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 The Man from Nowher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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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트맨도, 스파이더맨도 아니었다. 소외된 것들의 구체적 대상들이 희생될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한 것은 괴력의, 신통한 힘을 지는 영웅들이 아닌, 우리들 중 하나다. 다만 그런 존재 역시 이상적인 영웅일 뿐이었다.
  영화는 상상 이상의 액션과 강인함,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연기자들로 인해 쉼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원래의 인식은 깨지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원빈은, 과거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의 약한 모습의 그를 벗어난, 내면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전당포 아저씨로서의 멋진 변신을 이루어냈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 힘들어한 그가 어린 소녀를 위해 위험한 모험을 감수하는 모습은, 어쩌면 뻔한 이야기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소화했다. 그리고 영화 ‘여행자’에서 소외 받은 어린 소녀 역에서 믿을 수 없는 느낌을 보여주며, 어린 소녀의 슬픔을 극대화한 김새론은 이번에도 그녀의 특이한 매력을 발산했다. 저 소녀라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구할 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좋은 스토리와 볼거리, 그리고 훌륭한 연기자들만이 즐비한 것만큼 우아하지도, 그리고 행복하지도 않은 공간이다. 영화는 여느 액션무비완 다르게 서글픈 오늘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가난한 자들이 즐비하게 살고 있는 공간은 아름다운 영상으로 꾸며졌어도 슬펐다. 어린 소녀가 훔쳤다는 죄로 타박을 박고 나서 걸어간 모습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의 소녀의 귀환은 어느 할머니가 쏟아낸 모습을 통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그곳은 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세계가 아닌, 가난으로 인한 고통과, 그로 인해 나약해져 버린 인간들의 위험도가 매우 높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범죄와 폭력, 그리고 힘없는 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사회적 질곡이 숨어 있는 곳이다. 그 속에 아저씨가 있다. 

   아저씨, 그리 특이한 존재는 아니다. 그냥 옆집에 있는 평범한 존재감만이 존재하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평범한 존재감을, 사회적으로 소외된 소녀를 구원하는 영웅으로 재탄생 시킨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심각한 위기로 내몰린 우리들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심심풀이 폭력물이 아닌, 사회의 한 거울이자, 그 속에 담긴 소외된 자들의 갈망을 영화화했다. 영화 속에서 우릴 구원해달라는 메아리는 영화 곳곳에서 들려왔다.
  영화 속 풍광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았다. 과묵하기만 한 존재였던 아저씨에게 세상의 어느 불쌍한 소녀의 소원은 단순했지만 어려운 문제였다. 사회적 폭력 한가운데로 끌려간 그녀에게 평범한 존재감 정도로만 느껴지는 옆집 아저씨에까지 구원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은 아무리 좋게 봐도 결국은 슬펐다. 영화의 비극은 바로 이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부터 유연화 등, 각자 알아서 살라고만 하는 냉혹한 현실과 강자들의 이야기는 어린 소녀의 비극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면서, 소외된 자들이 다시 한 번 가혹한 현실 앞에 내쳐질 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마약거래에서부터 장기 밀거래까지 세상에 알려진 폭력과 폭력배들이 다 관여했다. 어린 소년 소녀들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잘 들어야 엄마 만날 수가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무서운 할머니는 다름 아닌, 어린 소녀를 더욱 가혹하게 밀쳐내는 세상을 형상화한 보조관념일 뿐이다.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기에 기이한 운명으로 태어난 ‘아저씨’라는 영웅은 세상에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이가 더 이상 없기에 탄생된 것이다. 어쩌면 현실감이 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현실감이 없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곳의 아저씨는 사실 타인의 고달픈 삶에 무관심하게 살 확률이 더욱 높은 그런 존재일 뿐이다. 영화는 이런 역발상을 통해 갈 곳 없어 힘들어하는 자에겐 자비를 베풀었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환타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위로는 보는 내내, 슬픈 우리들의 환경을 되돌아보게 할 뿐이었고, 영화 속의 경찰의 무능함 속에서 보이는 세상의 냉혹함은 역시나 어두운 우리들의 현실을 극대화한 소재였다.  

   영화 속의 어린 소녀는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마지막에 들었던, 혼자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환상에서 환타지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귀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가 위기를 벗어난 그 때는 잠시라는 꼬리표를 다시 달게 된다. 그녀는 아저씨라는 든든한 보호막이 사라지면서 다시 한 번 버려질 수도 있는 위험한 세상으로 귀환한 것이다.
  영화는 갈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갈망을 중심으로 만든 예술작품이 그렇듯 갈망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갈망은 어쩌면 소박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혹독한 세상으로 변모만 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소박함이 얼마나 인정되고 보호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저씨’가 더욱 간절해진다. 환타지지만 그래도 염원하고 싶다. 현실과 환타지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 간 ‘아저씨’란 영화는 좋은 영화를 뛰어넘어 한 사회의 갈망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현재의 힘든 우리를 위로하고 잠시나마 보호받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느끼고 싶다. 또 다른 ‘아저씨’ 속편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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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스! - Box!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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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과 희생, 그리고 진정한 경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런 것들, 어느 순간 잊고 사는 것들이다.
  영화는 동화다. 지금 부족하고, 이미 잃어버렸던 것들을 환생시킨다. 그런 환생을 일으키는 매개체인 것이다. 그런 과거의 환생을 일으키는 매개체는 기쁨도 만들고, 즐거움도 만들고, 괴로움도 만들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 인간의 인생을 되짚어 보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그런 마력을 통해 영화는 기쁠 수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슬플 수도 있다. 과거라는 기억의 세계로 향하고 싶은 열정, 즉, 그리움의 매개체, 나에겐 영화가 그런 것이다.
  어렸을 때의 찬구란 인간관계가 시간이 지나도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설정, 말이다. 아련한 추억 정도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의 내 생활의 일부가 되고, 나를 바꿀 수 있는 힘까지 갖게 된다는 것, 어려운 상황이지만 부럽기만 하다. 영화 [복스]엔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복스]는 너무 먼 곳에 있는 세계에서나 벌어지는 일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인간관계나 너무나 낯설기만 했다.
  친구, 그 가치가 점점 엷어지고 있다. 생활이 시간에 따라 연속되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환멸을 자주 겪을 때가 많이 있다. 현대인에게 그런 변화는 필수적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것이 생존전략 중 가장 중요한 것이리라. 가치는 있지만 지켜지기가 힘든 것들에 대해 점차 이해하기 시작한 세월의 무게를 인지할 때, 이 영화는 아쉬운 것들 것 넘친다. 영화 속에 보이는 벗과의 관계는 믿기 힘들만큼 뜨거웠다.
  어릴 때의 친구,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아름다운 우정을 계속 유지할 만큼 그들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그 때의 관계의 지속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고 싶다. 과거의 난 현재의 나보다 착했고, 순수했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그 때의 모습, 그대로를 지속할 수 없는 현대인이기에 가슴 아프다. 영화는 그렇게 어른이 되고만 날 즐겁게도, 힘들게도 했다.
  진한 우정이 돋보였다. 어린이들의 동화 같은 우정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우정이 깃든 삶과 경쟁 속에서 인생의 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결코 져선 안 되는 경기이지만 그래도 질 수도 있다는 점이 영화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비현실적이기조차 한 것들의 내용들이 현실이란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단 사실이다. 자칫 우스워질 수도 있는 내용들이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냉혹한 현실이란 배경을 중심으로 진행됐단 것이다. 현실 속에서의 동화 같은 이야기, 그러면서도 스토리의 힘이 느껴지는 장점, 이 점들이 영화의 힘이 됐던 것 같다.
  두 명의 천재 복서, 그러나 그들의 시작은 달랐고, 그들의 스타일도 달랐다. 천재였기에 게을렀고, 자신 주변의 모든 것에 Cool하게, 혹은 냉정하게, 혹은 과장된 행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친구 한 명과 겁쟁이였던 자신의 모습을 깨고, 성실과 집념이란 평범한 모습으로 권투란 매체로 세상을 사는 또 다른 천재 하나, 이렇게 둘은 친구로서 짝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과정은 매우 달랐어도 그들은 친구라는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다른 그들이지만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고, 상대를 위로하고 위하면서도 또한 적수로서의 인생을 살아간다. 좋은 라이벌로써 말이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은 것은 이 영화엔 공정함이 존재한다. 강자도 있을 수 있고, 약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거칠게 되면서, 상대를 이기는 방법에 대해선 점차 무시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 영화는 그런 불공정한 싸움방식에 대한 경고를 주기라도 하듯, 공정한 경기를 위주로 구성됐단 점이고, 상대에 대한 존경도 읽을 수가 있었다. 두 명의 친구의 공동의 적이었던 뛰어난 복서의 행태는 잔인한 능력보단 공정한 경쟁을 주도하는 멋진 세상을 제공해준 전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존재로 인해 어떤 친구들의 만남과 경쟁, 그리고 그들의 목표가 그 무엇보다 멋있고 존중되는 효과를 일으켰다.
  이런 장점의 바탕 하에서 영화 속의 생동감이 인상적이다. 영화 속의 그들은 현실인양 훌륭한 권투경기를 해주었다. 어느 경기장에서 실재 벌어지는 경기가 진행되는 것처럼, 감독의 섬세함과 현실감은 영화의 과정과 끝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했다. 특히 경기장의 그들이 왜 경쟁해야 하는가와 맞물리면서 그들 간의 경기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녔다.
  인간의 본성과 야심으로 인해 파멸하는 내용이 현재 영화에 넘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긍정적인 인간관계와 그에 따른 행복한 결론을 보고, 또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영화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부러웠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긍정적 시선이 이 영화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실을 살고 있는 현대인의 로망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어서인지 모른다. 이런 영화, 또 한 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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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클립스 - The Twilight Saga: Eclips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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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과거완 달라지는 인간관계가 존재한다. 한 여자를 상대로 두 남자의 사랑경쟁이 도를 넘고, 결국 그들의 가족까지 나서는 기막힌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미래의 가족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설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러나 두 남자 사이에 방황하는 것이기보다 ‘어장관리’한다는 말이 더 맞는 그런 상황에서 늑대인간의 가족이 목숨 바치며 싸우는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다. 단순히 누군가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기엔 너무 위험한 것이다. 인생의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그런 스토리를 영화 [이클립스]가 갖고 있다.
  이 영화엔 과거의 스토리가 있다. 그러나 난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최근 영화의 경향으로 볼 때, 이전 작품을 못 봤다고 스토리가 이해 안 가는 상황은 최근 영화에선 보지 못했다. 솔직히 그냥 보면 되는 것이고, 후속편들 역시 그와 관련된 내용들을 은근히 다 표현한다. 그리고 과거의 스토리가 굳이 필요한 것도 아닌 것만 같다. 소녀팬들을 위한 영화란 것은 영화 포스터만 봐도 다 알 수 있을 만큼 이 영화는 특정 소비층들을 겨냥한 영화란 것을 모르고 보지 않았으며, 그것은 나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건 소녀팬들을 위한 다양한 환타지들을 갖추고 있는 영화다.
  잘 생긴 두 명의 남자는 그러나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그나마 이 영화에서 사회적 긴장감을 어설프게나마 보여주는 부분이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지닌, 동유럽의 슬라브족과도 같은 흡혈귀족들은 본토박이로 보이지 않고, 환상이 가득한 이국적이고 부유한 타지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하긴 흡혈귀가 아메리카 출신일 리도 없고, 영화 설정도 그들은 이방인들이다. 너무 멋진 이방인이며, 유럽 명문가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정말 하얀 모습은 만화영화에서 백설공주를 구할 백마 타고 온 왕자의 집안 그대로이다.
  이런 왕자 같은 흡혈귀 집안과 반대로 늑대의 피를 받은 집안은 미국 본토박이다. 그들은 흡혈귀의 공격을 당한 것처럼 사실 미국의 백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고향을 뺏기고, 파괴된, 미국의 원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의 후손들로 구성된 집안이다. 그들은 흡혈귀 집안이 미국 동부의 귀족의 집안과 같은 곱상하고 부유한 모습들과는 반대로 산 속에 웅거하며, 언제나 형편없는 의류를 입고 다닌다. 또한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는 인디언 남자는 옷을 입는 적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추운 겨울을 비웃으며, 숲 속의 짐승으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야성, 그는 분명 짐승남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둘의 사랑을 받는 여자 주인공은 스토리 상 어쩔 수 없이 기회주의자가 되고 만다. 흡혈귀를 사랑하고, 언젠가 흡혈귀가 될 것이란 목표를 설정했지만 왜 그런지 그런 과정을 계속 미루며, 질질 끈다. 영화의 설정이란 느낌이 들고, 인간미의 유지야말로 행복의 유일한 길이란 것을 은연중 암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지만 어떻든 이런 상황으로 인해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게 되며, 양쪽 집안까지 나서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정말 팜므 파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에겐 지조도, 순박한 마음도, 그리고 과거에 여자가 있었으면 하는 것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고전과 현대의 구분이랄까? 확실히 그녀는 과거의 여성성을 지니고 있진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런 여성이다. 그녀에게 매력적인 외모가 없었다면 그런 도움도 요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그녀에겐 남성을 휘어잡을 매력적인 외모만 있다. 이런 강점으로 인해 자신의 테두리에 남자들이 안주하도록 만드는 힘, 그게 그녀의 장점이다. 그러나 아쉽다. 주인공 치곤, 너무 개인을 위해 살아가는 모양새라서 말이다. 아마도 오늘날 여성들이 가장 원하는 상황을 표현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이 영화의 그래서 갈망이 있다. 최근 경제위기네, 가족의 해체네 하면서 드리운 인간관계의 파멸과 누군가를 위해 살아줄 사람들이 태부족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나만을 위한 사람은 적어지고 있다. 남자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여자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누군가가 필요한데, 이제 그런 존재들이 태부족이고, 심지어 그럴 사람들끼리 뭉친 부부 역시 영화에서의 표현처럼 3분의 2가 이혼하는 상황이다. 아마도 영화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내몰린 인간들의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작된 것이며, 나 역시 그렇게 사랑 받고 싶다는 환상을 자극하기 위해 만든 상업영화일 것이다.
  이런 점을 비난할 것은 없다. 영화라고 세계화라는 경쟁구조를 피해갈 수 없으며, 미국 영화의 상업성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업성 속에서 그러나 사라진 것들이 많아지고 있고, 그래서 아쉽다. 개인주의의 첨병인 미국에서 극단적인 이타주의를 담은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마도 개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점에선 그들이 주장한 개인주의가 실패했던지, 아님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과도하게 남용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 속에 드리운 희생만을 요구하는, 일방적 관계로의 환타지는 분명 문제점이 있어 보이고, 우리들이 영화가 담기엔 너무 아쉬운 내용이다. 과거의 영화가 서로간의 사랑을 담고, 타인을 위한 희생의 연쇄적인 작용으로 인해 더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었다면, 이 영화엔 그런 것보단 늑대인간의 최후와도 같은 비극이 담겨 있다. 즉 누군가는 크게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내용으로 구성된 환타지는 결국 매력이 있고, 아름다운 외모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외모지상주의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들로 꾸며진 영화들은 보는 사람들 사이에 자칫 공분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165가 넘지 못하니 넌 Loser야 라고 외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왜냐면 이게 정말 정직하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 [Box]와 같은 영화가 그립다. 인간미와 우정, 그리고 진지한 삶의 성찰, 그리고 타인을 위한 희생과 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진정한 경쟁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에 후속편을 이클립스가 만들 때, [Box]를 참고했으면 한다. 영화 보는 시간은 매우 소중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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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 I Came from Bus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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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울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세상 속에선 말이다. 오직 아기에 대한 생각 속에서만은 예외였다. 그러나 그것도 영화 속에선 많은 시간이 할애되지 않았다. 그녀가 보는 세상은 혹독할 뿐이었다.
  영화의 시선은 그녀가 보는 세상을 함께 보며 움직였다. 그 속에서의 장면들은 여과 없이 표현됐고, 거칠고 폭력적이고, 냉정했고, 무관심했고, 그리고 차라리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로 가득했다. 폭력과 외면이 만연된 사회, 그런 곳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영화는 냉혹하리만큼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소외된 인간들의 군상의 어느 일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속에 인간, 연약하고 위험하기조차 하다. 그렇게 그들은 위험하게 살고 있었다.
  상처받고 자라난 어린 소녀의 산모가 된 모습은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는 장면이었고,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이미 끝의 모습이 보여주는 듯한 첫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그만 빛을 받고 서서히 일어서는 어린 산모는 과거에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암시했다.
  영화 [귀향 (2009)]이 생각났다. 불행한 미혼모로부터 시작된 서사의 마지막이었던 비극적인 장면은 신에 대한 저항일 수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저주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아기의 불행이고 만 그 장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재생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면과 소외로 빚어진 비극은 결코 개인만의 문제일 수도 없고, 결국 버림받은 자들을 배려해 줄 수 없는 사회적 구조는 비극의 확대재생산만을 촉진시킬 뿐이다. 이 영화 역시 그런 류의 비극을 보여주었고, 또한 이 영화는 [똥파리(2009)]의 또 다른 형제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폭력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해 방황한 어느 3류 깡패의 이야기는 비운의 가족으로부터 잉태됨을 사회적으로 이미 공유된 사실이 되고 말았다. 2009년도의 비극을 담은 많은 작품들은 올해도 그 형제자매들을 계속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영도다리란 공간의 차별성을 사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바라보게 된 영도다리란 공간의 고통과 폭력성, 그리고 사회적 소외로 점철됐고 비상구 없는 그런 공간이었고, 그 속에서의 삶이란 결국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그런 버팀목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의 삶은 척박했고, 각박했고, 무서웠다. 그 속에서의 어린 산모는 그런 부정적 요소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만삭이 된 어느 어린 소녀의 모습은 사회로부터의 외면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입양으로 처리되고 있는 아기의 모습 속에서 형편없겠지만 함께 더불어 살면서 얻게 되는 가족의 행복조차도 미혼모에겐 사치스럽다고 인식되었나 보다. 그런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다른 곳에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추론이고, 그것이 생활의 지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이리라. 하지만 남겨진 아기의 엄마의 미래와 행복은 결국 사멸되는 것인지 모른다.
  결국 산모는 영도다리에 남겨진다. 산모였던 어린 소녀가 돌아간 곳은 역시 폭력과 외면이 넘쳤다. 누군가의 폭행에도, 불행에도 무관심한, 그녀가 사는 세상은 말뿐인 인간사회일 뿐이었다. 그냥 사람이 살 뿐, 그곳엔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간관계도, 그리고 우정이나 관심은 결코 없었다. 그런 곳에서의 행복 찾기는 사치일 뿐이었고, 어쩌면 그런 것조차 없을 것이다. 동물과도 같은 인간관계들 속에서 어린 소녀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대충 살면서 일본에서 새로운 일생을 살겠다는 그녀의 친구의 선택이 더 옳아 보였다.  
  어린 미혼모의 무관심은 잔인했다. 어린 소년의 파괴에 무관심했고, 타인의 무관심했고, 타인의 죽음에도 그랬다. 그녀가 보고, 듣고, 그리고 살고 있는 그곳은 잿빛이 가득하고 차가운 겨울이었을 뿐이다. 그래서였을 것만 같다. 그녀는 자신의 아기를 찾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자신의 육체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어머니였다는 것을 확인했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어느 가족의 한 일원이었다는 것을 생활하면서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통해 행복하기 힘들다면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이란 인연을 다시 회복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한 것이다.
  영화는 아기를 찾으려는 그 순간 끝맺는다. 사실 이 마지막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가슴 아픈 장면이기도 하다. 그 다음의 스토리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영화의 줄거리를 통해 볼 수 있는 세상을 고려한다면 결코 둘 다 Happy Ending이기 힘들다는 것을 그 모든 이들이 알 것이다. 아기를 다시 찾아온다고 해서, 영도다리로 상징되는 힘든 생활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고는 믿기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 영화의 울림은 이 때부터 시작이다. 사회의 냉대를 바꿀 수 있는 변화를 촉구한 것이기도 하고, 어린 학생들의 성교육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영도다리로 대표되는 불행을 잉태하는 특정의 공간이고, 이 공간이 점차 확대되는 한국사회에 대한 아쉬움이다. 무엇보다 이를 바꾸려는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몰락하는 한국인들 상당수에 대한 불행은 결국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현실에 대해 자탄만이 흐른다. 한국의 건강성은 영화 속에 드러난 그런 사회처럼 몰락하고 있는 것 같아 영화의 참혹함이 다시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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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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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보다 감독에 더욱 관심을 갖게 한 영화라는 것은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썩 유쾌한 관심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결국 영화 자체로서 매력을 발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 연기자 중 하나로 평가된 구혜선, 그녀에게 감독이란 호칭은 낯설기만 하다. 아니 부적절한 것이다. 감독이란 호칭이 붙기엔 경력은 너무 일천했고, 데뷔는커녕 연기 생활 자체도 그다지 길지 않아 보인다. 과거의 그녀가 무엇을 보여줬던, 영화를 만든 풋내기 연기자란 느낌은 어쩌면 엄청난 한계로 보인다. 차라리 그녀가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이 화제가 된다면 더 좋았을 정도다. 그런데 그녀는 과감히 감독으로 데뷔했고, 그 시작이 ‘요술’이었다.
  의외였다. 또한 시작이 결코 독립영화와 같은 신참감독의 통과의례는 아닌 것으로 보였을 때, 조금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시작이 자칫 가혹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한국이 신인에게 주기엔 너무 어렸고, 너무 경력이 짧았고, 그리고 너무 신선했다.
  다행이란 생각이 그래도 들었다. 그녀의 음악적 능력을 뽐낸 앨범을 들었을 때도, 자신의 그림이 담긴 소설에서도 그녀는 아슬아슬한 모험을 했지만 평가는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새로운 모험이 자칫 위험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잘 넘겼다. 영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분명 그녀의 도전은 긍정적일 것만 같다. 영화는 음악이란 요소를 통해 이어지면서 현실감과 환상, 그리고 뮤지컬같은 효과를 느끼게 하며, 대중영화로선 보이기 힘들었던 과감한 도전을 영화에서 일삼았다. 결코 대중적인 작품에선 보이지 않았던 과감한 시도였고 도전이었다.  어딘지 모를 신선한 이미지와 구성, 과거와 현재로 넘나들면서 보이는 한 남자의 아련한 추억과 고통, 그와 반대이듯 즐거운 아카펠라의 노래는 영화에 색다른 인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런 음악적 구성에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 보이는 다양하고 고전적인 음악들은 어린 감독으로서 보일 수 있는 새로운 매력처럼 다가왔다.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 이루어진 다양한 상징성은 종종 이해하는데 있어 힘들게 만들기도 했지만, 아련한 추억을 만들어주었고, 인물들의 갈등의 수준을 형상화하고 또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에 역시 큰 힘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신선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사랑,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면서도 영원한 갈등과 번민의 원인이기도 한 이 감정을 ‘요술’에서 소재로 선택했다. 영화에서 선택한 묘한 삼각관계는 그러나 둘 사이에 낀 묘한 한 인간의 모습은 항상 갈망을 하면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타인의 마음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또한 한없이 고통스러워한다. 가까이 있을 것만 같지만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는 고통의 심연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묘한 대치를 이룬다. 매우 컸던 기대가 점차 약해지는 과거와, 그 과거로 인해 힘들어한 중년의 모습은 과거로부터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길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아련한 추억, 정신적 Trauma, 그리고 그 속에서 방황하는 한 인간의 모습은 나약하기만 하다. 그 나약함 속에 보이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편린, 그리고 현재에도 잊지 못하는 갈망 등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였고, 영화는 설득력 있는 구성을 갖고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인간은 허약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랑도, 우정도,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운 마음도 잃어버린 그의 모습은 과거의 투영을 통해 감상적으로 그려진다. 현재와 과거의 투영이 빚은 해변에서의 ‘문’은 과거와 현실을 환상과 상상의 세계로 만들면서 한 사람의 갈망과 현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해소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랑에 앞서 남녀 세 명 사이에 있었던 우정에 대한 망각을 해소하고, 그들의 인간적 우애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장면에서 나이를 통해 얻어지는 현명함이 아닌, 직접 그 고통에 스스로 다가서면서 그것에 대한 새로운 도전만이 인간적인 문제를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은 어쩌면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결론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속마음을 숨기면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는 즐겁기도 하면서도 비극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영원한 예술의 주제이자 소재인 사랑을 주제로 다가왔다. 어쩌면 진부한 주제에 진부한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이나 내용, 그리고 화면 등이 솔직히 보였다. 그러나 모든 것에 그렇듯, 탄생의 비밀은 하늘에서 갑작스레 온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도 그 새로움 뒤에 있던 어떤 현명함이 있음은 당연한 것이리라.  중요한 것은 그것을 빚어낸 예술가의 능력이란 느낌이 든다. 그런 예술가의 능력이 30이 넘지 않은 어린 여성 연기자에게 나왔다는 것이 무척 반갑다. 영화를 이야기하기보다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좋은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미래가 기대된다. ‘워핏(2009)’의 드류 배리모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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