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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 - 구판 ㅣ 황석영 대하소설 12
황석영 지음 / 창비 / 199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미뤄왔던 숙원사업 하나를 해결하고자 마음먹었는데 바로 장길산 전권을 논스톱으로 독파하는 일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벼르던 일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읽기를 시작하자마자 단번에 그 자장(磁場)으로 흠뻑 빨려 들어 추운 겨울밤을 결기로 날려버릴 정도로 가열찬 들림에 휩싸이게 되었다. 때론 처연하여 가슴이 미어질 듯, 더러는 애틋한 그리움에 녹아날 듯하기도 하였고 한동안은 비장한 각오로 숙연해지기까지 했었는데, 막바지로 접어들어 글의 전체적 윤곽이 또렷이 잡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뭔가 묵직하게 나의 심중을 억누르는 것이 있어서 읽기의 진전이 제대로 되지 않았었다. 무엇 때문일까 헤아려보다가 얼마 전에 읽었던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에서 느꼈던 우리 사회의 현실이 바로 장길산에서 그리고 있는 17세기 조선의 봉건적 질곡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장길산에 녹아있는 전근대적 모순이 홍세화의 글에 비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언짢은 상념으로 나의 글읽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홍세화는 그 글에서 우리 사회를 '사회 귀족'이 지배하는 전근대적 특권사회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는 장길산의 시대 배경인 17세기말의 사회 경제적 모순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장길산의 시대에 먼저 눈을 떴던 선각들이 그렇게 타파하고자했던 봉건적 질곡이 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명시적인 신분제도는 철폐되었지만 실질적인 계급 지배와 귀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등 전근대적 성격의 사회가 이 시대에도 공고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과 17세기 사회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좀더 구체적인 근거로는 먼저 계층 구조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대물림되어 주변 계급의 자녀들은 교육이나 각종 수혜에서 배제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천출 노비들의 숙명적 멍에인 신분 세습이 이루어졌던 17세기의 그것과 같은 것이다. 또 하나는 사회 귀족들에 의해 지배받고 유린당하고 있는 일반 대중들도 조작적 권위에 눈이 부셔 특권적 지배의 실체를 또렷이 파악하거나 사회의 성격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장길산의 시대에도 최형기나 하급 서리(書吏)들같이 백성의 아픔을 함께 해야할 위치에 있었던 이들이 오히려 사대부의 하수인으로서 그들에게 위임된 작은 권세를 휘두르며 민중들을 옭죄어 놓고는, 장길산같은 이들에 대해 '어째서 이런 자들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일까?' 라며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 더 짚고 싶은 것은 시대의 아웃사이더, 즉 반항아들에 대한 증오와 경원이다. 장길산의 시대에 반항아들은 국본(國本)을 흔드는 자로 몰아 감정적 보복 차원의 철저한 제거가 이루어졌었다. 오늘날도 기득권 도전 세력에 대해서는 갖은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추호의 용납이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점들로 미루어 보아 우리 사회는 여전히 17세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성찰과 계몽을 통한 시민의식의 고양이 선결되어야 한다. 한 사회의 수준은 구성원의 의식 수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이 권리 의식을 가지게 하려면 먼저 의식화된 이들이 앞장서 이끌어야 할 것이다. 지향을 올곧게 잡아주고 물꼬를 제대로 터 주어야 각성과 고양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전근대적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유포하는 진원인 수구적 언론권력에 대한 견제운동 등이 있을 것이다. 장길산의 대단원 말미에 있는 '운주사 와불' 이야기처럼 민중의 바닷물이 차 올라야 시대의 배가 운항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도 시민 의식의 성숙이 있어야 17세기 수준의 낙후된 사회 경제적 구조를 극복하고 비로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길산이 모든 이들에게 정성을 다하고 존중하며 일깨워, 자존과 자주 의식을 지니게 감화시킨 다음, 자신의 큰 뜻을 그들과 더불어 펼쳐나가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