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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감미롭게 속삭이던 나나 무스쿠리의 목소리가 어느새 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테이프 레코더의 볼륨을 높였다. 쓰달픈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리 잭스가 불렀던 <시즌 인 더 선(Seasons in the sun)>을 리메이크한 곡이었는데 무스쿠리의 또렷하면서도 미묘한 떨림이 배어있는 음색이 원곡의 의미를 절절하게 살려내고 있었다. 문외한인 나도 내용이 빠안히 그려지도록 노랫말 하나하나, 작은 멜로디라인까지 귀에 쏙 들어올 정도였다. 한동안 흠뻑 취해있는데 2절인가로 넘어가며 아버지에게 마지막 유언 같은 메시지를 남기는 부분에 이르자 그만 아찔해지며 눈앞이 온통 하얘져왔다. “I was black sheep of the family”임을 고백하는 대목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눈두덩을 덥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어느새 아려왔다. 교수대 위에서 자신의 생을 돌아보던 윤수의 심경이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공지영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그리고 있는 두 아이 윤수와 유정, 그들은 블랙 쉽(black sheep)이었다. 타자나 소속 집단으로부터 보호받고 존중되는 존재가 아닌 배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유정이 윤수를 처음 보는 순간 “저 앤 내 과(科)네” 하고 단번에 알아차렸던 그 동질감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모성의 결핍, 가족들과 사회의 백안시 속에 그들은 위악(僞惡)을 저지르는 블랙 쉽(black sheep)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것이다. 기어이 죽음의 열차를 타겠다고 무모하게 나아갔던 것이다. 자신을 해치고 파멸시켜 나감으로써 주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짜릿하게 즐기고자하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달라는 간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을. 하여 쓰달픈 삶의 곡절과 분열적 내면이 윤수와 유정의 얼굴에 고스란히 어려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서로에게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끌렸으리라.
블랙 쉽(black sheep)들은 자의식이 강하여 타인이 들어갈 조금의 여지도 마음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 얼음벽 같은 방어적 기제를 녹이고 낯설어 하는 그들에게 다가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다가가려는 자가 정신적,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자신은 구별된 타자이며 일방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존재라는 인상을 풍길 때 그들의 심리를 읽은 블랙 쉽(black sheep)들은 더욱 폐쇄된 성안에 자신을 가두려 할 것이다. 그 여린 심성이 이런 모멸적 상황을 도무지 감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함께 비를 맞으며 너나없이 보잘것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공감케 하는 방법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동병상련의 마음이 비로소 그 빙벽을 녹이고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할 것이다.
유정은 윤수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그를 측은히 여겨 선행을 베풀며 돌보고 있다는 시혜자(施惠者)의 관점을 지니지 않았다. 자신부터 먼저 뼈아픈 가슴의 응어리를 진솔하게 내어놓았다.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고백의 시간을 통과 의례처럼 거쳤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내면에 지닌 채 힘겹게 버티어왔을 또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윤수를 바라보며 인간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이는 오히려 유정 자신의 아픔의 본질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정이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것이 자신이 아니라 타자, 강간범인 오빠였음을 비로소 깨닫게도 되었다. 그러자 이제 윤수도, 교도관도 마음 한켠 깊숙이 담아두었던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풀어 보이기 시작한다. 폭우 속에 떨고 있는 이에게 우산을 주거나 돈을 내밀지 않고 함께 흠뻑 젖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동정이나 연민보다 그냥 인간적인 끌림에 따른 계산 없는 행동, 본연의 정서가 이끄는 대로 스스럼없이 나아간 일이었다. 돕는 것의 최선의 형태는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는 사형수 출신의 대학 교수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장면이었다.
함께 비를 맞는 공감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는 일사천리로 정서적 연대감을 쌓아갈 수 있게 된다. 그의 일이 바로 나의 그것처럼 여겨지는 감정이입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윤수와 유정 둘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작고 미미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옭죄고 있던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게 된다. 그러자 본래의 맑고 선한 모습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거듭난 내면이 투영된 것이었다. 극악무도한 강간살인범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세상은 그 변화를 감지하고 알아주지 않았다. 여전히 윤수는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켜야할 파렴치한 흉악범에 지나지 않았다. 다수의 강자들은 한번 자신들의 눈 밖에 난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은 철저히 배제해버리고자 한다. 또 그 수단으로 사형이라는 살인적 제도를 사용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같은 블랙 쉽(black sheep)이고 똑같이 죽임-그것이 타인이든 자신이든-을 시도하였지만 한 사람은 대학 교수에다 각종 특권을 향유하며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지탄받는 구제불능의 사형수가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형제도는 지배세력의 안녕을 거스르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변부 계층을 축출하기 위하여 기득권 계층이 설정한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장치인 것이 확인된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그것의 본질은 편견에 입각한 복수인 것이다. 유정은 사형제도의 이러한 이면과 본질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의식은 물론 윤수와 함께 비를 맞으며 공감하고 연대하는 가운데 싹텄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사형제도에 대한 분노, 그런 모순된 제도의 희생양으로서의 운명을 고스란히 안고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고 있는 윤수에 대한 측은함이 깊은 울림이 되어 자신의 일로 다가온 것이다.
97년 12월, 윤수는 결국 한 마리 새가 되어 안타까이 떠나갔다. 그러나 형이 집행되던 순간 윤수는 결코 불행하다고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생의 마지막 얼마간을 그야말로 행복하게 보냈다고 추억했을 것이다. 블랙 쉽(black sheep) 둘이서 알콩달콩 작지만 알짜인 시간들을 엮어나갔던 것이다. 자신도 꼭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로 남에게 대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의미 있게 삶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윤수와 유정은 더 이상 블랙 쉽(black sheep)의 숙명을 안고 삶의 무게를 곱씹으며 힘겹게 버티지 않아도 되었던 행복한 아이들이었다. 모니카 고모의 축복과 비호 속에 가여운 아이 둘이 서로를 알아보고 정겹게 동행하며 그들만의 행복한 시간을 누렸던 것이다.
<시즌 인 더 선(Seasons in the sun)>의 클로징 부분에서 무스쿠리는 생을 돌이켜 성찰하듯 고요히 읊조리고 있었다. “We had joy, we had fun. We had seasons in the sun." 내게는 윤수의 고백으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