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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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동안 인류가 이룩한 과학 기술의 진보는 실로 눈부시다. 달 착륙과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 로봇의 상용화 및 사이버스페이스 구축 등 과학사의 신기원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였다.

그런데 인류가 거둔 이러한 결실은 과학자들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연원으로 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나 만화가, 시인들이 머리 속으로 그려내어 관념적으로 형상화했던 것들이 과학적 발명과 일련의 진전에 자극제나 결정적 단서로 작용했던 것이다. 작가들은 나름의 작품을 통해 기발한 상상력과 예리한 통찰, 투철한 직관을 발휘하여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떠올렸으며 그것들에 공감한 이들의 요구와 염원과 필요가 과학자들의 작업으로 이어졌다는 말이다. 베르베르의 <나무>도 이런 작품들의 전통적 미덕을 고스란히 온축하고 있는 것이기에 단순한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정치(精緻)한 미래학이자 미래의 주역이 될 신세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교육학이며 인간 존재의 의미와 그 지향을 성찰해보게 하는 인간학이라 할만하다.

베르베르는 <나무>에서 미래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일련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최근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학문 분야인 미래학은 인간의 의지와 역량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구성론(構成論)적 관점을 토대로 하고있다. 과거의 결정론(決定論)적 사고에 반하는 흐름인 것이다. 이러한 구성론적 관점에 따른 실증적인 미래 예측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의사 결정의 나무' 기법이다. 베르베르가 이 책에서 '가능성의 나무'로 부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베르베르는 <나무>에서 바람직한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의사 결정의 나무 기법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특히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과학적 지향들의 파국적 종말에 대해 섬찟한 경고를 내리고 있기도 하고 해묵은 과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참신한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떤 것은 발칙하기까지 한 근거 없는 망상 같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은 이미 상당 부분 진행중인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일견 독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짧은 이야기들을 중첩되게 교직하면 한 그루의 나무가 그려지듯 미래의 다양한 면모가 하나의 총체로 구성되게 된다. 미시적인 개별의 것들의 조합을 통하여 거시적인 미래 사회의 진면목을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과학 소설의 전통은 과학적 발명에 대한 상상과 더불어 그것이 미래 사회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해서까지 천착하고 있다. 베르베르도 마찬가지이다. 미래가 utopia가 될 것인지 아니면 distopia가 될 것인지는 우리 인간들이 어떤 마음으로 미래를 구성해 나가는가에 달려 있음을 여러 작품들을 통해 적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distopia적 모습이 예견되는 상황은 그 요인을 사전에 제거하여 파국을 막고 바람직한 utopia로 이어질 것들은 강화시켜 나가야 함을 또렷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베르베르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미래 사회를 인간적인 것으로 구성해 내기 위해서는 철저한 과학적 역량 제고와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적 결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간파하고 식별해 내며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지혜의 배양이 절실히 요구될 것이다. <나무>는 이러한 점들을 여러 차원의 소재와 이야기 구성을 통해 잘 지적하고 있으며 더구나 신세대적 감각에 맞게 짧고 경쾌한 터치의 글들로 쿨하게 씌어져 있기에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지적 향연을 제공한다 할만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미래로 이어질 오늘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더불어 미래 지향적 안목을 높이고 과학적 마인드까지 기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에 대한 반성적 성찰까지 겸하여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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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신호등 -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성찰의 거울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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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문제와 민족문제는 물론이고 전근대적 폐단까지 망라되어 있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구조적 모순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곳이 한국 사회이다. 가히 사회 문제의 풀 옵션 버전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심각한 것은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러한 모순의 눈, 구조악의 핵심에 처해 있어서인지 그것의 해악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이며 심지어 당연하게 받아들이기까지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눈을 떠서 그 해결이 절박한 문제임을 먼저 깨달은 이들은 시급히 비상등이라도 켜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혼탁한 질곡의 자장에 휘둘려 자기 소외 지경인 사람들에게 그래도 영혼이 덜 오염된 이들이 경종이라도 울려야겠기에 말이다.

그러나 맑은 영혼들의 개인적인 시도만으로는 공고한 모순의 성채를 허물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일이 깨인 이들의 사회적 연대이다. 전근대적 의식에 얽매인,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계몽시켜서 문제 해결 과정에 동참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고상하고 우아한 담론과 행동으로는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약간은 경박하고 소란하게 보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홍세화의 앞선 저작들과 글의 톤이 달라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 그들이 개인적으로 비상등을 켜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방책이 신호등을 건설하는 일일 것이다. 상시적인 의식화, 집단적 계몽을 위한 제도적인 접근 말이다. 이를 위한 사회적 역량 구축과 법규의 제정 및 개정을 위한 힘겨운 싸움에 맑은 영혼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 고단한 역할을 자임하며 혼탁한 진흙 밭에 맨발로 들어선 시대의 표상 홍세화를 따라서 맑은 영혼의 벗들이여 빨간 신호등을 건설하여 이 질곡의 땅, 모순의 구조를 바꿔 나가도록 분연히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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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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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이 인다. 어딘가에 마음이 닿는다. 그 곳은 저 반대편 극지(極地) 페루 해변이기도 하고 우리 안에 아직 퇴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예술혼의 존재 영역 같기도 하며, 순응주의에 물들지 않은 인간 본연의 결기로 충만한 지점이기도 하고, 애써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동물적 본능, 그 차디찬 비정함의 세계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의 글은 우리 마음이 가 닿기를 의식적으로 꺼리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늘 동경하고 있었거나 부채로 여겼던 곳으로 평온한 일상을 흔들며 몰고 간다. 거기에서 실체가 모호했던 우리의 마음, 인간의 본연을 또렷이 읽을 수 있게 된다.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아려오게 한다. '그것들은 결국 이런 모습들이었단 말인가.' 하는 자탄과 회한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스라이 어릴 적 순수가, 인간 본연의 소박하고 따스한 모습이 그립게도 떠오른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통해 우리를 마음의 오지(奧地), 인간의 극지로 내몰아서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면의 그늘진 곳까지 가리지 않고 드러내어 의식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파악하게 해 준, 나의 나됨을, 인류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탐사하게 해 준 스승 로맹 가리의 혜안에 경탄과 함께 머리 숙이게 된다. 이제 사숙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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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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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영 연합군이 기어이 이라크 침공을 단행한 것입니다. 9.11 테러로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이래 끊임없이 별러왔고 또 실제 이루어지기도 했던 무한 보복이 다시금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지구적 범위의 폭력이 재생산되고 있는 이런 잔인 무도한 상황에 대해 시대의 지성 하워드 진은 결코 비켜가지 않습니다.

미리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해왔다는 듯이 우리의 위선적 사고와 우유부단한 행동을 통렬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선지자적 외침은 일견 미미해 보이는 듯하나 실은 엄청난 무게의 도덕적 힘이 실려 있습니다. 미국의 침공이 국제 사회의 심정적 지지와 공감을 얻지 못하고 공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하워드 진의 목소리는 전세계 반전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깊은 울림이 되어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변화시키고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찍이 간디는 눈을 눈으로 갚는다면 전세계가 눈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한 보복의 악순환이 몰고 올 파국적 종말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워드 진도 코소보 사태 발생 당시, 밀로세비치 영도하의 모든 세르비아인들을 가차없이 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뉴욕 타임스」 토머스 프리드먼의 칼럼에 대해 '만약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온갖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낳은 각 국 지도자들을 그 국민들이 '암묵적으로' 용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우연히 토머스 프리드먼의 글을 읽은 정의로운 하느님은 당연히 인류를 절멸시킬 게다.' (p.26) 고 하며 그들의 잔학행위건 우리의 잔학행위건 어느 하나 정당화 될 수 없는, 비난받아 마땅한 인류의 재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워드 진의 생각처럼 모든 테러와 전쟁은 원천적으로 반인륜적인 악덕입니다. 그 목적과 수단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적의 보복이란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보복은 악한 방법을 필요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일방적 침공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또 무력은 인류에게 사용하기 부적절한 수단입니다. 특히 그 피해 대상은 쉽게 노출되는 어린이나 여자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무한 보복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만 합니다. 선순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 길은 우선 '이제 그만!' 이라고 외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선한 의지를 결집하여 전쟁 반대 의사를 밝혀야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관용과 이해를 통한 평화 공존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멀고 험난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워드 진이 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소중한 전범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양식과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로써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이 작동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간디가 외쳤듯이 하워드 진이 이 책에서 간곡하게 일깨웠듯이 온 인류가 온전한 두 눈을 계속 지닐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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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 - 구판 황석영 대하소설 12
황석영 지음 / 창비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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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미뤄왔던 숙원사업 하나를 해결하고자 마음먹었는데 바로 장길산 전권을 논스톱으로 독파하는 일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벼르던 일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읽기를 시작하자마자 단번에 그 자장(磁場)으로 흠뻑 빨려 들어 추운 겨울밤을 결기로 날려버릴 정도로 가열찬 들림에 휩싸이게 되었다. 때론 처연하여 가슴이 미어질 듯, 더러는 애틋한 그리움에 녹아날 듯하기도 하였고 한동안은 비장한 각오로 숙연해지기까지 했었는데, 막바지로 접어들어 글의 전체적 윤곽이 또렷이 잡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뭔가 묵직하게 나의 심중을 억누르는 것이 있어서 읽기의 진전이 제대로 되지 않았었다. 무엇 때문일까 헤아려보다가 얼마 전에 읽었던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에서 느꼈던 우리 사회의 현실이 바로 장길산에서 그리고 있는 17세기 조선의 봉건적 질곡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장길산에 녹아있는 전근대적 모순이 홍세화의 글에 비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언짢은 상념으로 나의 글읽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홍세화는 그 글에서 우리 사회를 '사회 귀족'이 지배하는 전근대적 특권사회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는 장길산의 시대 배경인 17세기말의 사회 경제적 모순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장길산의 시대에 먼저 눈을 떴던 선각들이 그렇게 타파하고자했던 봉건적 질곡이 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명시적인 신분제도는 철폐되었지만 실질적인 계급 지배와 귀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등 전근대적 성격의 사회가 이 시대에도 공고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과 17세기 사회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좀더 구체적인 근거로는 먼저 계층 구조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대물림되어 주변 계급의 자녀들은 교육이나 각종 수혜에서 배제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천출 노비들의 숙명적 멍에인 신분 세습이 이루어졌던 17세기의 그것과 같은 것이다. 또 하나는 사회 귀족들에 의해 지배받고 유린당하고 있는 일반 대중들도 조작적 권위에 눈이 부셔 특권적 지배의 실체를 또렷이 파악하거나 사회의 성격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장길산의 시대에도 최형기나 하급 서리(書吏)들같이 백성의 아픔을 함께 해야할 위치에 있었던 이들이 오히려 사대부의 하수인으로서 그들에게 위임된 작은 권세를 휘두르며 민중들을 옭죄어 놓고는, 장길산같은 이들에 대해 '어째서 이런 자들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일까?' 라며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 더 짚고 싶은 것은 시대의 아웃사이더, 즉 반항아들에 대한 증오와 경원이다. 장길산의 시대에 반항아들은 국본(國本)을 흔드는 자로 몰아 감정적 보복 차원의 철저한 제거가 이루어졌었다. 오늘날도 기득권 도전 세력에 대해서는 갖은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추호의 용납이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점들로 미루어 보아 우리 사회는 여전히 17세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성찰과 계몽을 통한 시민의식의 고양이 선결되어야 한다. 한 사회의 수준은 구성원의 의식 수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이 권리 의식을 가지게 하려면 먼저 의식화된 이들이 앞장서 이끌어야 할 것이다. 지향을 올곧게 잡아주고 물꼬를 제대로 터 주어야 각성과 고양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전근대적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유포하는 진원인 수구적 언론권력에 대한 견제운동 등이 있을 것이다. 장길산의 대단원 말미에 있는 '운주사 와불' 이야기처럼 민중의 바닷물이 차 올라야 시대의 배가 운항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도 시민 의식의 성숙이 있어야 17세기 수준의 낙후된 사회 경제적 구조를 극복하고 비로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길산이 모든 이들에게 정성을 다하고 존중하며 일깨워, 자존과 자주 의식을 지니게 감화시킨 다음, 자신의 큰 뜻을 그들과 더불어 펼쳐나가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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