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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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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아니 만국 공통이리라. 악의 세력, 블랙 커넥션이 사실상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 말이다. 그 세력은 대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그럴듯한 가면으로 감쪽같이 존재의 정체성을 위장하고 있는 이들이 있고 더러는 에둘러 자신들을 드러내어 신비감을 자아내기기도 하며 최악의 경우 노골적으로 위력을 과시하는 하수들도 있다. 니시무라는 아마 두 번째 경우가 아닐까 한다. 

그는 첫 번째 이들의 세계를 경멸한다. 쓰리는 그들에 대한 통쾌한 복수 차원에서 행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도 없는 듯하다. 다만 그들에게 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괴로워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악의 커넥션은 필연적으로 세 번째 세력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니시무라 같이 사람의 생명과 신체에는 위해를 가하지 않고 또 대상도 선별하여 표면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그래서 크게 반사회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들 만이라면 나름대로 그 세계를 즐길만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 않아 냄새를 맡은 하수들이 주변에 꼬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속칭 무대뽀이기 일쑤고. 하여 니시무라도 기자키 같은 인간들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강요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자평하며 쓰리(소매치기)를 즐기던 니시무라는 결국 예정되어 있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소재가 광대무변하다는 점. 어떤 제한, 특히 자기 검열이 없다는 점이다. 반사회적 내용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체나 담고 있는 메시지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런 검증이 된 작품만 국내에 소개되는 이유에서이겠지만 말이다. 나카무라 후미노리도 신예 작가라 하지만 문체도 간결, 참신하고 내용의 깊이도 나름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소매치기라는 주인공의 직업에 걸맞지 않게 인생을 성찰하는 대목이 많이 묘사되고 있는데 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것이라 본다. 꽤 괜찮은 작품 하나를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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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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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형성사를 그린 것으로 잘 읽히지만 우리의 치부를 건드려서인지 심란하게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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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 마종기 시작詩作 에세이
마종기 지음 / 비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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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의 어느 저녁, 항구에서 노을을 보고 있던 한 소년의 찬란한 놀라움과 경외심에 찬 눈동자에 남았다가 그날 밤 소년의 꿈속에서 깨끗한 아름다움을 잠시 빛내고 사라져주기를 바란다.(아 그 가난하던 소년은 혹시 나였던가?)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시가 한국 문학사를 빛낸 걸작으로 거창하게 기억되는 것보다 시를 읽어 준 사람의 가슴에 오롯이 남기를 바란다는 마종기 시인은 정말 시인답다. 그리고 그는 소년임에 틀림없다. 이런 감수성을, 또 꿈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에 말이다. 그의 진가는 모 방송국 심야 낭송 프로그램인 <낭독의 발견>을 통해 진작 알아보았다. 그 전에도 시는 몇 편 접한 적이 있었지만 무덤덤했던 터였는데 그 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읽던 시인이 내뿜는 아우라, 그 도도한 울림에 온 몸이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청년, 아니 소년의 수줍은 듯 순수한 성정이 배어나오는 외모에 온화한 음성으로 잔잔하게 낭송하는 것을 들으며 문학의 향기에 인간의 매력에 한껏 취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시의 울림에도 자연 공감이 되었던 것일 게다. 그때 나는 시적 화자인 마종기 시인이 된 듯, 혹은 아빠와 얘기를 나누는 딸아이인 것처럼 울렁거렸다. 

마종기 시인이 시작 에세이를 펴냈다. 남다른 인생 역정이었고 더구나 내밀한 감성의 촉수가 유난히도 발달했던 터이니 시에 배어 있는 사연도 각별할밖에. 외국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고 외국어를 일상어로 쓰면서 모국어로 된 시를 발표해 온 시인은 시종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가슴 한켠 새겨진 옹이자국이 그대로 읽히는 듯했다. 더러는 눈물의 흔적이 선연히 어려 있기도 했다. 하니 사연은 담담한 듯 절절했고 무심한 듯하면서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 중 누이동생에 대해 쓴 ‘연가 4’가 특히 아리게 다가왔다.

연가 4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망각의 해변에
몸을 열어 눕히고
행복한 우리 누이여

쓸려간 인파는
아직도 외면하고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사연을 모른다면 일견 사랑을 노래한 관념적인 시라고 치부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열편이 넘는 연가 시리즈가 하나 같이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노래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이 시는 바로 시인의 누이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거라는 걸 알면 아! 하고 눈이 확 뜨일 것이다. 구절 하나하나에 박혀있는 생의 곡절이 선하게 그려지게 될 것이니 말이다. 누구보다 착하고 똑똑하고 예뻤던 시인의 누이가 여대 1학년 때 집안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더니 결국 남편에게 혼쭐이 나 이혼의 아픔을 겪은 다음 외국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를 하고 재혼에도 성공한 다음 이제 사회봉사에 매진하는 등 굴곡 많은 인생 유전을 거듭했는데, 그 과정과 고비마다의 아픔이, 그리고 이제 막 누리게 된 행복과 사랑이 이 시에 절절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러면서 누이가 어릴 때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고 문학에 빠지는 등 감성이 풍부했었는데 세파에 찌들어선지 메마른 생활인이 되어버렸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하고 있기도 했다. 시인은 이처럼 시를 쓸 당시의 생각이나 주변 상황,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의 뿌리 같은 것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니 그의 시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오롯이 읽어낼 수 있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얘기를 듣자니 작가의 말에서 들었던 고백이 되살아났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그 누구도 아닌 외로웠던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음을 수줍게 밝힌 것 말이다. 고국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나 가족 친지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시를 쓴 게 실은 자신이 위로받고 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우아하게 포장하지 않고, 또 자기 연민에 빠져있지도 않다. 담담하게 사랑의 대상이었던 시에 대해, 자신과 주변인들의 삶과 생각에 대해 목소리를 낮추고 내밀하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진솔하게 다가오는 힘을 지니고 있달 밖에. 하여 이 한권의 책으로 마종기 시인의 내면을, 그의 시의 속살을 상당 부분 읽을 수 있어서 유쾌했고 한편으론 아릿한 연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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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 대역본> 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대역 (영문판 + 한글판 + MP3 CD)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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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게 좋아(17쪽) 

아빠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마저 잃고 친척들이 돌보아주어야 할 상황에 놓인 작은 나무, 그 위축된 아이를 보고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한 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따라 산길을 조금만 걷더니 산이 손을 벌려 온몸으로 감싸주는 듯한 기분이 들고 주위에 뭔가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는 듯 하더니 만물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이는 소리와 숨소리들이 나무들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것을 느끼며 작은 나무는 단번에 아픔을,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다정스레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불러주던 할머니의 부들운 노래도 작은 나무를 일으켰다. 

숲도 가지를 스치는 바람도 

이젠 모두 그가 온 걸 알지 

아버지 산이 노래 불러 맞아준다네 

아무도 작은 나무를 무서워하지 않아 

작은 나무가 착한 걸 아니까 

모두가 소리 높여 노래하지 "작은 나무는 외톨이가 아니야." 

They now have sensed him coming 

The forest and the wood-wind 

Father mountain makes him welcome with his song 

They have no fear of Little Tree 

They know his heart is kindness 

And they sing "Little Tree is not alone." (22-23쪽)

노래 속의 작은 나무가 바로 자기라는 사실을 알고 산형제들이 모두 자기를 좋아하며 같이 있고 싶어한다는 걸 느낀 작은 나무는 울지도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자연 치유 능력을 믿는다. 딱히 병이 든 경우가 아니어도 자연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온 가뿐한 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함에 몸이 절로 흥겨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병든 도시의 아침, 그것도 우중충한 날씨에 밀린 일까지 생각하며 일어나는 날은 온 몸이 천근만근 이러다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기도 할 정도인데 말이다. 

체로키 인디언의 피를 물려받은 작은 나무는 자연과, 또 자연 친화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공존하며 상처를 딛고 일어서게 된다. 내면과 더불어 온 몸이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누릴 수 없는 소중한 알짜 경험들을 하면서 무럭무럭 커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가 비록 물질이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영혼은 더 없이 따뜻했다는 것을 순간순간 느끼게 된 것이고. 

작은 나무의 행복한 순간을 담은 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고 짠하게 다가온다. 곁들여진 영어 원문과 대조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래서 이 건 한번 쓱 읽고 말게 아니고 두고두고 마음 심란할 때 마다 꺼내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할까. 아끼는 지인에게 빌려주고도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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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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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 하면 대뜸 거대 담론을, 거창하고 심각한 주제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시대를 가른 대정치인의 역사적 선택이나 헌재 재판관들의 기념비적 판결이 뇌리를 맴돌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의 얘기를 듣다 보면 이게 얼마나 단견인지 금방 알게 된다. 오히려 사소한 일상 가운데 스며들어 있는 생활 밀착형 원리에 가깝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되니까 말이다. 태풍이 휩쓸고 간 뒤 오갈 데 없이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생수를 고가로 판매하여 폭리를 취하고자 하는 업자의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지, 자신의 병역 의무를 대신할 이에게 돈을 주고 전쟁터로 내모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혹은 소수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과 승진에서 우대 받는 것이 합당한지 등 일견 함량미달로 보이는 쟁점들이 정의를 논하는 중요한 소재로 바짝 다가와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해나가며 수시로 부딪히는 가치 갈등 상황이 모두 정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고 하나하나 정교한 논리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질문에 대해 시원하게 이것이 정의라고 못 박을만한 보편적인 정답이 없다는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런 고민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려운 도덕 문제에 직면했을 때, 도덕적 고민이 어떤 식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리는 대개 옳은 행위에 관한 견해나 확신에서 시작한다.(“전차를 비상 철로로 돌려라.”) 그런 다음 확신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그 근거가 되는 원칙을 찾는다.(“한 사람을 희생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목숨을 건지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 원칙을 반박하는 상황을 고려한 뒤에 결론에 도달한다.(“가능한 한 여러 사람을 구하는 것이 늘 옳은 줄로만 알았는데, 남자를 다리 아래로 미는 행위는 또는 무장하지 않은 염소치기를 죽이는 행위는 잘못인 것 같다.”) 이러한 혼란의 힘과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점이다. (45쪽) 

우리 사회는 각종 쟁점을 둘러싼 가치 갈등으로 영일이 없다 하겠다. 그러니 정의에 대한 갈급함이 더욱 클 밖에. 교육 분야만 해도 당장 성취도평가라는 이름으로 초, 중, 고생을 대상으로 치러지는 일제고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경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게끔 반강제로 치러진다는 점에서 제기되는 자유의 박탈 문제, 교육의 본래 목적인 인간화는 도외시한 채 점수 위주의 줄 세우기를 시도하는 도덕적 정당성의 결여,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를 무시한 지역적, 계층별 구별 시도 등 다양한 쟁점을 지니고 있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빙산의 일각이랄 정도로 곳곳에 암초가 즐비하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사회이니 하여 다른 지역보다 마이클 샌델의 논의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는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 숙고한 끝에 세 가지 방식으로 압축하여 논의를 풀어나가고 있다. 모두가 선망하는 사회적 희소가치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따라 정의로운 사회인가 아닌가가 판가름 나는데 이를 가르는 가치의 분배 기준으로 샌델은 행복과 자유와 미덕을 들고 있는 것이다. 행복은 쾌락의 정도, 자유는 권리의 소중함 그리고 미덕은 인간 본연의 정신적 가치를 이르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일제고사 문제는 학생과 교사 및 학부모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도, 선택권의 자유라는 시각에서 바라봐도, 또 사회적 미덕이라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은 정의롭지 못한 조치라 하겠다. 물론 다른 견해에 입각하여 판이한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샌델은 정의의 세 가지 원칙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관련, 여러 사상가의 견해를 개략적으로 톺아보고 있다. 공리주의자는 단연 행복을 최고의 기준으로 생각하여 정의를 판별할 것이고 자유시장주의자는 자유방임과 권리 보장을 위해 합의에 따른 자발적 선택을 가장 두드러진 원칙으로 여길 것이며 공평주의자들은 평등 옹호와 정부의 규제 개입을 통한 공평 실현에 주안점을 둘 것이고 보수주의자와 종교 우파세력은 미덕 이론에 입각하여 좋은 삶이라는 도덕적 종교적 이상을 강조할 것임을 짚어 나간다. 여기서 다시 제기되는 문제는 이들을 아우르는 합의된 정의의 원칙이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는 않더라도 도출할 수는 없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 사회에서 그것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핀 포인트로 적시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것이다. 사람들마다 최선의 삶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니까. 

칸트와 롤스가 보기에, 좋은 삶에 대해 종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특정한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정의론은 타인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목표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처럼 선택이 자유로운 자아와 중립 상태는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러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중립적인 권리의 틀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립은 도덕적, 종교적 논란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며, 시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한다. (303쪽) 

롤스는 정의의 원칙과 관련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평등한 시민의 자유는 목적론적 원칙에 근거할 때 위태로워진다.” 권리가 공리주의적 계산에 좌우되면 얼마나 취약해지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존중되는 이유가 오로지 전체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어느 날 절대 다수가 내 종교를 업신여기고 금지하려 든다면 어찌되겠는가? (304쪽) 

민주시민에게 공적 영역에 들어갈 때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내려놓으라고 주문한다면, 관용과 상호 존중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반대다.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을 가장한 채 중요한 공적 문제를 결정하는 행위는 반발과 분노를 일으키는 지름길이다. 중요한 도덕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정치는 시민의 삶을 메마르게 한다. 그런 정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건드리기 두려워하는 곳에는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든다. (337쪽) 

정의의 원칙에 대한 객관적인 합의가 어렵다 하더라도 뭔가 접점은 있지 않을까? 롤스는 이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판결을 할 때 자신이나 타인의 종교적, 철학적 견해를 의지하지 않는 대법원 판사처럼 우리도 신념은 제쳐두고 모든 시민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만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새로 합의한 원칙에 입각하여 정의를 세워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이도 별 뾰죽한 대안이라 보기 어려운 것이 형식적 절차에는 동감하겠는데 내용이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처럼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던 샌델이 결국은 입장을 명료하게 밝히고 만다. 정의란 가치중립적인 게 아니라 인간 사회를 바람직하게 이끌 원칙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정의의 방식 가운데 세 번째 원칙, 즉 시민의 미덕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하면서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지침까지 제시하고 있다. 희생 봉사를 기꺼이 감수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재검토,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의 연대, 도덕 문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 등을 통해 개인적인 좋은 삶과 더불어 집단의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원칙을 견지해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원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데 의미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여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샌델은 정의와 관련된 문제가 멀리 있는 추상적인 쟁점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바짝 다가와 있는 일상적인 문제라는 것을 환기시킨 다음 이를 세우기 위한 많은 이들의 제안과 시도가 뚜렷한 합의점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자신은 세 번째 원칙인 정신적 미덕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시민 각자 내면의 성숙한 의식이 요구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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