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 The Man from Nowhe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배트맨도, 스파이더맨도 아니었다. 소외된 것들의 구체적 대상들이 희생될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한 것은 괴력의, 신통한 힘을 지는 영웅들이 아닌, 우리들 중 하나다. 다만 그런 존재 역시 이상적인 영웅일 뿐이었다.
  영화는 상상 이상의 액션과 강인함,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연기자들로 인해 쉼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원래의 인식은 깨지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원빈은, 과거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의 약한 모습의 그를 벗어난, 내면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전당포 아저씨로서의 멋진 변신을 이루어냈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 힘들어한 그가 어린 소녀를 위해 위험한 모험을 감수하는 모습은, 어쩌면 뻔한 이야기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소화했다. 그리고 영화 ‘여행자’에서 소외 받은 어린 소녀 역에서 믿을 수 없는 느낌을 보여주며, 어린 소녀의 슬픔을 극대화한 김새론은 이번에도 그녀의 특이한 매력을 발산했다. 저 소녀라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구할 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좋은 스토리와 볼거리, 그리고 훌륭한 연기자들만이 즐비한 것만큼 우아하지도, 그리고 행복하지도 않은 공간이다. 영화는 여느 액션무비완 다르게 서글픈 오늘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가난한 자들이 즐비하게 살고 있는 공간은 아름다운 영상으로 꾸며졌어도 슬펐다. 어린 소녀가 훔쳤다는 죄로 타박을 박고 나서 걸어간 모습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의 소녀의 귀환은 어느 할머니가 쏟아낸 모습을 통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그곳은 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세계가 아닌, 가난으로 인한 고통과, 그로 인해 나약해져 버린 인간들의 위험도가 매우 높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범죄와 폭력, 그리고 힘없는 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사회적 질곡이 숨어 있는 곳이다. 그 속에 아저씨가 있다. 

   아저씨, 그리 특이한 존재는 아니다. 그냥 옆집에 있는 평범한 존재감만이 존재하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평범한 존재감을, 사회적으로 소외된 소녀를 구원하는 영웅으로 재탄생 시킨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심각한 위기로 내몰린 우리들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심심풀이 폭력물이 아닌, 사회의 한 거울이자, 그 속에 담긴 소외된 자들의 갈망을 영화화했다. 영화 속에서 우릴 구원해달라는 메아리는 영화 곳곳에서 들려왔다.
  영화 속 풍광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았다. 과묵하기만 한 존재였던 아저씨에게 세상의 어느 불쌍한 소녀의 소원은 단순했지만 어려운 문제였다. 사회적 폭력 한가운데로 끌려간 그녀에게 평범한 존재감 정도로만 느껴지는 옆집 아저씨에까지 구원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은 아무리 좋게 봐도 결국은 슬펐다. 영화의 비극은 바로 이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부터 유연화 등, 각자 알아서 살라고만 하는 냉혹한 현실과 강자들의 이야기는 어린 소녀의 비극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면서, 소외된 자들이 다시 한 번 가혹한 현실 앞에 내쳐질 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마약거래에서부터 장기 밀거래까지 세상에 알려진 폭력과 폭력배들이 다 관여했다. 어린 소년 소녀들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잘 들어야 엄마 만날 수가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무서운 할머니는 다름 아닌, 어린 소녀를 더욱 가혹하게 밀쳐내는 세상을 형상화한 보조관념일 뿐이다.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기에 기이한 운명으로 태어난 ‘아저씨’라는 영웅은 세상에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이가 더 이상 없기에 탄생된 것이다. 어쩌면 현실감이 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현실감이 없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곳의 아저씨는 사실 타인의 고달픈 삶에 무관심하게 살 확률이 더욱 높은 그런 존재일 뿐이다. 영화는 이런 역발상을 통해 갈 곳 없어 힘들어하는 자에겐 자비를 베풀었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환타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위로는 보는 내내, 슬픈 우리들의 환경을 되돌아보게 할 뿐이었고, 영화 속의 경찰의 무능함 속에서 보이는 세상의 냉혹함은 역시나 어두운 우리들의 현실을 극대화한 소재였다.  

   영화 속의 어린 소녀는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마지막에 들었던, 혼자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환상에서 환타지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귀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가 위기를 벗어난 그 때는 잠시라는 꼬리표를 다시 달게 된다. 그녀는 아저씨라는 든든한 보호막이 사라지면서 다시 한 번 버려질 수도 있는 위험한 세상으로 귀환한 것이다.
  영화는 갈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갈망을 중심으로 만든 예술작품이 그렇듯 갈망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갈망은 어쩌면 소박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혹독한 세상으로 변모만 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소박함이 얼마나 인정되고 보호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저씨’가 더욱 간절해진다. 환타지지만 그래도 염원하고 싶다. 현실과 환타지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 간 ‘아저씨’란 영화는 좋은 영화를 뛰어넘어 한 사회의 갈망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현재의 힘든 우리를 위로하고 잠시나마 보호받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느끼고 싶다. 또 다른 ‘아저씨’ 속편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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