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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올 봄 예기치 않은 초거대 쓰나미가 우리 사회를 휩쓸어버렸다. 꽃다운 아이들을 처참하게 수장시킨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격랑의 여파는 깊고 넓었다. 이와 관련하여 곳곳에서 개탄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격앙된 이들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기업의 행태와 이를 사주한 사이비 종교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 와중에 국가는 도대체 무얼 했는가 하는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는 원성도 만만찮았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공권력은 어디로 실종해버렸는지를 따져 묻는 것이다. 여기에 음모론까지 가세하여 국가와 세월호 선사가 블랙 커넥션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억측도 난무하고 있다. 사후 수습에 미적대고 은연중 증거를 은폐, 조작하려는 시도까지 보이고 있어 음모론은 갈수록 확대재생산 되는 지경이다.
[점과 선]을 읽으며 자연스레 세월호 사건이 오버랩되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눈에 비친 당시 일본 공직사회의 모습과 우리의 그것이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비리와 부정이 습속처럼 몸에 밴 그들은 음험한 계략을 다반사로 실행하고 제 잇속을 챙기는 일이라면 별의별 짓도 서슴지 않는다. 도쿄 관가와 납품업자 간 얽히고설킨 로비 커넥션과 이와 관련된 상층 엘리트들의 치졸한 행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우리 해경과 정부 당국자들도 거기서 오십보백보, 별 차이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일까? 의로운 분노를 일으킨 두 형사, 도리카이 주타로와 미하라 기이치의 활약상에서 묘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정의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른 우리의 영웅들이 그예 악한 세력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으니.
그런데 [점과 선]은 의외의 매력도 지니고 있었다. 사회구조적 모순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게 아니었다. 추리물 특유의 은근한 암시와 지적인 게임을 곳곳에 배치하여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점과 선,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며 꼬인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해결 기법은 추리물 가운데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탁월한 설정이라 하겠다. 또 하나 두드러지게 다가온 것은 도리카이 주타로 형사와 미하라 기이치의 문학적 감수성이랄까, 상황에 딱 어울리는 용어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었다. 그들은 사태의 본질을 콕콕 집어내며 주제를 호명하고 있었다. 하여 [점과 선]은 사회물에 미스터리 기법을 가미하고 직관적인 용어로 상황을 정리하는 등 다른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러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두 형사의 직관적 사태 파악 능력과 적절한 언어 표현법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식욕과 애정의 문제 : 도리카이 주타로 형사의 경우
늙다리 형사 도리카이 주타로는 지혜로운 조언자 캐릭터이다. 젊은 미하라의 멘토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새파란 후배인 미하라 형사에게 기꺼이 수사 편의를 제공하고 아이디어를 보태며, 삶의 연륜이 듬뿍 담긴 편지로 수사의욕을 북돋우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위적인 가장의 모습에다 직장에서는 상사를 성의껏 모시는 하급자 역할에 충실한, 별 두드러질 것 없는 자다. 그런 그에게 작가 세이초는 막중한 역할을 맡기고 있다. 작은 일에도 반짝 지혜로운 발상으로 다가가 이를 토대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내도록 이끈다. 그는 일견 무시해버리기 십상인 열차 식당칸의 영수증에 착안하여 사건의 얼개를 새롭게 그려낸다. 흔하디흔한 신파조의 동반자살 사건으로 치부하여 수사를 매듭지으려는 분위기가 흐르는 와중에 그는 단순 자살사건이 아님을 직감한다. 식사 영수증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던 도리카이는 우연히 결혼을 앞두고 있는 딸과의 대화를 통해 본질을 꿰뚫는다. 딸의 얘긴즉슨 연인이 식사하러 가자고 제의할 경우, 비록 포만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라도 동행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도리카이는 단번에 1인으로 표기된 영수증의 문제점을 알아차렸다.
그건 식욕이 아니라 애정의 문제라고.
그래서 동승했던 둘은 연인 관계가 아니며 이후 일정도 함께 하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이보다 더 절묘하게 사태를 정리할 수는 없을 듯하다. 명쾌한 용어로 상황의 고갱이를 파악해버렸으니 이후 수사는 급진전될 밖에. 세이초는 도리카이 형사의 입을 빌어 사건의 성격을 또렷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우연과 조작의 문제 : 미하라 기이치 형사의 경우
미하라 형사는 통상적인 추리물 주인공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다. 치밀한 논리에 집요한 의지 같은 이 분야 특유의 미덕은 기본이고 상사와의 공감과 소통능력 보유에다 직속 라인이 아닌 도리카이 형사의 조언까지 경청하는 등 유교적 덕목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추리력은 그렇게 반짝거리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끈질긴 상념 끝에 결국은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고 만다. 야스다 다쓰오 사장이 왜 도쿄역 플랫폼까지 출입 업소의 종업원을 대동했는지, 그것도 꼭 그 시각에 그 지점에 들어갔는지, 또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될 거래처 영업부장을 한밤중에 사포로역으로 왜 불러냈는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 가운데 한걸음씩 본질에 접근한다.
그는 야스다 사장의 정신세계와 행동방식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알리바이가 지나치게 완벽했던 것이다. 그는 사건이 일어났던 시각에 큐슈의 가사이만에 있는 외딴 바닷가 바위투성이 해변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점과 선, 시간과 공간 관념으로 확고하게 입증해 보이고 있다. 여기서 미하라 형사는 아귀가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도리어 부자연스럽고 짜 맞춘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낀다. 치밀한 부재증명은 역으로 존재 증명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고 말이다. 우연의 일치가 몇 번이나 겹쳐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조작된 필연이라는 점을 간파한다.
그것은 우연을 빙자한 인위적인 조작이기 십상이라고.
언어란 사고를 담는 그릇이고 행동을 유발하는 원천이다. 사태의 추이를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는 테마를 잡고 나니 다음 단계로 자연스레 이어져 결국엔 해결이라는 수순을 밟게 될 밖에.
이처럼 도리카이 형사와 미하라 형사는 상황 전개에 딱 어울리는 용어로 사건의 성격과 본질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직관력을 발휘하여 문제의 포인트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세이초는 이처럼 사태에 부합되는 언어 표현으로 복잡한 문제를 일거에 정리해버리는 묘수를 두고 있다.
하여 [점과 선]은 사회성 짙은 추리물이라는 점만으로도 다른 작품과 차별성이 두드러지지만 절묘한 표현으로 주제를 함축, 정리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매력이라 하겠다. 그러니 다들 세이초, 세이초 하는 것 아니겠나 싶다. 어떻게 일본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가 나올 수 있었는지, 미야베 미유키가 왜 그토록 세이초에 열광하며 그에게 헌정하듯 작품을 썼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