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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정의라 하면 대뜸 거대 담론을, 거창하고 심각한 주제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시대를 가른 대정치인의 역사적 선택이나 헌재 재판관들의 기념비적 판결이 뇌리를 맴돌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의 얘기를 듣다 보면 이게 얼마나 단견인지 금방 알게 된다. 오히려 사소한 일상 가운데 스며들어 있는 생활 밀착형 원리에 가깝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되니까 말이다. 태풍이 휩쓸고 간 뒤 오갈 데 없이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생수를 고가로 판매하여 폭리를 취하고자 하는 업자의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지, 자신의 병역 의무를 대신할 이에게 돈을 주고 전쟁터로 내모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혹은 소수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과 승진에서 우대 받는 것이 합당한지 등 일견 함량미달로 보이는 쟁점들이 정의를 논하는 중요한 소재로 바짝 다가와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해나가며 수시로 부딪히는 가치 갈등 상황이 모두 정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고 하나하나 정교한 논리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질문에 대해 시원하게 이것이 정의라고 못 박을만한 보편적인 정답이 없다는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런 고민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려운 도덕 문제에 직면했을 때, 도덕적 고민이 어떤 식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리는 대개 옳은 행위에 관한 견해나 확신에서 시작한다.(“전차를 비상 철로로 돌려라.”) 그런 다음 확신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그 근거가 되는 원칙을 찾는다.(“한 사람을 희생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목숨을 건지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 원칙을 반박하는 상황을 고려한 뒤에 결론에 도달한다.(“가능한 한 여러 사람을 구하는 것이 늘 옳은 줄로만 알았는데, 남자를 다리 아래로 미는 행위는 또는 무장하지 않은 염소치기를 죽이는 행위는 잘못인 것 같다.”) 이러한 혼란의 힘과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점이다. (45쪽)
우리 사회는 각종 쟁점을 둘러싼 가치 갈등으로 영일이 없다 하겠다. 그러니 정의에 대한 갈급함이 더욱 클 밖에. 교육 분야만 해도 당장 성취도평가라는 이름으로 초, 중, 고생을 대상으로 치러지는 일제고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경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게끔 반강제로 치러진다는 점에서 제기되는 자유의 박탈 문제, 교육의 본래 목적인 인간화는 도외시한 채 점수 위주의 줄 세우기를 시도하는 도덕적 정당성의 결여,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를 무시한 지역적, 계층별 구별 시도 등 다양한 쟁점을 지니고 있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빙산의 일각이랄 정도로 곳곳에 암초가 즐비하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사회이니 하여 다른 지역보다 마이클 샌델의 논의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는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 숙고한 끝에 세 가지 방식으로 압축하여 논의를 풀어나가고 있다. 모두가 선망하는 사회적 희소가치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따라 정의로운 사회인가 아닌가가 판가름 나는데 이를 가르는 가치의 분배 기준으로 샌델은 행복과 자유와 미덕을 들고 있는 것이다. 행복은 쾌락의 정도, 자유는 권리의 소중함 그리고 미덕은 인간 본연의 정신적 가치를 이르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일제고사 문제는 학생과 교사 및 학부모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도, 선택권의 자유라는 시각에서 바라봐도, 또 사회적 미덕이라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은 정의롭지 못한 조치라 하겠다. 물론 다른 견해에 입각하여 판이한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샌델은 정의의 세 가지 원칙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관련, 여러 사상가의 견해를 개략적으로 톺아보고 있다. 공리주의자는 단연 행복을 최고의 기준으로 생각하여 정의를 판별할 것이고 자유시장주의자는 자유방임과 권리 보장을 위해 합의에 따른 자발적 선택을 가장 두드러진 원칙으로 여길 것이며 공평주의자들은 평등 옹호와 정부의 규제 개입을 통한 공평 실현에 주안점을 둘 것이고 보수주의자와 종교 우파세력은 미덕 이론에 입각하여 좋은 삶이라는 도덕적 종교적 이상을 강조할 것임을 짚어 나간다. 여기서 다시 제기되는 문제는 이들을 아우르는 합의된 정의의 원칙이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는 않더라도 도출할 수는 없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 사회에서 그것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핀 포인트로 적시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것이다. 사람들마다 최선의 삶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니까.
칸트와 롤스가 보기에, 좋은 삶에 대해 종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특정한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정의론은 타인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목표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처럼 선택이 자유로운 자아와 중립 상태는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러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중립적인 권리의 틀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립은 도덕적, 종교적 논란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며, 시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한다. (303쪽)
롤스는 정의의 원칙과 관련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평등한 시민의 자유는 목적론적 원칙에 근거할 때 위태로워진다.” 권리가 공리주의적 계산에 좌우되면 얼마나 취약해지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존중되는 이유가 오로지 전체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어느 날 절대 다수가 내 종교를 업신여기고 금지하려 든다면 어찌되겠는가? (304쪽)
민주시민에게 공적 영역에 들어갈 때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내려놓으라고 주문한다면, 관용과 상호 존중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반대다.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을 가장한 채 중요한 공적 문제를 결정하는 행위는 반발과 분노를 일으키는 지름길이다. 중요한 도덕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정치는 시민의 삶을 메마르게 한다. 그런 정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건드리기 두려워하는 곳에는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든다. (337쪽)
정의의 원칙에 대한 객관적인 합의가 어렵다 하더라도 뭔가 접점은 있지 않을까? 롤스는 이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판결을 할 때 자신이나 타인의 종교적, 철학적 견해를 의지하지 않는 대법원 판사처럼 우리도 신념은 제쳐두고 모든 시민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만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새로 합의한 원칙에 입각하여 정의를 세워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이도 별 뾰죽한 대안이라 보기 어려운 것이 형식적 절차에는 동감하겠는데 내용이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처럼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던 샌델이 결국은 입장을 명료하게 밝히고 만다. 정의란 가치중립적인 게 아니라 인간 사회를 바람직하게 이끌 원칙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정의의 방식 가운데 세 번째 원칙, 즉 시민의 미덕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하면서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지침까지 제시하고 있다. 희생 봉사를 기꺼이 감수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재검토,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의 연대, 도덕 문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 등을 통해 개인적인 좋은 삶과 더불어 집단의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원칙을 견지해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원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데 의미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여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샌델은 정의와 관련된 문제가 멀리 있는 추상적인 쟁점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바짝 다가와 있는 일상적인 문제라는 것을 환기시킨 다음 이를 세우기 위한 많은 이들의 제안과 시도가 뚜렷한 합의점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자신은 세 번째 원칙인 정신적 미덕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시민 각자 내면의 성숙한 의식이 요구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하겠다.