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범우고전선 1
토마스 모어 지음 / 범우사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캐이블 TV 영화 채널에서 방영된 '사계절의 사나이'를 보았다. 인생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대법관 시절에서부터 헨리 8세와의 불화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기까지 수년 동안에 걸친 토마스 모어의 드라마틱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런던탑에 갇혀서 옥창(獄窓)으로 스치는 사계절을 음미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시대의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오롯이 간직해왔다는 것인지 제목이 뜻하는 바는 중의적이고 모호했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모어의 심원한 내면은 또렷이 읽혀졌다. 마음의 결이 어느새 모어의 그것에 옮겨 들어가 그의 심경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 좌절이 심하거나 시대의 질곡이 처참하고 가혹할 때 우리는 흔히 초월을 꿈꾼다. 그것은 때론 도피나 일탈로 보이기도 한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꿈꾸고 그 구체적인 모습까지 구성해 내었다는 사실은 헨리 8세 당시의 영국의 상황이 어땠는지 그리하여 의식 있는 선각(先覺)들이 얼마나 부심하며 초월과 일탈을 꿈꾸고 자신만의 관념세계로 도피하려했는지 여실히 반증해주고 있다.

누적된 봉건적 폐습과 엔클로저 운동 등의 사회 변동으로 말미암아 민생의 피폐가 극에 달한 최악의 상황을 목격하고 영국 사회에 대한 기대를 접은 채 상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모어에게 결정적인 시련이 닥쳐왔다. 폭군 헨리 8세의 전횡이 극에 달한 계기가 바로 앤 블린과의 재혼문제로 불거진 로마 카톨릭과의 갈등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수장령(首長令)을 선포한 헨리 8세의 조치에 대해 침묵으로 반대 의사를 단호히 표명하였다. 그 침묵의 무게는 허다한 변설의 논증보다 더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헨리 8세의 심기를 지극히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당연히 반역자들의 감옥, 런던탑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어가 꿈꾸었던 지도자와 염원했던 세상은 지상 어디에도 없었다. 초월을 꿈꿀 수밖에, 그리하여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위안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마음의 공간으로 스스로를 유폐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소설 『유토피아』의 집필 시점은 수장령(首長令)에 대항하다가 시련을 당한 사건이 있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모어의 심성이나 내면의 지적 경향이 늘 현실에 목말라하고 이를 일거에 해결할 원대한 구상을 관념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었기에 그의 저작과 삶은 수미상관 이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의,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해서의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이라는 유토피아의 원제에서 시사하고 있듯이 모어는 중첩된 모순으로 인해 한계 상황에 처한 영국 사회를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데 있어 점진적 개량의 방법은 유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근본적인 재구성을 통해 기존 질서와는 완전 딴판인 대안 사회를 모색한 결과 유토피아라는 관념을 조출해낸 것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 민중들의 의식 수준을 감안해서인지 그 새로운 섬의 지도자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독재자로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강력한 권한에다가 지혜를 겸비하였으며 민중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민생을 해결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한 지도자에 의해 최선의 상태로 운영되는 완전히 새로운 섬 유토피아가 우리 앞에 그 정교한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모어가 유토피아의 모습을 근거까지 제시하며 세밀하게 그려낸 이후에 수많은 이상향의 모델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시대의 질곡에 갈급한 심령들의 마지막 아우성이고 도피처였다. 때론 종교적 파라다이스로 혹은 과학적 사회 변동 이론의 모습으로 더러는 수련을 통한 인간 내면이 도달하는 경지로 그것은 이해되기도 하였다. 지식 정보화 시대인 요즈음에는 정보화 사회가 실현된 모습을 유토피아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바야흐로 지상 낙원이 도래했다고 볼만도 하다.

그러나 암울한 현실을 초월하기 위해 떠올린 이상향이란 원래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할 수 없기에 이상향인 것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있는 범위의 일이라면 유토피아라는 관념으로 상정하지 않고 즉각 실천적 몰입으로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당대에 이루려고 덤벼들 성질의 것이 아니고 다만 원대하게 지향할 따름인 것이다. 또 그것은 자칫 디스토피아(distopia)로 치달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관념이다. 유토피아로 설정한 것들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큰 폐해만 끼칠 건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화사회가 매트릭스(matrix)나 판옵티콘(pan-opticon)이론을 통해 지적된 바와 같이 정보 감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며(no place = utopia) 더구나 그 관념을 현실화하려는 시도는 자칫 우리에게 디스토피아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는 우리의 머리와 가슴속에 언제까지나 새겨져 있어야 한다. 유토피아 개념이 비현실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백안시하여 우리의 의식세계에서 배제해 버린다면, 그리하여 이상향을 염원하고 동경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인류는 암울한 현실을 무슨 수로 버티며 바람직한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동기 유발과 헌신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럴 때에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해결되며 또 정체를 모면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아찔한 일이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상정한 이상형(ideal type)일 뿐이고 또 역기능이 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유토피아는 인간 개인의 내면적 위안을 위해서나 사회 집단의 더 나은 미래를 열어나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간직해야할 소중한 관념인 것이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별처럼, 도탄에 빠져있던 우리 인류에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해준, 이상향의 비전을 또렷하게 제시한 토마스 모어에게 갈급한 현실에 목말라하며 그 별을 간절히 올려다볼 모든 이들이 더 없는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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