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범우고전선 1
토마스 모어 지음 / 범우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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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캐이블 TV 영화 채널에서 방영된 '사계절의 사나이'를 보았다. 인생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대법관 시절에서부터 헨리 8세와의 불화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기까지 수년 동안에 걸친 토마스 모어의 드라마틱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런던탑에 갇혀서 옥창(獄窓)으로 스치는 사계절을 음미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시대의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오롯이 간직해왔다는 것인지 제목이 뜻하는 바는 중의적이고 모호했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모어의 심원한 내면은 또렷이 읽혀졌다. 마음의 결이 어느새 모어의 그것에 옮겨 들어가 그의 심경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 좌절이 심하거나 시대의 질곡이 처참하고 가혹할 때 우리는 흔히 초월을 꿈꾼다. 그것은 때론 도피나 일탈로 보이기도 한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꿈꾸고 그 구체적인 모습까지 구성해 내었다는 사실은 헨리 8세 당시의 영국의 상황이 어땠는지 그리하여 의식 있는 선각(先覺)들이 얼마나 부심하며 초월과 일탈을 꿈꾸고 자신만의 관념세계로 도피하려했는지 여실히 반증해주고 있다.

누적된 봉건적 폐습과 엔클로저 운동 등의 사회 변동으로 말미암아 민생의 피폐가 극에 달한 최악의 상황을 목격하고 영국 사회에 대한 기대를 접은 채 상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모어에게 결정적인 시련이 닥쳐왔다. 폭군 헨리 8세의 전횡이 극에 달한 계기가 바로 앤 블린과의 재혼문제로 불거진 로마 카톨릭과의 갈등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수장령(首長令)을 선포한 헨리 8세의 조치에 대해 침묵으로 반대 의사를 단호히 표명하였다. 그 침묵의 무게는 허다한 변설의 논증보다 더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헨리 8세의 심기를 지극히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당연히 반역자들의 감옥, 런던탑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어가 꿈꾸었던 지도자와 염원했던 세상은 지상 어디에도 없었다. 초월을 꿈꿀 수밖에, 그리하여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위안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마음의 공간으로 스스로를 유폐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소설 『유토피아』의 집필 시점은 수장령(首長令)에 대항하다가 시련을 당한 사건이 있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모어의 심성이나 내면의 지적 경향이 늘 현실에 목말라하고 이를 일거에 해결할 원대한 구상을 관념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었기에 그의 저작과 삶은 수미상관 이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의,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해서의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이라는 유토피아의 원제에서 시사하고 있듯이 모어는 중첩된 모순으로 인해 한계 상황에 처한 영국 사회를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데 있어 점진적 개량의 방법은 유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근본적인 재구성을 통해 기존 질서와는 완전 딴판인 대안 사회를 모색한 결과 유토피아라는 관념을 조출해낸 것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 민중들의 의식 수준을 감안해서인지 그 새로운 섬의 지도자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독재자로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강력한 권한에다가 지혜를 겸비하였으며 민중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민생을 해결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한 지도자에 의해 최선의 상태로 운영되는 완전히 새로운 섬 유토피아가 우리 앞에 그 정교한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모어가 유토피아의 모습을 근거까지 제시하며 세밀하게 그려낸 이후에 수많은 이상향의 모델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시대의 질곡에 갈급한 심령들의 마지막 아우성이고 도피처였다. 때론 종교적 파라다이스로 혹은 과학적 사회 변동 이론의 모습으로 더러는 수련을 통한 인간 내면이 도달하는 경지로 그것은 이해되기도 하였다. 지식 정보화 시대인 요즈음에는 정보화 사회가 실현된 모습을 유토피아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바야흐로 지상 낙원이 도래했다고 볼만도 하다.

그러나 암울한 현실을 초월하기 위해 떠올린 이상향이란 원래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할 수 없기에 이상향인 것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있는 범위의 일이라면 유토피아라는 관념으로 상정하지 않고 즉각 실천적 몰입으로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당대에 이루려고 덤벼들 성질의 것이 아니고 다만 원대하게 지향할 따름인 것이다. 또 그것은 자칫 디스토피아(distopia)로 치달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관념이다. 유토피아로 설정한 것들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큰 폐해만 끼칠 건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화사회가 매트릭스(matrix)나 판옵티콘(pan-opticon)이론을 통해 지적된 바와 같이 정보 감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며(no place = utopia) 더구나 그 관념을 현실화하려는 시도는 자칫 우리에게 디스토피아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는 우리의 머리와 가슴속에 언제까지나 새겨져 있어야 한다. 유토피아 개념이 비현실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백안시하여 우리의 의식세계에서 배제해 버린다면, 그리하여 이상향을 염원하고 동경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인류는 암울한 현실을 무슨 수로 버티며 바람직한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동기 유발과 헌신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럴 때에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해결되며 또 정체를 모면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아찔한 일이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상정한 이상형(ideal type)일 뿐이고 또 역기능이 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유토피아는 인간 개인의 내면적 위안을 위해서나 사회 집단의 더 나은 미래를 열어나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간직해야할 소중한 관념인 것이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별처럼, 도탄에 빠져있던 우리 인류에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해준, 이상향의 비전을 또렷하게 제시한 토마스 모어에게 갈급한 현실에 목말라하며 그 별을 간절히 올려다볼 모든 이들이 더 없는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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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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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스포츠 중계방송이라도 화면 구성이 평면적이거나 내용이 일상적인 수준의 밋밋한 것이면 시청자를 사로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눈과 귀를 붙박아 리모콘에 손이 가지 않게 하려고 갖가지 아이디어가 동원된다. 그 가운데 컴퓨터 그래픽이나 가상현실 효과 차용 등 현란한 편집 기법도 눈에 띄지만 여러 대의 카메라를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박진감 있고 입체적인 생생한 화면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더 흡인력이 강한 듯하다. 특히 수중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더욱 그러하다. 공중, 입수면 및 수중 내부 등 다각도로 설치된 카메라가 경기 현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또렷하게 부각시켜 흥미진진하게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아름답고 멋진 것만은 아니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중계를 볼 때면 종종 불편해지곤 한다. 우아한 자태와 절묘한 동작에 매료되어 여운을 음미하고 있자면 얼마 가지 않아 금방 환상이 깨져버리고 만다. 풀장 바닥에 설치한 카메라가 포착한 뜨악한 장면이 미감(美感)을 해치는 것이다.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물 속 발동작을 클로즈업한 것인데 우아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그것은 아등바등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치열한 생존 본능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수면 위에서 펼쳐지는 예술적이고 세련된 연기와는 동떨어진 형이하학적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걸 보고 있자니 이제껏 감탄했던 아름다운 모습조차 의미 없게 여겨졌고 오히려 추해보이기까지 하였다.


<사람 풍경>에서 김형경은 로마 카타콤의 얽히고설킨 지하 미로에 압도되었다가 출구로 나온 다음 지상을 감쪽같이 덮고 있는 잔디를 보고 발밑에 그토록 이질적이고 거대하며 복잡하고 위험한 세계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겠다며 아찔해한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인간의 내면에도 표출되지 않는 독립된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 생의 비밀을 더 많이 쥐고 있는 무의식의 영역임을 명료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 대목에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중계 장면이 겹쳐지며 나의 잠재된 내면도 마치 음산한 지하 묘지나 수중의 부산하고 때론 어이없어 보이는 발짓과 다를 게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절로 무릎이 쳐 졌다. 그 후로 김형경이 뿜어내고 있는 자장(磁場) 안에 여지없이 빨려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특유의 감성이 배어 있는 유려한 문체 속에 오롯이 녹아 있는 심리학의 세계를 쫓아가다가 나의 내면을 이끌고 있는 한 가닥 결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리고 미숙한 아이가 한 쪽 끝을 잡고 나를 함부로 당기고 있었다. 세살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조그만 아이가 빤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왠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이전의 감정과 행동들이 또렷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였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이는 자기애(自己愛)적 사랑에만 집착하는 편집을 지니고 있었다. 타인의 정서나 감정, 반응에 대해서는 무신경으로 일관하고 오로지 자신의 사랑 표현에만 급급했었다. 그간 아무 생각 없이 사랑이랍시고 행했던 일들이 상대방을 얼마나 성가시게 했을지, 더러는 스토커 같은 집요함에 치를 떨게도 만들었으리라. 그리고 그게 사실은 상대방을 진실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를 사랑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자각도 뒤따랐다. 그러니 이해나 공감이나 배려라고는 없는 일방적인 자아도취일 따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보이지 않았다.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보니 그 아이가 표출했던 분노도 자기애적 방어 기제가 작동한 것이었다. 겉으로 태연한 척 남을 배려하고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드러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9할은 내면에서 들끓고 있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이며 언제나 선하고 정당한 판단을 하는데 수준 미달로 여겨지는 타인이 수시로 자기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에 분노와 저항감이 남다를 수밖에. 그런 무의식에 억압된 분노를 종종 가까운 이웃에게 터뜨려 관계를 망치곤 하였다. 나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실망감으로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또 그 아이는 질투와 시기심의 화신이었다. 사랑의 대상을 독점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늘 불안하고 곁에 있는 것을 확인해야 안심이 되었다. 또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남의 존재가 용납되지 않았다. 내가 최고인데 네가 감히 나보다 낫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분노와 모욕감과 수치심 때문에 우울과 혼란과 불안이 고조되어 상대를 제거하고플 만큼의 파괴적인 감정이 끓어오르곤 하였다. 또 불특정 다수의 유복한 자들에게 근거 없는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상대적 박탈감으로 늘 배가 아팠다.


아이는 병리적 의존 증세도 보였다. 누군가가 전폭적인 애정을 보여주고 엄마처럼 전능한 존재가 되어 자신의 문제를 요술같이 해결해 주기만을 바랬다.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 심리적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복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역량이 박약하였다.


그는 위험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낄 때 그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삶의 한복판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다. 회피 방어 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자아와 세상의 바깥에서 서성이며 늘 겉돌기만 했다.


나는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인정중독증 환자였다. 인정받는데서 정체성을 찾았으며 인정받기 위해 일 중독자가 되었고 그럼에도 늘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면서 불안해했다. 아아! 이처럼 나는 유아적 환상에서 비롯된 온정주의적 세상 인식에 머물러 있던 어른 아이였다. 내 속에는 깨인 의식으로도 알아차리기 어렵고 맘대로 길들여지지도 않는 아이가 여럿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기괴하게 일그러진 형상으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허기진 아이인 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한다. 아니 사랑해야만 한다. 아이의 존재를 알았으니 이제 소중하게 보살피고 키워 나가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중자애(自重自愛)할 것이다. 중심을 잡고 타인의 칭찬에 들뜨거나 외부의 비판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을 지니도록 가다듬어 나갈 것이다. 나의 긍정적 측면을 거짓 겸손이나 우월감 없이 인정하고 부정적 속성도 열등감이나 비하감 없이 깨끗하게 시인할 수 있도록 부단히 정신적 단련을 해 나가겠다고 마음먹는다. 트라우마에 억눌려 거짓되거나 확장되고 위축된 자아를 극복하고 나의 나 된 모습을 제대로 세워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볼썽사나운 물 속 발동작도 무심히 보아 넘기려 한다.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실상인 것을 어쩌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냉정하게, 어쩌면 뻔뻔할 정도로 나를 다잡아 나가고자 부단히 자기 암시를 할 것이다. 나르시시즘이나 환상 없이 헛된 기대나 욕망도 접고 나와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나갈 것이다. 그래야 무의식에 억압되어 앳되게 머물러 있던 어른 아이의 틀을 벗고 환골탈태하여 진정한 내면, 본래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근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빛나는 지혜와 창조의 문을 열 수 있는 작은 틈새가 어렴풋이 보일 것이다.


이동 통신 단말기 광고에서 김태희가 원빈에게 말했다. “나의 문제점 둘, 오빠의 문제점은 여섯 가지” 원빈이 받았다. “어째서 내건 여섯 가지야?” 그래도 김태희는 문제점투성이인 원빈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나의 문제점은 여섯 가지가 넘는다. 그래도 내가 나인 것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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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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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미롭게 속삭이던 나나 무스쿠리의 목소리가 어느새 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테이프 레코더의 볼륨을 높였다. 쓰달픈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리 잭스가 불렀던 <시즌 인 더 선(Seasons in the sun)>을 리메이크한 곡이었는데 무스쿠리의 또렷하면서도 미묘한 떨림이 배어있는 음색이 원곡의 의미를 절절하게 살려내고 있었다.  문외한인 나도 내용이 빠안히 그려지도록 노랫말 하나하나, 작은 멜로디라인까지 귀에 쏙 들어올 정도였다.  한동안 흠뻑 취해있는데 2절인가로 넘어가며 아버지에게 마지막 유언 같은 메시지를 남기는 부분에 이르자 그만 아찔해지며 눈앞이 온통 하얘져왔다. “I was black sheep of the family”임을 고백하는 대목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눈두덩을 덥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어느새 아려왔다. 교수대 위에서 자신의 생을 돌아보던 윤수의 심경이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공지영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그리고 있는 두 아이 윤수와 유정, 그들은 블랙 쉽(black sheep)이었다. 타자나 소속 집단으로부터 보호받고 존중되는 존재가 아닌 배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유정이 윤수를 처음 보는 순간 “저 앤 내 과(科)네” 하고 단번에 알아차렸던 그 동질감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모성의 결핍, 가족들과 사회의 백안시 속에 그들은 위악(僞惡)을 저지르는 블랙 쉽(black sheep)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것이다. 기어이 죽음의 열차를 타겠다고 무모하게 나아갔던 것이다. 자신을 해치고 파멸시켜 나감으로써 주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짜릿하게 즐기고자하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달라는 간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을. 하여 쓰달픈 삶의 곡절과 분열적 내면이 윤수와 유정의 얼굴에 고스란히 어려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서로에게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끌렸으리라.


  블랙 쉽(black sheep)들은 자의식이 강하여 타인이 들어갈 조금의 여지도 마음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 얼음벽 같은 방어적 기제를 녹이고 낯설어 하는 그들에게 다가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다가가려는 자가 정신적,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자신은 구별된 타자이며 일방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존재라는 인상을 풍길 때 그들의 심리를 읽은 블랙 쉽(black sheep)들은 더욱 폐쇄된 성안에 자신을 가두려 할 것이다. 그 여린 심성이 이런 모멸적 상황을 도무지 감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함께 비를 맞으며 너나없이 보잘것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공감케 하는 방법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동병상련의 마음이 비로소 그 빙벽을 녹이고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할 것이다.


  유정은 윤수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그를 측은히 여겨 선행을 베풀며 돌보고 있다는 시혜자(施惠者)의 관점을 지니지 않았다.  자신부터 먼저 뼈아픈 가슴의 응어리를 진솔하게 내어놓았다.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고백의 시간을 통과 의례처럼 거쳤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내면에 지닌 채 힘겹게 버티어왔을 또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윤수를 바라보며 인간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이는 오히려 유정 자신의 아픔의 본질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정이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것이 자신이 아니라 타자, 강간범인 오빠였음을 비로소 깨닫게도 되었다. 그러자 이제 윤수도, 교도관도 마음 한켠 깊숙이 담아두었던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풀어 보이기 시작한다. 폭우 속에 떨고 있는 이에게 우산을 주거나 돈을 내밀지 않고 함께 흠뻑 젖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동정이나 연민보다 그냥 인간적인 끌림에 따른 계산 없는 행동, 본연의 정서가 이끄는 대로 스스럼없이 나아간 일이었다. 돕는 것의 최선의 형태는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는 사형수 출신의 대학 교수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장면이었다.


  함께 비를 맞는 공감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는 일사천리로 정서적 연대감을 쌓아갈 수 있게 된다. 그의 일이 바로 나의 그것처럼 여겨지는 감정이입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윤수와 유정 둘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작고 미미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옭죄고 있던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게 된다. 그러자 본래의 맑고 선한 모습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거듭난 내면이 투영된 것이었다. 극악무도한 강간살인범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세상은 그 변화를 감지하고 알아주지 않았다. 여전히 윤수는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켜야할 파렴치한 흉악범에 지나지 않았다. 다수의 강자들은 한번 자신들의 눈 밖에 난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은 철저히 배제해버리고자 한다. 또 그 수단으로 사형이라는 살인적 제도를 사용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같은 블랙 쉽(black sheep)이고 똑같이 죽임-그것이 타인이든 자신이든-을 시도하였지만 한 사람은 대학 교수에다 각종 특권을 향유하며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지탄받는 구제불능의 사형수가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형제도는 지배세력의 안녕을 거스르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변부 계층을 축출하기 위하여 기득권 계층이 설정한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장치인 것이 확인된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그것의 본질은 편견에 입각한 복수인 것이다. 유정은 사형제도의 이러한 이면과 본질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의식은 물론 윤수와 함께 비를 맞으며 공감하고 연대하는 가운데 싹텄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사형제도에 대한 분노, 그런 모순된 제도의 희생양으로서의 운명을 고스란히 안고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고 있는 윤수에 대한 측은함이 깊은 울림이 되어 자신의 일로 다가온 것이다.


  97년 12월, 윤수는 결국 한 마리 새가 되어 안타까이 떠나갔다. 그러나 형이 집행되던 순간 윤수는 결코 불행하다고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생의 마지막 얼마간을 그야말로 행복하게 보냈다고 추억했을 것이다. 블랙 쉽(black sheep) 둘이서 알콩달콩 작지만 알짜인 시간들을 엮어나갔던 것이다. 자신도 꼭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로 남에게 대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의미 있게 삶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윤수와 유정은 더 이상 블랙 쉽(black sheep)의 숙명을 안고 삶의 무게를 곱씹으며 힘겹게 버티지 않아도 되었던 행복한 아이들이었다. 모니카 고모의 축복과 비호 속에 가여운 아이 둘이 서로를 알아보고 정겹게 동행하며 그들만의 행복한 시간을 누렸던 것이다.


  <시즌 인 더 선(Seasons in the sun)>의 클로징 부분에서 무스쿠리는 생을 돌이켜 성찰하듯 고요히 읊조리고 있었다. “We had joy, we had fun. We had seasons in the sun."  내게는 윤수의 고백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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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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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헌 이후 우리 헌정사에서 따스한 구석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 가부장적 대통령들의 집권 기간은 오로지 초월적 지도자 일인의 권위적 압제의 풍경으로만 채워진 시대였다. 나라의 근본 구조를 설정하고 우리들 삶의 현장을 규율할 원초적 틀인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여 민주 정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입헌주의가 실현되는 모습, 문명국가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질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겨우 이름으로만 남아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헌법이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비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헌정 질서 파괴가 여반장(如反掌)으로 이루어지고 그 장본인, 국헌을 문란케 한 자들이 오히려 국가 기강 확립과 정의 사회 구현을 부르짖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가 통용된 살벌하고 스산한 풍경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것은 우리 헌법이 진실로 살아있는 전범(典範)이 아니라 명목적(名目的)이거나 장식적(裝飾的)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음을 반증해주고 있는 거울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 헌법은 독재자의 폭압적 지배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했을 뿐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아닐 것이다. 그런 동토의 왕국을 우리는 견뎌왔다.


그러나 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사정은 조금 나아진 듯 하다. 권위주의적 독재가 청산되어 상부 구조의 민주화는 상당 부분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헌법의 풍경에 조금이나마 훈기가 스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들 삶의 면모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아직도 우리의 의식 세계는 근대적인 헌법을 생활로서 구현하기에 너무나 미흡해 보인다. 국가주의적 압제를 여전히 유효한 통치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데올로기적 봉쇄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극단적 배제가 생활 저변에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정착되어야 헌법의 이념이 우리 삶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인데 그간의 강압적 지배와 상징 조작에 길들여져 개인의 자유로운 공간을 누려보지 못한 다수의 대중들이 자신들의 의식 세계의 허구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를 선험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여 다수의 논리만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문화가 지배하는데 오히려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과 관련하여서는 아직 살풍경 그대로인 셈이다. 이러한 풍경에 김두식은 준엄하게 그러면서도 애정이 깃든 시선으로 메스를 가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헌법의 이념이 구현되려면 시민 개개인이 헌법 정신을 이해하여 이를 내면화하고 있어야 한다. 그 헌법 정신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김두식은 자유민주주의 원리를 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개인의 영역이 전폭적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다. 개인의 영역 가운데 신체의 자유와 더불어 양심과 사상의 자유의 소중함에 김두식은 방점을 찍고 있다. 개인의 정신세계는 국가나 사회, 다른 가치 기준을 지닌 타인으로부터 간섭받거나 침해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최소한의 원칙은 우리 사회 여러 영역에서 허다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김두식은 다양한 사례로 예증하고 있다. 폭압적 문화에 길들여진 시민 개개인이 이제 그러한 문화의 신봉자가 되어 자신의 논리를 강변하며 그 관철을 위해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우리 헌법의 풍경을 바꾸기 위해서는 타자와 이질적인 집단에 대해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여 정신적 영역의 독자성을 존중해 주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와 생각이나 행동 특성이 달라서 참고 보아 넘기기 힘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태도의 내면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약자들을 대할 때 이러한 원칙은 철칙으로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두식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피의자의 말하지 않을 권리, 즉 묵비권의 보장에 대한 것이다. 아무리 의심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또 자신의 인격이 상대방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되게 되면 자존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하지 않고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할 권리가 강조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지극히 당연한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개인의 자아가 진정 타인으로부터 부당하게 침해받거나 백안시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흉악한 범죄 혐의가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사회에서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규범이라 하겠다.


타인과 약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사회적 미덕으로 자리 매김하여 생활 저변에서 실천될 때,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의 공간이 제대로 확보될 때 우리는 그간의 살풍경에 안타까워했던 강박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다. 헌법에 기대어 고즈넉하면서도 따뜻한 훈풍이 불어오는 인간미 넘치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는 사회를 우리는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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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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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원래 새로 접하게되는 풍경이나 주변의 사회적 상황을 자신의 내면에 비추어 지극히 사적으로 해석하기 일쑤인 개인적 체험의 과정이다. 이를 통해 한 개체로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자각하기도 하고 때론 약삭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기도 한다. 바람의 딸 한비야의 여행도 처음에는 그러하였다. 그런데 이제 한비야에게서는 조금 다른 냄새가 난다. 그동안 보여준 여행의 기록들은 한 인간이 어떤 거역할 수 없는 벽(癖)에 사로잡혀 지구를 세 바퀴 반씩이나 돌아보고도 또다시 떠나고 싶어하는 바램으로 꽉 찬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약간은 센티하고 사치스런 단 맛이 느껴졌다면 이번 저작에서는 단순히 개인의 내면 치료용이 아니라 타자와 인류 사회의 아픈 구석까지 속속들이 어루만지듯 시선이 가 닿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다가가 특유의 친화력으로 하나가 되어 제 몸같이 보살피는 모습에서는 그야말로 인간미가 물씬 풍겨나고 있다. 어쩌면 구수한 장맛 같기도 하고 질리지 않는 향이 그윽하게 배어 나오고 있는 듯도 하다.  그녀의 삶이 깊어지듯 여행의 의미도 더욱 심장해지고 있다.

오지 여행가와 긴급 구호 활동가, 둘 다 어떤 고난이 닥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담대히 나아간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관심과 지향이 개인적 범주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대상에게까지 눈길을 돌리고 있는지에 따라 성격이 확연히 구분되는 일이다.  국제 NGO 조직인 월드비전 소속으로 극심한 위험 지역에 파견되어 긴급 구호 활동을 벌이는 것은 이미 여자 혼자의 몸으로 오지 여행을 통해 허다한 고난을 이겨낸 한비야에게 어쩌면 그다지 새롭거나 힘겨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 의미와 책임감의 무게는 이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차대할 것이기에 심적 부담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비야가 이제 그만 풍찬노숙의 힘겨운 생활을 접고 편히 안식할 때도 되었는데 왜 저리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목숨을 담보로 아무런 보상도 없는 그 험한 일을 하고있는지 가끔 의아해질 때가 있다. 타고난 방랑벽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하기엔 뭔가 미흡한 면이 있고 사회적 명사의 반열에 오른 자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하고 있다는 정신적 자기 만족감을 향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기엔 너무 불순하고 지나친 감이 든다. 아마 짐작컨대 그것은 한비야의 심성에 기인한 듯 하다. 오지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보여주었지만 그는 타고난 인도주의자이다. 접하는 이가 누구이건 간에 살갑게 다가가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여행의 과정에서 경험한 모순적 사회 구조와 그 희생양으로서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 등 사회적 의식에 눈뜨게 된 것도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된 하나의 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연륜이 들어서인지 타자의 처지에 공감하여 동병상련의 정을 쉬이 느끼는 지경이 된 것도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긴급구호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외부자, 시혜자로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동류의식을 느끼며 자기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일원으로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다. 우월적 시선이 아닌 함께 비를 맞아주는 동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친근하게 다가가니 상대방도 부담감과 자격지심을 떨치고 도움만 받는 궁핍한 존재에서 비로소 하나의 인간으로 당당하게 서서 오히려 한비야에게 배려의 손길을 뻗치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타고난 심성에다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면서 깨우치게된 사회에 대한 의식과 살아온 연륜까지 더해져서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일에 기꺼이 나서게 된 것이리라.

오늘도 일상에 틀에 옭죄어있는 우리들 상상력의 한계를 훌쩍 넘어 안온한 휴식에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주저 없이 고난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한비야 그녀에게서는 이제 푸근한 누이와 엄마에게서 느낄 수 있는 모성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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