친 기계음의 이상한 대비 속에서 화자의 방황이 보인다. 아마도 현실에서의 거친 야성 속에 힘들어하는 화자의 외침이 들린다. 도시라는 이상한 세계에서 행복 찾기,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방황은 화자의 일생이 될 것만 같다. 안 될 것을 계속 찾아 헤매는 현대인처럼 말이다.
  [비밀의 정원]에서 들리는 것은 중세의 유럽에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현실에서 아늑함을 더 이상 갖기 힘든 지금, 김윤아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요정과 기사들이 즐겁게 사는 느낌,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즐겼던 먼 세상으로 간 것만 같다. 현실 속에서의 이상향, 어쩌면 노래가 진행되는 것은 아마도 Arcadia인 것만 같다. 노래에서 이야기하는 고통을 모르는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그래서 더없이 낭만적으로 들린다. 순결, 그 어느 때보다 가슴 깊이 울린다. 과연 현대인들에게 순결이란 의미가 과연 숨쉬고 있는지 모르겠다.
  깊은 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읊조리는 것만 같다. [가만히 두세요]에서 들을 수 있는 우울하고 외로운 이미지는 혼자만의 노래를 하는 김윤아의 노래다. ‘자우림’이란 외피를 벗어던졌을 때의 그녀는 사랑에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있다. 서정적이면서도 고독한 느낌의 그것은 달빛의 이야기이면서도 고독하게만 들린다.
  [Going Home]에선 기대가 들린다. 김윤아는 위로하듯 이야기하며, 그들의 편안함을 갈구한다. 하지만 희망과 기대, 그리고 어느 순간 들리는 찬사의 뒷편엔 힘든 자들에 현실을 들려주며, 또한 피아노와 현악기의 조응은 어딘지 힘든 그들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희망과 기대를 이야기하지만 마냥 희망일 수도, 기대에 찬 것일 수만은 없다. 이 노래는 상냥한 미소 속에 숨겨진 슬픈 서사를 담은 것만 같다. 그래도 아름답다. 그리고 이런 곡, 정말 듣고 싶다. 위로받고 싶다.
  [도쿄 블루스], 무척 도시적이다. 탱고와 같은 적막하면서도 정열적인 흐름은 확실히 이국적이다. 도시의 건물 사이를 흐르는 빗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수많은 인간들이 존재하지만 동료도, 아는 누군가도 되지 못할 인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는 그곳에서의 우울함이 매우 정열적으로 들린다.
  [Summer Garden], 어딘지 모를 황량함을 느낀다. 몽롱과 환상, 그 속에 담겨진 절망은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비현실적인 부탁을 하게 되는 것만 같다. 단조로운 키보드의 흐름 속에 들려오는 애원은 어딘지 모르게 부러질 것만 같은 애처로움이 담겨 있다. 갈구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부탁, 마치 우리들의 삶을 바꾸어 달라는 비현실적인 부탁과도 같다.
  [에뜨왈르],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노래다. 가사에서의 낭만과 어느 순간 들리는 긴장감도 희석시키는 김윤아의 청아한 목소리는 천사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정화, 바로 그것이 이 노래에서 들린다. 전기기타의 낭만적인 음률은 전기의 강한 이미지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정경을 마련해준다.
  [얼음공주], 공주의 순수함과 냉정한 얼음, 역설적이다.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쩌면 이별을 통해 고통을 느꼈으리라. 만남과 헤어짐이 일상화된 도시 속에서의 인간이라면 흔히 느끼고,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데 익숙해져버린 그런 감정, 그러기에 Cool한 것이리라. 더 이상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얼음 속에 있으리라는 화자의 갈망은 어쩌면 반어적이다. 사랑받고 싶은 여인의 슬픈 갈망, 이 노래는 그래서 거짓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도 아름답다. 그것이 도시인들의 사랑에 대한 감정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상향인 [착한 소녀]는 그러나 우울한 노래다. 자신에 대한 솔직하지 못한 스스로의 자탄을 담고 있다. 타인을 위해, 혹은 자신을 솔직하게 밝히지 못한 ‘착한 소녀’는 긍정적인 표현 뒤에 숨겨진 고독과 비극이 숨어 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슬프다. 정직이 매말라버린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 자의 비극, 이 노래의 제목은 그래서 반어다. 앨범의 마지막 노래로는 너무 비극적인 것만 같다.
  Rock과 자우림의 그녀는, 그러나 이 앨범에서 많은 시도를 했다. 그녀는 그 어떤 것도 아닌 김윤아란 개인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이 앨범에서의 그녀의 노력은 성공했고, 환상과 몽환, 그리고 이상향에 대한 갈망, 그리고 역설적이고 반어적인 표현을 통해 드러난 도시인의 비극, 그리고 과거로의 여행을 통한 음악의 새로운 발견들이 이 앨범에 보인다. 이 앨범은 도시인의 마음을 그렇게 위로한다. 이해 못한 [315360]이란 앨범 제목, 모르겠다. 그녀의 인생의 어느 면이 투영된 듯도 하고,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붙인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우연 속에서 인생이 진행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번 앨범은 김윤아란 여인의 성숙과 인간에 대한 성찰, 그리고 도시인에 대한 배려와 위로가 들린다. 앨범, 들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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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의 어둠/의외의 선택, 뜻밖의 심리학/자본주의 역사로 본 경제학 이야기>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토요타의 어둠 - 2조 엔의 이익에 희생되는 사람들...
MyNewsJapan 지음, JPNews 옮김 / 창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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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선정적이라고 느꼈다. 그냥 인기에 목마른 어느 저자의 치밀한 판매전략이라고 느껴졌다. 또한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체념도 한 몫은 했을 것이다. 삶이 각박해진 21세기의 시작을 기점으로 세상은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이야기와 세상에 무관심해졌고 또한 각박한 삶이 연이어지다 보니 솔직히 귀찮아한다. 자기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어둠이란 단어가 제목에 있을 때,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푸념도 했고, 그리고 저자에 대한 비난도 했을 것이다. 각박해진 삶 때문에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또한 일종의 ‘귀찮니즘’이 두드러진 이 시점에서 일본의 대기업에 대한 실상을 소개한 이 책은 그렇게 귀찮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 세상에 대한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된 것만 같다. 그리고 묘하게 겹치는 한국의 실상, 그것은 사실상 신자유주의가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지 하는 공포를 일깨웠던 것이다.
  2010년에 도요타 자동차의 전세계적인 리콜 사태가 벌어졌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미국으로부터 시작한 이 리콜 사태를 보면서 처음엔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시작이 된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연이어지는 다른 나라에서의 리콜, 그 중엔 한국도 있다. 묘하게 겹치지만 어떤 점에선 국가 이익에 우선한 리콜 사태라고 해도 틀릴 성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바로 도요타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책, [토요타의 어둠]이란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대기업이 휘두르는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북한’이란 표현처럼 토요타 회사에서의 생활은 가히 군대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형편 없는 다다미의 네 장 반짜리 독신기숙사에서 토요타 사원의 첫 시작을 하게 되고, 세상과 결별한 채, 거의 모든 생활을 토요타의 업무에 의존하게 되는 사원들의 모습은 세계경제대국 일본의 한 단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최근의 경제불황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몰라도 그들은 경제 신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이고 지금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또한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의한 과로사의 한 예는 소설 속의 어느 불운한 주인공의 말년을 보는 것만 같아서 씁쓸했다. 잘 살 것만 같았던 일본인들의 일상에 대한 신화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또한 노조에 대한 탄압은 일본의 수준 낮은 기업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런 경향이 국제적으로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필리핀 등의 사례를 보면서 일본은 그냥 잘 살고 GDP 높은 국가일 뿐이란 느낌을 받았다.
  여기에 소비자의 목숨을 개의치 않는 판매전략은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리콜 사태의 진정한 주범이란 것도 마침내 느꼈다. 그들은 그렇게 형편없는 기업인 셈이다. 누군가 죽어도 개의치 않은 그들의 만행은 솔직히 공포스러웠다. 자동차는 어쩌면 흉기인 셈이다. 운전사가 어쩌지 못하는 흉기 말이다. 이런 위험한 기업을 후원하다시피 하는 일본의 정부와 관료는 전형적인 문제아들의 사회임을 보여준다. 소위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구한말의 모습을 되새김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할까? 그들은 그렇게 공모하고 있고, 그렇게 타인을 가혹하게 다루고 있으며, 자기들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 절어있는 것이다.
  일본, 돈은 많겠지만 잘 사는 나라는 아닌 것만 같다. 한 가지 예로만 평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어느 누군가가 있겠지만 문제는 그런 위험한 기업을 통제할 수 없는 일본의 기형적인 신자유주의 국가 시스템에 있고, 이를 묵인하고 그렇게라도 자신만 먹고 살면 된다는 일본 국민들의 이기주의가 숨쉬어 있다. 이런 시스템이 발목 잡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에 우선한 기업우위정책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일본 사회는 바다 건너 매우 위험해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최근 들어 그 악폐를 전세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장과 기업이 모든 인류를 살려줄 것이라는 잘못된 신화가 꺾이는 요즘, 토요타의 어두운 단면은 역시나 기업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그들은 분명 통제되어야 할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토요타가 한 짓은 한국의 재벌들의 만행과 많은 부분에서 겹쳐 있다. 구사대란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두들겨 팬 재벌들의 만행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다. 한국의 재벌들은 또 다른 토요타를 꿈꾸고 있다는 증거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만행에 눈감고 나만 무관하다면 상관 없다는 일본인의 마음 역시 한국인들에겐 많을 것이다. 한국인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리고 또한 토요타가 사회에 끼친 부정적인 현상들을 아무 탈이 없었으면 하고 겪고 살고 있을 것이다.
  위험하다.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육체적 생존을 추구하려는 모습은 ‘올리버 트위스트’란 소설에서 나오는 비참한 인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결국 모두가 힘든 인생을 살고, 또한 사회가 파멸해갈 수도 있다. 한국의 인구가 주는 이유 역시 알고 보면 멋대로 굴고 있는 재벌의 만행을 다루지 못하는 무능한 사회의 통제 시스템이며, 한국은 너무나도 기묘하게 일본과 닮아 있다. 어쩌면 일본의 하락을 답습하는 것 역시 무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두 나라는 과거의 은원으로 인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사실은 형제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있는 장치를 사회적으로 마련하지 않으면 국제적인 시장에서 한국의 재벌의 제품 역시 리콜을 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보호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런 기업의 만행을 국내에서 살고 있는 소비자들이 계속 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자성 역시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하지 못하는 동안, 한국 역시 잘 사는 겉모습만 있을 뿐, 사실은 위험사회의 어느 누구일 뿐이란 것을 조만간 몸으로 느낄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우린 위험한 곡예를 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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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 - The Hurt Lock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두 개의 세계가 지구에 공존한다. 월급을 받고 하루의 생활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회와 목숨을 걸고 전에 보지도 못한 상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폭탄을 장치하는 전쟁터가 그것들이다. 두 곳 다 생존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장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너무 다르고, 그것 때문에 두 곳은 구분된다. 그래서일까, 다른 사회에 있는 구성원들은 상대를 이해하기 힘들고 또한 다른 곳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옮겨와도 결코 적응하기 힘들게 된다. 그렇게 이 두 사회는 공존하지만 외면한다.
  [The Hurt Locker]가 담고 있는 전쟁터의 세계는 평범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관객들에겐 낯설기만 하다. 죽음이란 위험이 산재해 있음에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몇몇 군인은 매우 일상적으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 내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폭발물 제거반 EOD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너무 평범해 보였다. 모든 마을이나 도시를 다 파괴하고도 남을 것만 같은 폭탄 앞에서 윌리엄 제임스 중사(제레미 레너)는 다리 보수공사하는 사람처럼 태연히 일을 처리하는 것만 같다. 폭발에 대비하기 위해 독특한 무장을 한 채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폭탄의 험한 폭발 앞에서 과연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로 위험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그가 입고 있는 장비와 옷으로는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그의 얼굴과 모습은 단순한 작업을 하고 있는 일꾼 정도로만 보인다. 그의 얼굴만 본다면 전쟁터엔 어떤 위기와 위험도 있을 것만 같지 않다. 평범한 사회의 구성원이 보기엔 그럴 것이다.
  제임스 중사는 그렇게 전쟁에 익숙해 져버린 군인이다. 무려 873개의 폭탄을 제거한 그는 분명 전쟁터에서의 영웅이고 뛰어난 군인 베테랑이겠지만 돌려 말한다면 위험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결코 위험에 대한 현실감을 상실한, 위험과 고통이 너무 커서 차라리 망각해 버린 비현실적인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JT 샌본 하사(안소니 마키)와 오웬 엘드리지 상병(브라이언 개러티)은 그나마 평범해서였는지 언제나 위험을 느끼고 불안해 한다. 마치 영화를 보는 평범한 세계의 관객들처럼 말이다. 같은 전쟁터란 장소에서도 다른 인간들이 존재하겠지만 영화 속에서 종종 보이는 베테랑들의 모습에선 전쟁의 위험과 고통, 그리고 심지어 잔혹함조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속의 그들은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살지만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미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미조차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전쟁터에선 마련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슬프지만 다시 총을 들어야만 하는 무서운 세상 속에서 그들은 어느 순간 내동댕이쳐졌고 그것이 그들의 인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전쟁터란 세계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군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그런 따뜻한 마음은 자연스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미를 느끼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하게 된다. 폭탄 제거란 임무에 진력하는 제임스 중사와 충돌하는, 38일만 참아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꿈꾸는 샌본 하사의 소원은 결국 38일간만 비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 그들이 돌아간 그들의 원래의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인 평범한 세계는, 그러나 그들에겐 이상향이 되고 말았다. 귀한 가족이 살기에 갔지만 그들에게 가족이 살고 있는 그곳은 어느 순간부터 평범하지 않은,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그곳에서 편하기 힘들다는 것은 매우 불행했고 평범한 세상에서 적응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게 그들은 변해 버렸고 돌아올 수 없었다.
  불행해 보였다. 오직 한 세계에만 익숙해져 버린 우울한 군인의 모습은 분열되면서도 조화되기 힘든 두 개의 세계의 결코 동화될 수 없는 모습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인간의 파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그에겐 위험이 닥칠 것만 같은 위험은 그러나 애써 무시된 채 그 주변에 엄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우울한 군인은 그것을 피할 수도 없었고 비킬 수도 없었다. 그런 위험이 아니면 결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없기 때문이다. 그건 소외다.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그들은, 위험한 곳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그는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일 것이다. 죽은 자들만이 아닌 죽인 자들, 그리고 언제나 위험한 것에 익숙해져 버려서 더 이상 위험에 무감각한 그들은 분명 우리들의 또 다른 비극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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