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헌 이후 우리 헌정사에서 따스한 구석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 가부장적 대통령들의 집권 기간은 오로지 초월적 지도자 일인의 권위적 압제의 풍경으로만 채워진 시대였다. 나라의 근본 구조를 설정하고 우리들 삶의 현장을 규율할 원초적 틀인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여 민주 정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입헌주의가 실현되는 모습, 문명국가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질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겨우 이름으로만 남아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헌법이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비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헌정 질서 파괴가 여반장(如反掌)으로 이루어지고 그 장본인, 국헌을 문란케 한 자들이 오히려 국가 기강 확립과 정의 사회 구현을 부르짖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가 통용된 살벌하고 스산한 풍경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것은 우리 헌법이 진실로 살아있는 전범(典範)이 아니라 명목적(名目的)이거나 장식적(裝飾的)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음을 반증해주고 있는 거울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 헌법은 독재자의 폭압적 지배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했을 뿐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아닐 것이다. 그런 동토의 왕국을 우리는 견뎌왔다.


그러나 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사정은 조금 나아진 듯 하다. 권위주의적 독재가 청산되어 상부 구조의 민주화는 상당 부분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헌법의 풍경에 조금이나마 훈기가 스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들 삶의 면모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아직도 우리의 의식 세계는 근대적인 헌법을 생활로서 구현하기에 너무나 미흡해 보인다. 국가주의적 압제를 여전히 유효한 통치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데올로기적 봉쇄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극단적 배제가 생활 저변에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정착되어야 헌법의 이념이 우리 삶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인데 그간의 강압적 지배와 상징 조작에 길들여져 개인의 자유로운 공간을 누려보지 못한 다수의 대중들이 자신들의 의식 세계의 허구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를 선험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여 다수의 논리만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문화가 지배하는데 오히려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과 관련하여서는 아직 살풍경 그대로인 셈이다. 이러한 풍경에 김두식은 준엄하게 그러면서도 애정이 깃든 시선으로 메스를 가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헌법의 이념이 구현되려면 시민 개개인이 헌법 정신을 이해하여 이를 내면화하고 있어야 한다. 그 헌법 정신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김두식은 자유민주주의 원리를 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개인의 영역이 전폭적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다. 개인의 영역 가운데 신체의 자유와 더불어 양심과 사상의 자유의 소중함에 김두식은 방점을 찍고 있다. 개인의 정신세계는 국가나 사회, 다른 가치 기준을 지닌 타인으로부터 간섭받거나 침해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최소한의 원칙은 우리 사회 여러 영역에서 허다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김두식은 다양한 사례로 예증하고 있다. 폭압적 문화에 길들여진 시민 개개인이 이제 그러한 문화의 신봉자가 되어 자신의 논리를 강변하며 그 관철을 위해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우리 헌법의 풍경을 바꾸기 위해서는 타자와 이질적인 집단에 대해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여 정신적 영역의 독자성을 존중해 주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와 생각이나 행동 특성이 달라서 참고 보아 넘기기 힘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태도의 내면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약자들을 대할 때 이러한 원칙은 철칙으로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두식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피의자의 말하지 않을 권리, 즉 묵비권의 보장에 대한 것이다. 아무리 의심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또 자신의 인격이 상대방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되게 되면 자존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하지 않고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할 권리가 강조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지극히 당연한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개인의 자아가 진정 타인으로부터 부당하게 침해받거나 백안시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흉악한 범죄 혐의가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사회에서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규범이라 하겠다.


타인과 약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사회적 미덕으로 자리 매김하여 생활 저변에서 실천될 때,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의 공간이 제대로 확보될 때 우리는 그간의 살풍경에 안타까워했던 강박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다. 헌법에 기대어 고즈넉하면서도 따뜻한 훈풍이 불어오는 인간미 넘치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는 사회를 우리는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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